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연이 간절히 부탁까지 했다니. 원진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목울대가 울컥 움직이더니 돌아서서 병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병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당시연은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손을 들어 막 자신이 원진을 때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날 오후 당시연은 집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또 이틀이 지나고 수능이 끝났다.당시연은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원진의 연락처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메시지가 오지 않을 것이다.그 후 십여 일이 지나도록 당시연은 거의 넋이 나간 듯 지냈다. 아무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았고 일도 잠시 쉬기로 했다.그러던 어느 날, 이수희가 기쁜 소식을 전하며 전화를 걸어왔다. 원진이 수능에서 전국 1등을 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축하 현수막까지 걸 준비를 한다고 했다.“시연아, 안 올 거야? 그런데 진이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좋은 날 연락이 안 된다니!”당시연은 침대에 누운 채 한순간 다리가 마비된 듯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대충 몇 마디를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이상하게도 원진과 도망치듯 결혼식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김씨 가문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부모님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당시연은 병실에 나타났던 그 남자가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리라 짐작했다.원진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혹시 이미 그 낯선 남자와 함께 원씨 가문으로 돌아갔을까?이제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걸까?그날 오후 수능 성적 발표가 모두 끝났다. 당시연은 간만에 동네 슈퍼에 들렀다. 컵라면을 고르고 있던 그녀는 옆에서 들려오는 두 학부모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올해 수능 1등 학생이 인터뷰를 거절했다면서요?”“그러게요. 학교 선생님들도 못 찾았다던데요. 어디 간 건지.”“제원대도 안 쓴 거예요? 해외 유학을 가려는 건가?”“사진이 실렸던데 진짜 잘생겼더라고요. 우리 딸도 나중에 저런 훌륭한 남자 친구를 만나면 좋겠
‘떠나기 전 마지막 선물?’당시연은 잠시 멍해졌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두 손을 들어 원진의 뺨에 올렸다.이 아이는 정말 잘 해냈다. 전국 1등을 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정말로 이뤄냈다.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을까. 이 성과를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진아, 정말 대단해. 너무 자랑스럽고 기특해.’당시연은 몇 마디라도 칭찬해 주고 싶었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그 남자의 경고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원진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 남자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고 결국 감옥에 가게 될 거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당시연은 눈을 내리깔다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이 환상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그런데 이내 누군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방으로 데려갔다.침대에 누웠을 때야 당시연은 천장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이건 환상이 아니라 진짜 원진이었다.당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어갔다.하지만 거실에는 따뜻한 죽 냄새만 남아 있을 뿐 원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시간은 새벽 두 시였다. 원진은 그녀를 보러 왔지만 다시 떠나버렸다.당시연은 불안감에 휩싸여 몸속에 남아 있던 술기운에 이끌려 곧장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진아?”아래층으로 내려가 밖에서 소리쳐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원진은 보이지 않았다.당시연은 갑작스레 조급해졌다. 이번에 그를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원진!”그녀는 아파트 밖으로 뛰어나갔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원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당시연은 정처 없이 주변을 헤매며 한참 동안 그를 찾아다녔다.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맥이 풀린 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만약 주방에 남아 있는 따뜻한 죽 냄새가 아니었다면 오늘 밤의 일은 그저 꿈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당시연은 거실에 앉아 천천히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죽을 다
오 년 후.원진은 스물셋이 되었고 당시연은 어느덧 스물아홉의 나이에 접어들었다.그동안 당시연과 부모님의 관계는 꽤 부드러워졌다. 아마 원진의 떠남이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진이 떠난 이후로 당시연은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해져 원망도 미움도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되었다.당시연은 대학 강사가 되어 많은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활기찬 얼굴을 볼 때마다 문득 원진이 떠오르곤 했다.지난 오 년 동안 그녀는 원진의 소식을 알아보려 계속 애썼지만 그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매일 강의가 끝나고 차로 고등학교 근처를 지날 때면 그녀는 잠시 멈추곤 했다.그녀가 지금 사는 곳은 다섯 해 전 처음으로 임대했던 곳으로 이제는 집을 매입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최근 한 달간 그녀는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경찰은 주변을 조사한 후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 가장 비싼 명품 매장의 쇼윈도 앞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보았다.