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알고 있기나 해?”“퇴학?”오후에 김성진의 부모님은 직접 학교를 찾아 교장 선생님을 협박했다.교장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두 사람의 차갑고 침울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우리는 이 학생을 퇴학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즉시 퇴학시켜야 합니다.”“김 선생님, 하지만 곧 대학 입학시험이 다가오는데 이 학생의 성적이.”“성적이 좋다고 해서 그가 쓰레기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 아들을 때려죽일 뻔했고 미래의 며느리에 대한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이 사람은 뼈까지 나쁩니다.”김성진은 감히 가족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진이 당시연을 침범하려다가 자신에 의해 저지당했고 그 결과 원진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진실을 조작했다.나쁜 사람들의 눈에 원진은 이미 용서할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은 것이 분명했다.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 끝으로 대리석 탁자를 두드렸다.“원진을 퇴학시키지 않으면 교장 자리에 앉을 수 없을 겁니다.”이 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교장은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알았어요. 알았어요. 학교에 바로 공지를 내도록 하겠습니다.”원진은 이수희와 함께 학교로 막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 방송에서 학교가 자신의 싸움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월요일에 단상에 올라가 반성문을 읽고 학교를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원진의 발걸음은 멈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수희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김씨 가문이 이 문제를 추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통지가 내려왔다.“원진, 내 말 들어. 월요일에 네가 먼저 단상에 올라가서 반성문을 읽고 내가 교장 선생님과 상의하러 가겠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당시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하지만 당시연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시연 언니는 어딨어?”원진은 고개를 숙이며 속눈썹을 말했다.“최근 출장 중이라 금방 돌
이수희는 원진이 후회하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진정한 남자라면 고개를 숙이는 법도 알아야 해. 일단 대학 입학시험부터 통과하자.”“이 선생님, 감사하지만 전 정말 여기까지만 갈 수 있어요.”그는 택시 문을 열고 이수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이수희는 너무 불안해 가만히 서서 당시연에게 몇 번 더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당시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원진은 집에 가는 대신 훈련장에 왔다.어제 일찍 퇴근했기 때문에 오늘 훈련은 더욱 막중했다.원진은 잠시 멈칫하는 남자를 향해 주먹으로 입가를 내리쳤고 남자의 입가는 순식간에 멍이 들었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손을 들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원진 도련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원진의 팔은 모두 잔잔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며칠 동안의 악마 같은 훈련으로 인해 주먹이 빠르고 단단했다.그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잽싸게 피해 어깨를 차버릴 기회를 찾았다.원진은 발차기로 인해 팔이 탈골되었지만 눈치채지 못한 듯 공격을 계속했다.바닥에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다른 쪽 팔도 탈골되어 더 이상 양손을 들 수 없게 되었다.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두 발을 계속 사용했다.“감정을 갖는 것은 좋지만 너무 많은 감정은 의식을 잃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두 팔이 탈골되었으니, 제가 당신의 적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원진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반쯤 무릎을 꿇고 얼굴에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남자는 그의 등을 걷어찼고 그는 한입 가득 피를 뱉어냈다.“제가 병원에 가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안 간 것 같군요.”원진은 바닥에 쓰러져 몸이 아팠지만 팔이 탈골되어 움직일 수 없었고 여러 번 몸을 지탱한 후 어지러워 다시 쓰러졌다.남자는 손에서 장갑을 떨어뜨리고 입을 삐죽거렸다.원진이 흘린 땀이 이마에 흘러 바닥에 떨어졌고 금세 웅덩이를 만들었다.남자가 물을 한 모금 마시자, 원진이 물었다.“가장의 자리에 오르면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까?
