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연은 원진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그의 시험지에 빼곡히 적힌 글씨를 보고 마음이 아프면서도 자랑스러웠다.“선생님 말로는 네가 지난 두 달 동안 시험에서 계속 1등을 했다고 하더라?”“네, 누나가 실망하지 않게 하고 싶었거든요.”그 말에 당시연은 참을 수 없었는지 침대 옆에 앉아 원진을 꼭 껴안았다.“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말해줘야 해, 알았지?”평소에 당시연이 이렇게 안아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당시연은 작은 브랜드의 바디워시를 쓰고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원진도 같은 제품을 쓰지만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은 항상 더 진하게 느껴졌다.“네.”“의사 선생님이 내일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어. 오늘 밤은 너랑 같이 있을게.”“누나, 방금 막 돌아왔잖아요. 집에 가서 쉬어요.”“괜찮아, 바로 옆 간이침대에서 잘 거야.”원진은 얼굴이 붉어졌고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억지로 고개를 숙여 시험지에 집중했다.병원 간이침대는 좁았다. 당시연은 시차 때문에 금세 잠들었다.하지만 원진은 뒤척이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그는 옆에 있던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옆으로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원진은 그녀를 10분 정도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덮어주었다.당시연은 꿈결에 따뜻한 무언가가 잠시 얼굴에 닿는 걸 느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눈을 떠보니 이미 대낮이었다.목을 주무르며 일어나서 보니 원진은 이미 깨어나 다시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당시연은 곧 퇴원 절차를 마쳤고 차에 올라탄 뒤 원진에게 물었다.“이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학시켜 줄게. 지금 성적으로 다른 학교 가는 건 문제없을 거야.”“괜찮아요. 이번 학기도 이제 곧 끝나잖아요.”“그래도 혹시나 네가 상처받을까 봐.”“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신경 안 써요.”그의 진지한 말에 당시연의 마음이 더욱 부드러워졌다.‘어쩜 이렇게 착하고 말도 잘 들을까.’
“그래서?”당시연은 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가 없었다. 실제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그때 아빠가 주식에 손댈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전 재산을 주식에 넣지 말라고, 주식은 여유 자금으로 해야 하는 거라고 전 재산을 거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친구랑 사업한다고 했을 때 그 친구 전과가 있어서 믿을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아빠는 친구 의리만 믿고 누구 말도 안 듣고 고집부리더니 이제 와서 돈이 없으니까 딸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는 거야?”홍영란은 얼굴이 굳어져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당시연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나는 결혼 안 해. 누가 뭐라 해도 안 해. 만약 나를 진짜로 강요하면 진이를 데리고 해외로 나가서 다시는 안 돌아올 거야.”“엄마는 너 강요 안 해. 안 한다니까. 그냥... 내가 네 아빠 잘 설득해 볼게.”당시연은 눈물을 훔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엄마, 아빠 같은 남자랑 사는 게 정말 안 힘들어? 어릴 때부터 아빠 말만 들어야 했고 아빠가 하는 말은 다 맞다고 했잖아. 근데 대부분 틀린 선택들이었어. 아빠는 체면만 생각하고 의리라고 우기는 말 몇 마디에 쉽게 돈을 보내버리는 사람이야. 그런 남자랑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다니 믿기지 않아.”홍영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연이 점점 더 흥분하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려 했다.“시연아, 방금 막 돌아왔잖아. 일단 좀 쉬어. 난 가볼게.”당시연은 과연 쉴 수나 있을까 싶었다. 4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빚. 게다가 빚쟁이들이 이미 집까지 찾아왔는데 그 돈을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당지석은 그녀를 결혼시킬 궁리만 하고 있었고 홍영란이 무슨 말을 한다고 설득할 수나 있을까?지금 당시연의 손에는 고작 6억이 전부였다. 그 돈을 다 준다고 해도 문제 해결은커녕 잠시 미봉책에 불과했다.당시연은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기대앉았다. 당지석이 저지른 일들을 떠올릴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그녀와 상의라도 했더라면, 아니면 최소한 충고를
그렇다고 그녀가 괜찮을까?물론 당시연은 괜찮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홍영란의 앞으로의 삶을 지키고 싶었다.당시연이 최근 어려움에 빠졌다는 걸 알고 있던 원진은 매일 조용히 음식을 준비해 두고 나갔다. 돌아올 때도 최대한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그러던 중 법원에서 당지석의 채무에 대해 직접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연은 더욱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며칠이 흐른 후 홍영란이 집에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당시연은 거의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홍영란이 집을 팔았다는 것을.그들이 그 집을 샀을 때만 해도 위치가 좋아서 지금 집값이 많이 올랐다. 집을 팔고, 홍영란이 물려받은 부동산까지 정리하면 이제 10억만 남았다.하지만 이 시점에 집을 판다는 건 다시는 그 집을 되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당분간은 그런 여유가 없을 테니까.당시연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홍영란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이었다. 남편과 함께 고난을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그런 여성은 흔치 않았다. 대다수의 남자들은 아내가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이혼을 선택할 것이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보다 현실적이다. 반대로 여자는 언제나 마음을 쉽게 놓지 못한다.“시연아, 그 10억을 갚지 않으면 네 아빠가 감옥에 갈 수도 있어. 그걸 보기가 너무 힘들어.”당시연은 조용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지금쯤 원진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홍영란은 당시연이 화가 난 걸 알고 있었는지 더 이상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했다.“시연아, 미안해. 네가 이미 말한 건데도...”“엄마.”당시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엄마, 이미 부동산 다 팔아버렸잖아. 내 손에 있는 현금도 다 줬어. 이제 10억은 진짜로 구할 방법이 없어. 원진은 지금 고3이야. 이 일들이 그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너무 싫어.”하지만 아직 10억이 남았다.
