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연이 간절히 부탁까지 했다니. 원진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목울대가 울컥 움직이더니 돌아서서 병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병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당시연은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손을 들어 막 자신이 원진을 때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날 오후 당시연은 집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또 이틀이 지나고 수능이 끝났다.당시연은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원진의 연락처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메시지가 오지 않을 것이다.그 후 십여 일이 지나도록 당시연은 거의 넋이 나간 듯 지냈다. 아무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았고 일도 잠시 쉬기로 했다.그러던 어느 날, 이수희가 기쁜 소식을 전하며 전화를 걸어왔다. 원진이 수능에서 전국 1등을 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축하 현수막까지 걸 준비를 한다고 했다.“시연아, 안 올 거야? 그런데 진이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좋은 날 연락이 안 된다니!”당시연은 침대에 누운 채 한순간 다리가 마비된 듯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대충 몇 마디를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이상하게도 원진과 도망치듯 결혼식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김씨 가문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부모님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당시연은 병실에 나타났던 그 남자가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리라 짐작했다.원진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혹시 이미 그 낯선 남자와 함께 원씨 가문으로 돌아갔을까?이제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걸까?그날 오후 수능 성적 발표가 모두 끝났다. 당시연은 간만에 동네 슈퍼에 들렀다. 컵라면을 고르고 있던 그녀는 옆에서 들려오는 두 학부모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올해 수능 1등 학생이 인터뷰를 거절했다면서요?”“그러게요. 학교 선생님들도 못 찾았다던데요. 어디 간 건지.”“제원대도 안 쓴 거예요? 해외 유학을 가려는 건가?”“사진이 실렸던데 진짜 잘생겼더라고요. 우리 딸도 나중에 저런 훌륭한 남자 친구를 만나면 좋겠
‘떠나기 전 마지막 선물?’당시연은 잠시 멍해졌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두 손을 들어 원진의 뺨에 올렸다.이 아이는 정말 잘 해냈다. 전국 1등을 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정말로 이뤄냈다.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을까. 이 성과를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진아, 정말 대단해. 너무 자랑스럽고 기특해.’당시연은 몇 마디라도 칭찬해 주고 싶었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그 남자의 경고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원진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 남자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고 결국 감옥에 가게 될 거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당시연은 눈을 내리깔다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이 환상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그런데 이내 누군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방으로 데려갔다.침대에 누웠을 때야 당시연은 천장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이건 환상이 아니라 진짜 원진이었다.당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어갔다.하지만 거실에는 따뜻한 죽 냄새만 남아 있을 뿐 원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시간은 새벽 두 시였다. 원진은 그녀를 보러 왔지만 다시 떠나버렸다.당시연은 불안감에 휩싸여 몸속에 남아 있던 술기운에 이끌려 곧장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진아?”아래층으로 내려가 밖에서 소리쳐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원진은 보이지 않았다.당시연은 갑작스레 조급해졌다. 이번에 그를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원진!”그녀는 아파트 밖으로 뛰어나갔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원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당시연은 정처 없이 주변을 헤매며 한참 동안 그를 찾아다녔다.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맥이 풀린 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만약 주방에 남아 있는 따뜻한 죽 냄새가 아니었다면 오늘 밤의 일은 그저 꿈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당시연은 거실에 앉아 천천히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죽을 다
오 년 후.원진은 스물셋이 되었고 당시연은 어느덧 스물아홉의 나이에 접어들었다.그동안 당시연과 부모님의 관계는 꽤 부드러워졌다. 아마 원진의 떠남이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진이 떠난 이후로 당시연은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해져 원망도 미움도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되었다.당시연은 대학 강사가 되어 많은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활기찬 얼굴을 볼 때마다 문득 원진이 떠오르곤 했다.지난 오 년 동안 그녀는 원진의 소식을 알아보려 계속 애썼지만 그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매일 강의가 끝나고 차로 고등학교 근처를 지날 때면 그녀는 잠시 멈추곤 했다.그녀가 지금 사는 곳은 다섯 해 전 처음으로 임대했던 곳으로 이제는 집을 매입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최근 한 달간 그녀는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경찰은 주변을 조사한 후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 가장 비싼 명품 매장의 쇼윈도 앞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보았다.남자는 태연히 서서 선글라스를 손에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그러다 한 여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고 환히 웃었다.당시연의 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그 남자의 주위엔 경호원들이 몇 명 있었고 그들은 남자를 향해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원진이었다.하지만 예전 열일곱의 마르고 여린 소년이 아니라 이미 훤칠하게 자란 청년이었다. 그의 눈매는 날카로워졌고 미소를 지을 때는 서늘한 봄바람이 스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당시연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다리가 저려올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이 갑작스러운 상실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가슴이 조여오는 것처럼 답답하고 아팠다.옆에 있던 동료들이 수군거렸다.“저 사람 누구야? 오늘 매장 문을 닫고서까지 그 사람만 접대한다고 하던데.”“글쎄요, 제원에 워낙 재력가가 많으니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하겠죠.”“진짜 잘
당시연은 점점 가까워지며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다가갈수록 긴장감이 더해졌다.결국 그녀는 인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둘의 인연은 고작 일 년 반이었고 원진의 거대한 인생에 비하면 짧은 시간일 테니, 그녀와의 기억은 그다지 의미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원진은 이미 그녀를 잊었을지도 모른다.당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그의 옆을 지나쳐 가기로 했다.그런데 한 발짝을 내딛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진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맑고 차분해졌지만 그녀를 부르는 어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시연 누나, 이제 나랑 말도 안 하실 건가요?”당시연의 온몸이 굳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천천히 돌아서자 원진이 벽에 기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당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내려 했다.‘이제 보니 진이었네, 돌아왔구나.’그러나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입을 떼었다가 다시 다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원진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그는 더욱 커졌고 아마도 이제는 187cm쯤 되는 것 같았다. 그의 존재가 느껴져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시연 누나, 혹시 날 잊으신 건 아니죠? 저 원진이에요.”잊을 리가 없었다. 당시연은 그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그의 소식을 묻곤 했지만 그 남자의 말처럼 그녀와 원진은 이제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오늘 이 만남 또한 짧은 우연일 것만 같았다.“오랜만이야, 원진.”당시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여기서 모임 중이야?”원진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더니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네.”당시연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긴 침묵이 흐른 뒤 원진이 조용히 물었다.“결혼했어요? 신혼 선물이라도 챙겨야 하는 거 아니죠?”“결혼 안 했어. 남자 친구도 없어.”원진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아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반승제의 비서인 심인우였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백연서는 반승제에게 돌아와서 저녁밥이나 먹으라고 했지 성혜인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성격으로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안 올수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심인우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래, 승제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대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렴.”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백연서는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손을 휘적였다.“너도 이만 돌아가. 승제가 시간 있을 때 다시 부를 테니까.”“네.”성혜인은 애초부터 남아서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심인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흐릿한 뒷모습 만으로도 반승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혼 서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성혜인은 빨간불을 기다리며 회사 단톡방을열어 봤다.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톡방은 아주 시끄러웠다.‘반승제가 이번에 결혼하러 돌아왔다면서요? 네이처 빌리지에 비싼 값을 주고 펜션을 샀다고 하던데 곧 인테리어도 하겠죠?’‘사장님이 반승제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실내 디자인 일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을까요?”“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엄청 덕을 보겠는데요? 반승제 정도의 재벌이라면 일은 둘째 치고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요...”반승제가 결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뉴스에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일이었다.이 화제에 관심 없었던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 양한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지금 잠깐 문라이트로 올 수 있어? 네가 디자인했던 펜션에 관심 있는 고객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