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성혜인은 이미 대학에 와 있었다.이 대학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로써 순위는 제원대와 막상막하이다. 그런데 서른밖에 되지 않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연이 이곳에서 교수직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우수한 인재임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고 배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목도리를 둘러 부드러움을 연출해낸 당시연의 시선이 곧장 성혜인에게 몇 초간 머물렀다. 이윽고 상황파악을 하던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천천히 다가가 망설이며 물었다.“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바로 그때, 성혜인이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공간에서 부딪혔다.그리고 당시연은 성혜인을 알고 있는 듯 조금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은... 혹시 S.M의 성혜인 씨?”올 한 해 동안 S.M이 워낙 눈에 띄었는지라 그룹 대표인 성혜인의 개인 정보도 이미 사람들에 의해 수백 번 털려버렸다.게다가 반승제와 스캔들까지 터지는 바람에 실검까지 올라갔었다.이에 조금 민망해진 성혜인은 비로소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깨닫고 다시 허리를 폈다.“아, 저 맞습니다.”그러자 당시연은 귓가의 머리카락 한 올을 뒤로 넘기며 입술을 오므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난번에 병원 밖에 있을 때도 혜인 씨를 만났는데... 혜인 씨는 그때 저를 찾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인 씨 회사에 제 학생이 있습니다. 아직 정식 데뷔는 아니지만 대우가 좋다고 얼마나 칭찬해대는지...”그 말을 들으니 성혜인은 더 어색해지고 말았다. 원래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그녀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계획이었으나 당시연이 그녀를 알고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임신하며 지능까지 수직으로 하락한 것인지 모를 노릇이다.“아, 그것참 영광이네요. 저도 확실히 시연 씨를 찾을 일이 있어요. 전에 들은 바로는 영어 선생님이시라면서요?”당시연은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나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한없이 작아지는 당시연에 성혜인은 또다시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혹시 원진이 아직 24살이라 30살인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감히 고백하지 못했던 걸까?하지만 원진이 먼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가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시연은 약혼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그래서 원진은 줄곧 당시연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지금에 와서 결국 참지 못하고 몰래 그녀의 삶을 염탐하면서도 그녀와 만나지 않는 것이다.“최근 승제 씨가 원진 씨에게 밥을 사주려고 하는데 시연 씨도 시간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두 분은 이미 안면이 있으시고 저도 시연 씨와 친구로 지내고 싶으니 이 기회에 시연 씨도 같이 오시겠어요?”그러자 당시연은 처음에는 멍하니 넋을 잃더니 그 뒤에는 안절부절못하며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오므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성혜인도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기다려주었다.그렇게 10초 후에야 당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지만 그 사람은 저를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당시 조금 불쾌하게 끝나버렸으니까요.”아마 약혼자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성혜인은 순간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다급히 말을 꺼냈다.“좋아요. 주소가 확정되면 보내드릴게요. 혹시 카톡 연락처 교환해도 될까요?”그러자 당시연은 즉시 QR코드를 제시해주었고 두 사람은 친구 추가에 성공했다.성혜인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일은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연 본인이 원한 것이고 아무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이제 서른 살이 되었으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당시연도 잘 알고 있다.그리고 원진에 대해서도 감정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그렇게 성혜인은 대학교에서 나와 차를 타고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갔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흰둥이를 훈련하고 있었다. 흰둥이는 높이 뛰어다니며 훈련을 즐겼고 한편, 겨울이는 다른 한
한편, 성혜인은 방긋 웃으며 당시연을 바라보았다.“들어와요. 자리 남겨놨어요.”당시연은 목에 두른 캐시미어 얇은 목도리를 벗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원진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러나 원진은 똑바로 앉은 채 그녀를 보지 않았다.당시연은 괜히 마음이 쓰려와 성혜인을 따라 룸으로 들어왔다.성혜인이 의자를 당겨주자 당시연도 감사 인사를 표했다.“감사합니다.”조금 전까지도 반승제에게 비아냥거리던 원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당시연이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진아, 오랜만이야.”그러자 원진은 더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몇 초 뒤에야 대충 응해주었다.“네.”당시연은 갑자기 이곳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괜히 그녀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만 같았다.이윽고 성혜인이 그녀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자 그녀는 또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룸 안의 분위기는 확실히 미묘하게 흘러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원진은 마침내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오랜만이에요.”순식간에 달라진 원진의 태도에 반승제는 어이가 없었다. 아마 당시연을 미행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미치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적은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정말 미쳐버리면 시체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말이다.