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이를 알 리 없는 장하리는 차에 오른 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운전했다.작은 도시의 단독주택은 억 소리 날 정도로 비싸지는 않지만 이 도시에서는 그래도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장하리는 곧바로 환히 웃으며 집에 들어섰다.“어머니, 저 왔어요. 아버지는요? 또 낚시하러 가셨어요?”별장 정원 바깥에는 한 여자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전부 4년 전에 장하리가 직접 심은 꽃들로서 그 후 여자는 더욱 조심스럽게 그 꽃들을 가꿔주곤 했다.“원래 잠깐 들렀었는데 최근 강성에 큰 투자자가 왔잖니. 제원에서 오신 분이라 네 똑같이 제원에서 일했던 네 아버지가 불려갔지. 그래도 네 아버지가 다른 분들보다 그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아마 오늘 저녁은 바깥에서 식사하실 것 같아. 아, 맞다, 이럴 때가 아니지. 하리야, 넌 잠시 앉아있어. 꽃에 물 다 주면 바로 식사 준비해줄게.”“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끓일게요.”“네가 뭘 끓여. 내가 말했잖니. 넌 4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집안일을 할 수 없다고. 사실 난 네가 선생님이 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맨날 무슨 교육을 받는다고 바쁘게 지내잖아. 하리야, 너 정도면 엄마 아빠가 충분히 책임지고 챙겨줄 수 있어. 혼수도 이미 다 준비해두었다니까.”자신을 향한 여자의 사랑을 듬뿍 느끼며 장하리는 깊은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 4년 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장하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엄청난 당혹감과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과거 하나 없이 단지 눈앞에 있는 낯선 얼굴들을 본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괴로웠다.장민철과 추미현은 바로 그때 나타났는데 두 사람은 부부로서 매우 선량해 보였다.장민철은 장하리에게 전에 업무상의 이유로 국가 정부 측에서 그녀를 시골로 보내 보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장민철이 이번에 정식으로 퇴직하며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리러 가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추미
그 말에 장하리는 또다시 깊은 감동에 휩싸였다. 게다가 그때 요리를 하려고 주방에 들어가면 항상 추미현에게 제지당하곤 했다.그렇게 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정원에 나와 꽃에 물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어머니, 혹시 오늘 아버지가 만나게 될 투자자가 요즘 다들 의논하던 그분이신가요?”“맞아. 제원시에서도 지위가 상당히 높은 분이라고 그러더군. 안 그랬으면 아버지를 부를 일도 없었을 테지. 하지만 난 네 아버지가 조금 걱정되는구나. 하도 직설적이고 센스가 없어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는데 워낙 서툴잖니. 예전에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세상 물정을 아예 몰라 제원시에 있을 때도 항상 동료에게 오해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 그런데 오늘같이 중요한 자리에 가서 말이라도 잘못하면 아주 국민의 욕받이가 되겠다.”“어머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큰 문제 없을 거예요. 정말 명문가 출신이라면 아량도 넓은 분이겠죠.”그 말에 추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장하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됐다. 그건 그렇고 아빠가 저번에 잉어 한 마리를 잡아 오셨잖니. 어디서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정말 강에서 잉어를 낚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니? 하리야, 네가 가서 물고기 밥 좀 먹여주렴. 잉어는 절대 죽으면 안 돼. 나중에 또 뭐라고 해야 돼...”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는 추미현에 장하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강에 잉어가 없다는 것을 모를 수 있겠는가. 장민철은 그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알겠어요.”이윽고 추미현은 손에 든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난 요리해 올 테니 넌 물고기 밥 주고 TV 보러 가.”집안으로 막 발을 들인 그때, 추미현의 휴대폰이 반짝거렸다. 이는 오혜수가 4년 만에 그녀와 연락하는 것이었다.[장하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그러자 추미현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이내 답장 한 통을 보냈다.[좋아요. 매일 웃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연락하지 마세
장민철은 전에 줄곧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다니며 이런 자리에는 거의 참석해본 적이 없었다.국회의원은 장민철도 제원 출신인 것을 보고 제원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특별히 부른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장민철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니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어쨌든 서주혁의 이번 투자 건은 강성의 전체 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큰 거래였기에 혹여나 서주혁이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여겨 투자를 철회한다면 누구라도 그 손실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같은 시각, 서주혁은 맨 가운데에 앉아서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4년이 지났지만 서주혁은 전보다도 더 차갑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현장의 분위기는 원래 화기애애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싸늘하게 앉아있는 서주혁에 분위기는 다시 꽁꽁 얼어붙어 버렸고 모두가 쥐죽은 듯 조용히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국회의원 한 명이 재빨리 핑계를 대며 화제를 돌리려 안간힘을 썼다.