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 저택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강민지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는 코트를 한쪽 소파에 놓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저녁은 먹었나요?”“아가씨께서 입맛이 없다고 하셨어요.”신예준의 시선이 강민지에게 향했다. 그녀는 그가 돌아온 걸 알면서도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가슴이 조금 아려왔지만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그녀 옆에 앉았다.“왜 저녁을 안 먹었어?”“혜인이에게 전화해서 물어볼 게 있어.”신예준은 옆에 있던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비서는 곧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왔다.강민지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서민규에게서 온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짧은 음성 파일이었다.강민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를 낮추고 이어폰을 귀에 대었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신예준의 목소리에는 강한 집착과 미움이 담겨 있었다.“내가 강민지와 결혼하는 건 그저 강민지를 내 곁에 묶어두기 위해서야. 그래야 계속 괴롭힐 수 있잖아. 강민지는 나와 깨끗이 끝낼 수 없을 거야.”강민지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며 손가락이 굳어버린 듯 타자를 하지 못했다.서민규는 그녀가 메시지를 읽은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여러 개의 메시지를 연달아 보냈다.[이건 방금 예준이가 술 마시면서 한 말이에요. 술김에 진심이 튀어나온 거죠. 민지 씨. 예준이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강민지는 서민규의 말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굳이 서민규가 말해주지 않아도 신예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긴 강민지는 성혜인에게 전화해 도망갈 계획을 상의하려 했지만 배 속의 아이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지면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내일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히고 복수만을 꿈꾸는 남자 곁에 묶여 있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밤에 또 한 번 구토하면서 아이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신예준이 그
신예준이 샤워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강민지는 이미 식사를 끝낸 상태였다.그는 다시 물었다.“웨딩드레스는 안 입어볼 거야?”“필요 없어.”강민지는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내일 이 결혼은 성사되지 않을 거라고.그녀는 더 이상 그와 할 말이 없다는 듯 일찍 침대에 누웠다. 신예준은 술에 살짝 취한 상태였지만 결혼식 준비에 필요한 마지막 세부 사항을 디자이너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침대로 올라왔다.강민지는 얕게 숨을 고르며 자는 척했다. 그녀의 연기는 여전히 서툴렀다. 신예준은 그녀를 품에 안으며 조용히 말했다.“민지야.”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지만 신예준은 다시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결국 강민지는 눈을 꼭 감고 계속 자는 척했다.그때 신예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민지야, 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그 말을 들은 강민지는 순간 소름이 돋으며 몸을 떨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민지는 천장을 응시하며 옆에서 신예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안도했다. 다행히 꿈을 꾸는 듯했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잠들었다. 하지만 신예준이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더 들어간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팀이 강민지의 스타일링을 위해 찾아왔다. 신예준도 턱시도를 갈아입으러 갔다. 이번 결혼식은 복잡한 의식을 생략하고 간소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는 강민지가 지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신부 측 사람들이 그녀를 호텔 외부까지 데리고 오기만 하면 신예준은 호텔 밖 레드카펫에서 기다렸다가 강민지의 손을 잡고 함께 예식장에 들어가는 것으로 결혼식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호텔 전체를 대관하고 모든 기자의 출입도 철저히 막았다. 오직 업계 사람들만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강민지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신예준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신예준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강민지의 지인을 들
신예준의 들러리들은 그가 성공한 후 알게 된 몇몇 협력사 대표들이었다. 그의 진정한 친구는 서민규 단 한 명뿐이었다.신예준은 들러리들의 자리를 스치듯 보았으나 서민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중요한 순간에 도대체 어디 간 거야?’신예준은 서민규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신예준은 약간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신 대표님, 강민지 씨가 도망간 것 같습니다.”그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빛은 싸늘하게 변했다.“차는?”“추격 중이었지만 갑자기 도로에 트럭들이 많이 나타나 우리를 가로막았습니다. 결국 강민지 씨의 위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신예준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확 풀어 헤치고 옆에 세워둔 결혼식 차량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액셀을 밟았다. 차는 순식간에 도로를 질주했다.결혼식장 밖에서 기다리던 하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신예준이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운 것으로 보아 큰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뿐이었다.다행히 사회자가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하며 하객들을 호텔 안으로 안내했다.신예준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옆에 있는 장치를 켜고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 속 빨간 점 하나가 도시 외곽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그는 곧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 빨간 점의 위치를 전달했다.도로 위에 온 신경을 집중한 신예준의 눈은 핏발이 섰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더 빨리, 더 빨리.’하늘에는 이미 헬티콥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신예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차를 버리고 헬리콥터에 올랐다.이미 흐트러진 턱시도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헬리콥터에 올라탄 신예준은 여전히 GPS에 표시된 빨간 점을 주시하고 있었다.그가 강민지에게 선물한 팔찌에는 위치 추적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 장치를 사용하게 될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사용하
