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숨소리마저 불안정해졌다.하지만 장하리는 여전히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안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뭔가가 계속 저를 부르는 것 같아요.”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하리는 직접 문을 열고 건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차 문고리를 잡는 순간, 서주혁에 의해 손목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서주혁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장하리를 와락 끌어안았다.앞자리에 앉아있던 비서는 재빨리 칸막이를 올렸다. 그렇게 지금 뒷좌석이라는 공간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장하리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서주혁의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만의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이 순간, 서주혁이 뭔가를 아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서주혁이 누구인가? 제원의 진정한 재벌 2세로서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가지 마.”세 글자만 겨우 내뱉은 서주혁이 다시 장하리를 꼭 끌어안았다.장하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저항하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서주혁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장하리의 손은 천천히 서주혁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고개를 든 서주혁은 그녀를 밑으로 내리눌렀다.그의 입술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이 다가왔다.장하리의 눈이 크게 떠지며 손을 들어 서주혁을 밀어내려 했지만 연약했던 그녀의 힘은 서주혁에게 힘없이 물속에 내던져진 돌처럼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다.“음, 이거 놔요.”서주혁의 손이 장하리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장하리는 얇은 옷 너머로 무언가가 자신을 계속 짓눌러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알 수 없는 물체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웠다.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이미 서주혁의 허리 위에서 다리를 벌린 채 앉아있었다.서주혁의 옷은 단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었지만 그의 손을 여전히 자신의 허리 뒤에 놓인 채 두 사람의 거리를 점점 좁혀왔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달한 자동차는 적당한 위치를 찾아 멈춰 섰다. 그 자리는 최적의 관측 장소였고 아래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바글바글 서 있었다.그 자리는 분명 예약하고 구매해야 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들이 불꽃놀이를 보러 가기로 한 건 분명 임시로 결정한 일이었다. 보아하니 이 구역의 모든 위치를 전부 사들인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의 차만 조용히 멈춰서 있을 뿐이다.차 문을 열자 바깥에서는 마침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장하리는 여전히 그의 품에 엎드려 있어 고개만 돌리면 창밖을 볼 수 있었다.바깥의 찬 바람이 불어와 차 안의 애매한 분위기를 중화시켰다.서주혁의 손바닥은 여전히 장하리의 등에 살포시 놓여 있었고 마치 아이를 달래듯 툭툭 두드려주기도 했다.방금 가라앉았던 부끄러움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장하리가 막 몸을 일으키자 서주혁은 또다시 그녀를 꾹 누르며 눕혔다.“제 다리 위에 앉아요.”장하리는 다시금 양 볼이 붉어지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괜찮아요.”“그럼 또 해보고 싶어요? 조금 전에 당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주혁의 입술은 장하리에 의해 꽉 막혀버리고 말았다.어둑어둑한 등불을 빌려 서주혁은 온통 노여움으로 가득 찬 장하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 입 다물어요. 제발.”순간 재밌는 생각이 스친 서주혁의 눈가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흘러나왔고 그는 일부러 혀끝을 내밀어 그녀의 손바닥을 쓱 핥았다.눈동자가 매섭게 움츠러들고 장하리는 순간 자신의 손을 그냥 버리고 싶었다.“서주혁, 당신 정말...”정말 어처구니없고 뻔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로군.그녀는 다급히 자신의 손을 등 뒤에 숨기고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그때의 이상한 느낌이 또다시 치밀어 올랐다. 서주혁은 정말 그녀를 유혹하고 있다.예전에는 가벼운 유혹에 그쳤는데 지금은 정말 진지하게 폭탄을 날리고 있다.서주혁은 제원에서도 인기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었다. 만약 온 힘을 다해 여자를 유혹하려 한다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
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비서도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는 바람에 그 공간에는 오직 둘만 남게 되었다.장하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서주혁은 대체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같은 시각, 서주혁은 혹여나 장하리가 도망갈까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장하리를 삼켜버릴 듯 날카로웠다.서주혁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그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결국, 장하리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것 봐. 또 시작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미남 계를 사용하는 것을 보아 서주혁은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훌륭한지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윽고 서주혁은 장하리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의 손끝을 살짝 깨물고는 다시 자신의 벨트 위에 가져다 놓았다.서주혁의 뜻은 분명했다. 할건지 물어보는 것이다.장하리는 자신의 손을 거둬들이고 싶었지만 막상 그의 눈빛을 마주하니 없던 힘도 전부 빠져버리는 기분이 들었다.그러자 서주혁은 그녀의 손을 가져다 손쉽게 벨트의 단추를 풀었다.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작은 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서는 마치 금기를 깨뜨리는 스위치가 된 것만 같았다.대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주혁은 제대로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관계를 맺는 동안 장하리는 줄곧 손을 유리에 받친 채, 혹시라도 몸이 튕겨 나가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4년을 굶주린 사람이 배를 채우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그렇게 자동차는 한밤중까지 그곳에 주차되어 있었고 마지막에 이르러 장하리는 맥없이 시트에 주저앉았다.그러나 호텔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장하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너무 피곤했는지라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서주혁에 화가 난 장하리가 있는 힘껏 그를 걷어찼다.그러자 서주혁은 또 그녀를 살살 달래주며 이제 명분을 줄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물었다.장하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서주혁도 그녀가 잠이 들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써가며 괴롭혔다.결국, 그녀
