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성은 잔뜩 들떠서 사라를 바라보았다.“박사님 진세운한테 불만이라도 있나 봐요? 진세운은 저희가 다음 타자로 올려보낼 사람인데 말이죠.”사라는 계속 시험관을 만지작거리며 무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딱히 제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에요.”임원들은 모두 사라의 성격이 이상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반승제는 사라의 맞은편에 서서 스크린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임원들의 회의실은 그들이 있는 곳과 다른 구역에 있는 것 같았다. 인테리어도 다르고 연구 기지와 완전히 다른 색의 페인트를 했다.가장 큰 의문점은 임원들의 뒷배경은 이상하게도 낯이 익었다.한참이 지나도록 그 뒷배경을 어디서 본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연구기지 내부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관찰했다.자세히 관찰한 끝에 임원들이 연구기지에도 칸다에도 없을 거라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연구 기지에서 7명의 임원의 신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임원이기에 마스크를 쓰며 신분을 숨겨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혹은 임원들끼리도 서로의 신분을 모른 채 비즈니스만 하고 있을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었다.반승제는 손 한쪽을 부들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그가 만약 임원중 한 명이었다면 절대 혼자 아리카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아리카에 오면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최근 플로리아 지역에 큰 회의가 자주 열려 여러 나라의 임원들이 참여했기에 이때만큼 절호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이 몇 명의 임원들이 현재 플로리아에 있을 것이다.임원 중 유일하게 얼굴을 내놓은 젊은 남자는 아마 다른 나라에서 직위가 비교적 낮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반승제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러자 사라는 이미 회의를 끝마치고 조용히 계속 연구에 몰두했다.반승제는 손에 든 시약을 무심코 바라보며 아마도 그들의
‘뭘 축하한다는 거야?’진세운은 옛날부터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배지를 지금은 손을 뻗어 만질 수 없었다.오히려 진백운은 배지를 가지고 놀다가 정중하게 진세운의 품에 던졌다.진세운은 갑자기 돌덩이가 가슴에 얹힌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그때 무언가가 굳게 닫힌 철창 사이를 뚫고 나왔다.진세운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가슴팍으로 떨어진 배지를 내려다보며 진백운을 밀어냈다.진백운은 조심스럽게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갔다.문이 닫히고 진세운은 문득 짜증이 몰려왔다. 이윽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다시 진세운을 뒤덮었다.진세운은 심호흡 깊게 하고 담배 한 대를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밖에서 갑자기 큰 고함이 들려왔다.그 소리는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진세운은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고 홀에 가서 상황을 살폈다.그가 도착했을 때 홀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8번 실험체가 누군가에 의해 풀려나와 총성이 귀를 울려댔다.총성과 함께 흰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홀을 자욱하게 뒤덮었다.홀 안의 연구원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혹시라도 저 살인 무기의 눈에 띄어서 살이 갈기갈기 찢길까 봐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살인 무기는 연구원을 가장 싫어했다. 그의 손에서 죽어 나간 연구원만 최소 10명이었다.유리 벽의 보호에서 벗어난 연구원은 살인 무기의 눈에는 땅거미가 따로 없었다.어떤 이들은 필사적으로 다른 곳으로 도망쳐보려 했지만 이미 혼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사람들 사이에 숨어 함께 도망가려던 반승제는 갑자기 최용호의 목소리를 들었다.“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실험체를 가둬둔 작은 방마다 디지털 도어락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살인 무기들은 주먹 한 번으로 도어락을 부수고 짐승처럼 달려들었다.반승제는 눈이 반짝이더니 8번 실험체에게 다가갔다.실험체가 최용호를 밀치자 그는 몇 발짝 뒤로 밀려났다. 최용호는 단 한 번도 힘이 이렇게 센 사람을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실험체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소리를 듣자마자 반승제는 소리의 주인공이 그날 홀에서 제복을 입은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반승제의 예측대로라면 남자는 플로리아에서 회의에 참석했어야 했다. 연구 기지 곳곳에 CCTV가 널려있어 언제든지 들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이렇게 빨리 발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두뇌 회전이 빠른 반승제는 짐승을 가둬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굶주린 짐승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옆에서 지켜보던 최용호는 물었다.“이 방법이 소용이 있어요? 저희가 겨우 혼란을 만들었는데 이상한 벨 소리 하나로 단번에 해결되었어요. 이곳 사람들이 이미 최면에 걸려 그 벨 소리만 들으면 어떤 상황이든지 바로 정신을 차릴 것 같아요.”“소용 있을 거예요. 이 짐승들은 길들었기에 풀어주면 미쳐 도망치려고 할 거예요. 저놈들은 여태까지 철창 안에 버려진 사람만 먹었었기에 철창 밖의 사람은 무서워할 거예요. 두려움이 극치에 다다르면 저놈들은 미쳐버릴 거예요. 저희는 저놈들이 미쳐버려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설 대표님을 찾는 거예요.”설기웅은 최용호와 같은 날에 들어왔지만 여태껏 설기웅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반승제는 점점 걱정이 밀려왔다. 임원들 사이에 설기웅이 없다면 실험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실험체가 되어 매일 실험을 당하면 살아남기에 힘들 것이다.얼마 후, 모든 짐승이 철창에서 나왔고 반승제가 말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짐승들은 벽에 부딪히고 울부짖으며 탈출구를 찾으려 애썼다.안정을 되찾았던 연구원은 철창에서 나온 짐승들이 실험기구와 약병들을 뒤엎는 모습을 보고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한편, 반승제와 최용호는 세 구역을 찾아보고 유리 상자에 갇힌 실험체도 일일이 확인했지만 설기웅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도 없다면 설기웅이 어디에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반승제가 고개를 들어 사방으로 둘러보다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결국 반승제는 발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갔고 최용호도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홀에 도착한 후, 반승제는
