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도 조금 놀랐다.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그녀가 주동적으로 찾아가야 한다. 반승제가 신분을 낮추어 그녀를 찾아갈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그때 사촌 오빠가 거절하지 않았어요?”반승혜는 남의 사생활에 대하여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너무도 궁금했다.상대방은 사촌 오빠로, 그녀가 보기에 반 씨 집안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몇 번 거절했지만 결국 승낙했죠.”성혜인은 웃으면서 말했고 왜 반승혜가 갑자기 이걸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승혜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페니가 사촌 오빠와 잠자리를 하려고 이토록 노력했을 줄은 몰랐다.윤단미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화나서 미쳐버릴 수도 있다.하지만 반승혜는 이 일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그러고는 가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작업실 근처에 도착했고 성혜인은 차에서 내리려 하였다.차 문이 닫힐 무렵, 그녀는 반승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는데 반승혜가 이때 입을 열었다.“페니 씨, 우리 앞으로도 친구인 거 맞죠?”성혜인은 멈칫하였다. 그녀가 반승혜의 성격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그녀가 자신이 미움을 받고 있었던 형수라는 걸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승혜 씨가 원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친구예요.”그녀는 이렇게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어느 날 반승혜가 그녀와 친구 하는 걸꺼려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반승혜는 한숨을 돌렸다.“걱정 말아요. 저 그런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색안경을 끼고 페니 씨를 보지 않을 테니.”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닫혔고 차는 앞으로 향해 달렸다.성혜인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녀가 한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는 바로 별 생각을 하지 않고 작업실로 향했다.하지만 움직이면서 그녀는 자신의 일부 부위가 이상하다고 느꼈다.반승제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던 날 밤 너무 시달리다 다쳤었고 그 이후로는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조금 걸었더니 뭔가 이상하
천천히 옷을 입고 그녀는 어젯밤에 발생한 일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수영장에서 신이한이 건넨 술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잠이 들었고 그 사이에 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 같다.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지 않았다.혹시 꿈에서 꼬집었던 걸까? 어젯밤 확실히 야한 꿈을 꿨던 것 같다.그녀는 손을 들어 눈을 비볐고 다시는 다른 사람이 건네준 것을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숙취 후 머리가 아파와 침대에 누워서 좀 쉬려고 하는데 강민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어젯밤 너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가 꺼져 있더라고. 아저씨가 곧 깨어날 것 같아.”성혜인은 순간 졸음이 가시는 것 같았고 얼른 몸을 일으켜 앉았다.“의사가 그래?”“응. 의사가 어젯밤에 너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계속 휴대폰이 꺼진 상태라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만약 너의 사생활이 깨끗하다는 걸 몰랐다면 난 네가 분명 외간 남자와 잠자리하러 갔다고 생각했을 거야.”강민지는 생각하는 대로 내뱉는 스타일이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남자가 어디 있어. 어젯밤에 휴대폰이 잠시 먹통이 됐어. 지금 병원으로 갈게.”강민지는 전화를 끊고 한편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신예준을 힐끗 보았다.이 집은 강민지가 산 작은 아파트이다. 가난한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이 작은 집을 살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성혜인에게 이 집은 그녀의 집 화장실보다 더 작다고 불평을 토로한 적도 있다.그러나 신예준이 좁은 식탁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니 행복감이 솟구쳤다.“예준 씨, 그만 닦아. 충분히 깨끗해.”신예준은 동작을 멈추고 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분리 수거함에 버리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왔다.“민지야, 배고파? 오늘도 오후에 출근하러 가야 돼?”강민지는 신예준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자신은 줄곧 신분을 숨기고 있는데 만약 나중에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그녀는 강 씨 집안의 외동딸로 아버지는 분명 그녀가 가
강민지와의 통화가 끝난 뒤 성혜인은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의사는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어젯밤에 깨어나려는 기미가 보였지만 오늘은 다시 평온한 상태를 보이고 있어요.언제 깨날지 여전히 불확실해요.”성혜인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아파왔다.계속 운전해서 병원에 가려고 하는데 소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혜인아,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집에 왔어. 그러니깐 네 아버지 일을 듣고 특별히 온거야.”성혜인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다 서천 사람이고 그녀가 서천에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두 분을 뵈러 간 적이 없다.어머니가 그녀를 낳은 그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서천에서 원래 갓 결혼한 며느리는 한동안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아버지인 성휘는 큰 아들이고 집에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동생 편을 들었기 때문에 맏이인 성휘는 고생을 많이 했다.성휘가 임지연과 결혼을 한 뒤, 부부는 이튿날 낡디 낡은 별채로 배정되었다.신혼 첫날밤, 첫 끼에 밥 한알도 없었고 심지어 빌리러 가야 했다.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임지연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임지연이 있었을 때 며느리를 적지않게 꾸짖었다.