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이 주눅 들수록 당시연은 점점 더 화가 났다.김성진은 원래 사과할 성격이 아니었고 애초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에 더욱 그럴 리 없었다.술집 직원이 CCTV 영상을 가져와 천천히 재생했다. 방금 전 장면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당시연과 원진의 행동은 너무도 평범했다. 최소한 영상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김성진이 왜곡해서 본 장면도 CCTV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그 순간 김성진의 눈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고 그는 곁눈으로 당시연의 반응을 살폈다.당시연은 영상에 별다른 게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비웃음을 지었다.김성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더니 말했다.“시연아, 이제 그만하고 우리 다시 시작해.”두 사람은 여러 차례 헤어지고 다시 만났지만 이번 이별이 가장 길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원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이 굳어지며 당시연을 바라보았다. 당시연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면 그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김성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많이 생각해봤어. 나 소유진의 고백도 받아준 적 없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진심이야. 우리 이제 그만 싸우고 다시 만나자. 너랑 다시 시작하면 바로 결혼할게.”당시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김성진, 네 머리 좀 제대로 검사받아봐.”김성진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우리 고등학교 때 기억나? 네가 수업 중에 질문에 답하려고 일어섰을 때 반 친구들이 다 떠들었잖아. 우리 둘이 서로 좋아한다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는 그때까지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어. 대학 때 내가 정말 헤어지려고 했던 건 맞아.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쉽게 끝낼 수가 없었어. 그건 우리가 함께한 진짜 추억이잖아. 네가 다른 사람과 함께할 거라는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어. 나도 유치하고 성숙하지 못했어. 그래서 네가 불편했을 거 알아.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라는 게 원래 서로 맞춰가며
당시연은 과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원진의 불안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가 반응했을 때는 이미 원진이 그녀의 손을 놓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당시연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어리둥절해서 그를 불렀다.“진아?”하지만 원진은 점점 더 빨리 걸었고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당시연은 급하게 그를 쫓으려 했다.“진아!”겨우 한 발짝 내디디자 김성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시연아, 동의한 거야?”당시연은 그의 손을 홱 뿌리치며 인상을 찌푸렸다.“뭐에 동의했다는 건데?”“다시 사귀는 거.”“사귀긴 뭘 사귀어. 그냥 네 말이 맞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고등학교 때는 정말 좋았지. 하지만 우린 이미 대학도 졸업했고 사람은 과거에만 매달려서는 안 돼.”당시연은 그 말을 남기고 곧바로 원진이 간 방향으로 뛰어갔다.이미 원진이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에게 아버지의 존재도, 김성진의 존재도 그를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극했다.당시연이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이미 원진은 보이지 않았다.한편 홀로 남겨진 김성진은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는 어둠이 가득했고 마치 중요한 결정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당시연은 차에 올라타고 원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 녀석, 이제 성질까지 부리는 건가?’차를 몰고 근처를 몇 바퀴 돌아봐도 원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당시연은 밤 12시가 넘도록 그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 보니 원진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원진은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고 있었고 이제 키가 아주 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보였다.당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려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원진의 버림받은 듯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생각해 보면 그가 학교에서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는데 친구가 많을 리 없었다. 이곳 제원에는 그의 가족도 없었다. 어디 갈 데가 있었을까?아마 주변을 한 바퀴 돌
원진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 일의 주범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그는 소식을 전해준 친구에게 짧게 고맙다고 말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문제지를 풀기 시작했다.반 친구들 대부분은 원진을 좋아했다. 성실하고 노력하는 데다 잘생긴 사람이니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그의 존재가 누군가의 주목을 빼앗은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를 싫어하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그리고 이제 그의 가정사가 알려지자 몇몇 학생들은 비꼬기 시작했다.“학교에서 전학생을 받아주는 건 알겠는데, 전에 담임 선생님이 한 명은 거절했잖아. 그런데 왜 원진은 받아줬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아빠가 강간범이고, 엄마는 거의 창녀 수준이라더라. 유전은 어쩔 수 없다고 하잖아.”두 명의 남학생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던 한 여자아이가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쳤다.“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솔직히 원진이 농구 잘해서 너희가 질투하는 거잖아. 역시 남자를 가장 질투하는 건 남자들이야!”주위 학생들도 그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고 두 남학생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하여 양쪽은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했다.정작 그 싸움의 중심에 있어야 할 원진은 오히려 가장 평온하게 문제지를 풀고 있었다.그는 한 시간 동안 차분하게 문제를 풀었고 그러다 이수희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이수희는 아침에 이미 두 명의 학부모와 대면했다. 그들은 원진이 다른 반으로 가길 원했다. 자신들의 아이가 잠재적 범죄자와 같은 반에 있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이수희는 원진이 성적도 우수하고 품행도 바르다고 계속 설명했지만 학부모들은 위험을 감수할 마음이 없었다.이수희는 고민이 깊어져 결국 원진을 교무실로 불렀다.그녀는 원진을 다른 반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었지만 그의 상황이 너무 걱정되었다.학교 전체가 이미 이 소문을 알고 있었고 일부 학생들은 구경거리 삼아 반에 찾아오기도 했다.원진이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그는 아직 열일곱 살의 아이였다. 이 상황을 정말로 견뎌낼 수 있을까?“진아, 내가 이