장하리는 이제야 비로소 의식이 몽롱한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어색한 분위기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그녀는 지금이라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서주혁은 휴대폰을 잘 챙겨두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번복하고 싶어요?”그 말에 장하리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젠 목까지 화끈거렸다.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그녀는 비로소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입을 열었다.“아니, 전 그냥...”두 사람 사이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랐다. 하물며 그녀는 방금 남자 친구와 헤어졌는데 서주혁은 정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단 말인가?너무 다급한 나머지 서주혁에게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착각도 들었다.하지만 어느 쪽이든 서주혁의 실력은 장하리를 훨씬 능가하는데 그녀에게 대체 무슨 가치가 있어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장하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다만 그의 얼굴과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장하리의 마음도 점점 그를 향해 기울고 있었다.사실 자세히 계산해 보면 두 사람이 강성에서 알게 된 이후로 서주혁은 정말 그녀에게 단 한 번도 해를 끼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다만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마음속의 저울은 이미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계속하여 품에 안겨있는데 서주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뭐 먹고 싶어요?”밤새 뒤척이며 오랫동안 잤으니 지금 시각이면 분명 배고플 것이다.하지만 장하리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자 그는 사람을 시켜 준비를 시작하도록 당부했다.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 장하리는 문득 자신의 몸이 깨끗하게 씻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아마 그녀가 잠든 사이 씻겨준 모양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장하리의 양 볼은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깨끗하게 단장하고 거실에 나갔을 때 서주혁의 눈앞에는 컴퓨터 한 대가 놓여 있었다.기분이 좋은 것인지 서주혁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가를 도무지 주체할 수
장하리는 순간 멈칫했다.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서보겸이 이미 그녀의 다리에 매달리며 다시 한번 말했다.“엄마, 뭐 먹을 거예요?”서보겸은 장하리에게 저녁으로 뭘 먹을지 묻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이때 서주혁이 옆에서 끼어들었다.“어제 밤엔 아주 잘 먹었지.”장하리는 몸이 터질 듯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낮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주혁 씨!”서주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만지작거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이 말의 다른 의미를 알 리 없는 서보겸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순수하게 물었다.“어제 뭐 먹었어요?”장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녀는 손으로 서보겸의 귀를 막으며 서주혁을 노려보았다.“아이한테 신경 좀 써요!”서주혁은 다가와서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오늘 밤도 먹을래요?”장하리는 그에게 따귀를 한 대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왜 갑자기 이렇게 뻔뻔해진 거지? 아니 원래 진지한 남자들도 상황이 변하면 이렇게 변해버리는 걸까?장하리는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귀 끝까지 빨갛게 변한 모습을 본 서주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만 놀릴게요. 오늘 저녁 뭐 먹을까요?”서보겸은 귀가 막혀서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장하리에게서 서주혁으로, 서주혁에게서 다시 장하리로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장하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더 이상 장난치지 않는다면 그걸로 다행이었다.“가벼운 음식으로 해요. 속이 별로 좋지 않아서.”서주혁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알았어요. 내가 준비할게요.”그 입맞춤은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장하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아이에게는 천천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데 서주혁은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장하리는 서보겸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서주혁이 자리를 떠난 뒤 장하리는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을 느꼈다. 서보겸의 눈은
장하리는 마음이 따뜻해짐과 동시에 편안함을 느끼며 금세 잠에 들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된 것 같아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서주혁과 서보겸과 함께하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자신에게 꽤 잘해주었다. 그녀는 워낙 편안함을 추구하는 성격이라 금방 받아들였고 오히려 서주혁을 조금씩 좋아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음을 느꼈다.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서주혁은 여전히 회사를 나가지 않은 채 저택에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밤이 되면 그에게서 도망칠 길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 한참 동안이나 괴롭혔다.매일 밤이 그러했다. 서주혁은 정말 지치지도 않는 걸까? 그녀는 점점 수척해지는데 반해 그의 기력은 더 좋아지는 듯했다. 장하리는 이 남자가 흡사 자신의 기운을 빨아먹는 요괴처럼 느껴졌다.그렇게 나흘이 지나 마침내 장하리의 간곡한 요청에 서주혁은 하룻밤 쉬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대신 열 번이나 ‘여보’라고 부르는 걸 강요하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날 밤에는 서주혁에게 휘둘리지 않고 마음껏 잠을 청할 수 있었다.한밤중이 되어 갑자기 잠에서 깬 장하리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을 더듬어 보았다.서주혁이 침대에 없었다. 일어나서 살펴보니 베란다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장하리는 조용히 그곳으로 걸어갔다.베란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그 틈새로 서주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돌아온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상대방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서주혁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손에 든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왜? 소준호가 자기한테 붙여준 여자가 마음에 안 든대? 그 여자는 그래도 재벌가 딸인데.”비록 사생아이긴 하지만 제 몫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소준호에게는 과분한 상대였다.장하리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서주혁은 이곳에 누가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요즘 너무 행복해서 경계를 풀어버린 상태였다.“그 여자가 싫다면 다른 여자를 붙여 줘. 그 자식이 돌아오지