당시연은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울먹거리며 말하지 않으려 했다.원진은 그녀를 힘겹게 일으켜 세우고 문으로 곧장 걸어갔다.가는 도중에 당시연은 한 번 토했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환자를 병원으로 보낸 후 문밖에서 당시연을 기다리던 원진은 남한테 저지당하는 김성진을 보았다.김성진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지고 발이 부러졌으며 원진을 보는 그의 눈에는 악의가 있었다.원진의 표정도 좋지 않았고 올라가서 한 대 더 때리고 싶었다.김성진은 비웃었다.“아직도 대학 입시를 치를 수 있겠느냐?”“원진, 그토록 오랫동안 역겨운 벌레처럼 열심히 일한 것은 대학 입시를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안타깝게도 이제 네게는 방법이 없다.”벽에 기대어 앉은 원진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대단했다.김성진을 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경찰에 잡혀가면 당시연을 돌봐줄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었다.당시연은 요즘 아무도 믿지 않고 스스로를 완전히 닫아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원진이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다.김성진은 화가 났다. 특히 이 꼬맹이가 자신의 계획을 망친다고 생각하니 가문의 힘을 이용해 원진을 그 외딴 산골 마을로 몰아넣고 싶었다.원진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아직도 걸을 수 있나? 무릎이 부러질 줄 알았는데.”김성진은 깜짝 놀라며 통증이 다시 퍼지는 것 같았다.그는 심호흡했다. 입만 놀릴 줄 알지 조만간 무릎을 꿇고 그에게 구걸할 때가 있을 거라 그는 믿었다.원진은 당시연이 위를 씻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비참한 여인을 보자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누나.”당시연은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원진이 항상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남자들은 그를 면밀히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는 매일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했다.그는 다음날까지 그녀와 함께 이곳에 머물렀지만, 당시연은 한밤중에 악몽에서 깨어난 후 몇 번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 말도 없이 또 사그라들었다.원
“김성진.”이수희가 큰 소리로 불렀다.김성진은 그녀를 보고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이수희가 찾아온 목적을 알고 있었다.이수희는 그의 옆에 서 있는 홍영란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는 성진이와 시연이 담임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홍영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듯 말했다.“시연이 쟤 정말 말을 안 들어요. 방금 대화를 시도했는데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구는 거 있죠.”이수희는 놀라서 물었다.“시연이가 출장간 거 아니었나요?”“아뇨, 여기 병실에 있어요. 선생님, 가능하시면 시연이를 좀 설득해 주세요. 원진 때문에 우리 집안까지 다 피해를 보고 있어요. 원진만 없었어도 시연이와 성진이는 이미 결혼했을 텐데 말이에요.”이수희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곧장 당시연의 병실로 들어갔다.당시연은 침대 옆의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시연아!”이수희는 깜짝 놀라 급히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무슨 일이야? 진이가 너 출장 가서 당분간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당시연은 이수희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굳었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선생님?”이수희는 당시연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살이 많이 빠지고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그래. 나야, 시연아. 너 대체 무슨 일이야? 지금 진이가 퇴학을 당해서 수능도 못 봐. 그런데 너도 이 모양이고... 너희들 대체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니?”당시연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지금 그녀의 반응 속도는 매우 느렸지만 이수희의 말에 정신을 가다듬고 빨갛게 충혈된 눈을 들어 올렸다.“진이가... 퇴학당했다고요?”이수희는 그제야 당시연이 아직 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 성진이 부모님이 직접 교장실에 찾아가서 명령했어. 학부모들이 워낙 강하게 반발해서 교장 선생님도 어쩔 수 없이 퇴학 결정을 내리셨어. 월요일에 반성문을 읽으라고 했는데 너 아직 못 들었어? 게다가 경찰이 학교에 와서 진이를 데려갔을 때
그다음 일주일 동안 당시연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원진은 밤마다 그녀를 찾아와 침대 곁에 앉아 조용히 문제집을 풀었다.당시연은 손에 든 컵을 꽉 쥔 채로 물었다. 목소리는 쉰 상태였다. “이번에도 시험이 있었어?”원진이 사과를 거부한 탓에 퇴학당했다는 소식은 거의 학교 전체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원진은 아직 당시연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당시연이 평소 가장 신경 쓰던 것은 그의 성적이었다. 그래서 원진은 항상 문제집을 들고 와서 조용히 그녀 곁에서 문제를 풀었다.“네, 이번에도 1등이에요.”당시연은 아무 말 없이 컵을 꽉 쥐고 있었다.원진은 일어나 그녀의 컵을 건네받으며 물었다.“누나, 더 마실래요? 배고프지 않아요?”원진은 당시연이 한동안 침울해할 줄 알았지만 며칠 사이 그녀는 갑자기 차분해졌고 그의 성적이며 학교 일에 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진아, 수능에서 전국 몇 등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원진은 자신이 퇴학당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약속하듯 말했다.“1등 할 거예요, 누나. 그러니까 누나는 몸이나 잘 챙겨요.”당시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원진은 허둥지둥하며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그러나 당시연은 마치 누군가 그녀의 아픈 곳을 찌른 것처럼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눈이 붓도록 울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요. 누나가 울면 나도 힘들어요.”당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원진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잘도 말하네. 네가 1등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어?”“얼마나 어렵든 해낼 거예요.”원진은 이 말을 하며 그녀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그는 며칠 전 일어난 그날 밤 욕실에서의 일을 당시연이 떠올릴까 봐 두려웠다. 며칠 동안 그녀의 마음을 살폈지만 당시연은 그에게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로지 동생처럼 그를 대할 뿐이었다.누나와 동생 그 이상은 넘볼 수 없는 사이였다. 원진은 그 선을 넘기도 두려웠고 그저 모든 감정을