당시연이 막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수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원진이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소식이었다.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원진은 아주 얌전하고 항상 문제를 피하는 성격인데 어떻게 싸움에 휘말려 맞을 수 있을까?당시연은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 복도에서 이수희를 마주쳤다.“선생님.”“시연아!”이수희는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어젯밤 진이가 응급실에 들어갔어. 지금은 괜찮지만 가벼운 뇌진탕이래. 빨리 들어가 봐. 이 아이가 몇 킬로그램이나 빠졌는지 몰라.”당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둘러 원진의 병실로 들어갔다.원진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시연 누나?”“진아!”당시연은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싸움에 휘말린 거야?”원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이수희 선생님이 원진의 가정사가 폭로된 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당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일이 이미 두 달이나 됐고 그동안 원진은 학교에서 차별과 고립을 겪었는데도 전혀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시연아, 너무 화내지 마. 이번 일은 진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라 다른 반 학생들이 일부러 진이를 괴롭힌 거야.”당시연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원진의 손을 꼭 잡았다.“왜 이런 일을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어?”“누나가 걱정할까 봐요.”그 말에 당시연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이 아이는 어떻게 이렇게 착할 수 있을까.당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일단 푹 쉬어. 나랑 선생님이 학교 가서 이 일을 처리하고 올게.”그녀의 얼굴은 단호했고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할 계획이었다.원진은 그녀의 소매를 살짝 잡고 놓치기 싫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시연은 그가 겁을 먹은 줄 알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다친 곳을 조심스레 피하면서.“괜찮아, 금방 다녀올게.”원
김성진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원진이 점점 더 고립되는 모습을 보며 그의 마음은 만족감으로 가득 차올랐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압박을 받고 나면 당시연도 곧 원진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지석도 이제는 무언가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을 거라고 믿었다.김성진은 자신이 잘못한 게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진실을 말했을 뿐이었고 거짓을 퍼뜨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당시연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그의 눈에는 기쁨이 스쳤다.그는 회사 근처의 카페로 갔다. 그곳에서 당시연과 만나기로 약속했다.당시연은 이미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얼굴빛이 어두웠다.김성진은 직원에게 디저트 두 개와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해외에서 돌아온 거야?”당시연은 고개를 들어 김성진을 바라보았다. 김성진이 여러 면에서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많은 남자들처럼 자아가 강하고 심한 남성우월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그러나 그녀는 김성진이 이런 짓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원진의 가정사가 너 때문에 유출된 거야?”김성진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의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등학교 때 당시연이 그 아이디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맞아.”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시연은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고 그의 머리 위로 쏟아버렸다.“네가 20대 중반의 성인으로서 열일곱 살짜리 아이랑 싸우는 게 말이 돼? 너 사람이야? 그 애 이제 고3이라고! 김성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난 네가 아무리 자기중심적이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이 소란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모두가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김성진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걸 제일 싫어했지만 이번에는 그보다 더한 두려움이 덮쳤다.그가 그 소문을 퍼뜨릴 때 이미 후회가 밀려왔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원진이 비난받는 모습을 보며 그 후회는 금세 사
당시연은 원진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그의 시험지에 빼곡히 적힌 글씨를 보고 마음이 아프면서도 자랑스러웠다.“선생님 말로는 네가 지난 두 달 동안 시험에서 계속 1등을 했다고 하더라?”“네, 누나가 실망하지 않게 하고 싶었거든요.”그 말에 당시연은 참을 수 없었는지 침대 옆에 앉아 원진을 꼭 껴안았다.“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말해줘야 해, 알았지?”평소에 당시연이 이렇게 안아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당시연은 작은 브랜드의 바디워시를 쓰고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원진도 같은 제품을 쓰지만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은 항상 더 진하게 느껴졌다.“네.”“의사 선생님이 내일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어. 오늘 밤은 너랑 같이 있을게.”“누나, 방금 막 돌아왔잖아요. 집에 가서 쉬어요.”“괜찮아, 바로 옆 간이침대에서 잘 거야.”원진은 얼굴이 붉어졌고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억지로 고개를 숙여 시험지에 집중했다.병원 간이침대는 좁았다. 당시연은 시차 때문에 금세 잠들었다.하지만 원진은 뒤척이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그는 옆에 있던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옆으로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원진은 그녀를 10분 정도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덮어주었다.당시연은 꿈결에 따뜻한 무언가가 잠시 얼굴에 닿는 걸 느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눈을 떠보니 이미 대낮이었다.목을 주무르며 일어나서 보니 원진은 이미 깨어나 다시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당시연은 곧 퇴원 절차를 마쳤고 차에 올라탄 뒤 원진에게 물었다.“이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학시켜 줄게. 지금 성적으로 다른 학교 가는 건 문제없을 거야.”“괜찮아요. 이번 학기도 이제 곧 끝나잖아요.”“그래도 혹시나 네가 상처받을까 봐.”“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신경 안 써요.”그의 진지한 말에 당시연의 마음이 더욱 부드러워졌다.‘어쩜 이렇게 착하고 말도 잘 들을까.’
