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모, 시간도 늦었는데 집에 들어가시지 않고 뭐 하세요? 오빠는 뭐 하는데 도와주지도 않아요?”임남호가 있었다면 이소애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성혜인이 말하자 이소애는 얼굴을 붉히며 급히 성혜인의 손을 잡았다.“혜인아, 나랑 돌아가자. 네 방 아직도 그대로야. 이전에 너한테 신세를 이미 많이 졌어. 이번에 남호를 데리고 온 것도 말이야.”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리는 이소애를 보며 성혜인은 한숨을 쉬었다.“오빠가 돌아오고 나서 진희랑은 화해했어요?”“아니, 크게 싸웠지. 확실히 남호가 잘못했으니 반성문을 쓰라고 하더라. 아마도 용서해 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어카를 끌고 하늘에 리조트를 지나던 성혜인은 마침 계단 앞에서 반승제를 만났다.반승제는 정장 대신 흰 와이셔츠만 입고 심인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두 사람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 저녁 모임에 참가할 예정이었다.지금 시각은 이미 여덟 시였다. 모임은 이곳의 임원들도 참가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성혜인은 이소애를 도와 카트를 밀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반승제는 눈썹을 까딱거리더니 카트 안의 과일들로 시선을 돌렸다.오렌지에, 포도에, 바나나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성혜인은 당연히 자기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반승제가 서천에 나타날 리가 없었으니까.허리를 꼿꼿이 편 성혜인은 하늘에 리조트의 조명 아래에 우뚝 서 있는 반승제를 보았다. 조각 같은 얼굴의 날카로운 선들이 달빛에 융합되는 것 같았다.BH그룹에서 볼 때는 항상 엄숙하고 냉랭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셔츠 소매도 걷어 올린 상태여서인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보아하니 잠시 후 있을 모임이 어려운 자리가 아니라서 다소 편하게 입은 모양이었다.“반 대표님?”성혜인이 긴가민가하면서 불렀다.계단 위에 선 반승제를 보며 계단 앞에 선 성혜인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반 대표님, 귤 하나 드실
이번 비즈니스에 과일 관련한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반승제는 가볍게 웃었다.“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네요. 달 것 같습니다.”“맞습니다. 이런 귤은 다들 좋아합니다. 작년 이맘때에 한창 잘 팔렸었죠.”사람들이 멀어져갔다.반승제 뒤의 심인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표님은 이런 과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원에 있을 때도 해외에서 공수해 온 과일만 입에 댔었다.......성혜인은 이소애를 도와 리어카를 밀었다. 거의 집에 도착하는데 이소애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혜인아, 아까 그 사람과 아는 사이라면, 네가 리어카를 미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것 아니야? 네 체면도 있는데...”리어카는 너무 허름했다. 게다가 과일을 팔고 있었으니 하진희는 나이도 많은 이소애가 창피한 짓만 골라 한다고 했다.이소애가 길에서 이렇게 돈을 벌고 있을 때면 하진희는 친구랑 나가 놀면서도 이소애 앞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이소애는 성혜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다.“외숙모, 직접 일해서 돈을 버는 게 왜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에요? 반 대표님은 그런 걸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아요.”이소애는 할 말이 없었다.리어카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집에 들어서지도 못했는데 성혜인은 안에서 임남호의 목소리를 들었다.“아버지, 저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그냥 어머니 몫을 남기고 우리끼리 먼저 먹어요.”그 뒤에는 하진희의 목소리였다.“그러게 말이에요. 그 쥐꼬리만 한 돈이라도 벌겠다고 매일 이렇게 늦게 나가시는 걸 보면 제가 다 창피해요. 마주칠까 봐 친구랑 나가놀지도 못하겠다고요.”이소애와 성혜인은 밖에 서서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성혜인이 화가 날까 봐 걱정된 이소애는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여보, 빨리 나와. 혜인이가 왔어.”안에서 반찬을 데우고 있던 임동원은 이소애의 목소리를 듣고 급히 뛰쳐나왔다.임남호는 성혜인이 왔다는 소리에 몸이 굳어버려 나가지도 못했다.하진희는 그저 옆에서 코웃음을 치고 젓가락을 가져가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이소애를 도와 리어카