병실 안은 적막했다. 김성진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연이 결국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알고 있었다.결국 약 10분이 지난 후 당시연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결혼 날짜 정해. 대신 원진이를 놔줘. 수능에 나가게 해줘.”“그리고 그 자식을 네 집에서 내쫓고 관계를 완전히 끊어야 해. 내가 이렇게 된 건 원진 때문이니까. 그 자식 얼굴만 봐도 불쾌해. 당시연, 난 그 정도로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이 아냐. 원진은 우리 관계를 망친 원흉이야.”당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둘 사이를 파괴한 건 김성진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말한들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알겠어.”“나를 속이려 들지 마. 진짜로 끝내려면 완전히, 철저하게 해야 해. 나중에 그 녀석이 다시 너에게 돌아오지 못하게 말이야. 나도 호구는 아니니까.”“... 응.”당시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김성진은 갑자기 손을 들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와서 나랑 같이 있어.”순간 온몸이 굳어졌다. 다시 그날 밤의 역겨운 기억이 떠올라 마치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가렵고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하지만 거절하면 김성진이 또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라 당시연은 마지못해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뽀뽀해 줘. 이건 이자야. 내가 퇴원하면 결혼할 거니까. 당시연, 아직 첫 경험은 남아 있지?”당시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가락을 천천히 움켜쥐었다.“그날 내가 실패했으니 아직 남아 있겠지. 설마 원진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김성진!”당시연의 속눈썹이 떨렸다. 그녀는 원진을 항상 동생처럼 아꼈고 원진도 그녀를 누나처럼 여겨왔다. 둘 사이에 그런 더러운 관계는 있을 수 없었다.김성진은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며 크게 웃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말했다.“됐어, 이제 입 맞춰.”당시연의 입술이 두 번 떨렸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쥐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음 날 저녁 원진은 직접 만든 저녁을 들고 당시연을 찾았다.원진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려 했지만 그녀의 목에 남은 자국을 보고는 손이 멈칫했다. 당시연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그녀는 속눈썹을 떨며 한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그가 내민 죽을 쳐서 떨어뜨렸다.“시연 누나?”원진이 급히 몸을 숙여 바닥의 그릇을 주우려 했지만 당시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통장에 1,400만 원을 넣었어, 원진. 앞으로 우리 다시 보지 말자. 그 사람들이 하는 말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네가 내 옆에 있는 동안 내 인생이 너무 꼬인 것 같아.”원진은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방금 들은 말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며 고개를 들어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연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고 심지어 매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원진, 미안해. 나도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는 버티기 힘들어. 네가 온 뒤로 부모님도 낯설게 변했고 나와 김성진의 관계도 엉망이 됐어. 학교로 돌아가. 수희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줄게. 수능이 끝나면 다른 도시의 대학에 지원해.”원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뚫어져라 올려다보며 그녀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당시연은 지친 듯 이마를 감싸 쥐며 씁쓸하게 웃었다.“아마도 내가 너를 산골에서 데리고 나오지 말았어야 했나 봐. 다른 사람의 운명에 섣불리 발을 들이면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미안해, 원진.”원진은 생각이 멈춰버린 듯했다. 당시연의 말에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얼굴이 창백해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누나, 나를 버리는 거예요?”원진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 약속을 떠올렸다. 그때가 되면 자신도 더 이상 당시연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그녀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당시연은 등을 뒤로 기댔
원진은 절망과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당시연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마음속에 간직했던 짝사랑은 고백도 못 한 채 꺾여버렸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떼지 않고 당시연을 바라보았다.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당시연이 분명 협박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담담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차갑게 식어 있었다.어쩌면 그녀가 말한 대로 자신이 정말 그녀에게 짐이 된 걸지도 몰랐다.원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황급히 소매로 닦아냈다.“누나, 진심이에요? 정말 그런 남자랑 결혼하겠다는 거예요?”당시연의 가슴속 깊은 곳이 찢어지듯 아팠다. 몇 년 전, 그녀는 이 아이를 잘 키워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말이 칼날이 되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야만 했다.원진은 아직 세상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는 산골 마을에서 나와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해 왔기에 사람들의 잔혹한 속내를 잘 알지 못했다. 김씨 가문이 그를 해치려 한다면 그의 앞길은 막막해질 게 분명했다.“진심이야. 나 성진이를 사랑해. 우리 다음 달쯤 결혼식 올릴 거야. 수능은 두 달 남았으니까 이제 오지 마. 부모님도 네가 오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원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지만 당시연에게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당시연은 원진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는 그녀를 좋아했고 든든한 사람처럼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는 당시연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이며 오히려 그녀에게 불행만을 안겨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원진은 태어나서 이렇게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산골에서 살아온 그의 삶은 무감각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억울함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끊임없이 상처 주는 말만 내뱉는 당시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했다간 당시연이 자신을 혐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게 뻔했다. 그는 창백한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