그러나 주영훈은 두 그림을 동시에 내려놓더니 찢긴 그림만 들어 올리며 말했다.“누가 찢은 겁니까? 내가 한 달 넘게 그린 건데. 정말 보는 눈도 없군요.”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누가 찢은 거냐?”성혜인은 김경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김경자의 얼굴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선생님, 무슨 뜻입니까? 설마 이 그림이 진짜라는 말씀입니까?”주영훈은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직접 그린 그림인데 어떻게 가짜일 수 있겠어요? 사모님, 제 그림을 찢어버렸으니 당연히 배상하셔야죠. 이 그림은 지난번 경매에서 600억을 준다는 사람한테도 주지 않은 겁니다.”그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 그림을 말았다.“이렇게 안목이 없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왜 고소를 당했는지도 이제야 알겠네요. 위조품을 진품으로 여기다니, 물고기 눈알을 진주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시고 말 겁니다!”김경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윤단미 역시 어리둥절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내가 산 게 가짜라고? 그럴 리가! 1200억이나 쓴 건데!’1200억은 윤씨 집안을 놓고 말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그녀는 김경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돈을 쏟아 받쳐 사들인 것이었다.“선생님, 다시 한번 잘 봐주세요.”주영훈은 그녀를 힐끗 째려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당시 너를 내 제자로 들이지 않은 것은 네 심술궂은 마음 때문이었다. 다행히 제자로 안 들였으니 망정이지,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려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가짜로 사람을 속여 내 피땀으로 만든 작품까지 훼손하게 하다니, 그건 너 역시 안목이 없다는걸 설명하는 거지.”주영훈은 그림을 들고 뒷짐을 진 채 곧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앞으로 다시는 제 작품을 두 분께 팔지 않겠습니다.”그리고 이내 그는 감정사를 가리켰다. 감정사는 하마터면 그의 손가락에 얼굴이 찔릴 뻔했다.“그리고 당신, 감히 내 작품이 위조품이라고 말해? 사기만 칠 줄 알면서 도대체 어떻게 감정사가 된 건지
목이 너무 강하게 졸리고 있는 탓에 성혜인은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반승제는 얼굴이 왜 이 모양이 됐는지, 갑자기 앞머리와 안경은 왜 꼈는지 따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싫어했다.또 평소와는 다른 촌스러운 옷차림까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 모든 행동에, 이것 역시 그녀가 일부러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했다.“재밌어?”그의 손목에는 선명한 핏줄이 솟아나 얼마나 큰 힘을 쓰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정도였다.목이 졸린 성혜인은 정말 금방 죽을 것 같았다.그녀는 반승제의 고운 두 손을 보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감미로운 입술로 몸을 쓸어내리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성혜인은 이대로 질식해버릴 것 같아 급히 그의 손을 때렸다.“성혜인, 네 아버지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있던데,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으면 남은 시간 동안 조용히 분수를 지키면서 사는 게 좋을 거야. 수작 부리는 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거든.”그는 전에도 보지 못했던 차가운 말투로 말하며 마치 죽은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목을 감고 있던 손이 풀리자, 성혜인은 힘이 풀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심지어 목에서는 피 비린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콜록콜록...”반승제는 본체도 안 한 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안은 주영훈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김경자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윤씨 집안 사람들은 손님들을 보내는 것을 책임졌다.윤단미는 줄곧 울고불고하고 있었다.그녀는 반승제가 온 것을 보고 마치 구세주를 찾은 듯 울며 그에게 달려갔다.“승제야, 흑흑...”그녀는 반승제의 품에 안기려고 했다.그러나 왠지 모르게 반승제는 성혜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미간을 구기며 몸을 옆으로 비켰다.그 바람에 윤단미는 허공에 돌진하고 말았다. 그때, 임경헌이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왔다.“형, 왜 이
반승제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을 그녀는 처음 보았다.성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신이한의 뒤를 따라나섰다.불빛이 밝은 곳에 이르자, 신이한은 그녀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했다.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반 대표가 조른 거예요?”성혜인은 차에 올라탔다. 목 안이 마치 불타오르는 듯해 말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네.”“아내한테 너무 잔인하네요.”성혜인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그녀는 갑자기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씁쓸할 뿐.“페니 씨, 제가 일찍 알려주지 않은 걸 탓하지 마세요. 반 대표 평소에는 고고한 자태를 하고 있어도, 사실 성격이 별로 좋지 않아요. 지금 제원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목을 만지고 있었다.