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연은 원진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그의 시험지에 빼곡히 적힌 글씨를 보고 마음이 아프면서도 자랑스러웠다.“선생님 말로는 네가 지난 두 달 동안 시험에서 계속 1등을 했다고 하더라?”“네, 누나가 실망하지 않게 하고 싶었거든요.”그 말에 당시연은 참을 수 없었는지 침대 옆에 앉아 원진을 꼭 껴안았다.“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말해줘야 해, 알았지?”평소에 당시연이 이렇게 안아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당시연은 작은 브랜드의 바디워시를 쓰고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원진도 같은 제품을 쓰지만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은 항상 더 진하게 느껴졌다.“네.”“의사 선생님이 내일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어. 오늘 밤은 너랑 같이 있을게.”“누나, 방금 막 돌아왔잖아요. 집에 가서 쉬어요.”“괜찮아, 바로 옆 간이침대에서 잘 거야.”원진은 얼굴이 붉어졌고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억지로 고개를 숙여 시험지에 집중했다.병원 간이침대는 좁았다. 당시연은 시차 때문에 금세 잠들었다.하지만 원진은 뒤척이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그는 옆에 있던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옆으로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원진은 그녀를 10분 정도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덮어주었다.당시연은 꿈결에 따뜻한 무언가가 잠시 얼굴에 닿는 걸 느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눈을 떠보니 이미 대낮이었다.목을 주무르며 일어나서 보니 원진은 이미 깨어나 다시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당시연은 곧 퇴원 절차를 마쳤고 차에 올라탄 뒤 원진에게 물었다.“이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학시켜 줄게. 지금 성적으로 다른 학교 가는 건 문제없을 거야.”“괜찮아요. 이번 학기도 이제 곧 끝나잖아요.”“그래도 혹시나 네가 상처받을까 봐.”“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신경 안 써요.”그의 진지한 말에 당시연의 마음이 더욱 부드러워졌다.‘어쩜 이렇게 착하고 말도 잘 들을까.’
“그래서?”당시연은 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가 없었다. 실제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그때 아빠가 주식에 손댈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전 재산을 주식에 넣지 말라고, 주식은 여유 자금으로 해야 하는 거라고 전 재산을 거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친구랑 사업한다고 했을 때 그 친구 전과가 있어서 믿을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아빠는 친구 의리만 믿고 누구 말도 안 듣고 고집부리더니 이제 와서 돈이 없으니까 딸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는 거야?”홍영란은 얼굴이 굳어져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당시연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나는 결혼 안 해. 누가 뭐라 해도 안 해. 만약 나를 진짜로 강요하면 진이를 데리고 해외로 나가서 다시는 안 돌아올 거야.”“엄마는 너 강요 안 해. 안 한다니까. 그냥... 내가 네 아빠 잘 설득해 볼게.”당시연은 눈물을 훔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엄마, 아빠 같은 남자랑 사는 게 정말 안 힘들어? 어릴 때부터 아빠 말만 들어야 했고 아빠가 하는 말은 다 맞다고 했잖아. 근데 대부분 틀린 선택들이었어. 아빠는 체면만 생각하고 의리라고 우기는 말 몇 마디에 쉽게 돈을 보내버리는 사람이야. 그런 남자랑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다니 믿기지 않아.”홍영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연이 점점 더 흥분하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려 했다.“시연아, 방금 막 돌아왔잖아. 일단 좀 쉬어. 난 가볼게.”당시연은 과연 쉴 수나 있을까 싶었다. 4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빚. 게다가 빚쟁이들이 이미 집까지 찾아왔는데 그 돈을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당지석은 그녀를 결혼시킬 궁리만 하고 있었고 홍영란이 무슨 말을 한다고 설득할 수나 있을까?지금 당시연의 손에는 고작 6억이 전부였다. 그 돈을 다 준다고 해도 문제 해결은커녕 잠시 미봉책에 불과했다.당시연은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기대앉았다. 당지석이 저지른 일들을 떠올릴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그녀와 상의라도 했더라면, 아니면 최소한 충고를
그렇다고 그녀가 괜찮을까?물론 당시연은 괜찮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홍영란의 앞으로의 삶을 지키고 싶었다.당시연이 최근 어려움에 빠졌다는 걸 알고 있던 원진은 매일 조용히 음식을 준비해 두고 나갔다. 돌아올 때도 최대한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그러던 중 법원에서 당지석의 채무에 대해 직접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연은 더욱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며칠이 흐른 후 홍영란이 집에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당시연은 거의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홍영란이 집을 팔았다는 것을.그들이 그 집을 샀을 때만 해도 위치가 좋아서 지금 집값이 많이 올랐다. 집을 팔고, 홍영란이 물려받은 부동산까지 정리하면 이제 10억만 남았다.하지만 이 시점에 집을 판다는 건 다시는 그 집을 되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당분간은 그런 여유가 없을 테니까.당시연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홍영란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이었다. 남편과 함께 고난을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그런 여성은 흔치 않았다. 대다수의 남자들은 아내가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이혼을 선택할 것이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보다 현실적이다. 반대로 여자는 언제나 마음을 쉽게 놓지 못한다.“시연아, 그 10억을 갚지 않으면 네 아빠가 감옥에 갈 수도 있어. 그걸 보기가 너무 힘들어.”당시연은 조용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지금쯤 원진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홍영란은 당시연이 화가 난 걸 알고 있었는지 더 이상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했다.“시연아, 미안해. 네가 이미 말한 건데도...”“엄마.”당시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엄마, 이미 부동산 다 팔아버렸잖아. 내 손에 있는 현금도 다 줬어. 이제 10억은 진짜로 구할 방법이 없어. 원진은 지금 고3이야. 이 일들이 그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너무 싫어.”하지만 아직 10억이 남았다.