그러나 그들은 지금 설기웅을 구해낼 수 없었다. 일단 유리 상자 안의 사람이 사라지면 기지 전체가 내부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그러면 아직 탈출하지 못한 반승제 일행은 모두 발각될 것이고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반승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환기구로 돌아가서 자신이 던져버린 압축가스가 든 병들을 다시 제자리에 놓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혐의를 벗을 수 있다.“용호 씨,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최용호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말했다. “그럼 쟨 어떡하죠?”그는 설기웅을 가리켰다.반승제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직 심장이 뛰는 걸 보니 죽진 않았네요. 다만 지금 구해낸다면 우리 모두 죽게 될 겁니다.”모두가 똑똑한 사람들이라 모를 리 없었다.최용호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고 반승제는 핵심 연구실로 돌아갔다.이 연구실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실험하고 있어야 할 사라 박사는 보이지 않았다.반승제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환기구로 기어들어 가 모든 병을 회수해 왔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병들을 핵심 연구실에 놓았다.한편, 사라 박사는 밖에서 혼란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왔다.그녀는 진세운이 그곳에 나타나 심지어 혼란 속으로 돌진하는 것을 보았다.그는 한 여자를 끌어당겼다.사라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더니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연구원을 밀치고 진세운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사라와 진세운은 정식으로 만난 적이 별로 없다 보니 서로 잘 알지 못했다.다만 사라는 그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비롯된 반감이었다.진세운이 잡고 있는 사람은 제로였다.제로는 반승제가 먼저 이곳에 보냈다. 진세운은 제로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그녀의 방호복은 이미 연구원들에 의해 찢겨졌고 얼굴에도 몇 군데 상처가 났다.진세운은 순간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곧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성혜인?”말하면서도 그는 스스로 애써 부
그는 단검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지고 제로를 진백운에게 넘겼다.“선생님께 여쭤봐, 여석진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그처럼 사람을 감금하는 변태가 정말로 나하늘의 딸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놔둘 리 없었다.진세운의 마음속에서 악질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만약 이 여자가 나하늘에게 모욕을 당한다면 여석진이 모욕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과연 나하늘은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었는데 여전히 순결을 지키고 있을까?모녀가 서로 같은 사람에게 침범당하는 시나리오는 꽤 재밌었다.그는 상상만으로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비록 제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지만 단지 성혜인을 모방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보니 그녀의 무술 실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 진세운 같은 위선자 앞에서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다.손이 묶인 그녀는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없었다.“절 놓아주세요.”“당신을 놓아줄 수도 있어, 다만 반승제가 어디 있는지,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반승제가 연구 기지에 들어온 걸까? 그런데 굳이 대역을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면 이 여자를 먼저 보내 상황을 살피게 한 걸까? 자살 특공대도 아니고.진세운은 반승제가 연구 기지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역을 데리고 오는 데다 실력도 좋지 않은 대역을 데리고 온다니 순전히 머리가 돈 짓이다.제로는 입술을 오므린 채 몇 번이나 몸부림쳤지만 결국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그녀는 대표님이 자신을 보낸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이곳을 혼란스럽게 하고 연막탄을 던지는 것이었다.그러면 진세운은 더 이상 대표님이 여기에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제로는 멀리서 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 여자는 방금 달려올 것 같았지만 얼마 정도 달리다 제자리에 멈추더니 마치 고정된 것만 같았다.진세운은 제로의 시선을 따라 옮기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라가 보였다.비록 그는 그토록 유명한 사라 박사와 거의 말을 나눈 적 없지만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