“혜인아, 걱정하지 마.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고민하다가 다시 물었다.“유창목 바닥채 파는 사장님, 그 회사에 혹시 아는 사람 있어요?”임동원의 직업은 그래도 나쁘지 않은 직업이었다. 월급이 높지는 않아도 인맥은 꽤 넓었다.“조금 이따 물어볼게. 그리고 문자 보내마.”성혜인은 그제야 시름을 놓고 호텔로 돌아왔다.그녀는 샤워를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침대에 커다란 검은 벌레가 있어서 침대에서 잠을 청하기 무서워졌다. 성혜인은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하룻밤을 보냈다. 자고 일어나니 목이 아팠다.이튿날 아침 깨어났을 때 임동원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씨 아저씨가 오늘 밤 마침 그곳에 간다는 소리였다.「내가 이 씨한테 얘기해 놨어. 데리러 올 거야.」성혜인은 간단하게 죽과 옥수수를 먹고 호텔 입구에서 기다렸다.먼저 들어온 것은 제네시스 브랜드의 차량이었는데 가장 기본 디자인이어서 4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차였다.그 뒤로는 롤스로이스가 들어왔다. 성혜인은 바로 반승제의 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설마? 생각하고 있는데 이 씨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 성혜인을 데리고 롤스로이스 옆으로 갔다.이전에 성혜인의 그림이 반 대표님의 마음에 들었었다. 게다가 성혜인은 반 대표님의 차도 타보지 않았던가.차 창문이 내려가고 반승제가 얼굴을 드러냈다.이곳에서도 반승제의 무릎 위에는 여전히 서류가 많았다.손목에는 비싼 파텍필립 시계가 있었고 손톱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손가락 마디마디는 정교한 조각 같았다. 게다가 손목은 어찌나 하얀지, 손등의 핏줄이 선명하게 보였다.손은 그의 얼굴처럼 매력 있었다.“반 대표님, 이쪽은 그림을 그렸던 그 친구입니다. 마침 현장에 가서 시찰하는데 이 아이도 그 근처에 가거든요. 저희 차량에는 죄다 늙은이에다 담배까지 피워서 이 친구가 힘들어할 것 같은데, 반 대표님의 차에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이 씨는 예의를 갖추어 물으며 순수한 미소
반승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서류를 보고 있었기에 성혜인은 방해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씨는 롤스로이스 옆에 와서 일단 반승제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먼 곳에 있는 별장을 가리켰다. “저곳에 네가 찾는 사람이 있어. 우리는 일단 반 대표님을 모시고 아래에서 시찰할 테니 먼저 가 있어. 네 외삼촌의 부탁은 다 들어줬어.”성혜인은 반승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또 이 씨 아저씨에게도 감사를 드렸다. 그러고는 크게 발걸음을 떼어 별장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았는데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거절당하면 내 이름을 대.”성혜인은 살짝 의외라는 듯 놀랐다. ‘이곳의 사장과 아는 사이인가?’그렇다면 일이 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눈도 초롱초롱해졌다. “감사합니다, 반 대표님.”점심의 태양은 살짝 강렬해서 성혜인에게 쏟아지는 빛이 반승제에게는 눈부셨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옆의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이 별장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별장은 동양풍의 별장이었는데 높은 담장 너머로 심어놓은 나무들이 보였다. 이곳의 사장님의 취향도 독특한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성혜인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누구를 찾으시나요?”“안녕하세요, 방 사장님을 만나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오늘 집에 계시죠?”고용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문을 열었다. “방 선생님께서 오늘 집에 계신 것은 맞지만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일단 들어오셔서 기다려 주세요. 방 선생님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실지 여쭈어보고 오겠습니다.”성혜인이 단정하고 바르게 생겼기에 고용인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들어선 성혜인은 정원을 보자마자 공들여 가꾼 정성이 느껴졌다. 동양풍도 있었고 풍수에 관한 아이디어도 있었다. 스승인 주영훈이 대표적인 한국화 화가였기 때문에 유일한 제자인 성혜인도 이쪽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 와서 나를 찾는 것을 보아하니 그 전에 목제 타일을 예약한 것이 아닌가 보군. 내 물론 그대를 좋아하기도 하고 주영훈 화가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대에게 조금 나눠줄 수 있지만, 우리 회사의 타일은 3년 전에 예약해야 하기에 지금 당장 나눠주기엔 나도 힘들어.”