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집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강민지를 기다렸다.얼마 후 강민지가 카펫에 구멍을 뚫을 듯이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걸어왔다.“민지야.”강민지는 성혜인의 부름에 대답하지도 않고 그녀가 말했던 방문 앞으로 왔다.쾅쾅쾅!한바탕 노크하고 나자 강민지의 손바닥은 빨갛게 되었다.같은 시각, 방 안에는 두 쌍의 남녀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송미나는 신예준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예준 씨, 혹시 나를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거예요?”송미나는 약간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신예준이 서프라이즈를 준비할 만한 사이즈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송미나가 통 크게 2000만 원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늘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신예준은 싱긋 웃으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노크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다른 여자가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강민지가 서 있는 방향에서 테이블 앞에 있는 신예준이 정확히 보였다. 송미나는 아직도 그를 안고 있었다.강민지는 이를 악물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가방을 휘둘렀다.“야, 이 미친놈아! 네가 감히 바람을 피워?”강민지가 찾아올 줄 몰랐던 신예준은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러다 곧 당황하면서 벌떡 일어났다.“미... 민지야.”가방에 맞은 송미나가 욕하려고 했을 때, 함께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말려 섰다. 남자는 작게 머리를 저으며 그녀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나 파티에서 저 여자 만난 적 있어.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송미나는 이를 악물고 강민지를 노려봤다. 그녀는 문득 강민지의 가방을 바라봤다, 에르메스에서 새로 나온 4억짜리 가방이었다. 게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한정판만 걸치고 있었다.송미나는 순간 기세가 줄어들어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집안도 잘 사는 축이기는 했지만 몇억짜리 가방을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예준 씨, 이 여자 누구예요?”강민지가 답했다.
강민지는 휴지를 뽑아 들고 신예준의 얼굴을 닦아주며 자신의 옷차림을 설명했다.“이건 길가에서 대충 산 거야, 4000원짜리 신발 본 적 있어? 이 옷은 동대문에서 산 거고 가방은 6000원도 안 돼. 방금 그 사람들이 비싸다고 생각한 건 다 내 아우라 때문일 거야. 내가 원래 좀 옷을 잘 입잖아.”강민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신예준의 볼에 뽀뽀했다.“미안해, 예준 씨.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근데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 예준 씨가 이렇게 벌어온 돈으로 산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성혜인은 신예준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얼굴이 잘생긴 것만큼은 진심으로 인정했다. 누군가가 몇천만 원으로 밥 한 끼 먹을 기회를 사는 것도 어쩌면 이해가 되었다.성혜인은 시선을 떨군 채로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민지는 신예준을 한참 타이르고 나서야 오해를 풀고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문 앞으로 왔을 때, 강민지는 머리를 돌려 윙크를 날렸다. 성혜인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따라가지 않고 있었다.“예준 씨도 우리 집 상황 잘 알지? 내 동생이 돈을 엄청 많이 써. 엄마는 내 예물로 동생한테 집 사줄 생각만 한다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엄마를 설득해서 예물을 많이 요구하지 않을 거니까.”“고마워, 민지야.”성혜인은 어이가 없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다음에야 밖으로 나갔다. 강민지, 신예준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걸어가며 반승제의 방을 지나고 있을 때, 마침 안에서 나오는 온시환과 마주쳤다.온시환은 성혜인을 보자마자 눈썹을 찡긋했다. 성혜인은 왜 방금 강민지와 함께 내려가지 않았는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온시환과 함께 있는 바에는 차라리 커플과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또 보네요.”온시환은 성혜인의 뒤쪽을 힐끗 봤다. 왜냐하면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과 전혀 다른 곳에서 걸어왔기 때문이다. 방금 울고불고하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었기에,
성혜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이때 신이한에게서 전화가 왔다.“폐니 씨, 제가 방금 전화번호 하나 보냈어요. 꽤 괜찮은 인테리어 회사이기는 하지만 조 사장이랑 경쟁 관계에요. 그래서 이 회사와 함께 일하게 된다면 조 사장이 좋게 보지 않을 거예요.”“괜찮아요, 제가 조 사장님과 다시 일할 일은 없을 것 같거든요.”성혜인은 배신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조희준은 아직도 그녀의 앞길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신이한은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는 성혜인과 반승제 사이의 일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전화를 끊고 난 성혜인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는 그녀도 알고 있는 회사였다. 조희준과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낸 적도 있었다.성혜인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그녀의 디자인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반승제의 집이라는 말에 더욱 좋아했다. 비록 대부분 공로가 디자이너에게로 가겠지만 홍보만 잘한다면 회사에도 득이 될 거라는 판단이었다.짧게 얘기를 나눠본 후, 성혜인은 각종 재료를 보내줬다. 소통 과정은 아주 순리로웠고 반승제의 집도 드디어 시공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한시름 놓은 성혜인은 포레스트 펜션으로 향했다. 십자로를 지나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무서운 기세로 다가와서 그녀의 차를 억지로 세웠다. 난생처음 이런 일을 당한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차 문을 열었다. 건너편 차에서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내려왔다.