“서 대표님,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몇 년 동안 강성에 머무를 계획입니까?”혹여나 서주혁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웠던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그러나 서주혁의 시선은 여전히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았고 대충 응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옆에 있던 비서가 급히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덧붙였다.“죄송합니다만 대표님께서는 오늘 밤 다른 일이 있으셔서 이만 일어나시겠습니다.”그 말에 더욱 황송해진 국회의원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곧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방을 나섰다.그러던 중 장민철은 장하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깜빡하고 무음으로 설정해놓지 않은 탓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장민철에게 집중되었다.덩달아 깜짝 놀란 장민철은 급히 다른 한쪽으로 달려가 수신 버튼을 눌렀다.“하리야, 무슨 일 있어?”하리라는 두 글자를 들은 서주혁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장민철을 바라보았다.
서주혁은 차에 앉아 옆에 있는 서류를 가져다가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티를 냈지만 결국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입니까?”아들의 목소리를 듣자 명희정의 마음은 말로 이룰 수 없이 아려왔다. 4년 동안 서주혁은 정말 단 한 번도 본가에 돌아가지 않았고 회사와 집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심지어 아이조차 한 번도 데려온 적이 없었다.심씨 가족들은 아직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서주혁은 정말 아이를 잘 보호해 주었다.게다가 서주혁은 진즉 경비원과 도우미들에게 분부하여 심씨 일가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아두었다.지난 4년 동안 그는 거의 폐쇄된 상태로 지내며 그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가끔 반승제와 온시환이 거듭하여 초대해야지만 어쩔 수 없이 외출하곤 했다.그의 변화는 모두가 눈치챌 수 있었다. 현재의 서주혁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고인 물같이 아무런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주혁아, 4년이면 충분하지 않니? 과거 일이라면 내가 잘못했다. 응급처치하고 있을 때 너에게 아이를 포기하란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이 아이가 나중에 자폐증이라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대체 아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쓴 거니? 평생을 아이에게 올인하려고? 엄마가 없어서 자폐증에 걸렸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그냥 돌아와. 내가 주선해줄게. 집에 여자가 있으면 아이 상태도 훨씬 나아질 거다. 아이에게 가장 부족한 건 다름이 아니라 모성애라고.”서주혁의 눈동자에는 순간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스쳐 갔다. 사실 그는 아직도 서보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아버지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지만 서보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루에 많아야 8글자 정도 말하는 게 전부였다. 절대로 먼저 요구하거나 투정을 부리는 일이 없었고 항상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정말 이렇게까지 말이 없을 줄이야.처음 이 이
서재로 가까이 다가가니 맞춤 제작한 작은 책상 앞에 혼자 조용히 앉아있는 서보겸이 눈에 띄었다. 평소 서주혁이 책상 앞에서 회의할 때도 아이는 혼자 조용히 옆에 앉아있었다.서보겸은 정말 서주혁이 몇 마디 물어도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 없었다.“보겸아, 배고프지 않아?”아이를 마주하자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주혁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보겸에게 다가갔다.“없어요.”“오늘 뭘 봤길래 종일 내려가지 않았던 거야?”그러나 서보겸의 시선은 여전히 그림책에 꽂혀 있었고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빛을 감싸고 있는 듯 보송보송해 보였다.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서주혁도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와 함께 책을 보기 시작했다.그때 아이가 보고 있던 장면은 마침 어머니를 찾고 있는 상황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책은 서보겸이 가장 즐겨 있는 책이었다.서주혁은 그 책 안에 이런 줄거리도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때, 명희정이 했던 말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집에 여자를 들이면 정말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서보겸에게 부족했던 건 바로 모성애였다.그는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보겸아, 아빠가 엄마 찾아줄까?”그러자 고요하기만 하던 서보겸의 눈빛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서주혁을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에 서주혁은 드디어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여기며 내심 기뻐했다. 서보겸만 필요하다면 그는 충분히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서보겸은 다시 고개를 떨구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니요, 싫어요.”단숨에 여섯 글자를 말한 것을 보면 서보겸이 집에 여자를 들이는 것에 대해 극도로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순간 마음이 아파진 서주혁이 천천히 아이를 안아 올렸다.“그래, 찾지 말자. 그럼 지금은 먼저 밥 먹으러 내려갈까? 나중에 서율 누나와 통화하게 해줄게. 응?”설서율은 반승제와