하지만 막내를 대할 때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였다.하여 성휘는 일찍이 임지연와 함께 제원으로 와서 분투를 하였다. 노점상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회사까지 설립했다.성혜인이 태어날 때도 그들은 손녀가 여자 아이인 걸 알고 아직 분만실에 있는 임지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성휘는 여전히 제원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었고 임동원과 이소애만 있어 임지연도 억울함을 당했다.성휘는 임지연과 어린 성혜인을 데리고 제원으로 왔고 그 뒤로 다시는 가족들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성혜인은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이 일은 참 잘했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를 탓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 복이 없다고만 생각했다.지금 노부부가 갑자기 제원에 왔다고 하고 성 씨 집안
성혜인의 시선이 차가워졌다.그녀는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사람과 단 한 번도 같이 지내본 적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서천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지만 너무 어릴 때라 사실 기억이 좀 희미하다. 하지만 그녀는 또렷하게 두 노인이 빗자루를 들고 와서 어머니를 때린 걸 기억하고 있다.그때 아버지는 약간의 돈을 벌었다. 임지연은 효심이 있는 사람으로 돈을 벌었으니 부모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하물며 그들은 확실히 성휘를 양육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임지연과 동생 임동원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쁘지않다.하지만 집에 들어가기도 전, 두 노인은 그들이 생활고에 시달려 돈을 달라고 하는 줄 알고 임지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빗자루를 휘둘렀다.“꺼져! 딸 밖에 낳을 줄 모르는 돼지 같은 년! 우리는 너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을테니 평생 우리 집 문에 들어올 생각 마! 꺼져!”“창피해 죽겠어. 겨우 딸을 낳은 주제에. 우리 막내 봐봐, 둘째도 아들을 낳았어!”성혜인은 그때 임지연 품 속에 안겨있어 빗자루가 등을 때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이것이 바로 성혜인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다.지금 아버지는 아직 혼수상태인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 아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성 씨 집안으로 향했다.성 씨 집안 거실.성무일과 아내 라정옥은 값비싼 소파에 앉아 계속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정말 멋진 별장이다. 막내의 30여 평의 집보다 훨씬 널찍하다. 밖에 정원도 있고 이렇게 많은 도우미들이 시중들고 있다.첫째가 제원에서 이렇게 큰돈을 벌었는데도 동생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들은 너무도 화가 났다.소윤은 싱글 소파에 앉아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아버님, 어머님. 혜인이가 곧 돌아올 테니 하실 말씀 있으면 혜인이에게 하세요.”성무일은 콧방귀를 뀌였고 라정옥도 눈을 희번덕거렸다. 임지연도 이미 죽었는데 맏이의 재혼 아내가 낳인 자식마저 또 여자애
라정옥은 서천에서 나고 자랐다. 평생 잘못된 구시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아들을 둘이나 뒀을 뿐만 아니라 일도 잘하고 있는 막내 성훈만 편애했다.맏이 성휘가 임지연과 결혼하려고 했을 때는 얼마나 반대했는지 모른다. 임지연의 엉덩이가 자그마한 꼴을 보아하니 아들을 낳기는 틀려먹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성휘와 한참 다투다가 결국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했었다.라정옥은 결혼식이 다 끝나고 나서야 임지연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소식을 알고 나서는 또 얼마나 속앓이했는지 모른다. 만약 진작에 알았더라면 돈 낭비를 하면서 예물로 60만 원씩이나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라정옥은 곧바로 임신 사실을 숨기고 몸값을 올리려고 한 임지연을 삿대질하며 욕했다. 예물로 준 60만 원도 물론 다시 빼앗아 갔다. 그러고는 성휘 부부를 가장 작은 창고 방에 방치해 버렸다.임지연은 그림을 배웠다. 집안도 서천보다 큰 도시에서 장사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사도 망하고 사람도 죽어 나간 마당에 지금은 말해봤자 소용없는 옛날얘기일 뿐이다. 그래서 라정옥은 그녀가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임지연은 결혼하면서 예단 하나 준비하지 못했다. 성씨 집안에 시집간 이후에도 라정옥에게 하녀처럼 부림을 받기나 했다. 그 와중에 임지연의 편을 들어주는 성휘 때문에 집안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아이를 낳고 나서 성휘는 임지연을 데리고 제원으로 올라갔다. 라정옥은 두 사람이 무조건 잘 살지 못할 것으로 단정 짓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괜히 돈을 빌려달라고 연락하지 못하도록 말이다.그렇게 포기해 버린 성휘 일가가 제원의 별장에서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연락 한번 없이 말이다. 라정옥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숱한 돈을 팔아가며 키운 아들에게 단단히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다.성혜인은 덤덤하게 소파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앞으로 죽어도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은 할머니예요.”이는 성혜인이 임지연을 따라 서천에 내려갔을 때, 라정옥이