김성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원진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자신이 당시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어울린단 말인가? 원진 같은 고등학생일 리는 없었다.김성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원진의 뒷모습을 깊이 응시했다.하지만 원진은 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김성진을 지나쳐 무심하게 자리를 떠났다.김성진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땅에 내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들어 당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지석은 거의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있었기에 김성진의 전화가 오자마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아버님, 저 김성진이에요. 오늘 시연이가 빚쟁이들에게 붙잡혔어요. 제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뻔했어요. 아버님도 딸이 다치는 걸 원치 않으시겠죠? 사실 제 요구는 간단해요. 시연이가 저와 결혼만 한다면 이 빚은 제가 다 갚아드릴게요.”당지석은 현재 수감 중이라 전화를 걸기조차 쉽지 않았다.그리고 이미 아내에게 들은 소식에 따르면 집을 팔았지만 여전히 10억이 부족하다고 했다.이 모든 일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가 가족에게 큰 어려움을 준 것이었다. 만약 그 빚쟁이들이 당시연을 계속 노린다면 그녀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당지석은 당시연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저 가부장적이고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기 싫어했고 집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만약 당시연이 그의 잘못 때문에 다친다면 그는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당지석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김성진이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성진아, 내가 어떻게 협조하면 될까?”“아버님의 목숨을 걸고 시연이와 어머님을 설득하면 결국 승낙할 거예요.”그렇다. 목숨으로 협박한다면 아무리 당시연이 실망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실망은 실망이지만 자기 아버지가 죽는 것을 바라진 않을 테니까.잠시 침묵이 흘렀고 당지석은
원진이 돈을 챙겨 나가려는 순간 그의 허리에 총구가 겨눠졌다.“처음 와서 이렇게 큰돈을 따면 쉽게 나갈 수 없는 게 이 바닥의 룰이야, 학생.”원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늘 밤 그가 겪은 모든 일은 그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산더미처럼 쌓인 현금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총을 들이대는 남자.아마도 이미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날 여기 데려와서 도박을 하게 만든 건 당신들이고 지금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도 당신들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난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어.”남자는 원진의 담담한 반응에 놀란 듯 보였다.산골 마을에서 자란 이 소년은 비범한 침착함을 보였고 심지어 그들과 협상을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원진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여전히 그의 허리에 겨눠진 총을 무시했다.“며칠 전부터 날 따라다닌 것도 당신들이었지?”매번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면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미행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처음엔 김성진의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지만 김성진이라면 벌써 행동에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남자는 원진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찾아내려 했으나 원진은 너무도 차분했다.몇 분 후 남자는 총을 거두었다. 그의 반응에 매우 만족한 듯 보였다.만약 오늘 원진이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보였다면 그는 살아서 이곳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네 아버지가 널 보고 싶어 한다.”원진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의 아버지? 그 강간범?수년 전 수많은 죄를 저질러 이미 사형당한 사람이 죽지 않았다니?게다가 이제 와서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니?원진의 눈가에 순식간에 혐오감이 스쳤다. 그의 인생 모든 불행은 바로 그 아버지 때문에 시작되었다.“만나고 싶지 않아.”“네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야. 넌 아버지를 만나볼 필요가 있어. 너 지금 돈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에겐 돈이 그저 가벼운 종이 쪼가리일 뿐이야.”“만나지 않을 거야.”원진은 간신히 지금의 생활을 이루어냈고
소년은 이미 키가 185cm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에게 기대는 모습은 마치 위로를 구하는 어린아이 같았다.당시연은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아직 저녁 안 먹었지? 음식 데워났으니까 가서 좀 먹어.”원진은 결국 4억 원을 손에 넣었지만 현금 대신 수표를 받았다. 현금을 들고 다니면 눈에 띌 수 있었기에 때문이다.그러나 그 수표를 당시연에게 바로 줄 수는 없었다. 만약 당시연이 그 수표의 출처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원진의 안전을 계속 염려하게 될 테니까.그래서 그는 그 수표를 홍영란에게 보냈다. 아마도 지금쯤 그녀는 그 수표를 받았을 것이다.홍영란은 정말 수표를 받았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았지만 편지에는 자신이 예전에 가르쳤던 한 제자라고 적혀 있었다. 홍영란과 당지석은 모두 교사였기 때문에 가르친 학생이 너무 많아 정확히 어느 학생인지 떠올리지 못했다.그녀는 반신반의하며 은행에 가서 수표를 환전해 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4억 원이 있었다.이제 6억 원만 남았다.