김성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원진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자신이 당시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어울린단 말인가? 원진 같은 고등학생일 리는 없었다.김성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원진의 뒷모습을 깊이 응시했다.하지만 원진은 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김성진을 지나쳐 무심하게 자리를 떠났다.김성진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땅에 내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들어 당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지석은 거의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있었기에 김성진의 전화가 오자마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아버님, 저 김성진이에요. 오늘 시연이가 빚쟁이들에게 붙잡혔어요. 제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뻔했어요. 아버님도 딸이 다치는 걸 원치 않으시겠죠? 사실 제 요구는 간단해요. 시연이가 저와 결혼만 한다면 이 빚은 제가 다 갚아드릴게요.”당지석은 현재 수감 중이라 전화를 걸기조차 쉽지 않았다.그리고 이미 아내에게 들은 소식에 따르면 집을 팔았지만 여전히 10억이 부족하다고 했다.이 모든 일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가 가족에게 큰 어려움을 준 것이었다. 만약 그 빚쟁이들이 당시연을 계속 노린다면 그녀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당지석은 당시연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저 가부장적이고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기 싫어했고 집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만약 당시연이 그의 잘못 때문에 다친다면 그는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당지석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김성진이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성진아, 내가 어떻게 협조하면 될까?”“아버님의 목숨을 걸고 시연이와 어머님을 설득하면 결국 승낙할 거예요.”그렇다. 목숨으로 협박한다면 아무리 당시연이 실망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실망은 실망이지만 자기 아버지가 죽는 것을 바라진 않을 테니까.잠시 침묵이 흘렀고 당지석은
원진이 돈을 챙겨 나가려는 순간 그의 허리에 총구가 겨눠졌다.“처음 와서 이렇게 큰돈을 따면 쉽게 나갈 수 없는 게 이 바닥의 룰이야, 학생.”원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늘 밤 그가 겪은 모든 일은 그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산더미처럼 쌓인 현금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총을 들이대는 남자.아마도 이미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날 여기 데려와서 도박을 하게 만든 건 당신들이고 지금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도 당신들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난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어.”남자는 원진의 담담한 반응에 놀란 듯 보였다.산골 마을에서 자란 이 소년은 비범한 침착함을 보였고 심지어 그들과 협상을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원진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여전히 그의 허리에 겨눠진 총을 무시했다.“며칠 전부터 날 따라다닌 것도 당신들이었지?”매번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면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미행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처음엔 김성진의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지만 김성진이라면 벌써 행동에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남자는 원진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찾아내려 했으나 원진은 너무도 차분했다.몇 분 후 남자는 총을 거두었다. 그의 반응에 매우 만족한 듯 보였다.만약 오늘 원진이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보였다면 그는 살아서 이곳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네 아버지가 널 보고 싶어 한다.”원진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의 아버지? 그 강간범?수년 전 수많은 죄를 저질러 이미 사형당한 사람이 죽지 않았다니?게다가 이제 와서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니?원진의 눈가에 순식간에 혐오감이 스쳤다. 그의 인생 모든 불행은 바로 그 아버지 때문에 시작되었다.“만나고 싶지 않아.”“네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야. 넌 아버지를 만나볼 필요가 있어. 너 지금 돈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에겐 돈이 그저 가벼운 종이 쪼가리일 뿐이야.”“만나지 않을 거야.”원진은 간신히 지금의 생활을 이루어냈고
소년은 이미 키가 185cm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에게 기대는 모습은 마치 위로를 구하는 어린아이 같았다.당시연은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아직 저녁 안 먹었지? 음식 데워났으니까 가서 좀 먹어.”원진은 결국 4억 원을 손에 넣었지만 현금 대신 수표를 받았다. 현금을 들고 다니면 눈에 띌 수 있었기에 때문이다.그러나 그 수표를 당시연에게 바로 줄 수는 없었다. 만약 당시연이 그 수표의 출처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원진의 안전을 계속 염려하게 될 테니까.그래서 그는 그 수표를 홍영란에게 보냈다. 아마도 지금쯤 그녀는 그 수표를 받았을 것이다.홍영란은 정말 수표를 받았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았지만 편지에는 자신이 예전에 가르쳤던 한 제자라고 적혀 있었다. 홍영란과 당지석은 모두 교사였기 때문에 가르친 학생이 너무 많아 정확히 어느 학생인지 떠올리지 못했다.그녀는 반신반의하며 은행에 가서 수표를 환전해 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4억 원이 있었다.이제 6억 원만 남았다.