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집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강민지를 기다렸다.얼마 후 강민지가 카펫에 구멍을 뚫을 듯이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걸어왔다.“민지야.”강민지는 성혜인의 부름에 대답하지도 않고 그녀가 말했던 방문 앞으로 왔다.쾅쾅쾅!한바탕 노크하고 나자 강민지의 손바닥은 빨갛게 되었다.같은 시각, 방 안에는 두 쌍의 남녀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송미나는 신예준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예준 씨, 혹시 나를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거예요?”송미나는 약간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신예준이 서프라이즈를 준비할 만한 사이즈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송미나가 통 크게 2000만 원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늘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신예준은 싱긋 웃으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노크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다른 여자가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강민지가 서 있는 방향에서 테이블 앞에 있는 신예준이 정확히 보였다. 송미나는 아직도 그를 안고 있었다.강민지는 이를 악물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가방을 휘둘렀다.“야, 이 미친놈아! 네가 감히 바람을 피워?”강민지가 찾아올 줄 몰랐던 신예준은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러다 곧 당황하면서 벌떡 일어났다.“미... 민지야.”가방에 맞은 송미나가 욕하려고 했을 때, 함께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말려 섰다. 남자는 작게 머리를 저으며 그녀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나 파티에서 저 여자 만난 적 있어.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송미나는 이를 악물고 강민지를 노려봤다. 그녀는 문득 강민지의 가방을 바라봤다, 에르메스에서 새로 나온 4억짜리 가방이었다. 게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한정판만 걸치고 있었다.송미나는 순간 기세가 줄어들어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집안도 잘 사는 축이기는 했지만 몇억짜리 가방을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예준 씨, 이 여자 누구예요?”강민지가 답했다.
강민지는 휴지를 뽑아 들고 신예준의 얼굴을 닦아주며 자신의 옷차림을 설명했다.“이건 길가에서 대충 산 거야, 4000원짜리 신발 본 적 있어? 이 옷은 동대문에서 산 거고 가방은 6000원도 안 돼. 방금 그 사람들이 비싸다고 생각한 건 다 내 아우라 때문일 거야. 내가 원래 좀 옷을 잘 입잖아.”강민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신예준의 볼에 뽀뽀했다.“미안해, 예준 씨.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근데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 예준 씨가 이렇게 벌어온 돈으로 산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성혜인은 신예준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얼굴이 잘생긴 것만큼은 진심으로 인정했다. 누군가가 몇천만 원으로 밥 한 끼 먹을 기회를 사는 것도 어쩌면 이해가 되었다.성혜인은 시선을 떨군 채로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민지는 신예준을 한참 타이르고 나서야 오해를 풀고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문 앞으로 왔을 때, 강민지는 머리를 돌려 윙크를 날렸다. 성혜인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따라가지 않고 있었다.“예준 씨도 우리 집 상황 잘 알지? 내 동생이 돈을 엄청 많이 써. 엄마는 내 예물로 동생한테 집 사줄 생각만 한다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엄마를 설득해서 예물을 많이 요구하지 않을 거니까.”“고마워, 민지야.”성혜인은 어이가 없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다음에야 밖으로 나갔다. 강민지, 신예준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걸어가며 반승제의 방을 지나고 있을 때, 마침 안에서 나오는 온시환과 마주쳤다.온시환은 성혜인을 보자마자 눈썹을 찡긋했다. 성혜인은 왜 방금 강민지와 함께 내려가지 않았는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온시환과 함께 있는 바에는 차라리 커플과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또 보네요.”온시환은 성혜인의 뒤쪽을 힐끗 봤다. 왜냐하면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과 전혀 다른 곳에서 걸어왔기 때문이다. 방금 울고불고하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었기에,
성혜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이때 신이한에게서 전화가 왔다.“폐니 씨, 제가 방금 전화번호 하나 보냈어요. 꽤 괜찮은 인테리어 회사이기는 하지만 조 사장이랑 경쟁 관계에요. 그래서 이 회사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조 사장이 좋게 보지 않을 거예요.”“괜찮아요, 제가 조 사장님과 다시 일할 일은 없을 것 같거든요.”성혜인은 배신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조희준은 아직도 그녀의 앞길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신이한은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는 성혜인과 반승제 사이의 일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전화를 끊고 난 성혜인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는 그녀도 알고 있는 회사였다. 조희준과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낸 적도 있었다.성혜인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그녀의 디자인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반승제의 집이라는 말에 더욱 좋아했다. 비록 대부분 공로가 디자이너에게로 가겠지만 홍보만 잘한다면 회사에도 득이 될 거라는 판단이었다.짧게 얘기를 나눠본 후, 성혜인은 각종 재료를 보내줬다. 소통 과정은 아주 순리로웠고 반승제의 집도 드디어 시공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한시름 놓은 성혜인은 포레스트 펜션으로 향했다. 십자로를 지나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무서운 기세로 다가와서 그녀의 차를 억지로 세웠다. 난생처음 이런 일을 당한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차 문을 열었다. 