홍영란은 무척 흥분했지만 이 소식을 당시연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편지에 분명히 당시연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당시연은 요즘 평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집이 팔린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제 아무런 저축도 없기에 빠르게 돈을 벌지 않으면 자신과 원진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당지석의 빚은 아직 10억 원이 남았다. 설령 그가 감옥에 간다 하더라도 법원에서 형을 감경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그 후 일주일이 지나면서 원진이 집에 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연은 당지석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깜짝 놀란 당시연은 눈동자가 흔들렸다.“정말인가요?”“지금 병원에 이송된 상태입니다. 아직 위기를 넘기지 못했지만 어머님이 이미 병원에 와 계십니다.”당시연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홍영란을 보았다.2주 만에 보는 홍영란의 머리카락은 눈에 띄게 하얗게 변해 있었다.당시연은 그 자리에
당시연은 김성진의 품에 안겨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다 문득 멀리 서 있는 원진을 보자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원진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아마도 방금 막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당시연은 밤새 병원에 있었고 그 시각 원진은 당연히 집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지만 새벽 4시에 두 사람은 아파트 아래에서 마주쳤다.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김성진을 밀어내고 원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그의 입가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팔에도 여러 곳에 상처가 보였다.“진아, 대체 무슨 일이야?”원진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김성진에게 향했다.두 사람이 조금 전까지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시연 누나가 김성진을 다시 만나려는 걸까?’원진은 갑자기 강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까까지는 아프지 않았던 몸이 이제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다. 심지어 눈시울까지 뜨거워졌다.당시연은 걱정이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원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때 김성진이 말을 꺼냈다.“시연아, 잘 생각해 봐.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 다 네가 필요해.”당시연은 발걸음을 주춤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원진이 다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었다.집에 돌아가는 동안 원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당시연이 집 안의 불을 켜자 밝은 빛 아래서 원진의 상처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옷 벗어봐.”방금 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채 원진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못 들은 척했다.그러자 당시연은 다가와 그의 옷을 들추어 올렸고 그의 몸에 퍼진 멍 자국을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이 상처들은 오늘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고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 생긴 상처들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는 지난 일주일 동안 너무 바빠서 원진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이유를 묻지 않았다.“진아,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너를 때린 거야? 왜 이렇게 심
원진은 소파에 기대어 당시연의 억눌린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피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당시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자꾸만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꾹 참았다.“당시연.”당시연이 눈물을 닦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원진의 눈은 반짝였고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순간 당시연은 그가 왜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 의아해했다. 시연 누나라고 부르던 아이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다니.“왜 그래?”“누나가 울면 내가 더 힘들어져요.”그 말이 나오자 집안은 더욱 고요해졌다.당시연은 김성진 외에는 다른 남자와 교제한 적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서툴렀다. 그래서 눈앞의 소년이 아무런 가림 없이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진아, 아프지 않아?”원진의 몸 곳곳에 남은 심한 상처 자국들을 보며 누군가가 그를 얼마나 잔인하게 때렸는지를 생각하니 당시연은 마음이 아팠다.“정말 안 아파요.”원진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당시연의 얼굴은 눈물로 축축했다. 분명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무력해 보였다.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불안감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원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휩싸였다.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정말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원진은 그저 당시연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당시연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코를 훌쩍였다.“그러니까 누구한테 맞았는지 말해줄래?”“그냥 우연히 시비가 붙은 불량배들일 뿐이에요. 오늘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래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