“미안해요, 아가씨.”성혜인이 뭐라 말하려고 할 때, 중년 남자가 손을 뻗었다. 숨 막히는 냄새가 나는 손수건이 그녀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성혜인은 상대가 무조건 조희준이 보낸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경쟁사를 선택한다면 조희준의 처지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잘못한 사람은 조희준이었기에 그녀는 찔리는 게 없었다.정신이 희미해지는 순간, 성혜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성혜인은 정신만 희미했을 뿐 감각은 아주 선명했다. 그녀가 타고 있는 차는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고 역겨운 휘발유 냄새 때문에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귀가에서 들려왔고,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만지작대고 있었다.차는 폐공장 앞으로 와서 멈춰 섰다. 이곳은 시내와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아주 으스스했다.바닥에 내팽개쳐진 성혜인은 겨우 눈을 떴다. 앞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고 끈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생김새는 참 괜찮단 말이야. 이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봐.”“형님 먼저 하십시오. 저는 마지막으로 맛만 보게 해주시면 됩니다.”형님이라는 남자는 술배를 흔들거리며 성혜인의 다리를 잡더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비포장도로의 흙모래 때문에 그녀의 피부는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덕분에 정신 차린 그녀는 손을 올려 남자의 뺨을 때렸다.“꺼져!”뺨을 맞은 남자는 성혜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너 죽고 싶냐?”남자는 바로 성혜인의 뺨을 때렸다. 성혜인의 입안에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눈에는 실핏줄이 터졌다.남자는 성혜인의 멱살을 잡더니, 그녀의 옷을 확 찢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 겪는 무기력감에 죽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성혜인이 희망의 끈을 놓아가고 있을 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왔다.성혜인은 겨우 눈을 떴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고 익숙한 향수 냄새도 났다. 주변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쨍그랑 소리와 남자들의 욕설이 들려왔다. 이 욕설은 금방 애원으로 변했다.성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돌 하나를 주어서 꽉 쥐었다. 날카로운 돌 모서리가 손바닥에 박히자 드디어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렇게 반승제의 얼굴을 본 그녀는 이제야 자기가 누구에게 전화했는지 알아차렸다.반승제는 성혜인을 훌쩍 안아 올려 자신의 차 안으로 왔다. 겁먹은 납치범들은 구석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었다
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에 힘이 풀려 휴대폰도 스르르 미끄러졌다. 인내심이 바닥 난 반승제는 그녀의 휴대폰을 들고 지문 인식으로 잠금을 해제했다.이 휴대폰은 일 전용이었기에 연락처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물론 반승제는 그녀에게 휴대폰이 두 개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일 전용 휴대폰에는 당연히 ‘남편’으로 저장된 사람이 없었고, 반승제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다.성혜인의 연락처는 아주 깔끔했다. 고객은 한눈에 알리게 따로 표기하기도 했다. 반승제는 남편을 찾다 말고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름은 ‘반승제 대표님’, 간단하고 보기 쉬웠다.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던 그는 연락처를 끝까지 뒤졌다. 그리고 결혼했으면서도 불구하고 남편의 연락처가 없는 성혜인이 참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성혜인을 병원으로 데려다주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 나머지는 병원에 맡길 생각이었다.성혜인은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번에 일어난 일은 아직도 악몽처럼 기억에 생생했고, 그녀는 최대한 반승제와 멀리 떨어져 앉으려고 했다.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며 버티다 보니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견디기 어려웠는지라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반승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태연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의 자태는 도무지 방금 폭력을 행사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성혜인은 창문을 통해 점점 가까워지는 병원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성휘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저번에 안 좋게 헤어진 기억 때문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운이 안 좋았던 성혜인은 부쩍 병원에 자주 오는 것 같았다. 병원 대문에 거의 도착할 때, 그녀는 대문에서 부축받으며 나오는 성휘를 발견했다.성휘는 간암 말기로 이렇게 빨리 퇴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말이다. 성휘를 부축하고 있는 사람은 성혜원과 성한이었다. 두 사람은 아주 친한 모양새로 양쪽에 서 있었다.성혜인은 순
성휘가 먼저 차에 몸을 실었다. 성혜원과 성한은 서로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뒤따라 함께 차에 올라탔다.창가에 앉은 성혜원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외제차를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일렁였다.‘반승제의 차다!’“잠시만요, 누구 좀 만나고 올게요!”성혜원은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에서 반승제를 만날 줄이야! 성휘와 성한이 반응하기도 전에 성혜원은 차 문을 열고 반승제의 차 앞으로 다가갔다.창문이 닫혀 있어 차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반승제를 몰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성혜원은 그가 타고 다니는 모든 차를 기억했다.이 차는 분명 반승제의 것이다. 그는 병원에 온 듯하다.성혜원은 급히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졌다.“안녕하세요. 승제 씨도 병원에 오신 거예요?”성혜원은 창문을 두드리며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그녀는 모르겠지만, 사실 창문을 두드린 그 자리에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성혜인이었다.