서보겸은 아리를 좋아한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아리가 곁에 있으면 엄마가 옆에 있는듯한 안전감이 느껴졌다.물론 서주혁이 옆에 있어 준다면 그 안전감은 배가 될 것이다.서보겸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리가 가장 좋았다.아리는 오후 내내 밖에서 뒹구는 바람에 꼬리에는 풀잎 몇 개가 달려있기도 했다.서주혁은 옆에서 수건을 가지고 와 아리의 발과 꼬리를 깨끗이 닦아주었고 아리도 얌전히 그의 손길을 즐겼다. 이것은 서주혁이 매일 아리에게 해주는 필수코스였다. 다 닦아주고 나면 아리는 매우 얌전히 침대에 올라가 침대 끝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곤 한다.집에는 원래 다른 강아지도 있었는데 당시 장하리에게 보상해주기 위해 사온 강아지였다. 그러나 장하리는 그의 보상을 원하지 않았고 4년 전, 온시환이 데리고 가 지금도 잘 키우고 있다.침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친 서주혁은 욕실에서 나올 때 아이가 조심스럽게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아리도 귀염성 있게 머리를 내어주고는 서보겸의 손길을 즐겼다.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서주혁은 잠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보겸아, 너 먼저 자. 아빠는 서재에서 업무 좀 보다가 잘게.”“네.”서주혁은 침실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불가피하게 장하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아리와 서보겸은 모두 장하리가 서주혁에게 남긴 두 가지 보물이었고 4년 동안 외로운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그러나 서주혁 또한 장하리가 죽게 된 것도 결국 그의 무정함 때문이었고 그의 잔인함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4년 동안 서주혁은 수없이 많은 밤낮을 장하리의 생각들로 지새웠고 언젠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모습마저 잊어버릴까 두려웠다.4년이라는 시간은 서주혁에게 정말 너무나도 길고 아득한 시간이었다. 어떻게 서보겸을 데리고 키웠는지,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돌이키고 싶지 않을 만큼 길었다..하지만 앞으로 수없이 많은 4년이 서
그 말을 들은 장민철은 안색이 환해지며 뛸 듯이 기뻐했다.“그래그래, 네 엄마랑 혼수는 다 준비해뒀다. 가장 중요한 건 그 녀석이 우리 집 근처에서 사는 거다. 나중에 결혼한다고 해도 집에 돌아오고 싶으면 10분이면 올 수 있잖으냐. 얼마나 편해. 그리고 최대한 외지 사람은 찾지 말아. 나중에 혹여나 괴롭힘당해도 나와 네 엄마가 바로 해결해줄 수가 없잖니.”“네, 알겠어요. 저도 그 남자에게 호감 있었어요.”그날 밤, 장민철은 즉시 추미현과 상의하여 장하리에게 단독으로 집을 사주기로 했는데 좋기는 같은 동네에 장하리의 신혼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앞으로는 장하리와 그녀의 남편이 묵을 신혼집이지만 본가와도 가까워 그들 노부부도 언제든지 장하리를 보러 갈 수 있다.노부부는 곧 수중의 돈을 세기 시작했고 즉시 아파트 단지 내에 매물이 있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현재 마침 매물 한 채가 판매 중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내일 바로 집 상태를 보러 가겠다며 예약을 해두었다.그리고 그날 밤, 장하리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꿈속에는 웬 희미한 낯선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는데 그 정체를 확인하려 아무리 노력해봐도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희미하기만 했다.깨어났을 때 식은땀이 흐르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장하리는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너무 현실적인 꿈이었다. 정말 당황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그때, 다행히 휴대폰이 울리고 확인해보니 발신자는 다름 아닌 소준호였다.그리고 소준호가 바로 현재 장하리가 호감을 가지고 만나고 있는 남자이다.두 사람은 전에 한 행사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소준호는 피아노 선생님으로서 매우 온화하고 우아한 비주얼을 자랑했다.그의 전화를 받은 뒤, 장하리는 곧바로 찝찝한 느낌을 털어내고 욕실로 들어가 씻고 외출 준비를 하였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소준호의 차는 이미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다급히 조수석에 앉아 조금 빨개진 볼을 애써 감추며 설명했다.“죄송해요. 어젯밤에 악몽을 꾸는 바람에 조금 늦게 일어
두 손으로 서주혁의 목을 꼭 껴안은 서보겸의 눈빛은 새까맣고 하염없이 맑았다.서주혁은 그가 배가 고픈 줄로만 알고 계속하여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관광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면서 무심코 아래층을 훑어본 그의 시선은 곧 한 여자의 뒷모습에 머무르게 되었다.지난 4년 동안, 뼛속에 새겨질 정도로 그리워하던 장하리의 얼굴, 뒷모습, 그리고 목소리까지.이렇게 먼 거리를 두고도 그는 여전히 심장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서보겸을 안고 있던 손에도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몇 초 후, 그는 엘리베이터 하강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르기 시작했다.이때 버튼을 누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주혁을 안내해주던 호텔 지배인은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엘리베이터는 목표 층에 도달해야만 다시 내려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감히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하지만 서주혁이라고 과연 이걸 모를까?