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지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에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했다.반 달 전부터 강민지는 피임에 대해 특별히 신경 써왔고 절대 신예준의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게다가 예전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을 때 의사는 그녀가 체질이 약하고 어린 시절 자주 병을 앓아 임신이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신예준이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후 강민지는 그가 곧 그녀에게 흥미를 잃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신예준은 더 자주 그녀를 괴롭히며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몰아붙였다.강민지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혹시 피임이 제대로 되지 않은 걸까?그럴 리가 없었다. 신예준은 늘 그녀가 임신할까 봐 신경 쓰며 콘돔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콘돔을 쓰지 않았다. 대신 강민지가 스스로 피임약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생각할수록 두려움이 몰려왔다.어젯밤 구토를 한 이후로 신예준은 그녀에게 외출을 금지했다. 그녀는 마음속 깊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강민지는 자주 복용하던 피임약을 꺼내 보았다. 약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녀가 평소에 먹던 약과 똑같이 생겼다. 이건 신예준도 모르는 일이었다.이마를 문지르며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방 안에는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베개 옆을 뒤지고 집 안 곳곳을 찾아봤지만 휴대폰은 어디에도 없었다.그제서야 그녀는 휴대폰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도우미에게 휴대폰을 빌리려 했지만 그들 역시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강민지는 소파에 앉아 점점 더 불안해졌다.저녁 무렵 신예준이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곧바로 물었다.“내 휴대폰 어디 뒀어?”신예준은 현관에서 코트를 걸어 놓으며 가볍게 대답했다.“일단 보관해 뒀어. 결혼식 전까지는 전자 기기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겠어.”강민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게 무슨 뜻이야?”신예준은 뒤돌아보며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모레가 결혼식이잖아. 외부의 방해 없이 결
강민지는 마치 온몸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어떤 추측이 있었지만 그 추측이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그렇게 밤이 깊어지자 그녀는 결국 피로를 못 이겨 잠들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신예준은 결혼식 준비로 다시 바빠졌다. 원래 오늘 리허설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강민지가 가고 싶어 하지 않자 그는 억지로 데리고 가지 않고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떠났다.어제부터 오늘까지 신예준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다정했다. 강민지는 그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신예준은 결혼식이 열릴 호텔에 도착했고 현장은 이미 거의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사회자도 현장에 있었고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신예준은 꼼꼼하게 모든 사항을 확인한 후 문제가 없음을 확신하고 서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서민규는 호텔에 도착해 화려하게 꾸며진 결혼식장을 보며 속에서 질투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은 강민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민지가 자신을 그저 장난삼아 대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신예준은 과연 강민지에게 어울리는 사람일까?아니다. 이 세상 누구도 강민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결혼식장을 강민지는 절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신예준은 서민규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오랜 친구였고 신예준은 서민규가 언젠가 여자 문제로 큰일을 칠 것이라고 예상해 왔지만 그 대상이 강민지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민규야, 사회자랑 맞춰봐. 내일 들러리 동선까지 다 짰으니까.”서민규는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표정 관리에 신경 썼다. 신예준 앞에서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툴렀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어쩐 일인지 이상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옆에 늘어뜨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서민규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반드시 강민지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리라.모든 확인을 마쳤을 때는 이미 오후가 되었다. 서민규가 물었다.“술이나 한잔할래?”기분이 좋은