남자는 태연히 서서 선글라스를 손에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그러다 한 여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고 환히 웃었다.당시연의 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그 남자의 주위엔 경호원들이 몇 명 있었고 그들은 남자를 향해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원진이었다.하지만 예전 열일곱의 마르고 여린 소년이 아니라 이미 훤칠하게 자란 청년이었다. 그의 눈매는 날카로워졌고 미소를 지을 때는 서늘한 봄바람이 스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당시연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다리가 저려올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이 갑작스러운 상실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가슴이 조여오는 것처럼 답답하고 아팠다.옆에 있던 동료들이 수군거렸다.“저 사람 누구야? 오늘 매장 문을 닫고서까지 그 사람만 접대한다고 하던데.”“글쎄요, 제원에 워낙 재력가가 많으니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하겠죠.”“진짜 잘
당시연은 점점 가까워지며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다가갈수록 긴장감이 더해졌다.결국 그녀는 인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둘의 인연은 고작 일 년 반이었고 원진의 거대한 인생에 비하면 짧은 시간일 테니, 그녀와의 기억은 그다지 의미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원진은 이미 그녀를 잊었을지도 모른다.당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그의 옆을 지나쳐 가기로 했다.그런데 한 발짝을 내딛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진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맑고 차분해졌지만 그녀를 부르는 어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시연 누나, 이제 나랑 말도 안 하실 건가요?”당시연의 온몸이 굳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천천히 돌아서자 원진이 벽에 기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당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내려 했다.‘이제 보니 진이었네, 돌아왔구나.’그러나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입을 떼었다가 다시 다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원진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그는 더욱 커졌고 아마도 이제는 187cm쯤 되는 것 같았다. 그의 존재가 느껴져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시연 누나, 혹시 날 잊으신 건 아니죠? 저 원진이에요.”잊을 리가 없었다. 당시연은 그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그의 소식을 묻곤 했지만 그 남자의 말처럼 그녀와 원진은 이제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오늘 이 만남 또한 짧은 우연일 것만 같았다.“오랜만이야, 원진.”당시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여기서 모임 중이야?”원진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더니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네.”당시연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긴 침묵이 흐른 뒤 원진이 조용히 물었다.“결혼했어요? 신혼 선물이라도 챙겨야 하는 거 아니죠?”“결혼 안 했어. 남자 친구도 없어.”원진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당시연은 순간 멈칫했다.그러나 원진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마치 오늘 날씨가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당시연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데려다줄까요? 지금 어디 살아요?”당시연은 거의 멍한 상태로 원진을 따라 걸었다.차가 그녀가 사는 곳 앞에 멈춰 선 후에야 그가 물었다.“아직도 여기에 살아요?”“응, 이 집을 아예 샀어.”“다른 곳은 생각 안 해봤어? 여기서 누나가 다니는 학교까지 좀 거리도 있고 집값도 꽤 비싼 편인데.”당시연도 왜 이 집을 산 건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아마 언젠가 원진이 돌아와 그녀를 찾으려 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그런데 이제 원진이 돌아왔음에도 그녀는 자신이 괜한 짓을 했다고 느꼈다. 원진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원씨 가문의 힘을 빌리면 원진이 그녀를 찾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을 테니.결국 지난 오 년 동안 그가 그녀를 찾지 않았다.“시연 누나, 올라가요.”당시연이 몇 걸음 옮길 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참, 누나 전화번호 줄 수 있어요? 나중에 제가 또 제원에 오면 그때 같이 밥 한번 먹어요.”당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번호는 예전 그대로야. 바뀐 적 없어.”만약 그가 전화를 걸었다면 알았을 것이다.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원진은 이미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의 세계엔 이제 그녀가 없는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었다.“그래요. 그럼 폰에 저장해 둘게요.”원진은 차 안으로 돌아갔다.당시연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올라갔다. 마음이 기대했던 만큼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둔하게 아려왔다.그제야 세월이 얼마나 잔인한지 깨달았다.아파트 단지 밖에서 원진도 떠나지 않고 차에 앉아 있었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당시연의 번호를 확인했다