단지 너무 당황하여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급한 마음에 연달아 누른 것이다.엘리베이터가 마침내 1층에 도달하고 그는 서보겸은 품에 안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방금 장하리가 서 있던 곳까지 달려나갔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데 그때, 온시환의 전화가 걸려왔다.“어, 왜 그래?”“어제부터 네 어머니께서 나와 승제에게 너와 결혼할 사람을 물색해 달라고 계속 전화하셔. 너 정말 결혼할 생각이야?”지난번 서주혁의 태도가 워낙 애매해 승낙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하지만 서보겸과 이 일에 대해 말해본 결과, 그의 대답은 명확한 거절이었다.“안 할 거야. 애초에 보겸이도 새엄마를 원하지 않는다고.”말이 끝나자마자 서보겸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엄마.”이는 오랜 시간이 흘러 서보겸이 처음으로 이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이었다.그러나 서주혁의 마음은 그 단어 하나에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그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온시환에게 입을 열었다.“아니야. 보겸이와 다시
강민지와 대화를 마친 후, 공지민은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온시환은 이미 누군가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떠나기 전 공지민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공지민의 시야에 원아정과 몇몇 여성이 들어왔다. 원아정은 마치 공지민을 못 본 척 지나치려는 듯했지만 그녀 옆의 몇몇 여자는 공지민이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원아정의 곁을 맴돌던 오예슬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오예슬은 공지민이 온시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공지민을 보자마자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어머나, 아정아, 저기 좀 봐. 저 사람 우리 고등학교 때 제일 인기 많았던 공지민 아니야?”오예슬은 거의 뛰다시피 공지민 앞으로 다가가선 위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공지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여기 직원으로 지원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공지민의 옷차림을 보면 그런 말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오예슬은 그녀를 비하하고 싶어 일부러 그런 말을 내뱉었다.공지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예슬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지민을 괴롭히며 쾌감을 느껴왔고 지금의 무시당하는 태도는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과거 공지민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공지민에게 그대로 부어버렸다.공지민은 피할 새도 없이 머리에 술을 뒤집어썼다.“어머, 미안해. 내가 잔을 제대로 못 들었나 봐.”오예슬은 원아정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이런 행동을 했고 이는 과거에도 그녀가 원아정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주 하던 짓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지민을 굴욕 주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원아정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려 돌아섰다.하지만 공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오예슬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발
원아정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친한 친구인 양 공지민의 팔짱을 끼었다.“그럼 다행이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것도 내 생일 파티에서라니 정말 놀랍다. 앞으로 자주 보자. 나도 제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잖아.”“좋아.” 공지민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온시환은 공지민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가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녀가 구은우의 일은 조금이라도 덜 떠올릴 테니 말이다.구은우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건 연승혁이 배후라는 것뿐이었다. 연승혁은 현재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그를 건드린다면 필연적으로 원씨 가문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터였다. 두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온시환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공지민이 잠시라도 구은우를 내려놓고 평온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원아정은 고개를 숙여 공지민의 귀에 속삭였다.“몇 년 못 봤는데, 그새 너 남자 꼬시는 재주가 이렇게 늘었을 줄은 몰랐네. 죽어서 바다에 가라앉은 은우가 이 꼴을 보면 편히 눈을 감을 수나 있을까?”가볍게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너도 이제 곧 결혼하잖아. 과거의 남자에게 얽매이는 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원아정의 얼굴에 미소가 굳고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공지민은 손에 든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승혁 씨 같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자꾸 떠올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넌 원씨 가문에서도 딱히 기댈 곳이 없어 보이던데. 원진 씨가 너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더라고.”이 일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원진은 철저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원진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원아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대신 네가 시환 씨랑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나 잘 고민해.”그녀는 그
