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저녁 원진은 직접 만든 저녁을 들고 당시연을 찾았다.원진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려 했지만 그녀의 목에 남은 자국을 보고는 손이 멈칫했다. 당시연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그녀는 속눈썹을 떨며 한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그가 내민 죽을 쳐서 떨어뜨렸다.“시연 누나?”원진이 급히 몸을 숙여 바닥의 그릇을 주우려 했지만 당시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통장에 1,400만 원을 넣었어, 원진. 앞으로 우리 다시 보지 말자. 그 사람들이 하는 말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네가 내 옆에 있는 동안 내 인생이 너무 꼬인 것 같아.”원진은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방금 들은 말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며 고개를 들어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연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고 심지어 매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원진, 미안해. 나도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는 버티기 힘들어. 네가 온 뒤로 부모님도 낯설게 변했고 나와 김성진의 관계도 엉망이 됐어. 학교로 돌아가. 수희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줄게. 수능이 끝나면 다른 도시의 대학에 지원해.”원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뚫어져라 올려다보며 그녀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당시연은 지친 듯 이마를 감싸 쥐며 씁쓸하게 웃었다.“아마도 내가 너를 산골에서 데리고 나오지 말았어야 했나 봐. 다른 사람의 운명에 섣불리 발을 들이면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미안해, 원진.”원진은 생각이 멈춰버린 듯했다. 당시연의 말에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얼굴이 창백해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누나, 나를 버리는 거예요?”원진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 약속을 떠올렸다. 그때가 되면 자신도 더 이상 당시연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그녀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당시연은 등을 뒤로 기댔
원진은 절망과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당시연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마음속에 간직했던 짝사랑은 고백도 못 한 채 꺾여버렸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떼지 않고 당시연을 바라보았다.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당시연이 분명 협박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담담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차갑게 식어 있었다.어쩌면 그녀가 말한 대로 자신이 정말 그녀에게 짐이 된 걸지도 몰랐다.원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황급히 소매로 닦아냈다.“누나, 진심이에요? 정말 그런 남자랑 결혼하겠다는 거예요?”당시연의 가슴속 깊은 곳이 찢어지듯 아팠다. 몇 년 전, 그녀는 이 아이를 잘 키워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말이 칼날이 되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야만 했다.원진은 아직 세상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는 산골 마을에서 나와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해 왔기에 사람들의 잔혹한 속내를 잘 알지 못했다. 김씨 가문이 그를 해치려 한다면 그의 앞길은 막막해질 게 분명했다.“진심이야. 나 성진이를 사랑해. 우리 다음 달쯤 결혼식 올릴 거야. 수능은 두 달 남았으니까 이제 오지 마. 부모님도 네가 오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원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지만 당시연에게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당시연은 원진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는 그녀를 좋아했고 든든한 사람처럼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는 당시연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이며 오히려 그녀에게 불행만을 안겨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원진은 태어나서 이렇게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산골에서 살아온 그의 삶은 무감각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억울함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끊임없이 상처 주는 말만 내뱉는 당시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했다간 당시연이 자신을 혐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게 뻔했다. 그는 창백한
한 달 후, 김성진과 당시연의 결혼식이 다가왔다.당시연은 거울 속 화려하게 치장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눈동자에는 어떤 생기도 없었다.주변에서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오가며 당시연의 머리를 만지고 정리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주었다.화장이 끝나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부축하여 아래로 내려갔다. 긴 웨딩카 행렬이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 앞으로 걸어갔다.차 문이 열리고 당시연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당지석과 홍영란이 무언가 말을 건네려 했지만 당시연이 대화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들도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차가 출발하자마자 당시연의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차 안에는 그녀와 운전기사만 있었고 모자를 푹 눌러쓴 운전기사는 휴지를 뽑아 뒤로 내밀었다.