방태주의 말은 가식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그 얘기에 성혜인은 웃음을 지었다.“방 사장님, 제가 듣기론 몇 년 전에 고객의 예상 날짜가 틀렸다거나 혹은 문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취소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요. 다른 사람의 몫을 나누어 주시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취소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 몫을 제게 먼저 주실 수 있으실까요? 가격은 섭섭지 않게 해드릴게요.”방태주는 고민하지 않고 바도 대답했다.“이름이 뭐라고 했지?”“페니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제 스승님도 이렇게 불러주셨거든요.”방태주는 작게 웃었다.“그의 제자이기도 하고 내게 빚도 졌으니 남아서 그림을 한 폭 그려주게나. 이후에 누가 취소하게 되면 내 바로 연락하지.”“그렇다면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방 사장님.”방태주가 그녀한테 그려달라고 한 것은 어려운 그림이 아니었다. 원래 그리던 사람이 절반을 그렸는데 왜서인지 멈춰버려서 성혜인이 계속 그려야 했다. 하지만 원래 주인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 살짝 난이도가 있었다.하지만 성혜인의 머릿속에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성혜인은 클리셰같은 그림 속에 생동한 포인트들을 넣어 이 그림이 더욱 진짜 같게 했다.세 시간이 지나서야 이 그림을 완성했다. 중간에 고용인이 그녀를 위해 차를 가져왔다.방태주는 차에 있어서도 매우 견해가 깊었다. 아주 급이 높은 대홍포였다.성혜인이 손을 내밀어 차를 들자마자 밖에서 발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오늘 승제 씨 온다면서요? 오전 내내 기다렸는데 왜 안 오는 거예요?!”그대고 굳은 성혜인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는 예쁘게 치장한 20대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여자는 성혜인을
반승제는 팔을 꺼내면서 방태주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태주 아저씨, 오랜만입니다.”방태주는 이미 일어나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너 이 자식, 3년 동안 찾아오지도 않고.”보아하니 반승제가 3년 전의 혼인 때문에 해외로 나간 후 다시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성혜인은 반승제와 방태주의 관계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아마도 방태주와 반 회장님이 아는 사이여서 반승제가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방이서가 옆에서 끼어들었다.“나여도 도망갔어요. 모르는 여자랑 결혼하라니 회장님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방태주는 방이서를 노려보았다.“남의 일에 네가 왜 끼어들어. 승제야, 앉아. 마침 여기 주영훈 화가님의 제자가 있는데 소개해 줄게, 다 젊은 사람들끼리.”성혜인은 그 혼인의 당사자로서 이곳에 있는 것이 어색했다.그녀는 원래 이곳의 사람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실망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방태주가 소개할 때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방 사장님, 전 이미 반 대표님과 아는 사이입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말을 듣고 성혜인이 방태주에게 그 집이 반승제를 위해 설계한 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그는 성혜인이 주영훈의 제자인 줄은 몰랐다.방태주는 성혜인의 말을 듣고 살짝 놀랐다.“어떻게 아는 사이인가?”굳이 따진다면 침대에서 안 사이이긴 했다. 그 후에야 교류가 생긴 것이니까.성혜인이 대답하려는데 옆의 방이서가 과장하며 소리를 질렀다.“승제 씨, 바지 끝이 왜 이렇게 더러워졌어요? 산에 가신 거예요?”성혜인이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반승제의 비싼 바지에 흙이 조금 묻어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아까 이 씨 아저씨를 따라가 직접 산을 시찰하고 온 모양이었다.아마도 그곳의 길이 좋지 않아 바지가 더러워진 모양이었다.“괜찮아.”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방이서가 물티슈를 가져와 쪼그려 앉아 닦아주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방태주는 자기 딸이 이렇게 급히 호감을 사려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성혜인이 왔을 때 반승제의 차를 타고 왔으니 반승제가 오지 않았다면 성혜인은 돌아가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방이서는 두 사람이 그녀의 앞에서 가까이 붙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바로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성혜인을 밀어냈다. 