그런데 그런 원진이 현재 눈앞에 있는 그릇을 응시하며 멍하니 앉아있으니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당시연은 예전부터 원진을 살뜰히 돌봐주었다. 게다가 다정한 누나 스타일이라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원진에게 차 한 잔 따라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당시연이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원진이 먼저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그러자 당황한 당시연이 약간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아 미안해. 이미 다 컸다는 걸 까먹었다.”참 씁쓸한 말이었다. 때때로 잠깐 몸을 돌렸을 뿐인데 이미 몇 년이라는 긴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리곤 한다.원진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고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한편
말을 마친 원진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토록 완벽하던 그도 당시연 앞에만 서면 한없이 멍청해지는 것 같다.당시연은 원래 원진에게 음식을 집어주려고 했지만 원진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두 사람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분위기는 일순간 침묵으로 변했다.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성혜인은 반승제의 인정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여 성혜인은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배를 슬쩍 어루만졌다. 그리고 원진의 농담거리를 지켜보고 있던 반승제는 그녀의 이 동작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바로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어디 아파?”“조금요.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요.”“내가 부축해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일어나서 함께 룸을 나섰다.그들이 떠나자 룸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은 더욱 어색해졌다.원진은 당시연에게 차 한 잔을 더 따라주었다.당시연은 눈앞에 나타난 훤칠한 손가락을 쳐다보며 추억에 잠겼다.원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큰 키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안색이 약간 병적인 느낌이 드는 것을 보아 명백한 영양실조였다.그 후 1년 동안 꾸준히 몸조리한 후에야 비로소 회복할 수 있었다.“진아, 수능 끝나고 왜 인사도 없이 갔어? 혹시 우리 부모님이 너 곤란하게 하셨어?”“아니에요.”이번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진이 천천히 앞에 놓인 잔을 쥐어 잡았다.시연 누나라는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묵묵히 원진을 지켜보던 당시연은 입꼬리를 올리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그러나 다 쓰다듬은 뒤에야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동작에 충격을 받았고 곧이어 원진은 이미 24살의 성인 남자라는 것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손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쓰다듬어주는 게 익숙해서... 그때 우리 부모님과 심하게 싸우며 듣기 싫은 말들이 오갔는데 아직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네. 어렵게 연락처를 얻
그러자 성혜인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팔짱을 끼며 차에 올라탔다.원진과 당시연만 행복하다면 그녀의 노력도 결코 물거품이 아니다.위층.반승제의 조롱을 받고 원진의 몸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렸다.그는 손을 대지도 않은 눈앞의 요리들을 바라보며 한쪽의 공용 젓가락으로 당시연에게 갈비를 하나 집어주었다.당시연도 원래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 순간, 그녀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어머니였다.당시연은 수신 버튼을 누르고는 조금 허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엄마, 나 오늘 진짜 야근했어. 일부러 안 만난 거 아니야... 그건 나도 알아. 그래, 그럼 한 시간 후에 만나.”전화를 끊은 뒤, 당시연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진아, 너 제원에서 며칠 동안 지낼 계획이야? 나 앞으로 며칠 동안은 외지로 출장 갈 것 같은데 혹시 나중에 제원에 다시 오게 되면 그때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까?”어머니가 당시연에게 소개팅 상대를 주선해 주며 이미 그 사람과 약속을 잡았으니 멋대로 바람맞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러자 원진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꺼냈다.“내가 배웅해줄게요.”“나 차 가지고 왔어.”“그럼 저 배웅해줘요.”“....”결국, 두 사람은 함께 자동차에 올라탔다.당시연은 운전석에 앉아 호텔 위치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는데 뜻밖에도 이 호텔은 그녀의 집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이렇게 가까운 데 있으며 한 번도 그녀에게 전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단 말인가?서운함을 금치 못한 당시연이 눈꺼풀을 내리 드리우며 눈 속에 담긴 감정을 애써 감췄다.원진은 조수석에 앉아 여러 가지 화제를 떠올렸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진아, 대학은 어디서 다녔어?”당시 원진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집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당시연 역시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첫해에는 갖은 방법을 써도 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플로리아요.”“졸업한 지도 1년이 지났겠다. 제원으로 돌아와 일할 생