“그래서?”당시연은 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가 없었다. 실제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그때 아빠가 주식에 손댈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전 재산을 주식에 넣지 말라고, 주식은 여유 자금으로 해야 하는 거라고 전 재산을 거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친구랑 사업한다고 했을 때 그 친구 전과가 있어서 믿을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아빠는 친구 의리만 믿고 누구 말도 안 듣고 고집부리더니 이제 와서 돈이 없으니까 딸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는 거야?”홍영란은 얼굴이 굳어져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당시연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나는 결혼 안 해. 누가 뭐라 해도 안 해. 만약 나를 진짜로 강요하면 진이를 데리고 해외로 나가서 다시는 안 돌아올 거야.”“엄마는 너 강요 안 해. 안 한다니까. 그냥... 내가 네 아빠 잘 설득해 볼게.”당시연은 눈물을 훔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엄마, 아빠 같은 남자랑 사는 게 정말 안 힘들어? 어릴 때부터 아빠 말만 들어야 했고 아빠가 하는 말은 다 맞다고 했잖아. 근데 대부분 틀린 선택들이었어. 아빠는 체면만 생각하고 의리라고 우기는 말 몇 마디에 쉽게 돈을 보내버리는 사람이야. 그런 남자랑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다니 믿기지 않아.”홍영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연이 점점 더 흥분하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려 했다.“시연아, 방금 막 돌아왔잖아. 일단 좀 쉬어. 난 가볼게.”당시연은 과연 쉴 수나 있을까 싶었다. 4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빚. 게다가 빚쟁이들이 이미 집까지 찾아왔는데 그 돈을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당지석은 그녀를 결혼시킬 궁리만 하고 있었고 홍영란이 무슨 말을 한다고 설득할 수나 있을까?지금 당시연의 손에는 고작 6억이 전부였다. 그 돈을 다 준다고 해도 문제 해결은커녕 잠시 미봉책에 불과했다.당시연은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기대앉았다. 당지석이 저지른 일들을 떠올릴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그녀와 상의라도 했더라면, 아니면 최소한 충고를
그렇다고 그녀가 괜찮을까?물론 당시연은 괜찮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홍영란의 앞으로의 삶을 지키고 싶었다.당시연이 최근 어려움에 빠졌다는 걸 알고 있던 원진은 매일 조용히 음식을 준비해 두고 나갔다. 돌아올 때도 최대한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그러던 중 법원에서 당지석의 채무에 대해 직접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연은 더욱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며칠이 흐른 후 홍영란이 집에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당시연은 거의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홍영란이 집을 팔았다는 것을.그들이 그 집을 샀을 때만 해도 위치가 좋아서 지금 집값이 많이 올랐다. 집을 팔고, 홍영란이 물려받은 부동산까지 정리하면 이제 10억만 남았다.하지만 이 시점에 집을 판다는 건 다시는 그 집을 되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당분간은 그런 여유가 없을 테니까.당시연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홍영란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이었다. 남편과 함께 고난을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그런 여성은 흔치 않았다. 대다수의 남자들은 아내가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이혼을 선택할 것이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보다 현실적이다. 반대로 여자는 언제나 마음을 쉽게 놓지 못한다.“시연아, 그 10억을 갚지 않으면 네 아빠가 감옥에 갈 수도 있어. 그걸 보기가 너무 힘들어.”당시연은 조용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지금쯤 원진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홍영란은 당시연이 화가 난 걸 알고 있었는지 더 이상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했다.“시연아, 미안해. 네가 이미 말한 건데도...”“엄마.”당시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엄마, 이미 부동산 다 팔아버렸잖아. 내 손에 있는 현금도 다 줬어. 이제 10억은 진짜로 구할 방법이 없어. 원진은 지금 고3이야. 이 일들이 그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너무 싫어.”하지만 아직 10억이 남았다.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