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지와의 통화가 끝난 뒤 성혜인은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의사는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어젯밤에 깨어나려는 기미가 보였지만 오늘은 다시 평온한 상태를 보이고 있어요.언제 깨날지 여전히 불확실해요.”성혜인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아파왔다.계속 운전해서 병원에 가려고 하는데 소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혜인아,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집에 왔어. 그러니깐 네 아버지 일을 듣고 특별히 온거야.”성혜인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다 서천 사람이고 그녀가 서천에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두 분을 뵈러 간 적이 없다.어머니가 그녀를 낳은 그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서천에서 원래 갓 결혼한 며느리는 한동안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아버지인 성휘는 큰 아들이고 집에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동생 편을 들었기 때문에 맏이인 성휘는 고생을 많이 했다.성휘가 임지연과 결혼을 한 뒤, 부부는 이튿날 낡디 낡은 별채로 배정되었다.신혼 첫날밤, 첫 끼에 밥 한알도 없었고 심지어 빌리러 가야 했다.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임지연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임지연이 있었을 때 며느리를 적지않게 꾸짖었다.하지만 막내를 대할 때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였다.하여 성휘는 일찍이 임지연와 함께 제원으로 와서 분투를 하였다. 노점상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회사까지 설립했다.성혜인이 태어날 때도 그들은 손녀가 여자 아이인 걸 알고 아직 분만실에 있는 임지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성휘는 여전히 제원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었고 임동원과 이소애만 있어 임지연도 억울함을 당했다.성휘는 임지연과 어린 성혜인을 데리고 제원으로 왔고 그 뒤로 다시는 가족들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성혜인은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이 일은 참 잘했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를 탓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 복이 없다고만 생각했다.지금 노부부가 갑자기 제원에 왔다고 하고 성 씨 집안
성혜인의 시선이 차가워졌다.그녀는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사람과 단 한 번도 같이 지내본 적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서천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지만 너무 어릴 때라 사실 기억이 좀 희미하다. 하지만 그녀는 또렷하게 두 노인이 빗자루를 들고 와서 어머니를 때린 걸 기억하고 있다.그때 아버지는 약간의 돈을 벌었다. 임지연은 효심이 있는 사람으로 돈을 벌었으니 부모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하물며 그들은 확실히 성휘를 양육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임지연과 동생 임동원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쁘지않다.하지만 집에 들어가기도 전, 두 노인은 그들이 생활고에 시달려 돈을 달라고 하는 줄 알고 임지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빗자루를 휘둘렀다.“꺼져! 딸 밖에 낳을 줄 모르는 돼지 같은 년! 우리는 너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을테니 평생 우리 집 문에 들어올 생각 마! 꺼져!”“창피해 죽겠어. 겨우 딸을 낳은 주제에. 우리 막내 봐봐, 둘째도 아들을 낳았어!”성혜인은 그때 임지연 품 속에 안겨있어 빗자루가 등을 때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이것이 바로 성혜인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다.지금 아버지는 아직 혼수상태인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 아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성 씨 집안으로 향했다.성 씨 집안 거실.성무일과 아내 라정옥은 값비싼 소파에 앉아 계속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정말 멋진 별장이다. 막내의 30여 평의 집보다 훨씬 널찍하다. 밖에 정원도 있고 이렇게 많은 도우미들이 시중들고 있다.첫째가 제원에서 이렇게 큰돈을 벌었는데도 동생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들은 너무도 화가 났다.소윤은 싱글 소파에 앉아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아버님, 어머님. 혜인이가 곧 돌아올 테니 하실 말씀 있으면 혜인이에게 하세요.”성무일은 콧방귀를 뀌였고 라정옥도 눈을 희번덕거렸다. 임지연도 이미 죽었는데 맏이의 재혼 아내가 낳인 자식마저 또 여자애
라정옥은 서천에서 나고 자랐다. 평생 잘못된 구시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아들을 둘이나 뒀을 뿐만 아니라 일도 잘하고 있는 막내 성훈만 편애했다.맏이 성휘가 임지연과 결혼하려고 했을 때는 얼마나 반대했는지 모른다. 임지연의 엉덩이가 자그마한 꼴을 보아하니 아들을 낳기는 틀려먹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성휘와 한참 다투다가 결국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했었다.라정옥은 결혼식이 다 끝나고 나서야 임지연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소식을 알고 나서는 또 얼마나 속앓이했는지 모른다. 만약 진작에 알았더라면 돈 낭비를 하면서 예물로 60만 원씩이나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라정옥은 곧바로 임신 사실을 숨기고 몸값을 올리려고 한 임지연을 삿대질하며 욕했다. 예물로 준 60만 원도 물론 다시 빼앗아 갔다. 그러고는 성휘 부부를 가장 작은 창고 방에 방치해 버렸다.임지연은 그림을 배웠다. 집안도 서천보다 큰 도시에서 장사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사도 망하고 사람도 죽어 나간 마당에 지금은 말해봤자 소용없는 옛날얘기일 뿐이다. 그래서 라정옥은 그녀가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임지연은 결혼하면서 예단 하나 준비하지 못했다. 성씨 집안에 시집간 이후에도 라정옥에게 하녀처럼 부림을 받기나 했다. 그 와중에 임지연의 편을 들어주는 성휘 때문에 집안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아이를 낳고 나서 성휘는 임지연을 데리고 제원으로 올라갔다. 라정옥은 두 사람이 무조건 잘 살지 못할 것으로 단정 짓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괜히 돈을 빌려달라고 연락하지 못하도록 말이다.그렇게 포기해 버린 성휘 일가가 제원의 별장에서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연락 한번 없이 말이다. 라정옥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숱한 돈을 팔아가며 키운 아들에게 단단히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다.성혜인은 덤덤하게 소파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앞으로 죽어도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은 할머니예요.”이는 성혜인이 임지연을 따라 서천에 내려갔을 때, 라정옥이