서민규는 긴장한 나머지 몇 번이나 침을 꿀꺽 삼켰다.전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뒷좌석에 앉아 있던 강민지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와. 민규 씨, 정말 용감하네요. 신예준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다시 보게 됐어요.”그 순간 강민지는 자신이 정말로 남을 이간질하는 비열한 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어차피 이제 곧 따라잡힐 테니 차라리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결혼?자기 집안을 망가뜨린 남자와 결혼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신예준 역시 강민지의 말을 들었고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마치 심장이 거대한 손에 꽉 잡힌 듯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옆에 있던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그에게 어떻게 처리할지를 물어보려 했지만, 신예준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다.그 모습을 본 그 사람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침묵을 지켰다.차는 여전히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지만 이미 열댓 대의 헬리콥터가 차량을 거의 포위한 상태였다.강민지는 이제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말했다.“차를 세우세요.”서민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그들을 쫓는 헬리콥터와 차량들뿐이었다. 이대로 계속 도망가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그는 강민지의 목숨을 걸고 도박할 용기가 없었다.한편 결혼식장에서는 강상원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와 한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다급히 차를 내온 사람의 태도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하객들은 저마다 속삭이며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해했다. 분명 감옥에 있어야 할 강상원이 어떻게 갑자기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강상원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최근 들어 그는 살이 많이 빠져 몸이 매우 쇠약해 보였다.어젯밤 신예준이 갑자기 합의서를 제출했다. 조희서의 합의서까지 함께 법원에 제출되었다.가족들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태도를 밝혔고 게다가 당시의 보상금도 누군가가
강민지는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라서인지 신예준의 보복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차 안에 앉아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신예준은 그녀의 차창 앞에 다다르더니 문을 확 열어젖혔다.강민지는 울었던 것처럼 붉게 충혈된 신예준의 눈동자를 보고 잠시 의아해졌다.하지만 곧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예준 같은 교활한 인간이 눈물을 흘릴 리 없었다.신예준은 강민지를 힘껏 끌어내렸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가슴은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결국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 멀리 있는 차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이때 서민규가 차에서 내려 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신예준은 재빠르게 발차기 한 방으로 서민규를 바닥에 쓰러뜨렸다.서민규는 바닥에 나뒹굴며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강민지는 손목이 아파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놓으라고! 나 너랑 결혼 안 해!”“그럼 합의서도 필요 없다는 거지?”“신예준, 네가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을 리가 없어. 넌 그냥 비열한 악마야. 심지어 아이까지도 네 계획에 넣어두고 있는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그는 결코 합의서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려는 생각뿐이었다.신예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순간적으로 약하게 풀었다. 마치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그는 웃으려고 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힘이 빠졌다.“네 말이 맞아. 난 비열한 인간이야. 너도 네가 임신한 걸 알고 있었구나.”강민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신예준은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그만해. 돌아가서 결혼식 잘 치르자. 아이에게까지 충격 주지 말고.”그의 목소리는 차분해졌다. 옆에 쓰러져 있는 서민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강민지는 그대로 손바닥을 올려 그의 뺨을 때렸다. 그의 얼굴엔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신예준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
