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성혜인은 이미 대학에 와 있었다.이 대학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로써 순위는 제원대와 막상막하이다. 그런데 서른밖에 되지 않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연이 이곳에서 교수직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우수한 인재임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고 배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목도리를 둘러 부드러움을 연출해낸 당시연의 시선이 곧장 성혜인에게 몇 초간 머물렀다. 이윽고 상황파악을 하던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천천히 다가가 망설이며 물었다.“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바로 그때, 성혜인이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공간에서 부딪혔다.그리고 당시연은 성혜인을 알고 있는 듯 조금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은... 혹시 S.M의 성혜인 씨?”올 한 해 동안 S.M이 워낙 눈에 띄었는지라 그룹 대표인 성혜인의 개인 정보도 이미 사람들에 의해 수백 번 털려버렸다.게다가 반승제와 스캔들까지 터지는 바람에 실검까지 올라갔었다.이에 조금 민망해진 성혜인은 비로소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깨닫고 다시 허리를 폈다.“아, 저 맞습니다.”그러자 당시연은 귓가의 머리카락 한 올을 뒤로 넘기며 입술을 오므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난번에 병원 밖에 있을 때도 혜인 씨를 만났는데... 혜인 씨는 그때 저를 찾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인 씨 회사에 제 학생이 있습니다. 아직 정식 데뷔는 아니지만 대우가 좋다고 얼마나 칭찬해대는지...”그 말을 들으니 성혜인은 더 어색해지고 말았다. 원래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그녀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계획이었으나 당시연이 그녀를 알고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임신하며 지능까지 수직으로 하락한 것인지 모를 노릇이다.“아, 그것참 영광이네요. 저도 확실히 시연 씨를 찾을 일이 있어요. 전에 들은 바로는 영어 선생님이시라면서요?”당시연은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나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한없이 작아지는 당시연에 성혜인은 또다시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혹시 원진이 아직 24살이라 30살인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감히 고백하지 못했던 걸까?하지만 원진이 먼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가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시연은 약혼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그래서 원진은 줄곧 당시연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지금에 와서 결국 참지 못하고 몰래 그녀의 삶을 염탐하면서도 그녀와 만나지 않는 것이다.“최근 승제 씨가 원진 씨에게 밥을 사주려고 하는데 시연 씨도 시간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두 분은 이미 안면이 있으시고 저도 시연 씨와 친구로 지내고 싶으니 이 기회에 시연 씨도 같이 오시겠어요?”그러자 당시연은 처음에는 멍하니 넋을 잃더니 그 뒤에는 안절부절못하며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오므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성혜인도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기다려주었다.그렇게 10초 후에야 당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지만 그 사람은 저를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당시 조금 불쾌하게 끝나버렸으니까요.”아마 약혼자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성혜인은 순간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다급히 말을 꺼냈다.“좋아요. 주소가 확정되면 보내드릴게요. 혹시 카톡 연락처 교환해도 될까요?”그러자 당시연은 즉시 QR코드를 제시해주었고 두 사람은 친구 추가에 성공했다.성혜인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일은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연 본인이 원한 것이고 아무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이제 서른 살이 되었으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당시연도 잘 알고 있다.그리고 원진에 대해서도 감정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그렇게 성혜인은 대학교에서 나와 차를 타고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갔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흰둥이를 훈련하고 있었다. 흰둥이는 높이 뛰어다니며 훈련을 즐겼고 한편, 겨울이는 다른 한
한편, 성혜인은 방긋 웃으며 당시연을 바라보았다.“들어와요. 자리 남겨놨어요.”당시연은 목에 두른 캐시미어 얇은 목도리를 벗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원진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러나 원진은 똑바로 앉은 채 그녀를 보지 않았다.당시연은 괜히 마음이 쓰려와 성혜인을 따라 룸으로 들어왔다.성혜인이 의자를 당겨주자 당시연도 감사 인사를 표했다.“감사합니다.”조금 전까지도 반승제에게 비아냥거리던 원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당시연이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진아, 오랜만이야.”그러자 원진은 더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몇 초 뒤에야 대충 응해주었다.“네.”당시연은 갑자기 이곳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괜히 그녀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만 같았다.이윽고 성혜인이 그녀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자 그녀는 또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룸 안의 분위기는 확실히 미묘하게 흘러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원진은 마침내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오랜만이에요.”순식간에 달라진 원진의 태도에 반승제는 어이가 없었다. 아마 당시연을 미행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미치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적은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정말 미쳐버리면 시체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말이다.그런데 그런 원진이 현재 눈앞에 있는 그릇을 응시하며 멍하니 앉아있으니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당시연은 예전부터 원진을 살뜰히 돌봐주었다. 게다가 다정한 누나 스타일이라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원진에게 차 한 잔 따라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당시연이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원진이 먼저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그러자 당황한 당시연이 약간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아 미안해. 이미 다 컸다는 걸 까먹었다.”참 씁쓸한 말이었다. 때때로 잠깐 몸을 돌렸을 뿐인데 이미 몇 년이라는 긴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리곤 한다.원진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고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한편