장하리는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워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서주혁은 장하리를 꼭 끌어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손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하리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이내 서주혁에게 안겨 그의 몸 위에 앉아버렸다.장하리는 이제 막 깨어난 척하며 중얼거렸다.“하기 싫어요.”그녀는 서주혁의 가슴에 완전히 엎드린 채 그를 내리눌렀지만 그는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안고 잘게요.”그 말을 들으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대체 서주혁의 어떤 모습이 진짜인 건지 장하리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엎드려 있는 게 편했다.어둠 속에서 서주혁이 나지막이 말했다.“여보.”장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서주혁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쉬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안 되겠어요. 당신이 너무 향기롭잖아.”그 말에 장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화가 난 그녀는 서주혁을 힘껏 꼬집었다. 그러나 그의 신음이 들려오자 다시금 힘이 빠져버렸다.“왜 그래요?”“너무 아파서... 부러졌어요.”서주혁은 정말 괴로운 것처럼 보였다.장하리는 그의 몸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마음이 너무나 복잡했다. 서주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녀가 다가오지 않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요?”그러나 장하리는 돌아누워 등을 보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주혁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거짓말이에요. 안 부러졌어요.”장하리는 여전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이 맴돌았지만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묻고 싶지 않았다.서주혁이 그녀를 얻기 위해 어리석은 짓을 벌였다는 걸 알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어차피 부모님은 유럽에서 여행을 즐기고 있고 여러 사진을 보내오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소준호에게 다른 여자와 자도록 조치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마치
장하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서주혁의 계획이 아니라면 그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근데 어젯밤 당신이 전화할 때 분명히 다 당신이 계획한 거라고 했잖아요...”“그들이 술자리에서 모일 때 내 사람이 부추겼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 여자가 먼저 소준호에게 접근해 약을 먹인 건 내 예상 밖이었어요. 나를 못 믿어요?”장하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가슴이 쿡쿡 아파지기 시작했다.“아니요, 믿어요.”서주혁은 그녀를 꼭 안았다. 장하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그의 눈빛은 이미 깊은 어둠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방심한 걸 깨달은 그는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당신 부모님을 유럽으로 보내드리고 사람을 붙인 건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봐 보호 차원에서 그런 거예요. 보세요, 부모님 정말 즐겁게 지내시잖아요. 근데 당신은 강성에서 만난 날부터 가족에게 너무 의존했어요. 부모님이 계셨다면 절대 제원에 따라오지 않았을 거잖아요. 미안해요, 여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맞아요. 차라리 때리고 욕해도 좋으니 제발 나를 무시하지는 말아 주세요.”서주혁의 자세는 한없이 낮아져 있었다. 만약 외부인이 이 모습을 봤다면 분명 충격받았을 것이다. 그동안 서주혁이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냉혹함이 다 사라진 것처럼 장하리 앞에서 유연하게 변해 있었다.이쯤 말이 나왔으니, 장하리도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사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저 소준호 사건에서 손을 놓고 있었을 뿐이고 단지 그녀를 제원으로 데려오기 위해 몇 가지 계략을 쓴 것뿐이었다.결국 그가 그녀를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그거 말고도 나한테 숨긴 게 더 있나요?”장하리는 몸을 돌려 서주혁의 얼굴을 마주 보고 말했다.“있다면 지금 전부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정말 화낼 거예요.”서주혁의 눈에 잠시 무언가가 스쳐 갔지만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없어요.”“정말요?”“네.”장하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그가 한 일은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
‘그래, 공지민. 구은우와 관련된 일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지.’온시환은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옆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일단 지민이 데리고 돌아가.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공지민은 그 순간도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여기 남고 싶어요.”그녀는 직접 구은우 사건의 진상을, 그리고 그의 가족 중 누가 손을 썼는지 듣고 싶었다. 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데려가.”“시환 씨!”공지민은 경호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억지로 차로 이끌려 갔다.온시환은 곧 사람을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깨의 부상은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많았다.차 안에서 부하가 온시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일을 꾸민 건 연씨 가문의 둘째입니다.”연씨 가문의 둘째, 바로 현재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당시 권력을 다투는 상황에서 그는 형과 자신 아래의 모든 남자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연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후계자를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규율을 따랐다. 딸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가문 밖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었다. 구은우를 알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제거한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연씨 가문의 모든 권력은 연승혁의 손에 집중되었다. 2년 전부터 그는 해외에서 국내로 사업 중심을 옮겼고 해상 운송 사업을 시작해 원씨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현재의 연승혁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구은우를 위해 복수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연씨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거대 가문이었다. 온시환이라 해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온시환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연승혁은 방탕한 성격에 수단이 잔혹했다. 그를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원씨 가문의 원아정과 약혼한 상태였다. 원아정은 원진의