온시환은 단지 그녀가 식견을 넓히려 한다고만 생각할 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밤이 되어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 때, 온시환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그녀의 옷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지민은 몸을 돌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싫어요.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온시환의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서두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짧게 대답했다.“알았어.”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들었다.원아정의 생일 파티는 초대받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공지민은 몇몇 스타일리스트에게 둘러싸여 오늘 밤을 위한 스타일링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면 상대가 얼마나 화를 낼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일 파티인 만큼 원아정이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원진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공지민은 이 며칠 동안 온시환에게 원진에 대해 물어보며 정보를 얻어냈다. 원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두려워했고 원아정도 예외는 아니었다.원진이 있는 한 원아정이 함부로 굴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 밤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자리라 원진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했다.먼저 스타일링을 마친 온시환은 공지민이 몸에 꼭 맞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순간 눈빛이 반짝이며 숨소리마저 떨렸다. 매끈한 허리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지민아, 오늘 정말 아름다워.”온시환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공지민은 말없이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원씨 가문의 저택은 제원에 위치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구매한 곳이라고 했다. 오늘 밤의 파티는 바로 그 저택에서 열리고 있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저택 입구에 주차된 화려한 차들을 보니 이 파티의 주최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린 공지민은 온시환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한 홀 안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가
오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지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은우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아. 사실 난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고 은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그런데 넌 이런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너라는 애는 참으로 밉지만 그래도 넌 진심으로 은우를 좋아했잖아. 은우는 한때 네 사람이었고, 넌 나보다 천 배는 더 괴로웠겠지... 미안해.”그 말을 끝으로 오하윤은 자리를 떠났다. 가슴은 여전히 저릿저릿했다.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절망 속에 빠졌을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오하윤은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느꼈다.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한편, 공지민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주스가 담긴 컵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감쳐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온시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온시환과 연승혁이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공지민은 그가 왜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친구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겠는가.‘남자는 결국 믿을 게 못 돼.’가슴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다시는 온시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공지민은 끝내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온시환은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나 화나게 하지 마. 구은우의 일은 아직 조사 중이니까, 너도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그 메시지를 읽은 공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온시환은 분명 누가 구은우를 해쳤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녀를 계속 속이려는 것이 뻔했다.공지민은 속눈썹을 지그시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