말을 마친 원진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토록 완벽하던 그도 당시연 앞에만 서면 한없이 멍청해지는 것 같다.당시연은 원래 원진에게 음식을 집어주려고 했지만 원진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두 사람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분위기는 일순간 침묵으로 변했다.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성혜인은 반승제의 인정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여 성혜인은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배를 슬쩍 어루만졌다. 그리고 원진의 농담거리를 지켜보고 있던 반승제는 그녀의 이 동작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바로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어디 아파?”“조금요.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요.”“내가 부축해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일어나서 함께 룸을 나섰다.그들이 떠나자 룸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은 더욱 어색해졌다.원진은 당시연에게 차 한 잔을 더 따라주었다.당시연은 눈앞에 나타난 훤칠한 손가락을 쳐다보며 추억에 잠겼다.원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큰 키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안색이 약간 병적인 느낌이 드는 것을 보아 명백한 영양실조였다.그 후 1년 동안 꾸준히 몸조리한 후에야 비로소 회복할 수 있었다.“진아, 수능 끝나고 왜 인사도 없이 갔어? 혹시 우리 부모님이 너 곤란하게 하셨어?”“아니에요.”이번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진이 천천히 앞에 놓인 잔을 쥐어 잡았다.시연 누나라는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묵묵히 원진을 지켜보던 당시연은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그러나 다 쓰다듬은 뒤에야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동작에 충격을 받았고 곧이어 원진은 이미 24살의 성인 남자라는 것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손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쓰다듬어주는 게 익숙해서... 그때 우리 부모님과 심하게 싸우며 듣기 싫은 말들이 오갔는데 아직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네. 어렵게 연락처를 얻
그러자 성혜인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팔짱을 끼며 차에 올라탔다.원진과 당시연만 행복하다면 그녀의 노력도 결코 물거품이 아니다.위층.반승제의 조롱을 받고 원진의 몸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렸다.그는 손을 대지도 않은 눈앞의 요리들을 바라보며 한쪽의 공용 젓가락으로 당시연에게 갈비를 하나 집어주었다.당시연도 원래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 순간, 그녀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어머니였다.당시연은 수신 버튼을 누르고는 조금 허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엄마, 나 오늘 진짜 야근했어. 일부러 안 만난 거 아니야... 그건 나도 알아. 그래, 그럼 한 시간 후에 만나.”전화를 끊은 뒤, 당시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진아, 너 제원에서 며칠 동안 지낼 계획이야? 나 앞으로 며칠 동안은 외지로 출장 갈 것 같은데 혹시 나중에 제원에 다시 오게 되면 그때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까?”어머니가 당시연에게 소개팅 상대를 주선해 주며 이미 그 사람과 약속을 잡았으니 멋대로 바람맞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러자 원진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꺼냈다.“내가 배웅해줄게요.”“나 차 가지고 왔어.”“그럼 저 배웅해줘요.”“....”결국, 두 사람은 함께 자동차에 올라탔다.당시연은 운전석에 앉아 호텔 위치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는데 뜻밖에도 이 호텔은 그녀의 집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이렇게 가까운 데 있으며 한 번도 그녀에게 전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단 말인가?서운함을 금치 못한 당시연이 눈꺼풀을 내리 드리우며 눈 속에 담긴 감정을 애써 감췄다.원진은 조수석에 앉아 여러 가지 화제를 떠올렸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진아, 대학은 어디서 다녔어?”당시 원진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집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당시연 역시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첫해에는 갖은 방법을 써도 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플로리아요.”“졸업한 지도 1년이 지났겠다. 제원으로 돌아와 일할 생
애초에 핸드폰을 깜빡했다는 건 핑계일 뿐 그는 핸드폰을 두고 나온 적이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마음이 심란해져 바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내려간다는 것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원진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고개를 숙였지만 저 너머의 유리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혹여나 목도리에 담배 냄새가 배지 않을까 다시 담배를 내려놓았다.그렇게 위에서 7~8분을 머무른 후에야,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당시연은 최근에 외지로 출장을 가게 되며 관련 과제를 연구하느라 연달아 이틀 밤을 새운 상태였다. 하여 짧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운전대에 엎드려 잠들어있었다.원진이 차 문을 당겼을 때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그는 조수석에 다시 앉아 차 문을 닫고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당시연은 워낙 피부가 맑고 깨끗한지라 눈을 감으니 속눈썹에 의해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천천히 당시연의 얼굴을 뜯어보던 원진의 시선은 결국 그녀의 꾹 닫힌 입술에 그쳤다. 