소윤은 라정옥과 성무일이 아주 싫었다. 아니, 혐오했다. 두 사람은 가난에 찌든 냄새를 풍기며 별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곳곳을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혜인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라도 소윤은 두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맞는 말씀이세요, 어머님. 대출이 얼마나 남았어요?”“4억 9000만 원 정도 남았어. 달마다 600만 원씩 나가는데 지천명의 나이에 막내가 많이 힘들어하더구나. 요즘 회사에서 정리해고까지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직장까지 잃게 생겼다. 그러니 너희가 대신 대출금을 갚아주렴.”소윤은 싱긋 웃으며 은행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이 카드에 5억 원 정도 있어요. 일단 이걸로 대출을 갚으세요.”라정옥의 눈동자에는 빛이 돌기 시작했다. 소윤이 어토록 호탕하게 돈을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후다닥 은행 카드를 받아 들며 성혜인을 노려봤다.성혜인은 같은 거실에 있으면서도 마치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윤은 성휘의 서류상 아내일 뿐만 아니라 SY그룹의 지분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라정옥은 돈을 얻고 싱글벙글 웃는 것도 잠시 곧바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은 돈을 요구했어야 했다. 5억이라는 큰돈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내놓는 걸 보니 성휘 일가의 부유함이 더욱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소윤도 쓸모없는 딸을 낳았다는 게 문제였다.이때 라정옥에게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성훈에게 아들이 있다는 핑계로 성훈 일가를 전부 이곳으로 이사시키면 그들이 덜 고생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도 덕을 보지 않겠는가?‘호호호, 우리 막내가 퇴근하자마자 바로 얘기해줘야겠구나.’라정옥과 성무일은 흐뭇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일단은 5억 원으로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나머지는 성훈 일가를 별장에 들이고 나서 받아도 늦지 않았다.혼수상태에 빠진 채 병원에 있는 성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정옥은 지금도 성휘를 불효자로 여겼으니 말이다. 그녀
성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별장에 들어섰다. 지난번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부터 줄곧 신경이 예민한 성한때문에 소윤은 목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한아, 혜인이는 잡았니?”성한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그럼요. 저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부터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어요.”소윤은 약간 걱정스러웠다. 어찌 됐든 성혜인은 아직 반태승의 예쁨을 받고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고를 당한다면 반태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반태승의 능력으로 사건 조사는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때가 되면 성한 뿐만 아니라 성씨 집안 모두가 영향받게 될 것이다.“내가 했던 말 아직 기억하지?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성한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소윤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의 분위기는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리고 무슨 일에서든 남 얘기를 듣기 싫어했다, 특히 어머니 소윤의 말에 대해서는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성한은 자신이 이런 사고를 당한 게 전부 소윤과 허진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면 그는 성혜인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성한은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결을 파고들었지만.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어머니, 바람을 피우더라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했어요. 그런데 왜 자꾸 위험한 곳에서 만나려 하는 거예요!”소윤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나도 네가 반씨 집안에 보복당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만약 반 회장이 나선다면 우리 다 끝장이야.”이때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성혜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서 이미 오빠한테 말해줬어요. 언니는 이번 일을 윤단미가 했다고 믿을 거예요. 그러니 반씨 집안에 말해 봤자 그들은 윤단미의 편을 들어줄 뿐이에요. 언니 곧 이혼한다면서요? 이혼한 다음
성혜인이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눈에 띄는 외모의 한 직원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성혜인을 바라봤다.이 술집은 제원에서 유일하게 CCTV가 없는 술집이다. 덕분에 일부러 찾아가는 손님이 아주 많았고, 대부분 바깥세상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오죽하면 술집 입구에 가게 측은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겠는가.이 술집은 손님뿐만 아니라 직원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손님에게 추행당하는 일이 일상처럼 일어나기는 하지만 월급이 업계에서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신예준은 빈 그릇을 들고 몸을 돌렸다.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강민지의 친구 성혜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귀찮은 일이라 딱히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이때 강민지가 신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일하는 곳을 구경하러 가겠다는 전화였다. 신예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이상 성혜은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신예준은 짜증 난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다른 직원에게 빈 그릇을 건네주고는 성혜인이 끌려간 방향으로 걸어갔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남자들이 예약한 룸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은 그녀를 사정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내장이 다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윤단미 씨가 뭐라고 했더라? 일단 옷을 벗기고 사진부터 찍어야겠지?”남자들은 성혜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는 비틀비틀 테이블 위의 술병을 잡고 두 사람 중 한 명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쨍그랑!술병이 깨지고 머리를 맞은 남자의 얼굴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자 멀쩡한 남자가 성혜인의 뺨을 향해 손을 들었다.성혜인은 반쪽 남은 술병으로 남자의 손을 막았다. 유리 조각을 힘껏 내리찍은 남자는 손을 부여잡고 신음을 냈다. 성혜인은 이 기회를 타서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곧장 정신 차린 남자들이 놓치지 않고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