강제로 헬리콥터에 들어간 순간, 강민지는 손을 들어 올려 신예준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볼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신예준이 손을 뻗었다.강민지는 신예준이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얼른 눈을 감았다.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이 아닌 그녀의 안전벨트가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채워졌다.‘이 사람... 정말 미쳐버린 건가? 뺨을 때려도 화를 내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꿍꿍인 거지?’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신예준에 강민지는 오히려 더 어리둥절해졌다.지난번에는 강씨 가문을 아예 산산조각내버리더니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꾸미려고...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강민지는 갑자기 엄청난 절망감이 느껴졌다.“신예준 씨, 이제 솔직하게 털어놓지? 대체 뭘 원하는 거야?”안전벨트를 매어주기 위해 고개를 숙였던 신예준이 그 말을 듣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사냥감을 노리는듯한 신예준의 눈빛에 강민지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정말 듣고 싶어?”“그래. 그냥 통쾌하게 다 털어놓지? 난 당신과 알게 된 후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할 짓을 한 적이 없을 텐데. 설령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고 해도 이제 충분하지 않나? 내 뱃속의 이 아이를 봐서라도 말이야.”“그건 나도 알아...”말을 마친 후 그는 또 옆에 있는 담요를 가지고 와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강민지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에게 가장 잘해주었던 사람이라는 건 신예준도 잘 알고 있다.“민지야, 네가 영원히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신예준은 긴장한 마음에 속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강민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아직도 복수가 끝나지 않은 거야? 신예준, 역겨운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이것 봐. 아직 사랑 고백은 하지도 않았는데 강민지는 벌써 신예준을 역겨워하고 있다.신예준 역시 자신을 잘 알고 있기에 굳이 모든 일을 강민지더러 이해해달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다.신예준도 함께 헬리콥터에 올라타는 것을 보니 그녀를 데리고 함께 돌아가려는 모양이다. 여기
헬리콥터가 착륙하고 강민지는 온몸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바닥에 닿는 것조차 두려워진 강민지는 온몸을 웅크린 채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직도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빨리 깨어나자. 빨리 깨어나라고.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조종사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돌리며 조금 전의 상황을 알리고 대표님을 찾으라며 지시를 내렸다.“아가씨, 어떡하실래요? 저와 같이 가실래요? 아가씨께서 움직이지 않으시면 저도 여기에서 아가씨를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강민지는 헬리콥터에서 내릴 힘조차 없었다.신예준이 뛰어내리는 순간, 강민지의 영혼도 함께 산산조각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지금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육체일 뿐이다.머릿속이 찌릿해지며 강민지는 자신을 꼭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아프다. 심장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정말 죽었어?강민지의 그 말 하나 때문에 신예준이 죽었다고?실없는 희망은 그저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고 강민지는 더 깊이 사고할 용기조차 없었다.신이시여, 어서 시간을 돌려주세요.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 그 말을 내뱉지 않을 것이다.신예준이 아무리 악랄한 개자식이고, 악마이고, 소인배여도 그녀는 그가 살아있기를 바랬다.강민지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신예준이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 말은 단지 욱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들었다고? 신예준은 미친 것이 분명하다. 죽으라는 말에 정말 뛰어내리다니.예전에는 그렇게 사랑을 애원해도 말 한번 안 들었으면서 죽으라는 한마디는 왜 그렇게 잘 듣는 거지?입술을 짓이기며 애써 현실을 부정했지만 눈가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흘러내렸고 강민지는 심지어 눈앞의 세상을 똑바로 정시할 수조차 없었다. 뿌옇게 희미해진 세상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신예준과 만나지 않는 건데.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강민지는 이제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신예준의 죽음을 조금 더 강하게 받아들였다면,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그가 뛰어내리는 순간 그토록 넋을 잃고 비천하게 애원하며 낭패를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세상에 어떻게 이런 남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치가 떨릴 정도로 악랄하고 이기적이다.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헬리콥터가 제원 호텔을 향해 날아가는 길에 강민지는 정상적인 사고조차 아예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그녀는 결코 미치지도, 그렇다고 정신을 잃지도 않고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착지 후 스타일리스트는 강민지를 위해 다시 스타일링을 해주었고 신예준도 새 양복으로 갈아입었다.레드카펫으로 끌려갈 때도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다른 사람이라면 지금 어떻게 반항할지 모르겠지만 강민지는 확실히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었다.너무 피곤했다. 이대로 잠이 들어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줄기의 힘이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지라 그녀는 쓰러질 수도 없었다.그에게 손을 잡혔을 때, 강민지는 심지어 그의 손을 뿌리칠 힘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호텔 입구까지 걸어가자 애타게 기다리던 하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그러나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강민지는 무감각하게 그의 손을 잡은 채,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천천히 단상으로 올라갔다.사회자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강민지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그녀는 그저 텅 비어버린 동공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자 옆에 서 있던 신예준이 그녀를 대신하여 답변을 해주었다.“민지도 원하니까 더 이상 묻지 마세요.”그 순간,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해지더니 곧이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다.강민지는 진행자와 교감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신예준을 보자 갑자기 그의 뺨을 때리고 싶어졌다.그러나 마음과 달리 그녀의 손끝은 조금씩 움찔거릴 뿐 여전히 힘없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