사라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천천히 정리하고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들더니 입을 닦았다.“반승제 씨, 밖에 얼마 있죠?”반승제는 순간 그 지도가 그녀가 준 것임을 확신했다.다만 그녀는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원으로서 애초에 나갈 기회가 없었다.“기지에는 20여 명이 있고 외부라면 박사님이 원하시는 만큼 얼마든지 있습니다.”사라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더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반승제는 그녀의 뒤를 따라 긴 복도를 지나갔다.그녀는 두 손으로 차가운 실험대를 꽉 잡았다.“얼마든지 있다고? 마음에 드는 답이네요.”“그럼 박사님의 정체는요?”사라는 눈앞의 약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사람이 필요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여기서 나갈 겁니다.”그녀는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반승제를 찾게 되었다.지도를 보낸 것도 이미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아무리 연구 기지 내에서 충분한 신뢰를 얻었더라도 여전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박사님은 지도를 어떻게 보냈죠?”사라는 옆에 놓인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마셨다.겨우 얼마 지났다고 그녀는 벌써 이마에 땀이 맺혔다.“죽을 각오로 보냈죠. 비록 지도를 너무 명확하게 그리지 못했지만 당신이 알아봐서 다행입니다.”반승제가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도 우연히 구금성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로의 위치를 통해 역추적한 것이다.아마 일반 사람에게 그 지도를 준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그래서 다른 곳에 그려진 것이 연구 기지라고 추측했다.마침 그는 연구 기지를 조사 중이었기 때문에 거의 찍다시피 맞췄다.사라는 이마를 짚으며 정신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이마에는 계속해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박사님께서는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 거죠?”“여석진을 죽여주세요.”반승제는 여석진을 죽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조에서 미움을 넘어 강한 혐오감을 느낄 수 있었다.“그래요. 여석진을 죽이면 박사님께서 나갈 방법이 있으신가요?”“아니요, 하지만 나
“그분은 사람을 완전히 홀릴 수 있는 약을 개발했지만 최선을 다해도 세 알밖에 만들 수 없었어요. 재료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죠.”“박사님께서 저한테 말했던 환각을 일으킬 수 있는 약 말인가요?”그녀는 피식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환각을 일으키는 약은 가장 낮은 수준일 뿐입니다. 그분의 약은 사람을 순종적으로 만들 수 있고 지시하는 대로 할 수도 있어요. 전 아직도 그분이 어떻게 그 약을 개발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고위층도 모르죠. 어쨌든 그분은 이미 떠났을 겁니다. 그 후, 기지는 잠시 혼란에 빠졌고 그분을 잡으려고 수배까지 시작했죠.”결국 잡지 못했을 것이다. 반승우는 능력이 뛰어나서 어디든 숨어있을 수 있었다.“그분이 떠나고 나서 전 그 약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계속 연구했지만 모든 데이터를 삭제했다 보니 이리저리 끼워서 맞춰보며 연구했어요. 그렇게 만든 약은 사람을 최면시켜 진실을 말하게 하고 저 대신 물건을 밖으로 보내줄 수밖에 없었어요.”“지도는 아마 여석진이 가지고 나갔을 텐데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거겠죠?”사라는 약간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그 사람이라고 추측한 이유가 뭐죠?”“대담하게 추측해 봤어요. 박사님께서 그를 죽이라고 시켰으니 그를 싫어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연구 기지의 핵심 인원들은 거의 만나지 않으며 서로의 배경이나 신원을 알지 못하죠. 박사님께서 또한 진세운을 싫어하고 진세운의 스승도 싫어하지만 그들을 바로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는 박사님과 여석진의 원한은 지울 수 없고 지 밖에서 생긴 것을 의미하죠. 박사님은 전에 밖에 나갔던 적이 있나요? 또한 박사님께서 몸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했고 갑자기 배현우를 언급하기도 했죠. 어쩌면 박사님의 몸에 두 가지 기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어요.”사라는 담배를 태우며 입꼬리를 치켜올렸지만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확실히 똑똑하신 분이네요. 제 기억은 완전하지 않아요. 전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들어왔고 그 이후로 기억은 조금씩 기억나기
반승제는 대답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있었다.“H 국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왔는데 박사님은 왜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거죠?”사라는 가볍게 웃었지만 눈빛은 슬픔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반승우처럼 의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 얼마 되겠어요? H 국에서 보낸 사람들은 확실히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연구 기지 내부를 보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뛰어난 자들이죠. 그들 역시 한때는 천재였지만 여기서는 소처럼 일할 수밖에 없어요. 연구 기지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은 천재 중의 천재에요. 이 몇 년간 H 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사람을 보내왔지만 살아서 나간 사람은 없었어요.”그녀는 계속 기다려왔다. 또 다른 협력자가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모두 실험에서 죽었다.오직 반승우만이 살아서 나갔지만 당시 약은 세 알뿐이었고 한 사람밖에 나갈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구금섬에서 자신을 찾으라고 했다.여석진은 아마 그녀의 몸을 그곳에 숨겼을 것이다. 그녀는 그 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그 몸의 기억이 완전히 손상된 것이 아니라면 그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어쨌든 해파리 도장은 여전히 밖에서 떠돌고 있고 BK 조직은 아직 지도자가 없을 것이다.비록 여석진은 구금섬의 배후자이지만 너무 자만했다.사라는 다시 손을 들어 이마를 짚더니 말했다. “서둘러야 해요. 오늘 당신이 한 일은 이미 소란을 일으켰어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옆에 있는 약을 들고 중앙 홀로 갔다.그가 떠나고 사라는 입가의 담배를 내려놓더니 손에 쥐고 세심히 관찰했다.언제부터 흡연했는지 그녀도 몰랐다.몇 년간 머릿속에 뭔가 계속 걸려 있었지만 방금 진세운의 대화를 듣고 마치 새로운 힘이 주입된 것만 같았다.그녀는 드디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바로 그녀가 필사적으로 보호하려 했던 딸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아닌 모습이 되더라도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