“3년 안에 해외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곳에는 미치광이들도 정말 많고 서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반 대표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잘 섞어 들었어요. 사실, 저랑 몇몇 친구들은 그가 밖에 거액의 재산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해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한테도 모질고 다른 사람한테는 더 모질게 굴어요. 페니 씨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며 그 후과는 엄청날걸요?”신이한은 비록 다른 속셈을 하고 있긴 했지만, 전혀 함부로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조금 전에도 하마터면 목을 졸라 죽일 뻔했는데, 나중에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목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파 급히 뭐라도 마셔 통증을 완화하고 싶을 뿐이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본 신이한은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워 약방에서 약을 사 왔다.차에서 내린 성혜인은 곧바로 한 덩이의 피를 토해냈다.목이 극한으로 심하게 졸리면 이렇게 될 수 있었다.신이한이 건네준 약
로즈가든에 돌아온 성혜인은 주영훈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온통 반승제에 대한 욕을 쏟아내고 있었다.“빌어먹을 자식! 찢어 죽이지 못한 게 한스럽다, 한스러워! 화가 나 죽겠어. 너랑 결혼한 걸 감사하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밖에서 헛짓거리하고 돌아다녀?! 내 제자의 명성이 바닥을 치게 하네! 바닥을 치게 해!”성혜인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스승이 제원에 딱 하루, 그것도 일이 있어서 갑자기 돌아온 것뿐인데, 자신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게 된 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주영훈이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반승제를 욕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사과를 건넸다.“스승님, 죄송합니다.”주영훈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머리에서 연기가 날 정도였다.“어떻게 할 생각이냐? 계속 속일 작정이야?”“모르겠어요.”핸드폰 너머로 주영훈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목은 또 왜 그래? 다 쉬어버렸네. 혹시 우는 것이냐?”성혜인은 두 번 기침을 하더니 너무 아파 조금 전의 약을 또 두 모금 마셨다.“아뇨, 목이 조금 아파서요.”“페니야, 너는 반승제를 좋아하냐?”성혜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좋아한대도 사귈 수는 없을 것 같았다.아마도 그 미미한 설렘은 단지 그들이 매일 밤 친밀한 스킨쉽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끌어당기고 몸을 부딪치지 못해 안달 나 하는 반승제의 모습이 떠오르면 여전히 얼굴이 뜨겁고 심장이 두근거렸다.‘이게 좋아하는 건가? 아닐 거야. 이혼에 대한 결심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으니까.’“그럼 반승제 그 녀석은 너를 좋아하냐?”“아뇨.”그녀의 대답은 빨랐다. 반승제의 옆에는 윤단미가 있으니 말이다.“그럼 너도 좋아하지 말렴. 찾으려면 일편단심인 남자를 찾아. 승제는 확실히 뛰어난 사람이 맞긴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들 네 것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알겠습니다, 스승님.”“너도 네 생각이 다 있을 테니 나도 더 말은 하지 않겠다. 이 그림은 내가 친
반승제가 들어오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온시환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술 한잔을 건넸다.“너 오늘 너무 늦게 왔어. 가장 재밌는 장면도 다 놓치고 말이야. 승제야, 네 아내 정말 대단하더라.”반승제는 겨우 반씨 집안의 일을 모두 처리했다. 김경자는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윤씨 집안에서는 계속 울며 간절히 하소연했다.성혜인은 모두가 평온할 수 없어 잔뜩 헤집어 놓았다.온시환은 반승제의 어깨를 토닥였다.“생긴 건 그저 그래도 말솜씨가 좋더라고. 그런 사람하고 결혼할 수 있는 것도 네 복이야.”오늘 내내 일이 순탄치 못해 예민했던 반승제는 시선을 떨군 채 차갑게 말했다.“이 복 너한테 줄게. 가질래?”온시환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예쁜 여자를 좋아했으니까 말이다.반승제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뒤로 살짝 기댔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목에 있는 단추를 몇 개 풀었다.그러자 온시환이 또 위로하며 말했다.“됐어, 그 여자 말은 하지 말자. 그나저나 윤단미는 어떻게 할 작정이야? 오늘 밤 이후로 많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텐데. 윤단미를 더 좋아하는 거면 빨리 이혼해서 명분을 줘.”반승제는 손에 들려있는 술잔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는 내가 성혜인하고 결혼하기를 바라고, 할머니는 내가 윤단미하고 결혼하기를 바라고. 왜 나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는 거지?”목소리가 너무 낮은 탓에 오직 온시환과 서주혁만이 그의 말을 들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재벌가들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걸 믿는 사람들은 아직 이 무리를 접한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대부분의 재벌가 사람들은 집안과 타협하여 집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아내를 선택하고 밖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명 두었다.집안에서는 잘 따르고 밖에서는 찬란하게 놀았다.그리고 대중들 앞에서는 쇼윈도 부부를 연기를 하는 것이 회사의 주가 상승에도 도움이 되었다.