이날도 당시연은 동료들과 함께 술집에 갔다.전날 꾼 꿈 때문인지 자꾸만 부끄러워져서 몇 잔을 더 마셨다.전도윤은 옆에 앉아 당시연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녀가 첫사랑과 닮았다고 했다.당시연은 그와 결혼해 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이유가 첫사랑을 대신하려고 한 것이라니.당시연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담담했다.“그럼, 왜 첫사랑을 다시 찾아보지 않았어요?”“그 사람은 해외에서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어요.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더라고요.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전도윤도 나름대로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당시연은 한숨을 쉬고 술을 더 마셨다.“왜 헤어졌는데요?”“제 잘못이었죠. 그때는 교수님 밑에서 배우는 것에만 신경을 쓰느라 그 사람 감정은 아예 신경을 못 썼어요. 제3자가 낀 건 아니었지만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게 문제였어요. 여자는 옆에 있어 주는 걸 원하는데 저는 그조차 해주지 못했죠.”“헤어지고 나서 마음을 전했어야죠. 붙잡아야 했던 거 아닌가요?”“붙잡을 수 없었어요. 그 사람은 정말 단호한 성격이거든요. 예전에 저와 함께하려고 가족과의 인연까지 끊었으니. 날 사랑할 땐 불꽃 같았고 끝낼 땐 너무나 깔끔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처럼 그렇게 단호할 수는 없었죠. 지금 그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고 사랑하는 남자와 행복하게 잘 살아요. 아마 저만 여기서 멈춰 있는 거겠죠.”당시연은 조용히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전도윤은 얘기를 하다가 눈물이 차올라 얼굴을 가리며 울기 시작했다.당시연은 이마를 문지르며 생각했다.‘내가 지금 연애 상담이나 해주려고 나왔나?’결국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전도윤을 부탁하고 자리를 떠났다.술집을 나설 때쯤 당시연은 이미 알딸딸한 상태였다.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내려다가 얼굴을 확인하자 목이 막힌 듯, 하고 싶은 말들이 전부 삼켜져 버렸다.“원진?”“누나, 취했어요?”“
당시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머리 위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몸이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원진은 그녀가 피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그 전도윤이라는 사람이야? 둘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귀는 거야?”‘진이가 어떻게 전도윤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당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혹시 그도 그녀를 계속 지켜봐 온 건 아닐까? 다만 그녀가 모르게 했을 뿐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황당해서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이제 그녀도 더는 예전의 풋풋한 소녀가 아니라 서른이 된 어른이었다.원진은 여전히 빛나는 나이에 있으며 그녀는 이제 앞으로의 삶을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했다.당시연은 고개를 떨구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방금 사귀기로 했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원진의 손이 그녀의 턱에 얹혔다.“그래서 벌써 할거 다 해봤어?”당시연은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의 말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얼굴이 금세 달아올랐고 혀가 꼬이며 막무가내로 내뱉었다.“원진, 나 이제 서른이야. 서른 살 여자가 아직 순결할 거라고 생각해?”당시연은 무심코 내뱉었지만 말하고 나서 자신도 놀랐다.오늘 밤 둘 다 너무 이성을 잃었다. 이렇게 과감한 말을 주고받다니 왠지 민망해졌다.원진은 그녀를 끌어안고는 어깨에 턱을 기대며 말했다.“그럼 진짜 처음이 아닌 거야?”“응.”당시연의 머릿속이 엉켜 버렸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만두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인정하는 듯했다. 사실 그녀는 여전히 누구와도 그런 경험이 없었지만 그저 어른스러운 척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당시연, 그럼 올라가서 나 좀 가르쳐 줘.”당시연은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런 건 네 여자 친구가 가르쳐 주겠지.”“난 여자 친구 없는데.”당시연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들어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둘이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원진이
당시연은 당혹스러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원진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 듯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는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의 움직임은 한층 더 다정해졌다.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당시연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원진은 한 번도 그녀의 곁을 진정 떠난 적이 없었고 오히려 그녀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다.그러나 당시연은 한 번도 그를 붙잡을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반년 뒤에나 다시 만날 거라고 한 것은 그녀를 자극하고 싶어서였는데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었다.그녀를 기다리느라 긴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의 모든 마음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원진은 당시연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거의 병적으로 강렬했기에 그녀에게서 한동안 멀리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당시연은 언제나 모범적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를 산골 마을에서 데려오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김성진과 결혼하여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결국 당시연의 삶을 뒤흔든 것은 자신이었다. 원진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연은 결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당시연...”원진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당시연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술기운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 없이 그저 울기만 했다.원진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왜 그래? 너무 심하게 했어?”당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두려울 뿐이었다.“진아, 사실 나 너 찾았었어.”정말 오랫동안.원진의 움직임이 그녀의 말에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 집요하게 찾으려 했는지 당시연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당시연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 곁에 남고 싶었다.잠시 후 원진은 장난스럽게 물었다.“예전 남자 친구들이랑 비교하면 어때? 누가 더 잘해?”당시연은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