“예준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너도 희서가 얼마나 슬프게 우는지 들었잖아. 너 예전에는 절대 희서를 울게 하지 않았잖아. 그때 넌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희서에게 선물을 사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했잖아. 회서를 좋아한다고 평생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네 행동은... 솔직히 말해서 쓰레기랑 다를 바가 뭐야?”신예준은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민규야, 넌 내가 희서한테 잘해줬다고 생각해?”“당연하지. 넌 희서한테 정말 뭐 하나 부족함 없이 해줬잖아. 그래서 난 너희가 정말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어.”“희서가 원하는 게 뭐든지 어떻게든 손에 넣었어. 비싸든 내가 보기에 별로 가치가 없든 상관없었지. 그냥 내가 희서한테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우리 집안이 희서한테 빚진 게 많았으니까. 사실 희서의 요구는 가끔 무리한 것들이 많았어. 학교 다닐 때도 명품을 좋아했지.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주고 장학금도 항상 먼저 희서한테 줬어. 희서한테 잘해주는 건 나한테 당연한 일이었고 나도 진심으로 희서를 보호하고 싶었어.”신예준은 술 한 모금을 마시고 손에 쥔 잔을 천천히 돌렸다.“희서가 병에 걸린 뒤로 의료비를 대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고 심지어 사채까지 손을 댔어. 만약 우리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내가 더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하셨을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는데, 도대체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해?”“그러니까, 넌 희서랑 결혼해야 하는 거잖아. 너희는 어릴 때부터 함께했고 서로 사랑했잖아. 희서는 널 그토록 사랑하는데, 네가 내일 정말 결혼하면 희서는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내 계획대로라면 맞아, 나는 희서랑 결혼해야 해.”“그럼 왜...”서민규가 더 물어보려 했을 때 신예준이 말을 끊었다.“내가 왜 강민지와 결혼하냐고?”이건 업계에서도 모두가 궁금해하는 일이었다. 신예준이 협력사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듣는 질문이었다. 강민지를 도대체 어떻게 할 계획이냐는 질문이 항상 뒤를 따랐다.모두
신예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 저택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강민지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는 코트를 한쪽 소파에 놓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저녁은 먹었나요?”“아가씨께서 입맛이 없다고 하셨어요.”신예준의 시선이 강민지에게 향했다. 그녀는 그가 돌아온 걸 알면서도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가슴이 조금 아려왔지만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그녀 옆에 앉았다.“왜 저녁을 안 먹었어?”“혜인이에게 전화해서 물어볼 게 있어.”신예준은 옆에 있던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비서는 곧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왔다.강민지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서민규에게서 온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짧은 음성 파일이었다.강민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를 낮추고 이어폰을 귀에 대었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신예준의 목소리에는 강한 집착과 미움이 담겨 있었다.“내가 강민지와 결혼하는 건 그저 강민지를 내 곁에 묶어두기 위해서야. 그래야 계속 괴롭힐 수 있잖아. 강민지는 나와 깨끗이 끝낼 수 없을 거야.”강민지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며 손가락이 굳어버린 듯 타자를 하지 못했다.서민규는 그녀가 메시지를 읽은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여러 개의 메시지를 연달아 보냈다.[이건 방금 예준이가 술 마시면서 한 말이에요. 술김에 진심이 튀어나온 거죠. 민지 씨. 예준이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강민지는 서민규의 말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굳이 서민규가 말해주지 않아도 신예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긴 강민지는 성혜인에게 전화해 도망갈 계획을 상의하려 했지만 배 속의 아이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지면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내일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히고 복수만을 꿈꾸는 남자 곁에 묶여 있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밤에 또 한 번 구토하면서 아이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신예준이 그
신예준이 샤워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강민지는 이미 식사를 끝낸 상태였다.그는 다시 물었다.“웨딩드레스는 안 입어볼 거야?”“필요 없어.”강민지는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내일 이 결혼은 성사되지 않을 거라고.그녀는 더 이상 그와 할 말이 없다는 듯 일찍 침대에 누웠다. 신예준은 술에 살짝 취한 상태였지만 결혼식 준비에 필요한 마지막 세부 사항을 디자이너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침대로 올라왔다.강민지는 얕게 숨을 고르며 자는 척했다. 그녀의 연기는 여전히 서툴렀다. 신예준은 그녀를 품에 안으며 조용히 말했다.“민지야.”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지만 신예준은 다시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결국 강민지는 눈을 꼭 감고 계속 자는 척했다.그때 신예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민지야, 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그 말을 들은 강민지는 순간 소름이 돋으며 몸을 떨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민지는 천장을 응시하며 옆에서 신예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안도했다. 다행히 꿈을 꾸는 듯했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잠들었다. 하지만 신예준이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더 들어간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팀이 강민지의 스타일링을 위해 찾아왔다. 신예준도 턱시도를 갈아입으러 갔다. 이번 결혼식은 복잡한 의식을 생략하고 간소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는 강민지가 지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신부 측 사람들이 그녀를 호텔 외부까지 데리고 오기만 하면 신예준은 호텔 밖 레드카펫에서 기다렸다가 강민지의 손을 잡고 함께 예식장에 들어가는 것으로 결혼식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호텔 전체를 대관하고 모든 기자의 출입도 철저히 막았다. 오직 업계 사람들만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강민지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신예준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신예준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강민지의 지인을 들