당시연은 정중히 받아 들고 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감사합니다.”운전기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시연은 작은 약병을 꺼내어 알약 몇 알을 입에 털어 넣고 씹더니 씹은 약을 그대로 삼키며 쓴맛을 견디고 있었다.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그녀는 덧붙였다.“진정제예요. 잠시 후 너무 긴장할까 봐서요.”운전기사는 반응 없이 가속 페달을 밟았다.당시연의 눈물은 계속 흘렀다. 이 길이 끝이 없기를, 예식장에 도착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창밖을 보기 싫어 눈을 감은 채 있었지만 자동차가 점점 더 빠르게 달리는 걸 느끼며 불안해졌다.당시연은 모자를 푹 눌러쓴 운전기사를 바라보았다.원진은 모자를 벗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시연 누나, 내가 데리고 갈게요.”당시연의 눈동자가 놀라움에 크게 흔들렸다. 이게 현실인지 믿기지 않았다.“진아, 멈춰!”“싫어요. 누나 데리고 여기를 떠날 거예요.”당시연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뒤편에는 몇 대의 차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이제 웨딩카 행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그들을 추적 중이
당시연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다 자동차가 작은 도시에 들어서며 멈춰 섰다. 김씨 가문 사람들이 집요하게 뒤쫓아 오고 있어 둘에게는 도망칠 길이 없어 보였다. 원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당시연의 손을 잡고 곧바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누나, 이쪽이에요.”당시연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움직이기 불편했다. 몇 걸음 뛰다가 지쳐버린 그녀는 베일을 벗어 옆에 던졌다.“진아, 이제 그만해.”원진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급히 시선을 돌렸다.“제가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게 누나가 김성진과 거래한 덕분이죠? 이제 수능도 필요 없어요. 제가 누나를 데리고 갈게요.”당시연은 원진에게 쌀쌀맞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의 눈을 마주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원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조금 더 쫓아오다 보면 저 사람들도 곧 포기할 거예요. 여기는 외진 곳이라 길도 많고 제가 미리 다 알아봤어요.”당시연은 말없이 원진을 따라갔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을 둘러쌌다.당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그만 돌아가서 공부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자.”이 난리 속에서 김씨 가문도 화가 났을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원진이 그들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당시연의 눈에 비친 원진은 언제나 순수하고 열정적인 소년이었다. 그러나 불과 십여 분 만에 그는 그 무리의 사람들을 전부 쓰러뜨렸다.원진의 주먹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고 상대가 너무 많아 결국 등에 한 방을 맞고 말았다.“시연 누나, 가요.”당시연은 그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길로 걸음을 옮겼다.김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이 다시 추격해 오자 당시연은 이제 도망칠 수 없음을 직감했다.김성진은 결코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원진을 둘러싼 사람들이 하나둘씩 야구방망이를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자 당시연은 그를 도우려
당시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당신은 누구시죠?”“원진의 가족입니다.”원진에게 가족이라니?당시연은 순간 경계심을 품었다. 그러자 그가 여러 가지 자료를 꺼내 보여주었다.“원진은 원씨 가문에서 누군가의 악의로 인해 산골 마을로 유괴된 아들입니다. 당신이 산골 마을에서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원씨 가문은 아마 원진을 평생 찾지 못했을 겁니다. 이건 40억입니다. 받아주세요.”당시연은 아무 말 없이 그저 현실감이 없는 듯 보았다.남자는 다시 문서 한 장을 꺼냈다.“이건 당신을 위해 마련한 300평짜리 주택 증서입니다. 생활하시기 충분할 겁니다. 당시연 씨, 당신과 원진은 서로 다른 세계 사람입니다. 원진은 이미 우리와 함께 돌아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이제 당신과 원진은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당신은 벌써 반달 가까이 의식이 없었어요. 열흘 뒤면 그 아이는 수능을 봐야 해요.”당시연은 말없이 남자의 손에 들린 영상을 보았다. 화면에는 원씨 가문의 재산이 소개되고 있었다.그녀는 그토록 많은 돈을 가진 가문을 본 적이 없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원씨 가문은 수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다.당시연은 침대 시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고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남자는 태블릿을 치우며 말했다.“40억은 받아 두세요. 원진의 마음과 달리 당신은 동생처럼만 생각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원진은 아직 철이 없지만 당신은 성숙하게 대처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시연 씨, 그날 밤 원진이 당신에게 입맞춤했지요? 원진이 편히 떠날 수 있도록 당신도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합니다.”당시연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진의 마음을 몰랐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그녀는 그저 원진을 동생처럼 여겼고 그의 마음이 그토록 깊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마음 한편이 씁쓸해졌다.“열흘 뒤면 수능을 볼 테니 원진은 조만간 당신을 보러 올 겁니다. 당시연 씨, 우리와 협조해 주실 거죠? 나중에 원진이 결혼하게 되더라도 그 상대는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