건너편 차에서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내려왔다.“미안해요, 아가씨.”성혜인이 뭐라 말하려고 할 때, 중년 남자가 손을 뻗었다. 숨 막히는 냄새가 나는 손수건이 그녀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성혜인은 상대가 무조건 조희준이 보낸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경쟁사를 선택한다면 조희준의 처지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잘못한 사람은 조희준이었기에 그녀는 찔리는 게 없었다.정신이 희미해지는 순간, 성혜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성혜인은 정신만 희미했을 뿐 감각은 아주 선명했다. 그녀가 타고 있는 차는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고 역겨운 휘발유 냄새 때문에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귀가에서 들려왔고,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만지작대고 있었다.차는 폐공장 앞으로 와서 멈춰 섰다. 이곳은 시내와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아주 으스스했다.바닥에 내팽개쳐진 성혜인은 겨우 눈을 떴다. 앞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고 끈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생김새는 참 괜찮단 말이야. 이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봐.”“형님 먼저 하십시오. 저는 마지막으로 맛만 보게 해주시면 됩니다.”형님이라는 남자는 술배를 흔들거리며 성혜인의 다리를 잡더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비포장도로의 흙모래 때문에 그녀의 피부는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덕분에 정신 차린 그녀는 손을 올려 남자의 뺨을 때렸다.“꺼져!”뺨을 맞은 남자는 성혜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너 죽고 싶냐?”남자는 바로 성혜인의 뺨을 때렸다. 성혜인의 입안에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눈에는 실핏줄이 터졌다.남자는 성혜인의 멱살을 잡더니, 그녀의 옷을 확 찢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 겪는 무기력감에 죽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성혜인이 희망의 끈을 놓아가고 있을 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왔다.성혜인은 겨우 눈을 떴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고 익숙한 향수 냄새도 났다. 주변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쨍그랑 소리와 남자들의 욕설이 들려왔다. 이 욕설은 금방 애원으로 변했다.성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돌 하나를 주어서 꽉 쥐었다. 날카로운 돌 모서리가 손바닥에 박히자 드디어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렇게 반승제의 얼굴을 본 그녀는 이제야 자기가 누구에게 전화했는지 알아차렸다.반승제는 성혜인을 훌쩍 안아 올려 자신의 차 안으로 왔다. 겁먹은 납치범들은 구석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었다
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에 힘이 풀려 휴대폰도 스르르 미끄러졌다. 인내심이 바닥 난 반승제는 그녀의 휴대폰을 들고 지문 인식으로 잠금을 해제했다.이 휴대폰은 일 전용이었기에 연락처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물론 반승제는 그녀에게 휴대폰이 두 개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일 전용 휴대폰에는 당연히 ‘남편’으로 저장된 사람이 없었고, 반승제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다.성혜인의 연락처는 아주 깔끔했다. 고객은 한눈에 알리게 따로 표기하기도 했다. 반승제는 남편을 찾다 말고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름은 ‘반승제 대표님’, 간단하고 보기 쉬웠다.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던 그는 연락처를 끝까지 뒤졌다. 그리고 결혼했으면서도 불구하고 남편의 연락처가 없는 성혜인이 참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성혜인을 병원으로 데려다주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 나머지는 병원에 맡길 생각이었다.성혜인은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번에 일어난 일은 아직도 악몽처럼 기억에 생생했고, 그녀는 최대한 반승제와 멀리 떨어져 앉으려고 했다.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며 버티다 보니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견디기 어려웠는지라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반승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태연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의 자태는 도무지 방금 폭력을 행사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성혜인은 창문을 통해 점점 가까워지는 병원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성휘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저번에 안 좋게 헤어진 기억 때문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운이 안 좋았던 성혜인은 부쩍 병원에 자주 오는 것 같았다. 병원 대문에 거의 도착할 때, 그녀는 대문에서 부축받으며 나오는 성휘를 발견했다.성휘는 간암 말기로 이렇게 빨리 퇴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말이다. 성휘를 부축하고 있는 사람은 성혜원과 성한이었다. 두 사람은 아주 친한 모양새로 양쪽에 서 있었다.성혜인은 순
성휘가 먼저 차에 몸을 실었다. 성혜원과 성한은 서로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뒤따라 함께 차에 올라탔다.창가에 앉은 성혜원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외제차를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일렁였다.‘반승제의 차다!’“잠시만요, 누구 좀 만나고 올게요!”성혜원은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에서 반승제를 만날 줄이야! 성휘와 성한이 반응하기도 전에 성혜원은 차 문을 열고 반승제의 차 앞으로 다가갔다.창문이 닫혀 있어 차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반승제를 몰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성혜원은 그가 타고 다니는 모든 차를 기억했다.이 차는 분명 반승제의 것이다. 그는 병원에 온 듯하다.성혜원은 급히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승제 씨도 병원에 오신 거예요?”성혜원은 창문을 두드리며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그녀는 모르겠지만, 사실 창문을 두드린 그 자리에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성혜인이었다.