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오혜수는 손에 든 총을 닦으며 조금 망설였다.“확실해요? 전에 이미 한 알 먹고 일부 기억을 잃었잖아요. 그런데 만약 지금 두 번째 약을 먹는다면 정말 모든 기억을 잃을지도 몰라요. 물론 당신의 말대로 다른 도시에서 당신에게 떳떳한 신분을 찾아주고 새로운 삶을 찾아줄 수 있어요. 하지만 정말 제원에서의 모든 기억을 버릴 수 있겠어요?”장하리의 몸은 현재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사실 오혜수는 진즉 그녀를 이곳으로 몰래 데려왔는데 도주자가 장하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 들어온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당시 장하리는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급하게 아이를 낳게 되었다. 게다가 곧이어 방안에서 불이 나기 시작하며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먼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보내버린 것이다. 사실 그녀에게는 삶의 욕구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감옥에서 몇 달 동안, 그리고 여기서 반년 동안 아이를 키우고 장하리는 갑자기 앞으로 어떻게 계속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나가서 서주혁에게 복수할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모든 건 전부 그녀의 선택이었다.그렇다면 나가서 성혜인을 찾아가야 할까? 그런데 장하리가 무슨 자격으로 성혜인을 찾아가겠는가?회사에는 아직 훌륭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남아있는데 장하리 한 명이 나온다고 회사에는 큰 영향이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몇 년만 지나면 장하리라는 이름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면 아무도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그땐 그렇게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장하리는 오혜수에 의해 구조되고 말았다.장하리와 오혜수는 감옥에 간 후 서로 알게 되었는데 오혜수는 경찰서에서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백겸의 일에 연루되지만 않았다면 계속하여 승승장구하며 진즉 승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그녀는 여러 가지 부동한 곳에 파견되며 각종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백겸은 온갖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전부 싹 쓸고 다녔지만 그해 오혜수의 학업에 대해 금전적인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죽은 후
4년 후, 강성 유치원.막 퇴근하려고 할 때, 장하리는 다른 한쪽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동료들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최근 강성에 큰 투자자가 와서 오래 머물 거라는 소식 들었어요? 재력이 엄청난 투자자라 정부 측에서도 직접 나선다는데 강성의 모든 관광 개발 프로젝트를 도급받는대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것인지...”“강성은 지리적 위치로도 훌륭해서 진작 개발했어야 했어요. 지난번 정부 측에서 사고를 내지 않았더라면 지금 진즉에 인기 관광도시로 거듭났을 거예요.”“듣기로는 제원시에서 오신 분이라는데 심지어 엄청난 명문 가문 출신이래요. 이 작은 도시에서 어떻게 이런 큰 인재를 만날 수 있었던 건지... 듣자 하니 아이도 있다는데 애 엄마는 세상을 떴대요.”“대체 이런 소식은 어디에서 들은 거예요?”“사실, 이 정도는 제원시에서 비밀도 아니에요. 친척이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뉴스로 알게 되었어요. 게다가 아이가 아픈 것 같더라고요. 글쎄 자폐증도 있다지 뭐예요.”“정말이에요?”“그럼요. 이 병 때문에 아이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낸다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도 않는대요.”장하리는 옆에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묵묵히 교안을 챙겼다.강성 유치원은 강성시에서 가장 큰 유치원으로 그녀는 2년 동안 시험을 치르고서야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이제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급여는 그런대로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한 달 400만 원 정도는 이 작은 도시에서 상당히 높은 월급이었다.막 가방을 메고 떠나려는데 동료 전아영의 말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아, 전하리 씨, 그 재벌 아들이 우리 유치원에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 들었어요?”그러자 장하리는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죄송해요. 들어본 적 없어요.”그 말에 전아영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다시 말을 이었다.“내일이면 회의를 열 텐데 아직도 몇 반인지 몰라요?”장하리는 태생으로 부드럽고 우아한 기질을 타고났다. 게다가 요 몇 년 동안 요양하며
같은 시각, 이를 알 리 없는 장하리는 차에 오른 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운전했다.작은 도시의 단독주택은 억 소리 날 정도로 비싸지는 않지만 이 도시에서는 그래도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장하리는 곧바로 환히 웃으며 집에 들어섰다.“어머니, 저 왔어요. 아버지는요? 또 낚시하러 가셨어요?”별장 정원 바깥에는 한 여자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전부 4년 전에 장하리가 직접 심은 꽃들로서 그 후 여자는 더욱 조심스럽게 그 꽃들을 가꿔주곤 했다.“원래 잠깐 들렀었는데 최근 강성에 큰 투자자가 왔잖니. 제원에서 오신 분이라 네 똑같이 제원에서 일했던 네 아버지가 불려갔지. 그래도 네 아버지가 다른 분들보다 그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아마 오늘 저녁은 바깥에서 식사하실 것 같아. 아, 맞다, 이럴 때가 아니지. 하리야, 넌 잠시 앉아있어. 꽃에 물 다 주면 바로 식사 준비해줄게.”“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끓일게요.”“네가 뭘 끓여. 내가 말했잖니. 넌 4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집안일을 할 수 없다고. 사실 난 네가 선생님이 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맨날 무슨 교육을 받는다고 바쁘게 지내잖아. 