신예준의 들러리들은 그가 성공한 후 알게 된 몇몇 협력사 대표들이었다. 그의 진정한 친구는 서민규 단 한 명뿐이었다.신예준은 들러리들의 자리를 스치듯 보았으나 서민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중요한 순간에 도대체 어디 간 거야?’신예준은 서민규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신예준은 약간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신 대표님, 강민지 씨가 도망간 것 같습니다.”그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빛은 싸늘하게 변했다.“차는?”“추격 중이었지만 갑자기 도로에 트럭들이 많이 나타나 우리를 가로막았습니다. 결국 강민지 씨의 위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신예준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확 풀어 헤치고 옆에 세워둔 결혼식 차량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액셀을 밟았다. 차는 순식간에 도로를 질주했다.결혼식장 밖에서 기다리던 하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신예준이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운 것으로 보아 큰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뿐이었다.다행히 사회자가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하며 하객들을 호텔 안으로 안내했다.신예준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옆에 있는 장치를 켜고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 속 빨간 점 하나가 도시 외곽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그는 곧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 빨간 점의 위치를 전달했다.도로 위에 온 신경을 집중한 신예준의 눈은 핏발이 섰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더 빨리, 더 빨리.’하늘에는 이미 헬티콥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신예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차를 버리고 헬리콥터에 올랐다.이미 흐트러진 턱시도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헬리콥터에 올라탄 신예준은 여전히 GPS에 표시된 빨간 점을 주시하고 있었다.그가 강민지에게 선물한 팔찌에는 위치 추적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 장치를 사용하게 될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사용하
서민규는 긴장한 나머지 몇 번이나 침을 꿀꺽 삼켰다.전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뒷좌석에 앉아 있던 강민지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와. 민규 씨, 정말 용감하네요. 신예준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다시 보게 됐어요.”그 순간 강민지는 자신이 정말로 남을 이간질하는 비열한 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어차피 이제 곧 따라잡힐 테니 차라리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결혼?자기 집안을 망가뜨린 남자와 결혼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신예준 역시 강민지의 말을 들었고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마치 심장이 거대한 손에 꽉 잡힌 듯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옆에 있던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그에게 어떻게 처리할지를 물어보려 했지만, 신예준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다.그 모습을 본 그 사람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침묵을 지켰다.차는 여전히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지만 이미 열댓 대의 헬리콥터가 차량을 거의 포위한 상태였다.강민지는 이제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말했다.“차를 세우세요.”서민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그들을 쫓는 헬리콥터와 차량들뿐이었다. 이대로 계속 도망가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그는 강민지의 목숨을 걸고 도박할 용기가 없었다.한편 결혼식장에서는 강상원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와 한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다급히 차를 내온 사람의 태도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하객들은 저마다 속삭이며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해했다. 분명 감옥에 있어야 할 강상원이 어떻게 갑자기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강상원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최근 들어 그는 살이 많이 빠져 몸이 매우 쇠약해 보였다.어젯밤 신예준이 갑자기 합의서를 제출했다. 조희서의 합의서까지 함께 법원에 제출되었다.가족들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태도를 밝혔고 게다가 당시의 보상금도 누군가가
