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하늘가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마지막 햇빛 한 줄기마저 전부 사라지자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자신이 가택연금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온 가족이 거실에 앉아 그저 조용히 바깥에서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양측의 대화는 이미 끝나버렸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그들의 생명은 현재 모두 백겸의 손에 달려 있다.그러나 백겸은 현재 이미 미쳐버렸다. 아니, 어쩌면 옛날에 진즉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이윽고 백겸은 자리에 다시 앉아 천천히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바깥에서 더 이상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백겸은 더욱 빈정거리며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하여 그는 뒤에 있던 반재인에게 말을 건넸다.“재인아, 저 사람들 좀 봐라. 처자들이 위험에 처하니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잖니. 참말로 도덕군자인 양 점잔을 빼고 있네. 이 사람들이 대체 나와 무슨 차이가 있냐?”그러자 반재인은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답했다.“선생님, 차 드세요.”백겸은 반재인이 건네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물었다.“참, 오혜수 쪽은 어떻게 되었냐?”“오혜수 씨는 진짜 반승제를 데려갔지만 설기웅이 쉽게 속아주지 않더군요. 원래는 직접 쫓아갈 거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곧바로 설씨 가문으로 하여금 기자회견을 열게 하더라고요.”“그래도 뭔가 뜻이 있나 보군.”백겸은 차 반 컵을 마시고 수면창 안에서 깊게 잠들어 있는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아쉽게도 성혜인은 임신 중이라 데이터가 불안정하네. 임신만 아니었어도 가장 먼저 실험했을 텐데.”솔직히 백겸은 아들보다 아내가 더 마음에 걸렸다.“선생님, 걱정 마세요. 오늘 밤 11시면 수술이 끝날 거라고 박사님이 말씀하셨어요.”그러자 백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미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게다가 이제 곧 나설희가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렇게 오랜
그러자 사라는 또 김상아를 다독여주며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기억하고 있잖아요. 상아 씨는 옆에서 협조만 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호들갑은 떨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요. 백겸 선생님께서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상아 씨도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잖아요.”반재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김상아는 사라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반승제와 너무 비슷한 얼굴을 한 반재인이 바로 옆에 있으니 김상아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심지어 이 중요한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반재인에게 향하곤 했다.그리고 이 순간에 사라의 위로를 듣고 나니 김상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협조할게요.”하여 사라는 눈을 내리깔고 계속하여 그 안에 약물을 투입했다.하지만 곧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자 김상아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사라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고개를 들어 김상아를 바라보았다.김상아의 행동에 대해 경고한 지 불과 30분이 지났고 현재 저녁 7시가 되었다.같은 시각, 하늘에는 희미한 저녁노을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김상아는 사라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굳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박사님, 저 약물에 대한 이해는 박사님보다 못할지도 모르지만 저도 연구기지에 오래 머물면서 천재로 불리던 사람입니다. 박사님 약물은 서주혁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깨우기 위한 약물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던 반재인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이윽고 김상아는 일찌감치 텅 비어버린 시험관을 보며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틀릴 수는 있어도 그 번호를 전부 틀릴 수는 없어요.”두 사람의 소란에 반재인이 성큼성큼 걸어와 어두운 안색으로 캐물었다.“어찌 된 일입니까?”그러자 김상아는 옆 서랍을 가리키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사라 박사님께서 오늘 오전에 외출한 후, 작은 물건 몇 개를 가지고 오더니 오늘따라 뭔가 이상해졌어요. 혹시 그 작은 물건들에 영향을 받아 기억이 회
사라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구성 전에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여러 시약을 계속 투입하기 시작했다.한편, 김상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반승제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녀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정말 당장이라도 서주혁의 몸에서 실험을 시작하고 싶을 지경이다.같은 시각, 방 안에서 가장 평온한 사람은 오히려 백겸이다.그는 심지어 반재인 더러 스테이크와 와인을 준비하도록 지시한 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천천히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밖에 있는 저격수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 지역에도 이미 백겸 측의 사람을 마련해두었고 그에게도 저격수가 있다. 만약 누가 감히 이곳에 침입한다면 바로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땅에는 폭탄이 매설되어 있고 손안에는 인질도 많았다.이번에야말로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승리를 만끽하며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다가 옆에서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은 피아노를 보며 반재인에게 물었다.