성혜인은 목에 무언가 턱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혜원이 어째서 반승제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반승제와 성씨 집안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인사차 방문한 적도 없었다. 결혼을 할 때도 반승제는 모습을 감추어 성혜인 혼자 모든 절차를 처리해야 했고, 그렇게 3년이 흘렀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성혜원과 엮일 일이 없었다.게다가 성혜원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다는 건, 성혜원이 이 차를 알아봤다는 것이다.성혜인이 머릿속으로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던 그때,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성혜원이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면 더 이상 반승제에게 정체를 감출 수 없게 된다.창문이 내려가던 그 순간, 성혜인은 몸을 돌려 반승제를 껴안으며 그의 품속에 머리를 파묻었다.때마침 반승제가 한 여성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 성혜원은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 놀란 감정은 순식간에
성혜인은 자신을 대하는 성혜원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둘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기에 성혜원은 성휘 앞에서 뒷담화를 하곤 했다. 종종 눈치 없이 말을 꺼냈다가 성휘가 화를 낼 정도로 말이다.그렇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매번 성혜인을 다정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마치 정말 성혜인을 ‘언니’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소윤은 대놓고 성혜인을 미워했지만, 성혜원은 달랐다. 늘 성혜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성혜인은 순간 깨달았다. 성혜원이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다. ‘반승제의 아내’라는 그 자리를 성혜인이 차지했기 때문이다.그전에 있던 일을 떠올려 보니, 이제야 뚜렷하게 이해가 됐다. 성혜원이 왜 아픈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는지 말이다.성혜원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성혜인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코끝에서 반승제의 향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이 고개를 드는 순간, 반승제 역시 고개를 밑으로 떨구면서 두 사람의 코끝이 서로 부딪쳤다.성혜인은 이마를 짚는 척하며 급히 몸을 뒤로 뺐다. 마치 몸이 좋지 않아 그에게 기댄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눈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몸 앞이 갑자기 텅 비자 허전함이 느껴졌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성혜인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혜원이 타고 있던 차는 이미 이곳을 떠난 상태였다.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막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성휘에게 온 전화였다.성혜인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순간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받기 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로 성휘의 목소리가 들렸다.“혜인아, 2차 융자 성공했다. 반씨 집안에서 투자해줬어. 퇴원 기념으로 같이 축하하고자 하는데, 승제랑 집으로 오렴. 감사 인사도 전해야 하니 이모에게 저녁 준비시킬게.”말이 좋아 ‘감사 인사’지, 사실 반씨 집안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다.성혜인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
이성을 다잡고 마음을 가라앉힌 반승제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병원으로 들어온 성혜인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약 기운이 여전히 몸을 지배하고 있었고, 뺨을 맞은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렸다.따가우면서 화끈거리기까지 하니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때마침 앞을 지나가던 간호사 덕분에 부축을 받아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성혜인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다 정말 구토를 하고 말았다. 결국 창백한 얼굴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수액을 맞았다.하필 그때, 성휘가 또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잊지 말고 반승제를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었다.「혜인아, 승제와 결혼했으니 한 번쯤은 집에 데리고 와야지.」성혜인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외부에서 판을 치던 유언비어를 잠재우고자 반승제를 불러들이려는 것이었다.2차 융자도 유치했으니 앞으로 인맥이 넓어질 일만 남았다.하지만 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이 정략결혼을 하고 난 이후, 사람들이 성씨 집안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사실 반승제, 그리고 반씨 집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이 무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선 단체를 자처하고자 모인 것이 아니다. 체면을 살려줬다면 그만큼의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건 분명 성씨 집안이 충분히 보답하지 못했다는 뜻이니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씨 집안은 반승제가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했다.그래야만 그들의 체면을 살려줄 사람들이 계속 곁에 존재할 테니 말이다.성혜인은 홀로 병원에 앉아있으니 쓸쓸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휘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나도 너와 다투기 싫어...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라.」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성휘의 특기다.성혜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성휘가 그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렸을 때는 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