당시연의 입술은 타고난 웃는 상으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어 사람들에게 항상 친화력을 주었다.입술에 몇 초간 시선이 머물렀지만 원진은 좀처럼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그때 차창 밖으로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알고 보니 당시연의 차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뒤에 있던 차들이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켕기는 게 있는지 원진은 순간 꼿꼿이 앉아 입을 꾹 다물었다.당시연은 잠에서 깨어나 먼저 시간을 보고 나서야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왜 나 안 깨웠어? 혹시 또 잊은 게 있어?”“아니요.”이에 당시연은 그제야 액셀을 밟고 자리를 떴다.한참을 달려 차는 호텔 입구에 다시 멈춰 섰다.“출장 며칠 동안 가 있는 거예요?”“음... 3일 정도.”이윽고 다른 얘기를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시연의 핸드폰이 또다시 시끄럽게 울려댔다. 이번에는 소개팅 상대에게서 온 전화이다.당시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고 먼저 상대에게 차가 막힌다
같은 시각, 성혜인은 반승제와 함께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간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잔뜩 신난 얼굴로 온시환에게 전화하는 반승제를 보게 되었다.“야, 너 원진 알아? 그 사람...”통화를 마친 후, 그는 또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혁아, 너 원진이...”가만히 듣고 있던 서주혁은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한번 화면을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확실히 반승제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맞다.말하는 내용만 듣고 진심으로 온시환인 줄 알았다.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막 몇 마디 답장을 해주기 위해 입을 뻥긋거렸다. 예를 들어 원진이 너한테 복수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그런데 서주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저쪽에서 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혜인아, 너 왜 내 귀를 잡아당겨? 말로 해, 말로.”“제발 그만 하세요, 반승제 씨. 꼭 그렇게 원진 씨와 걸고넘어져야겠어요?”서주혁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는 커플들의 사랑싸움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떤 종류인지를 불문하고 커플 싸움은 극혐이었다.넓은 별장 안에는 서주혁 혼자뿐이었고 옆 탁자 위에는 그가 법원에서 가져온 두 장의 서류가 놓여있었다.그날 무심코 놔두고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그 두 서류를 본 서주혁은 눈이 데기라도 한 듯 갑자기 두 권의 책을 고이 안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아리는 입구를 지키며 왕왕 짖다가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붕붕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별장 안에는 비록 두 마리의 개가 더 많아졌지만 서주혁은 분명히 이 회색빛이 도는 작은 토종 개를 더 좋아하고 있다.그는 아리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그의 턱을 긁어주었다.아리는 기분이 좋은지 편안한 소리를 냈고 꼬리를 더 세차게 흔들었다.옆에 있던 도우미는 낯선 주인의 모습에 겁이 나 발을 동동 굴렀다. 별장에 갑자기 개 두 마리가 늘어난 것도 모자라 그중 한 마리는 주혁 씨와 이렇게 가까운 사이라니.예전에 서주혁은 이런 작은 동물들을 가장 싫어하고 더럽다고 여
“됐어요.”이 집의 남 주인과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또 처음이라 도우미는 전전긍긍하며 털을 말리기 시작했다.아리는 아직 어린 강아지라 털을 말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털을 다 정리하자 서주혁은 바로 아리를 데리고 나가 아리에게 강아지 이름표를 달아주었다.하지만 아리는 아직 너무 작은지라 이름표 하나를 달았을 뿐인데 걷는 것조차 영향을 받았다.하여 서주혁은 침실 모퉁이에 이름표를 다시 내려놓고 아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그리고 한밤중에 서주혁은 아리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재빨리 침대 머리맡의 불을 켜보니 아리는 자신의 따뜻한 보금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 침대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순간 마음이 급해진 서주혁이 아리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그러나 아리는 눈을 뜨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서주혁은 너무 놀라서 즉시 수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방문하도록 요구했다.하지만 이윽고 무슨 생각이 난 것인지 또 서둘러 트렌치코트를 입기 시작했다.“아닙니다. 그냥 제가 지금 갈 테니까 병원에서 기다려주세요. 약 같은 것도 갖춰두시고요.”그는 급한 대로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한쪽에 놓여있던 목도리로 아리의 작은 몸을 돌돌 말고 바로 집에서 나가 차를 탔다.운전기사를 부를 겨를도 없이 서주혁이 직접 운전에 나섰다.진료소에 도착한 건 10분 후였다. 그는 아리를 안고 빠른 걸음으로 진료소에 들어갔는데 안색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어두웠다.수의사는 강아지에게 진찰을 해주고 또 여러 가지 실랑이를 한 끝에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주혁 씨, 강아지는 그저 악몽을 꾼 것 같습니다.”아마 전에 익사할 뻔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잠을 자는 게 불안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몇몇 의사들이 서주혁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안에 검은색 잠옷을, 그리고 겉에는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사람들에게 알려진 서주혁의 이미지는 항상 냉정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잔뜩 흐트러진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다른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