소윤은 라정옥과 성무일이 아주 싫었다. 아니, 혐오했다. 두 사람은 가난에 찌든 냄새를 풍기며 별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곳곳을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혜인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라도 소윤은 두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맞는 말씀이세요, 어머님. 대출이 얼마나 남았어요?”“4억 9000만 원 정도 남았어. 달마다 600만 원씩 나가는데 지천명의 나이에 막내가 많이 힘들어하더구나. 요즘 회사에서 정리해고까지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직장까지 잃게 생겼다. 그러니 너희가 대신 대출금을 갚아주렴.”소윤은 싱긋 웃으며 은행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이 카드에 5억 원 정도 있어요. 일단 이걸로 대출을 갚으세요.”라정옥의 눈동자에는 빛이 돌기 시작했다. 소윤이 어토록 호탕하게 돈을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후다닥 은행 카드를 받아 들며 성혜인을 노려봤다.성혜인은 같은 거실에 있으면서도 마치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윤은 성휘의 서류상 아내일 뿐만 아니라 SY그룹의 지분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라정옥은 돈을 얻고 싱글벙글 웃는 것도 잠시 곧바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은 돈을 요구했어야 했다. 5억이라는 큰돈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내놓는 걸 보니 성휘 일가의 부유함이 더욱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소윤도 쓸모없는 딸을 낳았다는 게 문제였다.이때 라정옥에게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성훈에게 아들이 있다는 핑계로 성훈 일가를 전부 이곳으로 이사시키면 그들이 덜 고생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도 덕을 보지 않겠는가?‘호호호, 우리 막내가 퇴근하자마자 바로 얘기해줘야겠구나.’라정옥과 성무일은 흐뭇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일단은 5억 원으로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나머지는 성훈 일가를 별장에 들이고 나서 받아도 늦지 않았다.혼수상태에 빠진 채 병원에 있는 성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정옥은 지금도 성휘를 불효자로 여겼으니 말이다. 그녀
성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별장에 들어섰다. 지난번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부터 줄곧 신경이 예민한 성한때문에 소윤은 목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한아, 혜인이는 잡았니?”성한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그럼요. 저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부터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어요.”소윤은 약간 걱정스러웠다. 어찌 됐든 성혜인은 아직 반태승의 예쁨을 받고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고를 당한다면 반태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반태승의 능력으로 사건 조사는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때가 되면 성한 뿐만 아니라 성씨 집안 모두가 영향받게 될 것이다.“내가 했던 말 아직 기억하지?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성한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소윤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의 분위기는 점점 더 음침해졌다. 그리고 무슨 일에서든 남 얘기를 듣기 싫어했다, 특히 어머니 소윤의 말에 대해서는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성한은 자신이 이런 사고를 당한 게 전부 소윤과 허진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면 그는 성혜인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성한은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결을 파고들었지만.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어머니, 바람을 피우더라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했어요. 그런데 왜 자꾸 위험한 곳에서 만나려 하는 거예요!”소윤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나도 네가 반씨 집안에 보복당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만약 반 회장이 나선다면 우리 다 끝장이야.”이때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성혜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서 이미 오빠한테 말해줬어요. 언니는 이번 일을 윤단미가 했다고 믿을 거예요. 그러니 반씨 집안에 말해 봤자 그들은 윤단미의 편을 들어줄 뿐이에요. 언니 곧 이혼한다면서요? 이혼한 다음