하리야, 너 정도면 엄마 아빠가 충분히 책임지고 챙겨줄 수 있어. 혼수도 이미 다 준비해두었다니까.”자신을 향한 여자의 사랑을 듬뿍 느끼며 장하리는 깊은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 4년 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장하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엄청난 당혹감과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과거 하나 없이 단지 눈앞에 있는 낯선 얼굴들을 본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괴로웠다.장민철과 추미현은 바로 그때 나타났는데 두 사람은 부부로서 매우 선량해 보였다.장민철은 장하리에게 전에 업무상의 이유로 국가 정부 측에서 그녀를 시골로 보내 보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장민철이 이번에 정식으로 퇴직하며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리러 가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추미
그 말에 장하리는 또다시 깊은 감동에 휩싸였다. 게다가 그때 요리를 하려고 주방에 들어가면 항상 추미현에게 제지당하곤 했다.그렇게 장하리는 어쩔 수 없이 정원에 나와 꽃에 물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어머니, 혹시 오늘 아버지가 만나게 될 투자자가 요즘 다들 의논하던 그분이신가요?”“맞아. 제원시에서도 지위가 상당히 높은 분이라고 그러더군. 안 그랬으면 아버지를 부를 일도 없었을 테지. 하지만 난 네 아버지가 조금 걱정되는구나. 하도 직설적이고 센스가 없어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는데 워낙 서툴잖니. 예전에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세상 물정을 아예 몰라 제원시에 있을 때도 항상 동료에게 오해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 그런데 오늘같이 중요한 자리에 가서 말이라도 잘못하면 아주 국민의 욕받이가 되겠다.”“어머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큰 문제 없을 거예요. 정말 명문가 출신이라면 아량도 넓은 분이겠죠.”그 말에 추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장하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됐다. 그건 그렇고 아빠가 저번에 잉어 한 마리를 잡아 오셨잖니. 어디서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정말 강에서 잉어를 낚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니? 하리야, 네가 가서 물고기 밥 좀 먹여주렴. 잉어는 절대 죽으면 안 돼. 나중에 또 뭐라고 해야 돼...”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는 추미현에 장하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강에 잉어가 없다는 것을 모를 수 있겠는가. 장민철은 그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알겠어요.”이윽고 추미현은 손에 든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난 요리해 올 테니 넌 물고기 밥 주고 TV 보러 가.”집안으로 막 발을 들인 그때, 추미현의 휴대폰이 반짝거렸다. 이는 오혜수가 4년 만에 그녀와 연락하는 것이었다.[장하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그러자 추미현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이내 답장 한 통을 보냈다.[좋아요. 매일 웃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연락하지 마세
장민철은 전에 줄곧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다니며 이런 자리에는 거의 참석해본 적이 없었다.국회의원은 장민철도 제원 출신인 것을 보고 제원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특별히 부른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장민철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니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어쨌든 서주혁의 이번 투자 건은 강성의 전체 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큰 거래였기에 혹여나 서주혁이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여겨 투자를 철회한다면 누구라도 그 손실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같은 시각, 서주혁은 맨 가운데에 앉아서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4년이 지났지만 서주혁은 전보다도 더 차갑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현장의 분위기는 원래 화기애애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싸늘하게 앉아있는 서주혁에 분위기는 다시 꽁꽁 얼어붙어 버렸고 모두가 쥐죽은 듯 조용히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국회의원 한 명이 재빨리 핑계를 대며 화제를 돌리려 안간힘을 썼다.“서 대표님,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몇 년 동안 강성에 머무를 계획입니까?”혹여나 서주혁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웠던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그러나 서주혁의 시선은 여전히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았고 대충 응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옆에 있던 비서가 급히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덧붙였다.“죄송합니다만 대표님께서는 오늘 밤 다른 일이 있으셔서 이만 일어나시겠습니다.”그 말에 더욱 황송해진 국회의원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곧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방을 나섰다.그러던 중 장민철은 장하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깜빡하고 무음으로 설정해놓지 않은 탓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장민철에게 집중되었다.덩달아 깜짝 놀란 장민철은 급히 다른 한쪽으로 달려가 수신 버튼을 눌렀다.“하리야, 무슨 일 있어?”하리라는 두 글자를 들은 서주혁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장민철을 바라보았다.