[원진과는 이미 연락했어요. 원진도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는 데 동의했어요. 다만 문제는 원아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당장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흥, 그 정도는 해줘야지.]연승혁은 이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공지민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그녀의 시선은 곧장 연승혁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첫눈에도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연승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소개했다.“이쪽은 내 친한 친구, 이상우예요.”순간 공지민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우, 이 사람은 과거 그녀가 찾아갔던 유명한 최면술사의 수제자였다.최근 그 대가가 은퇴하고 이제 그의 제자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공지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공지민입니다.”하지만 이상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과거 그녀와 짧은 시간 교류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그녀를 최면하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의 스승은 공지민의 마음속 집착이 너무 깊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더군다나 스승과 함께 수련하던 한 달 동안, 이상우는 공지민에게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속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지금 이 순간, 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이상우의 손을 잡았다.“안녕하세요.”이상우는 한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혁이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서요. 오늘 저랑 편하게 얘기 나눠보실래요?”얘기를 나누자는 말은 곧 그녀를 최면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였다.공지민은 그제야 연승혁을 흘깃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연승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앉아요, 누나.”공지민은 자리에 앉
원아정은 팔꿈치로 미친 듯이 차창을 내리치며 동시에 운전대를 잡아당겼다. 게다가 뒤따라오는 경찰도 따돌리지 못하자 운전자는 결국 공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차는 이리저리 우회하며 간신히 경찰들을 따돌렸지만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잡한 지역에 들어서고 말았다.원아정은 문을 발로 차며 열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은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경호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경호원들은 이마에 땀이 맺히며 초조하게 멀어져가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를 공항까지 데려가라는 지시였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진작에 마취라도 시킬 걸 싶었지만 마취한 상태로는 공항 보안검색을 통과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운전자는 급히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은 연승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해?”경호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승혁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다음 기회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까. 우선 원진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군.”원진만 동의하면 원아정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원아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공지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다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연승혁과 결혼해서 상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었어.’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이전의 공지민은 그저 그녀 발밑에 있는 하찮은 존재였는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원아정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가던 노숙자와 옷을 바꿔 입은 뒤,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초라하고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거리를 전전하며 숨어 지
하지만 연승혁은 이 일을 아주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고작 연예계에서 떠도는 무명 배우에 불과한 공지민이 진실을 알아낼 리 없었다.설령 나중에 공지민이 온시환과 얽혔다 해도, 온시환이 처음부터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겼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이런 일을 조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연승혁은 지금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공지민이 아직 진실을 모르고 진짜 연씨 가문의 딸이며 구은우와의 관계는 그저 악연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모든 일을 계획해 구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연승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만약 후자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최근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런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불쑥 나타나다니.그는 안정숙을 찾아가 당시 진행했던 두 번의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하나는 머리카락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공지민이 쓰레기통에 버린 이쑤시개를 쓴 결과라는 말을 들은 연승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약 이 정도까지 속일 수 있다면, 공지민도 참 대단한 사람이겠네.’“승혁아,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너 솔직히 말해봐. 원아정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긴 한 거니?”“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진행한 두 번의 친자 검사는 꽤 신뢰할 만한 결과잖아요. 그런 걸 조작하는 건 쉽지 않죠.”“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일인지 원... 난 그저 내 손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라니! 내가 어떻게 걱정 안 할 수 있겠니!”안정숙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네가 조사한 구은우에 대한 자료, 나도 봤어. 그 아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더라. 만약 지민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했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에 잃었다면? 너 같으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잊을 수 있겠니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