성혜인은 그저 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든 방이서가 반승제의 손에서 그림을 가져갔다. “사실 그냥 그래요. 이 정도 실력은 우리 미대에서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선생님이 오늘 기분이 좋으셨나 봐요, 만점을 다 주시네.”방이서의 이런 행동은 매우 무례한 것이었다. 게다가 성혜인의 앞에서 바로 그녀를 까 내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혜인은 아직 방태주와 거래가 있기에 방이서의 무례함에도 그저 꾹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미묘한 기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반승제가 방이서의 말에 대답했다. “페니는 네 선배야.”그 말에 방이서를 둘러싼 공기가 어색해진 기분이었다. 이 여자도 제원 대학교 미술 카데미 출신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방이서 얼굴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완전히 기분이 차갑게 식은 방이서였다. “승제 씨, 왜 이래요, 진짜. 우리 못 본 지 3년이 다 되는데 제삼자나 데려오고.”방이서가 그의 팔을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반승제는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눈썹을 까딱이며 신경 쓰지 않았다. 방이서한테 뭐라고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방태주는 그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애가 계속 이렇게 철이 없다니까. 이러다가 큰코다치면 어떡하려고. 승제야, 네가 결혼했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이서가 계속해서 매달려서 골치만 아팠을 거야.” “뭐예요, 승제 씨 결혼은 안 한 거랑 같아요. 그 여자를 진짜 좋아했다면 3년 동안 왜 해외에 있었겠어요? 내가 만약 그 여자였다면 제 주제를 알고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낼 거예요. 쓸데없이 남의 남자나 넘보기는.”성혜인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가 굳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웃겨서였다. 남의 남
성혜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방태주는 금방 주방에서 나오다가 비를 보고는 웃으며 얘기했다.“이 비가 그치면 오늘 밤에 또 많은 버섯이 자라나겠군.”방태주는 진짜 이 산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소파 앞에 걸어와 앉은 후 산에서 캘 수 있는 것들에 관해 얘기했다. 그 덕분에 아까의 미묘한 분위기는 사라졌다.하지만 그동안 밖의 비가 점점 거세졌다. 보슬비는 점점 소나기로 되었고 온도마저 뚝 떨어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하늘도 꽤 어두워졌다.이런 산속에서 폭우를 만나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방태주가 입을 열었다.“사용인들더러 방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 오늘은 다 여기 남도록 하게. 이런 날씨에 운전은 위험해. 게다가 길이 미끄러울 수도 있으니까.”그리고 특별히 성혜인을 보며 말했다.“페니, 승제랑 같이 왔으니 같이 여기 남게. 차를 타고 가는 건 안전하지 않아.”성혜인은 거절할 권리도 없었다. 그녀가 가겠다고 해도 반승제는 남을 테니 그러면 성혜인 혼자 깊은 산길을 걸어 내려 가야 했다.그래서 그녀는 반승제를 바라보았다.반승제는 손으로 미간을 꾹 누르며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그럼 오늘만 실례하겠습니다.”“실례라고 할 게 뭐가 있나. 예전에도 잘 묵었잖아.”옆의 방이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드디어 자기가 끼어들 수 있는 화제를 찾아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그때 승제 씨는 엄청 어렸는데, 반 회장님이랑 왔잖아요. 서천에는 그때 제대로 된 큰길도 없었어요. 두 분이 산에서 힐링을 하고 계실 때 마침 저희랑 마주쳤죠.”옆의 방태주는 또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계속 그렇게 예의 없이 굴래? 승제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지, 이름만 덜컥 부르지 말고.”방이서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이래야 애 취급을 안 당하죠.”성혜인은 그제야 알았다. 반태승이 아프기 전에 방태주처럼 산을 좋아했다.아마도 매년 산에서 버섯을 캘 때 오다가 미성년자인 반승제를 데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방태주랑 알게 되었고 여태까지 연락을 주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