강민지는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라서인지 신예준의 보복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차 안에 앉아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신예준은 그녀의 차창 앞에 다다르더니 문을 확 열어젖혔다.강민지는 울었던 것처럼 붉게 충혈된 신예준의 눈동자를 보고 잠시 의아해졌다.하지만 곧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예준 같은 교활한 인간이 눈물을 흘릴 리 없었다.신예준은 강민지를 힘껏 끌어내렸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가슴은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결국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 멀리 있는 차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이때 서민규가 차에서 내려 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신예준은 재빠르게 발차기 한 방으로 서민규를 바닥에 쓰러뜨렸다.서민규는 바닥에 나뒹굴며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강민지는 손목이 아파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놓으라고! 나 너랑 결혼 안 해!”“그럼 합의서도 필요 없다는 거지?”“신예준, 네가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을 리가 없어. 넌 그냥 비열한 악마야. 심지어 아이까지도 네 계획에 넣어두고 있는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그는 결코 합의서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려는 생각뿐이었다.신예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순간적으로 약하게 풀었다. 마치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그는 웃으려고 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힘이 빠졌다.“네 말이 맞아. 난 비열한 인간이야. 너도 네가 임신한 걸 알고 있었구나.”강민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신예준은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그만해. 돌아가서 결혼식 잘 치르자. 아이에게까지 충격 주지 말고.”그의 목소리는 차분해졌다. 옆에 쓰러져 있는 서민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강민지는 그대로 손바닥을 올려 그의 뺨을 때렸다. 그의 얼굴엔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신예준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
전화를 받은 공지민이 쇼핑몰에 있다는 말에 온시환은 곧장 그녀를 찾아갔다. 그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명품 브랜드의 물건들을 사주었지만 공지민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온시환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공지민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애써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자신이 우스웠다.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과거에 겪은 괴롭힘과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왜 지민이를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아니, 왜 예전에 지민이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을까?’온시환은 자신을 자책했다.“이게 다 마음에 안 들면 해외 패션쇼에서 이번 시즌 신상을 직접 공수해 오라고 할게. 지민아, 너 이제 내 아내야. 그 정도는 좀 인식하고 살아줬으면 좋겠어.”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차에 올라타 있었고 뒷좌석에 쌓인 값비싼 선물들을 힐끗 본 뒤 마지못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난 사과를 좋아하는데 억지로 배를 쥐여주고 기뻐하라니, 그게 말이 돼요?”순간 자동차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온시환은 핸들을 꽉 쥐며 낮게 말했다.“내가 너한테 빚졌어?”공지민을 기쁘게 해주려 할수록 그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조금의 부드러운 말조차 하지 않았다.“내려.”공지민은 그 말에 굴하지 않고 문을 열어 대뜸 차에서 내렸다.온시환은 핸들을 세게 내려치며 잠시 고민했다. 그제야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그녀를 찾겠다고 나왔으면서 정작 그녀를 내쫓아버렸으니.그는 바로 차를 몰고 그녀가 있는 쪽으로 갔다. 공지민은 여전히 길가에 서 있었다.차창을 열며 그는 말했다.“타. 방금 한 말은 화가 나서 그랬던 거야.”하지만 공지민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다른 골목으로 걸어갔다.“공지민!”온시환은 화가 나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차에서 내려 그녀를 뒤쫓았다. 하지만 그가 골목 안으로 들어섰을 때 공지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초조해진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
연승혁의 눈에는 흥미로운 기색이 스치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공지민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좋아요, 한 번 먹어볼게요.”메뉴판이 금세 나왔고 가장 비싼 메뉴도 한 꼬치에 고작 2천 원이었다.공지민은 성의 있게 설명을 덧붙였다.“여기 오뎅은 전부 수제로 만들었어요. 재료도 신선하고 국물은 오래 끓인 뼈 육수라서 정말 맛있어요. 첨가물도 전혀 없고요. 승혁 씨 식사량이 많은 편이면 메뉴에 있는 걸 전부 시켜도 될 것 같아요. 우리 둘이 다 먹을 수 있을 거예요.”연승혁은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지만 흥미를 느껴 메뉴에 있는 모든 것을 주문했다.곧이어 커다란 그릇 두 개가 나왔는데 하얀 국물 위에 빨간 고추가 살짝 떠 있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공지민은 먼저 한 입을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가를 손바닥으로 부채질했다. 너무 뜨거워 입천장이 덴 모양이었다.그 모습을 본 연승혁은 피식 웃으며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어 먹었다.첫입에 그는 살짝 놀랐다.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과 한마디 나누려 했지만 그녀는 오롯이 음식을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조용히 그릇을 비웠고 공지민은 일어나 계산을 했다. 그는 사장 아주머니가 말한 금액을 들었다.“1만 8천 원이요.”