성혜인은 목에 무언가 턱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혜원이 어째서 반승제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반승제와 성씨 집안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인사차 방문한 적도 없었다. 결혼을 할 때도 반승제는 모습을 감추어 성혜인 혼자 모든 절차를 처리해야 했고, 그렇게 3년이 흘렀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성혜원과 엮일 일이 없었다.게다가 성혜원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다는 건, 성혜원이 이 차를 알아봤다는 것이다.성혜인이 머릿속으로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던 그때,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성혜원이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면 더 이상 반승제에게 정체를 감출 수 없게 된다.창문이 내려가던 그 순간, 성혜인은 몸을 돌려 반승제를 껴안으며 그의 품속에 머리를 파묻었다.때마침 반승제가 한 여성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 성혜원은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 놀란 감정은 순식간에
성혜인은 자신을 대하는 성혜원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둘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기에 성혜원은 성휘 앞에서 뒷담화를 하곤 했다. 종종 눈치 없이 말을 꺼냈다가 성휘가 화를 낼 정도로 말이다.그렇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매번 성혜인을 다정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마치 정말 성혜인을 ‘언니’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소윤은 대놓고 성혜인을 미워했지만, 성혜원은 달랐다. 늘 성혜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성혜인은 순간 깨달았다. 성혜원이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다. ‘반승제의 아내’라는 그 자리를 성혜인이 차지했기 때문이다.그전에 있던 일을 떠올려 보니, 이제야 뚜렷하게 이해가 됐다. 성혜원이 왜 아픈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는지 말이다.성혜원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성혜인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코끝에서 반승제의 향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이 고개를 드는 순간, 반승제 역시 고개를 밑으로 떨구면서 두 사람의 코끝이 서로 부딪쳤다.성혜인은 이마를 짚는 척하며 급히 몸을 뒤로 뺐다. 마치 몸이 좋지 않아 그에게 기댄 것처럼 말이다.반승제는 눈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몸 앞이 갑자기 텅 비자 허전함이 느껴졌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성혜인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혜원이 타고 있던 차는 이미 이곳을 떠난 상태였다.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막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성휘에게 온 전화였다.성혜인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순간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받기 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로 성휘의 목소리가 들렸다.“혜인아, 2차 융자 성공했다. 반씨 집안에서 투자해줬어. 퇴원 기념으로 같이 축하하고자 하는데, 승제랑 집으로 오렴. 감사 인사도 전해야 하니 이모에게 저녁 준비시킬게.”말이 좋아 ‘감사 인사’지, 사실 반씨 집안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다.성혜인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
이성을 다잡고 마음을 가라앉힌 반승제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병원으로 들어온 성혜인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약 기운이 여전히 몸을 지배하고 있었고, 뺨을 맞은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렸다.따가우면서 화끈거리기까지 하니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때마침 앞을 지나가던 간호사 덕분에 부축을 받아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성혜인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다 정말 구토를 하고 말았다. 결국 창백한 얼굴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수액을 맞았다.하필 그때, 성휘가 또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잊지 말고 반승제를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었다.「혜인아, 승제와 결혼했으니 한 번쯤은 집에 데리고 와야지.」성혜인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외부에서 판을 치던 유언비어를 잠재우고자 반승제를 불러들이려는 것이었다.2차 융자도 유치했으니 앞으로 인맥이 넓어질 일만 남았다.하지만 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이 정략결혼을 하고 난 이후, 사람들이 성씨 집안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사실 반승제, 그리고 반씨 집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이 무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선 단체를 자처하고자 모인 것이 아니다. 체면을 살려줬다면 그만큼의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성씨 집안과 반씨 집안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건 분명 성씨 집안이 충분히 보답하지 못했다는 뜻이니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씨 집안은 반승제가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했다.그래야만 그들의 체면을 살려줄 사람들이 계속 곁에 존재할 테니 말이다.성혜인은 홀로 병원에 앉아있으니 쓸쓸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휘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나도 너와 다투기 싫어...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라.」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성휘의 특기다.성혜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성휘가 그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렸을 때는 돈을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