홍영란은 무척 흥분했지만 이 소식을 당시연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편지에 분명히 당시연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당시연은 요즘 평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집이 팔린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제 아무런 저축도 없기에 빠르게 돈을 벌지 않으면 자신과 원진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당지석의 빚은 아직 10억 원이 남았다. 설령 그가 감옥에 간다 하더라도 법원에서 형을 감경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그 후 일주일이 지나면서 원진이 집에 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연은 당지석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깜짝 놀란 당시연은 눈동자가 흔들렸다.“정말인가요?”“지금 병원에 이송된 상태입니다. 아직 위기를 넘기지 못했지만 어머님이 이미 병원에 와 계십니다.”당시연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홍영란을 보았다.2주 만에 보는 홍영란의 머리카락은 눈에 띄게 하얗게 변해 있었다.당시연은 그 자리에
당시연은 김성진의 품에 안겨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멀리 서 있는 원진을 보자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원진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아마도 방금 막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당시연은 밤새 병원에 있었고 그 시각 원진은 당연히 집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지만 새벽 4시에 두 사람은 아파트 아래에서 마주쳤다.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김성진을 밀어내고 원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그의 입가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팔에도 여러 곳에 상처가 보였다.“진아, 대체 무슨 일이야?”원진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김성진에게 향했다.두 사람이 조금 전까지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시연 누나가 김성진을 다시 만나려는 걸까?’원진은 갑자기 강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까까지는 아프지 않았던 몸이 이제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다. 심지어 눈시울까지 뜨거워졌다.당시연은 걱정이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원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때 김성진이 말을 꺼냈다.“시연아, 잘 생각해 봐.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 다 네가 필요해.”당시연은 발걸음을 주춤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원진이 다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었다.집에 돌아가는 동안 원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당시연이 집 안의 불을 켜자 밝은 빛 아래서 원진의 상처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옷 벗어봐.”방금 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채 원진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못 들은 척했다.그러자 당시연은 다가와 그의 옷을 들추어 올렸고 그의 몸에 퍼진 멍 자국을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이 상처들은 오늘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고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 생긴 상처들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지난 일주일 동안 너무 바빠서 원진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이유를 묻지 않았다.“진아,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너를 때린 거야? 왜 이렇게 심
원진은 소파에 기대어 당시연의 억눌린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피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당시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자꾸만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꾹 참았다.“당시연.”당시연이 눈물을 닦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원진의 눈은 반짝였고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순간 당시연은 그가 왜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 의아해했다. 시연 누나라고 부르던 아이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다니.“왜 그래?”“누나가 울면 내가 더 힘들어져요.”그 말이 나오자 집안은 더욱 고요해졌다.당시연은 김성진 외에는 다른 남자와 교제한 적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서툴렀다. 그래서 눈앞의 소년이 아무런 가림 없이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진아, 아프지 않아?”원진의 몸 곳곳에 남은 심한 상처 자국들을 보며 누군가가 그를 얼마나 잔인하게 때렸는지를 생각하니 당시연은 마음이 아팠다.“정말 안 아파요.”원진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당시연의 얼굴은 눈물로 축축했다. 분명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무력해 보였다.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불안감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원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휩싸였다.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정말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원진은 그저 당시연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당시연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코를 훌쩍였다.“그러니까 누구한테 맞았는지 말해줄래?”“그냥 우연히 시비가 붙은 불량배들일 뿐이에요. 오늘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