고작 2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그 순간 연승혁은 어이가 없어졌다. 공지민이 자리로 돌아오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한테 이런 걸 대접한 거예요?”공지민은 태연하게 말했다.“승혁 씨가 저한테 밥을 사라고 했잖아요. 제가 사는 건데, 뭘 먹을지는 제가 정하죠. 그리고 저 요즘 돈 없어요.”돈이 없다는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그녀를 보며 연승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두 사람의 차는 모두 견인되어 수리를 맡겨야 했다. 결국 그들은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렸다.그때 공지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온시환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은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나 친구랑 뭐 좀 먹고 있어요.”친구라는 사람은 바로 연
원아정은 그날 밤,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연승혁이 이미 화가 난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고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였다.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색한 분위기에 서둘러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다. 이런 민감한 일이 퍼지면 자신들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아정은 너무 빠르게 말을 쏟아내며 그들에게 떠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연승혁은 주위 사람들을 스치듯 둘러보며 미소인지 냉소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미안한데, 다 나가줄래?”이 방 안에서 중심에 있던 사람은 늘 연승혁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능력은 물론 연씨 가문의 막강한 배경 덕분에 그는 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일어나 방을 나갔다.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이제 남은 사람은 원아정과 연승혁뿐이었다.연승혁은 천천히 술잔을 채우며 그녀의 두려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태연하게 말했다.“계속 말해봐.”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원아정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들은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세우고 약혼 파기라는 수모를 만회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시선이 연씨 가문의 사생아 문제에 쏠려버렸다.원아정은 입을 닫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날아오는 것을 느껴 머리를 홱 돌려 피했다. 그것은 술병이었다.“원아정, 내가 널 정말 과소평가했네.”연승혁의 말에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고 서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오빠, 우리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나를 이렇게 쉽게 버리면 내가 얼마나 헛된 기대를 했던 건지, 오빠는 모를 거예요.”헛된 기대라니. 연승혁은 그 말이 우습게 느껴졌다. 원아정이 자신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문자로 분명히 말했잖아. 끝났다고. 그런데도 내 앞에서 이런 꼼수를 부리면 내일 아침
모두의 시선이 연승혁에게 쏠렸다.연승혁은 그날 밤 연씨 가문 저택에 머물지 않았고 안정숙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묻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집안의 지시에 따라 원아정과 완전히 선을 그었을 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머릿속에 공지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웃기게도 그는 원래 드라마를 즐겨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지민이 출연했던 드라마만은 지루할 때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녀를 보고 나쁘지 않은 정도로 생각했었다.공지민은 처음에는 크게 눈에 띄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연기를 할 때 드러나는 뼛속 깊은 강인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특히 자신처럼 망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강인한 존재는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늘 단단한 무언가를 부수고 싶어 하는 충동을 느꼈고 그녀가 무너질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연승혁은 깨끗한 존재를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존재가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때 누군가가 말했다.“원아정이 왔어. 승혁이 찾으러 온 건가 본데?”그 말이 끝나자마자 원아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연승혁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만큼, 이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금세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승혁 오빠...”연승혁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문자로 그렇게 분명히 말했는데도 왜 또 찾아온 걸까?그는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일이야?”원아정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승혁 오빠, 나 정말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우리 다시 안 되는 거예요?”그 순간 방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떠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몇몇은 연승혁에게 그녀를 용서하라고 부추기기도 했다.연승혁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