성혜인은 이력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음에 드는 듯 사무실로 불러달라고 청했다. 이력서의 주인 장하리는 올해 초에 입사한 21살의 예쁘장한 신입사원이었다.성혜인은 장하리를 훑어보며 단도직입으로 물었다.“장하리 씨, 제 개인 비서로 일할 생각 없어요?”장하리는 잠깐 멈칫하다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성혜인이 어떤 사장인지는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이것은 분명 승진할 좋은 기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면 인사부로 가서 수속을 밟고 오후에 다시 돌아와요. 제가 자리를 만들어 줄게요.”장하리는 또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말없이 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이 성혜인은 아주 만족스러웠다.같은 시각, 어제 크게 창피를 당한 윤단미는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김경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만나러 갔다.김경자는 이미 반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법원에서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자칫 기절할 뻔하기도 했다. 분노는 성혜인의 피부 껍질을 찢어내고 싶을 정도로 솟아올랐다.“요망한 년 같으니라고, 콜록콜록.”“할머니, 저 이제 어떡해요?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파티에 참석해요...”김경자는 잠깐 기침하다가 백연서에게 물었다.“성씨 집안에서는 무슨 사업을 하니?”성씨 집안에 관한 일은 백연서도 당연히 몰랐다. 그저 BH그룹에서 많은 투자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적자를 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이때 윤단미가 먼저 대답했다.“성씨 집안에서는 페인트 사업을 해요.”김경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너희 집안은 부동산 사업을 한다고 했지? 페인트 회사를 인수해서 도움이 되려나?”“도움은 당연히 되죠. 근데 SY그룹을 인수하면 할아버지께서 화내지 않을까요? 그리고 승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가장 중요한 건 SY그룹도 나름 큰 회사라 인수가 쉽지는 않을 거예요.”만약 윤씨 집안이 재벌가의 문턱을 밟았다고 하면 성씨 집안은 재벌가의 ‘ㅈ’자도 본 적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인수는
성혜인의 사무실은 괴이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도 장하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후 성혜인이 몸을 일으키며 장하리에게 말했다.“수고했어요, 이만 퇴근해요.”장하리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성혜인도 이만 퇴근해서 성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윤단미에게 사과하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 없었다. 아무리 이사회가 배신했다고 해도, 아무리 그녀의 편에 서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그녀는 윤단미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것이다.성혜인은 성휘의 방문 앞에서 잠깐 고민하다가 손을 들어 노크했다. 방 안에서는 성휘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회사를 잘 키우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이런 일로 찾아오게 되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들어와.”성휘는 짧게 대답하고 또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성혜인은 침대 곁에 앉으며 말했다.“아빠, 저 이만 지분을 팔아버리려고요.”성휘는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약 일 분간 침묵한 끝에 겨우 대답했다.“네 마음대로 해, 콜록콜록.”“죄송해요.”“사과할 것 없어. 내가 변호사한테 연락, 콜록콜록...”성휘는 이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분을 파는 일은 변호사에게 맡기고 이만 꿈을 좇으라는 그의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래도 속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시작해 회사를 세우는 것이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성혜인도 속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영원히 팔아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잠깐일 뿐이에요. 제가 금방 되찾아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그냥 아빠가 놀라지 않게 미리 알려드리러 온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어떤 소식을 들어도 흥분하지 마세요.”성휘는 이제야 약간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혜인이 너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 무조건 잘 해낼 거다.”성혜인은 성휘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잠자코 있었다. 이미 벌어진
신이한은 성혜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조금 전에 한 말은 그냥 장난이었어요. 그래도 돕겠다고 한 건 진심이에요.”성혜인은 스테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표정은 한결같이 차분하기만 했다.신이한은 그런 성혜인에게 경외심이 들 지경이었다. 반승제의 위압감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지구를 통틀어도 몇 안 되기 때문이다.반승제의 곁에 서 있던 윤단미마저도 약간 겁먹은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승제야.”반승제는 이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역시 성혜인은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온시환의 말이 맞았다. 불륜도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그는 성혜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진실게임을 할 때도 그녀는 그가 아닌 신이한에게 키스하려고 하지 않았는가?말없이 성혜인을 쏘아보던 반승제는 금세 생각 정리를 끝내고 멀어져갔다. 윤단미는 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성혜인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한마디 했다.“정말 더러워서 못 봐주겠네요. 남자가 그렇게도 고파요?”말을 마친 윤단미는 반승제를 쪼르르 따라갔다. 반대로 성혜인은 입맛이 뚝 떨어진 듯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신이한은 성혜인를 바라보며 와인잔을 들었다. 눈빛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페니 씨, 아까는 반 대표님이 오는 걸 보고 일부러 그랬죠?”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이한은 한쪽에 놓인 숟가락을 가리켰다. 마침 그녀의 뒤를 볼 수 있도록 배치된 숟가락을 말이다. 신이한은 그녀가 반승제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뽀뽀하려 했다고 생각했다.“만약 제가 막지 않았다면 진짜 뽀뽀하려고 했어요?”“아마도요?”신이한은 약간 후회가 되기도 했다. 반승제 앞에서 대놓고 성혜인과 뽀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이미 날아갔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은 소용없었다.그는 원샷으로 와인잔을 비웠다. 그러자 성혜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이한 씨.”신이한은 씁쓸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