성혜인이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눈에 띄는 외모의 한 직원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성혜인을 바라봤다.이 술집은 제원에서 유일하게 CCTV가 없는 술집이다. 덕분에 일부러 찾아가는 손님이 아주 많았고, 대부분 바깥세상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오죽하면 술집 입구에 가게 측은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겠는가.이 술집은 손님뿐만 아니라 직원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손님에게 추행당하는 일이 일상처럼 일어나기는 하지만 월급이 업계에서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신예준은 빈 그릇을 들고 몸을 돌렸다.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강민지의 친구 성혜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귀찮은 일이라 딱히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이때 강민지가 신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일하는 곳을 구경하러 가겠다는 전화였다. 신예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이상 성혜은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신예준은 짜증 난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다른 직원에게 빈 그릇을 건네주고는 성혜인이 끌려간 방향으로 걸어갔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남자들이 예약한 룸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은 그녀를 사정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내장이 다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윤단미 씨가 뭐라고 했더라? 일단 옷을 벗기고 사진부터 찍어야겠지?”남자들은 성혜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는 비틀비틀 테이블 위의 술병을 잡고 두 사람 중 한 명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쨍그랑!술병이 깨지고 머리를 맞은 남자의 얼굴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자 멀쩡한 남자가 성혜인의 뺨을 향해 손을 들었다.성혜인은 반쪽 남은 술병으로 남자의 손을 막았다. 유리 조각을 힘껏 내리찍은 남자는 손을 부여잡고 신음을 냈다. 성혜인은 이 기회를 타서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곧장 정신 차린 남자들이 놓치지 않고 쫓아갔다
전화는 금방 연결되고 강민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민지야, 나 좀 도와줘.”성혜인의 힘 빠진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이상했다. 그래서 강민지는 집안일이고 나발이고 모두 내팽개친 채 성혜인의 위치부터 물었다.강민지는 성혜인이 말한 술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신예준에게서 받은 주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부랴부랴 성혜인이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혜인아!”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성혜인을 보고 강민지는 곧바로 달려갔다.성혜인은 흠칫 놀라며 머리를 들더니 상대가 강민지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쉬며 술병을 내려놓았다.“나 병원으로 데려다줘.”“응!”강민지는 빠르게 겉옷을 벗어 성혜인의 목에 감아줬다. 밖에 있는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볼 새도 없이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성혜인을 데리고 룸 밖으로 나간 강민지는 홀에서 서빙하고 있는 신예준을 단번에 알아봤다. 느낌 탓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따라 그가 조금 달라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혜인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예준 씨, 나 지금 예준 씨 왼쪽에 있어.” 신예준은 놀란 표정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강민지와 눈을 마주친 순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민지야, 오면 온다고 말하지. 네 친구는 왜 그래? 취했어?”강민지는 신예준의 손을 꽉 잡으면서 말했다.“일단 우리를 병원으로 데려다줘. 급해.”신예준은 머리를 끄덕이며 성혜인을 부축했다. 앞에서 자신의 차가 있는 곳을 안내하고 있던 강민지는 신예준의 어두운 안색을 발견하지 못했다.‘그 남자들 실패한 모양이네.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술집 밖에 세워져 있는 몇십억짜리 차를 보고 신예준은 눈
“언니, 난 이제 망했어. 내가 경호원이랑 무슨 짓을 했는지 사람들이 다 알아버렸다고. 나 이제 시집 못 가는 거 아니야?”반승제에게 그런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윤선미는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윤선미가 반승제를 쫓아다닌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여자로 대한 적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실내 디자이너와는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또 윤단미와는 연애까지 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한 게 너무나도 억울했다.윤단미는 자신이 힘들지 않은 선에서 윤선미를 대충 부축하고 있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경솔하게 움직이래?”윤선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모든 일이 성혜인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두 사람은 강민지와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딱히 인사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냥 서로 무시하고 지나쳐 버렸다.윤선미는 정밀 검사를 받으러 가고 윤단미는 밖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그리고 윤선미는 그녀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날 때가 되어서야 검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윤선미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자꾸만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검사를 받는 사람 중 대부분이 문란한 생활을 하므로 그녀는 제풀에 찔리고 말았다.윤선미는 머리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깨물고는 윤단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병실에서 나가고 있는 성혜인과 마주쳤다. 성혜인은 화장실을 가려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윤선미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불러세웠다.“페니 씨.”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머리를 돌렸다. 윤선미가 무엇 때문에 병원으로 왔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녀는 윤선미를 힐끗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윤선미는 그녀를 순순히 보내줄 사람이 아니었다.“야, 당장 거기 서지 못해?! 내가 너 때문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 죽여버릴 거야!”금방 치욕스러운 검사를 받고 나온 윤선미는 분노 지수가 최대치를 뚫었다. 그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