두 번째 친자확인 검사 결과는 아주 빨리 나왔고 첫 번째 결과와 동일했다.공지민이 바로 당시 연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그 아이임이 확정되었다.안정숙은 기쁨과 감격에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공지민이 고등학교 시절 심각한 괴롭힘을 당했던 일과, 부모와 남동생마저 교통사고로 잃고 고생했던 세월을 떠올리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정호야, 네가 꼭 지민이를 데려와야 한다. 지금은 결혼했더라도, 지민이는 결국 우리 연씨 가문의 아이야. 어떻게 우리 손녀가 밖에서 고생하게 둘 수 있겠니? 게다가 온시환이라는 아이는 너무 바람기가 많아. 다들 그 자식이 여러 여자들에게 관심을 두는 걸 알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지민이를 그런 사람에게 맡기겠니.”연정호는 친자 확인 결과를 보며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머니, 제가 직접 가서 지민이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서둘러야 해. 내 손녀가 밖에서 더 이상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아. 그동안 내가 원아정을 손녀처럼 아껴왔다는 게 너무 후회돼. 아정이가 지민이를 그렇게 괴롭혔다니, 지민이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지?”“그럴 리 없어요. 연씨 가문이 지민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온씨 가문의 젊은이도 지민이를 설득하는 데 도움을 줄 거예요.”안정숙은 그제야 안심하며 말했다.“이 일은 승혁이에게는 당분간 알리지 말자. 사실 승혁이가 아정이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잖니. 단지 아정이가 승혁이를 구해준 적이 있고, 내가 아정이를 아꼈기 때문에 결혼을 받아들였던 거야. 이제 결혼식이 취소됐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승혁이와 아정이는 다시는 서로 얽히지 않도록 해야 해.”“알겠습니다. 제가 잘 이야기해 볼게요.”안정숙은 감정의 기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어머니, 먼저 쉬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안정숙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그래. 이젠 네게 맡길게. 이걸로 내 평생소원이 다 이루어진 것 같구나.”연정호는 어머니를 공손히
원아정이 갑작스럽게 무릎을 꿇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공지민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학교 다닐 때 내가 철이 없어서 계속 괴롭혔어. 이제야 내 잘못을 깨달았어. 제발 나를 용서해 줄래?”공지민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용서한다고도, 용서하지 않겠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원아정을 그대로 무릎 꿇린 채 두었다.원아정은 억울함과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도 그녀를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더 큰 수치로 다가왔다.입술은 피가 맺힐 정도로 깨물었고 옆에 늘어뜨린 손은 분노를 억누르려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체 뭘 더 하라는 거야?’속으로 치를 떨며 생각했다.‘공지민, 이 죽일 년!’하지만 방 안에 안정숙, 연승혁, 연정호가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계속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흐르고 공지민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결국 원아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이미 사과했잖아. 이제 너도 뭐라도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공지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이 자리를 떠나겠다는 태도였다.온시환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지민아?”공지민은 잠시 멈춰 섰다가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제가 뭘 말해야 하죠? 용서한다고요? 저는 저를 괴롭혔던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은 쟤가 또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네요.”그녀는 온시환의 손을 밀쳐내며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였다.안정숙은 당황한 듯 그녀를 붙잡으려 일어나며 말했다.“지민아, 오해하지 말렴. 오늘 너를 부른 건 원아정을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야. 나는 아정이가 과거에 잘못했던 일들을 다 알고 있어. 넌 피해자야. 단지 너에게 사과를 시키고 싶었을 뿐이야.”안정숙의 말에 공지민은 잠시 망설였고 결국 천천히 돌아와 자리에 다시 앉았다.탁자 위에는 다양한 과일이 놓여 있었다. 온시환이 그중 하나를 집어 그녀의
한편, 공지민은 조용히 별장에 머물렀다. 염정아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그저 온시환과 함께 둘만의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온시환은 지금의 이 행복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한낱 신기루처럼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휘감았다.공지민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연씨 가문의 친자 확인 결과가 곧 나올 것임을 예상하였다. 오히려 지금 초조할 사람들은 연씨 가문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조만간 자신을 찾아오리라 믿었다.역시나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연씨 가문 측에서 직접 차를 몰고 와 그녀를 만나려 했다. 결혼식에서 일어난 일과 관련하여 원아정이 직접 사과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온시환은 공지민과 함께 가겠다고 나섰지만 그녀는 그를 말렸다.“집에서 기다려요. 금방 돌아올게요.”“안 돼. 네가 무슨 일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온시환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너 혼자 못 가. 반드시 나랑 같이 가야 해.”결국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고집을 받아들였다.두 사람이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을 때 원아정은 이미 와 있었지만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전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한 듯 초췌한 모습이었다.