[원진과는 이미 연락했어요. 원진도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다만 문제는 원아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당장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흥, 그 정도는 해줘야지.]연승혁은 이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공지민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그녀의 시선은 곧장 연승혁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첫눈에도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연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한 친구, 이상우예요.”순간 공지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우, 이 사람은 과거 그녀가 찾아갔던 유명한 최면술사의 수제자였다.최근 그 대가가 은퇴하고 이제 그의 제자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공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공지민입니다.”하지만 이상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과거 그녀와 짧은 시간 교류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그녀를 최면하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의 스승은 공지민의 마음속 집착이 너무 깊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더군다나 스승과 함께 수련하던 한 달 동안, 이상우는 공지민에게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속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지금 이 순간, 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상우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이상우는 한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서요. 오늘 저랑 편하게 얘기 나눠보실래요?”얘기를 나누자는 말은 곧 그녀를 최면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였다.공지민은 그제야 연승혁을 흘깃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연승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앉아요, 누나.”공지민은 자리에 앉
원아정은 팔꿈치로 미친 듯이 차창을 내리치며 동시에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게다가 뒤따라오는 경찰도 따돌리지 못하자 운전자는 결국 공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차는 이리저리 우회하며 간신히 경찰들을 따돌렸지만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잡한 지역에 들어서고 말았다.원아정은 문을 발로 차며 열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은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경호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경호원들은 이마에 땀이 맺히며 초조하게 멀어져가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를 공항까지 데려가라는 지시였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진작에 마취라도 시킬 걸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는 공항 보안검색을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운전자는 급히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연승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승혁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다음 기회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까. 우선 원진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군.”원진만 동의하면 원아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원아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공지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연승혁과 결혼해서 상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었어.’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이전의 공지민은 그저 그녀 발밑에 있는 하찮은 존재였는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원아정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던 노숙자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초라하고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지
하지만 연승혁은 이 일을 아주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고작 연예계에서 떠도는 무명 배우에 불과한 공지민이 진실을 알아낼 리 없었다.설령 나중에 공지민이 온시환과 얽혔다 해도, 온시환이 처음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겼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일을 조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연승혁은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공지민이 아직 진실을 모르고 진짜 연씨 가문의 딸이며 구은우와의 관계는 그저 악연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모든 일을 계획해 구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연승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만약 후자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최근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런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불쑥 나타나다니.그는 안정숙을 찾아가 당시 진행했던 두 번의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하나는 머리카락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쓰레기통에 버린 이쑤시개를 쓴 결과라는 말을 들은 연승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약 이 정도까지 속일 수 있다면, 공지민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네.’“승혁아,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너 솔직히 말해봐. 원아정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긴 한 거니?”“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진행한 두 번의 친자 검사는 꽤 신뢰할 만한 결과잖아요.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쉽지 않죠.”“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일인지 원... 난 그저 내 손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니!”안정숙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네가 조사한 구은우에 대한 자료, 나도 봤어. 그 아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더라. 만약 지민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했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에 잃었다면? 너 같으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