“당신들 도대체 뭐야!”여자는 분명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구은우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이 사람 기억나요?”여자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날 풀어줘요!”공지민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사람답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발로 여자의 손등을 짓밟으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지민아, 뭐 하는 거야?”그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온시환은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냉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부드럽고, 강인하며, 침착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번진 살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만약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손뼈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구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거야?’온시환은 속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그는 낮게 말했다.“심문은 내 사람들이 할 거야. 넌 결과만 들으면 돼.”공지민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발을 세게 내리찍었다.온시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이 쓰리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옆 의자에 앉아 차갑게 변한 공지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여자는 비명을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 다 고소할 거라고!”공지민은 여자의 눈앞에 쭈그려 앉아 차갑게 물었다.“그때 누가 돈을 줘서 청부 살인을 사주했나요?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나요?”여자는 공지민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를 바닥에 제압하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공지민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단숨에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그 아이가 구조되었을 당시 대략 여섯, 일곱 살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짓말에 동
공지민은 구은우의 부모가 굉장히 화목한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구은우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대체 누가 10억을 들여 구은우의 목숨을 노린 걸까.그녀는 하루빨리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시환 씨, 신정우 어머니랑 동생은 찾았어요?”신정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돈을 요구하며 동생의 치료비를 대라고 했다.그런데 신정우가 이를 거부했으니, 아마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찾았어. 내일 나랑 같이 만나러 가자.”공지민은 온시환과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가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문득 그녀는 과거 온씨 가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시환이 거의 망설임 없이 온씨 가문와 절연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물론 이건 그녀가 들은 단순한 가십에 불과했다. 당시 온씨 가문 사람 중 누군가가 성혜인을 건드려 일이 몹시 커졌다는 이야기였다.온시환은 가족에게도 무척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사랑에 있어서도 마치 구경꾼처럼 시큰둥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공지민은 온시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에 대해 더 알 수밖에 없을 터였다...다음 날, 그는 정말 그녀를 데리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구은우가 사고를 당했을 당시 공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구은우가 구조된 후, 그 어머니와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구은우가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다.그 당시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모자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공지민은 그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복잡하고 때로는 무척 어두운 법이다. 처음에는 구은우가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는 오래전부터 공지민에게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예전에는 온시환도 잘 몰랐다. 그러다 구은우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많은 순간, 공지민은 아마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두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 자신조차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마치 생기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모습이었다.온시환이 처음 그녀를 싫어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계속 그녀를 신경 쓰다 보니, 점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공지민의 왼쪽에는 강민지, 오른쪽에는 성혜인이 앉았다.사실 그녀는 성혜인을 알고 있었다. 과거 성혜인과 반승제의 사건이 너무나 크게 이슈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서 자주 본 이름이었다.공지민은 성혜인을 굉장히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마당에 앉아 있었으며 방해하지 않고 때때로 과자나 과일을 들고 와 전해 주었다.강민지가 갑자기 공지민의 손을 잡았다.“지민 씨, 시간 될 때 우리랑 자주 만나요. 남자들이랑만 있지 말고. 남자라는 것들은 말이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그걸 당연하게 여겨요.”강민지는 아직 공지민과 온시환의 결혼이 단지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공지민에게 남자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공지민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내가 시환 씨를 단지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요...”앞에 있는 두 여자는 온시환의 친구들이었다. 만약 이 결혼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거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