그녀는 단톡방의 메시지를 차마 확인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녀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예전에 그녀와 어울리던 가식적인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걱정하는 척하며 연락을 해왔다. 사실은 결혼식에서 일어난 일을 캐내려는 심산이었다.결혼식에서의 소동은 이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원아정은 이를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했다. 어떻게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문으로 들어오는 공지민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공지민은 그녀를 보자마자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고, 온시환의 뒤로 몸을 숨겼다.그 모습을 본 온시환은 문득 원아정의 생일 파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공지민은 어딘가 이상했다. 하지만 당시 원아정이 두 사람이
원아정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치를 떨었다. 예전엔 공지민을 가장 하찮게 여기며 무시했는데 그 하찮게 여겼던 사람이 결국 자신에게 이렇게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하다니.‘빌어먹을 공지민! 네가 나를 망치려 한다면 나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원아정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고 지금 당장이라도 공지민을 찾아가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진이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겨우 분노를 억눌렀다.결국 원아정은 집으로 돌려보내졌다.한편, 공지민은 여전히 온시환의 품에 조용히 안겨 있었다.온시환은 그녀가 정말 놀라서 겁 먹은 줄 알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당분간 집에서 푹 쉬어. 원아정과 연승혁의 혼사는 이제 끝난 것 같아. 그런데 어르신이 갑자기 네 편을 드는 게 이상하네.”공지민은 눈을 감은 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마도 지금쯤 친자 확인을 서두르고 있겠지.’그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안정숙은 하객들을 뒤로한 채 연씨 가문의 장남이자 연승혁의 아버지인 연정호를 집으로 불러들였고 서둘러 친자 검사를 진행했다.연정호는 오랜 시간 외국에서 기밀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집에 거의 들를 기회가 없는 사람이었다.“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연정호의 목소리에는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그의 아내는 딸을 잃은 뒤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일로 마음의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그 사건 이후 안정숙은 특히나 연승혁에게 애정을 쏟았다.안정숙은 침착하게 말했다.“별일은 아니고. 집에 며칠만 머물러, 정호야. 아직 확실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자세히 말할 수 없어.”연정호는 이마를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지금도 일 때문에 바빠 죽겠어요, 어머니.”“그런 건 모르겠고, 이번엔 아무리 바빠도 무조건 시간 내!”평소 고집을 부리지 않던 어머니의 단호한 태도에 연정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사흘, 딱 사흘 동안 집에 있을게요. 하지만 나중에 꼭 제대로 설명해 주세요. 결혼식을 중단시켰다고 들었는데, 두 가문의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진실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조사가 필요없을 정도로 분명했다.원아정과 오예슬은 평소에도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서로의 사진을 SNS에 올리거나 함께 쇼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오예슬이 갑자기 원아정을 배신하며 폭로한 것은 분명 현장의 분위기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더구나 안정숙이 진위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만약 공지민이 진짜 잃어버린 손녀라면 그녀가 이런 끔찍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안정숙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안정숙은 지팡이를 단단히 쥐고 멀리 있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아정아, 더 할 말 있어?”원아정은 속으로 오예슬을 한 대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게다가 그때 저질렀던 괴롭힘은 숨기지도 못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조금만 학교에 조사를 요청하면 금방 드러날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부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녀는 공지민이 이런 순간에 왕따 사건을 폭로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안정숙이 마치 홀린 듯 공지민을 편드는 모습에 어리둥절했다.“할머니, 그땐 제가 너무 어렸어요. 제가 잘못한 줄도 모르고 한 행동들이었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안정숙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지난번 사찰에서 공지민과 원아정이 다투는 모습을 봤을 때는 공지민이 성격이 지나치게 급하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공지민은 갑작스럽게 괴롭힘 가해자를 마주했기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원아정은 재빨리 다가가 안정숙의 손을 잡았다.“할머니, 용서해 주세요. 오늘은 제 결혼식이에요.”결혼식을 언급하며 그녀는 안정숙의 태도를 살폈다. 이 결혼식이 계속될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안정숙은 그녀의 손을 홱 뿌리치며 단호히 말했다.“이 일은 내가 철저히 조사할 거야. 아정아, 그때 네 나이가 어리지도 않았을 텐데,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