서주혁은 차에 앉아 옆에 있는 서류를 가져다가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티를 냈지만 결국 수신 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입니까?”아들의 목소리를 듣자 명희정의 마음은 말로 이룰 수 없이 아려왔다. 4년 동안 서주혁은 정말 단 한 번도 본가에 돌아가지 않았고 회사와 집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심지어 아이조차 한 번도 데려온 적이 없었다.심씨 가족들은 아직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서주혁은 정말 아이를 잘 보호해 주었다.게다가 서주혁은 진즉 경비원과 도우미들에게 분부하여 심씨 일가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아두었다.지난 4년 동안 그는 거의 폐쇄된 상태로 지내며 그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가끔 반승제와 온시환이 거듭하여 초대해야지만 어쩔 수 없이 외출하곤 했다.그의 변화는 모두가 눈치챌 수 있었다. 현재의 서주혁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고인 물같이 아무런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주혁아, 4년이면 충분하지 않니? 과거 일이라면 내가 잘못했다. 응급처치하고 있을 때 너에게 아이를 포기하란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이 아이가 나중에 자폐증이라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대체 아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쓴 거니? 평생을 아이에게 올인하려고? 엄마가 없어서 자폐증에 걸렸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그냥 돌아와. 내가 주선해줄게. 집에 여자가 있으면 아이 상태도 훨씬 나아질 거다. 아이에게 가장 부족한 건 다름이 아니라 모성애라고.”서주혁의 눈동자에는 순간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스쳐 갔다. 사실 그는 아직도 서보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아버지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지만 서보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루에 많아야 8글자 정도 말하는 게 전부였다. 절대로 먼저 요구하거나 투정을 부리는 일이 없었고 항상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정말 이렇게까지 말이 없을 줄이야.처음 이 이
서재로 가까이 다가가니 맞춤 제작한 작은 책상 앞에 혼자 조용히 앉아있는 서보겸이 눈에 띄었다. 평소 서주혁이 책상 앞에서 회의할 때도 아이는 혼자 조용히 옆에 앉아있었다.서보겸은 정말 서주혁이 몇 마디 물어도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 없었다.“보겸아, 배고프지 않아?”아이를 마주하자 온몸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주혁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보겸에게 다가갔다.“없어요.”“오늘 뭘 봤길래 종일 내려가지 않았던 거야?”그러나 서보겸의 시선은 여전히 그림책에 꽂혀 있었고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빛을 감싸고 있는 듯 보송보송해 보였다.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서주혁도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와 함께 책을 보기 시작했다.그때 아이가 보고 있던 장면은 마침 어머니를 찾고 있는 상황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책은 서보겸이 가장 즐겨 있는 책이었다.서주혁은 그 책 안에 이런 줄거리도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때, 명희정이 했던 말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집에 여자를 들이면 정말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서보겸에게 부족했던 건 바로 모성애였다.그는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보겸아, 아빠가 엄마 찾아줄까?”그러자 고요하기만 하던 서보겸의 눈빛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서주혁을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에 서주혁은 드디어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여기며 내심 기뻐했다. 서보겸만 필요하다면 그는 충분히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서보겸은 다시 고개를 떨구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니요, 싫어요.”단숨에 여섯 글자를 말한 것을 보면 서보겸이 집에 여자를 들이는 것에 대해 극도로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순간 마음이 아파진 서주혁이 천천히 아이를 안아 올렸다.“그래, 찾지 말자. 그럼 지금은 먼저 밥 먹으러 내려갈까? 나중에 서율 누나와 통화하게 해줄게. 응?”설서율은 반승제와
서보겸은 아리를 좋아한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아리가 곁에 있으면 엄마가 옆에 있는듯한 안전감이 느껴졌다.물론 서주혁이 옆에 있어 준다면 그 안전감은 배가 될 것이다.서보겸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리가 가장 좋았다.아리는 오후 내내 밖에서 뒹구는 바람에 꼬리에는 풀잎 몇 개가 달려있기도 했다.서주혁은 옆에서 수건을 가지고 와 아리의 발과 꼬리를 깨끗이 닦아주었고 아리도 얌전히 그의 손길을 즐겼다. 이것은 서주혁이 매일 아리에게 해주는 필수코스였다. 다 닦아주고 나면 아리는 매우 얌전히 침대에 올라가 침대 끝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곤 한다.집에는 원래 다른 강아지도 있었는데 당시 장하리에게 보상해주기 위해 사온 강아지였다. 그러나 장하리는 그의 보상을 원하지 않았고 4년 전, 온시환이 데리고 가 지금도 잘 키우고 있다.침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친 서주혁은 욕실에서 나올 때 아이가 조심스럽게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아리도 귀염성 있게 머리를 내어주고는 서보겸의 손길을 즐겼다.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서주혁은 잠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보겸아, 너 먼저 자. 아빠는 서재에서 업무 좀 보다가 잘게.”“네.”서주혁은 침실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불가피하게 장하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아리와 서보겸은 모두 장하리가 서주혁에게 남긴 두 가지 보물이었고 4년 동안 외로운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그러나 서주혁 또한 장하리가 죽게 된 것도 결국 그의 무정함 때문이었고 그의 잔인함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4년 동안 서주혁은 수없이 많은 밤낮을 장하리의 생각들로 지새웠고 언젠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모습마저 잊어버릴까 두려웠다.4년이라는 시간은 서주혁에게 정말 너무나도 길고 아득한 시간이었다. 어떻게 서보겸을 데리고 키웠는지,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돌이키고 싶지 않을 만큼 길었다..하지만 앞으로 수없이 많은 4년이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