성혜인은 한순간 감개무량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식탁 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약간 어색했지만 강민지가 공지민에게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제야 강민지가 공지민이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지민은 처음엔 다소 긴장해 보였으나 점차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강민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강민지가 성혜인에게 눈짓을 보내자 성혜인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가끔 여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식사가 끝날 무렵, 강민지는 공지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지민 씨, 마지막에 출연했던 드라마는 왜 몇 화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캐릭터가 그렇게 빨리 죽을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퇴장하더라고요.”사람의 진심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공지민은 강민지가 진심으로 자신의 드라마를 좋아하며 각 에피소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래 문보영은 공지민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문보영과 온시환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공지민은 참 외로웠다. 그런데 강민지가 먼저 다가와 주자 그녀는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그땐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잠시 활동을 중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도 일찍 하차할 수밖에 없었죠.”“정말 아쉬워요. 그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까지 연기했으면 팔로워가 최소 백만 명은 더 늘었을 거예요.”공지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매가 휘어졌다.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시환은 혼자 계산을 하러 갔다.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공지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졌다.반승제와 신예준이 그의 앞에 있었지만 온시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지민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온시환 앞에서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그날 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온시환은 그녀의 그 미소를 떠올리며 뒤척였다.휴대폰은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연락한 친구들로부터 술자리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지민과의 결혼을 생각하며 그녀가 이미 동의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돌아누워 공지민을 바라보았다.한편 공지민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에 관한 생각, 특히 결혼 상대가 온시환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이 없었다.“지민아, 너도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러 가자.”온시환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은 결혼이 최소 몇 달 후에나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온시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지민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다. 결혼도,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도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그녀를 곁에 붙잡아둘 명분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온시환은 새 정장을 꺼내 입으며 추지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혼인신고하러 간다.]추지성은 이 메시지에 놀라 즉시 전화를 걸어왔다.“야, 너 농담하는 거지? 진짜 가는 거야? 지민 씨가 동의했어?”“응, 동의했어.”추지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을 멍하니 뜬 채 온시환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온시환은 다른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도 혼인신고 소식을 알렸다. 단톡방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다.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설우현이었다. 그는 연달아 다섯 개의 놀란 이모티콘을 올리며 반응했다.다른 사람들은 몇 분간 망설이다가 그제야 축하 메시
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추지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둘은 별다른 말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온시환은 게임을 하는 중에도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저녁 7시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지민이었다.“국 끓였어요. 와서 먹을래요?”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온시환은 그 한마디에 바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그러자 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야, 어디 가냐? 곧 배달 음식 도착하는데, 나 혼자 다 못 먹어!”“집에 가서 지민이가 끓인 국 먹을 거야.”추지성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뭐야, 이 말투에서 자랑하는 느낌이 나는 건 왜지?”온시환은 이내 추지성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반 시간도 안 돼 집에 도착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공지민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공지민이 그의 곁에 몇 년만 더 있어 준다면 그 뒤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깔끔히 정리하고 아무런 짐도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지민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겠지...’온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무슨 국 끓인 거야? 냄새가 너무 좋은데.”공지민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작은 그릇에 국을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또 지성 씨랑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시환은 그녀가 추지성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서둘러 부인했다.“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어.”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여자는 없었어.”공지민은 방금 만든 반찬들을 모두 식탁으로 옮기고 밥도 한 그릇 담아 내왔다.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식탁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온시환은 이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천천히 떠먹었다.식사가 끝날 무렵 공지민이 그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