“재인아, 지금 상황에 맞는 곡을 연주해 봐.”반재인의 모든 것은 백겸이 가르친 것이다.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기술도 포함해서 말이다.백겸은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젊었을 때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도 알았는데 심지어 그 실력도 엄청났다.심지어 당시 나설희가 피아노를 칠 때 옆에서 바이올린을 켜서 상대방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두 사람은 더욱이 소꿉친구였기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약혼했다.반재인은 옆에 있던 구형 피아노 앞에 앉아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와인을 한 모금 마신 백겸은 창밖으로 이따금 날아가는 헬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새벽 6시 반, 실험은 제시간에 시작되었다.사라는 이미 서주혁에게 다가가 첫 번째 약물을 주입하였고 밖에서는 갑자기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백겸은 앞에 놓인 와인을 우아하게 흔들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이 일은 거의 모두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자살이라니.하지만 나설희는 확실히 자살한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백겸도 모른다.그는 줄곧 자신의 결혼생활이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내와 부부 관계가 화목하고 아들도 활발하게 잘 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백발이 되도록 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해봐도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그 후 나경택과 아내는 너무 슬퍼 바로 이 구역에서 물러나며 더 이상 외부 일을 상대하지 않았다.그렇게 백겸도 그때부터 명목상의 장인어른을 만난 적이 없었다.그리고 현재 백겸은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나경택을 보고 나서야 나설희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나경택의 모습은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긴 노인처럼 심지어 걸을 때도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아마도 백겸이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백겸은 순간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뒤로 물러섰고 나경택은 곧바로 집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는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며 옆에 있는 반재인에게 알렸다.“재인아, 네가 내려가서 어르신께 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전해라.”반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뛰쳐나갔다.백겸은 나경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반재인을 바라보았는데 나경택은 숨을 헐떡이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이윽고 반재인은 다시 백겸에게 뛰어왔고 조금 망설이는 듯 말을 더듬었다.“선생님, 어르신께서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어젯밤에 어르신의 부인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즉 선생님의 장모님 말씀입니다. 어르신께서 선생님께 전해주고 싶은 편지가 있으시다는데 나설희 사모님께서 남긴 편지라고 합니다. 직접 선생님께 주고 싶다고 합니다.”나설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에 관한 수수께끼가 잔뜩 남아 있었다.처음 3년 동안 백겸은 계속하여 꿈을 꾸었다. 아주 작은 기억부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아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반승제의 비서인 심인우였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백연서는 반승제에게 돌아와서 저녁밥이나 먹으라고 했지 성혜인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성격으로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안 올수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심인우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래, 승제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대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렴.”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백연서는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손을 휘적였다.“너도 이만 돌아가. 승제가 시간 있을 때 다시 부를 테니까.”“네.”성혜인은 애초부터 남아서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심인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흐릿한 뒷모습 만으로도 반승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혼 서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성혜인은 빨간불을 기다리며 회사 단톡방을열어 봤다.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톡방은 아주 시끄러웠다.‘반승제가 이번에 결혼하러 돌아왔다면서요? 네이처 빌리지에 비싼 값을 주고 펜션을 샀다고 하던데 곧 인테리어도 하겠죠?’‘사장님이 반승제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실내 디자인 일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을까요?”“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엄청 덕을 보겠는데요? 반승제 정도의 재벌이라면 일은 둘째 치고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요...”반승제가 결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뉴스에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일이었다.이 화제에 관심 없었던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 양한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지금 잠깐 문라이트로 올 수 있어? 네가 디자인했던 펜션에 관심 있는 고객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