애초에 핸드폰을 깜빡했다는 건 핑계일 뿐 그는 핸드폰을 두고 나온 적이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마음이 심란해져 바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내려간다는 것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원진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고개를 숙였지만 저 너머의 유리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혹여나 목도리에 담배 냄새가 배지 않을까 다시 담배를 내려놓았다.그렇게 위에서 7~8분을 머무른 후에야,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당시연은 최근에 외지로 출장을 가게 되며 관련 과제를 연구하느라 연달아 이틀 밤을 새운 상태였다. 하여 짧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운전대에 엎드려 잠들어있었다.원진이 차 문을 당겼을 때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그는 조수석에 다시 앉아 차 문을 닫고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당시연은 워낙 피부가 맑고 깨끗한지라 눈을 감으니 속눈썹에 의해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천천히 당시연의 얼굴을 뜯어보던 원진의 시선은 결국 그녀의 꾹 닫힌 입술에 그쳤다. 당시연의 입술은 타고난 웃는 상으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어 사람들에게 항상 친화력을 주었다.입술에 몇 초간 시선이 머물렀지만 원진은 좀처럼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그때 차창 밖으로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알고 보니 당시연의 차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뒤에 있던 차들이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켕기는 게 있는지 원진은 순간 꼿꼿이 앉아 입을 꾹 다물었다.당시연은 잠에서 깨어나 먼저 시간을 보고 나서야 얼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왜 나 안 깨웠어? 혹시 또 잊은 게 있어?”“아니요.”이에 당시연은 그제야 액셀을 밟고 자리를 떴다.한참을 달려 차는 호텔 입구에 다시 멈춰 섰다.“출장 며칠 동안 가 있는 거예요?”“음... 3일 정도.”이윽고 다른 얘기를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시연의 핸드폰이 또다시 시끄럽게 울려댔다. 이번에는 소개팅 상대에게서 온 전화이다.당시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고 먼저 상대에게 차가 막힌다
같은 시각, 성혜인은 반승제와 함께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간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잔뜩 신난 얼굴로 온시환에게 전화하는 반승제를 보게 되었다.“야, 너 원진 알아? 그 사람...”통화를 마친 후, 그는 또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혁아, 너 원진이...”가만히 듣고 있던 서주혁은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한번 화면을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확실히 반승제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맞다.말하는 내용만 듣고 진심으로 온시환인 줄 알았다.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막 몇 마디 답장을 해주기 위해 입을 뻥긋거렸다. 예를 들어 원진이 너한테 복수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그런데 서주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저쪽에서 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혜인아, 너 왜 내 귀를 잡아당겨? 말로 해, 말로.”“제발 그만 하세요, 반승제 씨. 꼭 그렇게 원진 씨와 걸고넘어져야겠어요?”서주혁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는 커플들의 사랑싸움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떤 종류인지를 불문하고 커플 싸움은 극혐이었다.넓은 별장 안에는 서주혁 혼자뿐이었고 옆 탁자 위에는 그가 법원에서 가져온 두 장의 서류가 놓여있었다.그날 무심코 놔두고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그 두 서류를 본 서주혁은 눈이 데기라도 한 듯 갑자기 두 권의 책을 고이 안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아리는 입구를 지키며 왕왕 짖다가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붕붕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별장 안에는 비록 두 마리의 개가 더 많아졌지만 서주혁은 분명히 이 회색빛이 도는 작은 토종 개를 더 좋아하고 있다.그는 아리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그의 턱을 긁어주었다.아리는 기분이 좋은지 편안한 소리를 냈고 꼬리를 더 세차게 흔들었다.옆에 있던 도우미는 낯선 주인의 모습에 겁이 나 발을 동동 굴렀다. 별장에 갑자기 개 두 마리가 늘어난 것도 모자라 그중 한 마리는 주혁 씨와 이렇게 가까운 사이라니.예전에 서주혁은 이런 작은 동물들을 가장 싫어하고 더럽다고 여
“됐어요.”이 집의 남 주인과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또 처음이라 도우미는 전전긍긍하며 털을 말리기 시작했다.아리는 아직 어린 강아지라 털을 말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털을 다 정리하자 서주혁은 바로 아리를 데리고 나가 아리에게 강아지 이름표를 달아주었다.하지만 아리는 아직 너무 작은지라 이름표 하나를 달았을 뿐인데 걷는 것조차 영향을 받았다.하여 서주혁은 침실 모퉁이에 이름표를 다시 내려놓고 아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그리고 한밤중에 서주혁은 아리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재빨리 침대 머리맡의 불을 켜보니 아리는 자신의 따뜻한 보금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 침대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순간 마음이 급해진 서주혁이 아리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그러나 아리는 눈을 뜨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서주혁은 너무 놀라서 즉시 수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방문하도록 요구했다.하지만 이윽고 무슨 생각이 난 것인지 또 서둘러 트렌치코트를 입기 시작했다.“아닙니다. 그냥 제가 지금 갈 테니까 병원에서 기다려주세요. 약 같은 것도 갖춰두시고요.”그는 급한 대로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한쪽에 놓여있던 목도리로 아리의 작은 몸을 돌돌 말고 바로 집에서 나가 차를 탔다.운전기사를 부를 겨를도 없이 서주혁이 직접 운전에 나섰다.진료소에 도착한 건 10분 후였다. 그는 아리를 안고 빠른 걸음으로 진료소에 들어갔는데 안색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어두웠다.수의사는 강아지에게 진찰을 해주고 또 여러 가지 실랑이를 한 끝에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주혁 씨, 강아지는 그저 악몽을 꾼 것 같습니다.”아마 전에 익사할 뻔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잠을 자는 게 불안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몇몇 의사들이 서주혁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안에 검은색 잠옷을, 그리고 겉에는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사람들에게 알려진 서주혁의 이미지는 항상 냉정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잔뜩 흐트러진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