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으니 강하랑은 약간 불편한 감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핑계로 약속을 미루거나 거절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온서애가 말을 이었다.“말이 나온 김에 내일 바로 만나는 건 어떠니? 혹시 시간 있어? 내일 마침 네 할아버지 생신이잖니. 생전 집이 북적북적 시끄러운 것을 좋아한 데다가 너를 그렇게 아끼던 사람이니, 만약 네가 와준다면 분명 저승에서도 좋아할 거야.”황당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이유에 강하랑은 침묵에 잠겼다. 연성철은 강세미가 돌아온 다음에도 그녀에게 잘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만약 연성철이 살아 있었다면 그녀는 당연
온서애의 추측대로 연유성은 확실히 회사에 없었다. 그는 아침 댓바람부터 강씨 가문의 재촉 전화를 받고 병원에 와 있었다. 강세미의 정신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해서 의사도 그에게 다른 곳에 가지 말라고 했다. 지금 그는 묵묵히 병실에 앉아 금방 진정제를 맞고 난 강세미를 바라보고 있었다.연유성은 강세미에게 말로 이루 설명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뿌리가 무엇이든 한 사람이 이대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어젯밤 한 말은 강하랑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혹시나 연유성이 거절할까 봐 온서애는 또 황급히 말을 이었다.“재혼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 하지만 하랑이 그 집안에서 괴롭힘당한 일은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사내놈이 이혼을 결심했으면 빨리빨리 처리해야지 계속 질질 끄는 건 무슨 버릇이니? 그래도 아직은 남편인 네가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걸 알면 하랑이는 또 어떻게 생각하겠니?”“그 일은 제가 경솔했네요.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한지라 이것저것 따질 새가 없었어요. 강하랑한테는 제가 내일 직접 사과할게요.”연유성은 오래간만에 침묵하지 않
“나 진짜 죽었나 봐, 이런 꿈을 다 꾸고... 유성이가 이번에는 진짜 화났겠지? 나를 보러 오지도 않을 거야. 난... 난 죽는 게 나아. 내 목숨으로 사과하는 거야. 난 진작 죽었어야 했어... 가짜 부모님께 폭행당하면서 강에 빠졌을 때 진작 죽었어야 했다고.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고, 나도 계속 좋은 사람일 수 있었겠지.”강세미는 눈을 꼭 감은 채 침대에 누워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곁에 있는 연유성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연유성은 가만히 강세미의 말을 끝까지 들어줬다. 하지만 강세미의 말에 그
이튿날 오후.강하랑은 오늘 온서애와 저녁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일찍이 한남정을 나섰다. 그리고 단이혁에게는 연씨 가문의 본가에 다녀와야 하니 늦어도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뒀다.단이혁은 강하랑의 계획이 약간 불만스러웠다. 그래도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강하랑이 강씨 집안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지금껏 무사히 자란 데에는 연씨 가문의 덕이 컸기 때문이다.만약 연씨 가문이 없었더라면 14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졌던 강하랑은 하룻밤 사이 다른 세상에 버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밥은 어떻게 하는지, 빨래는 어떻게 하는지 배우기도 전에 인신
강하랑이 도착한 다음 온서애는 직접 대문을 열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강하랑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전부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아이고, 우리 하랑이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게 얼마 만이야!”온서애는 대문을 열어 강하랑을 들어오게 했다. 그러고는 그녀는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말을 이었다.“밖에서 고생 많이 했지? 어휴, 마른 것 좀 봐. 해외에서 밥은 제대로 먹었니?”온서애는 강하랑을 보자마자 걱정부터 했다. 전과 변함없는 그녀의 열정에 강하랑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당연하죠, 빠진 건 젖살인가 봐요.”마음이 따듯했
연유성은 한 손으로만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우아한 분위기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식탁에 음식을 내려놓은 연유성은 두 사람을 힐끗 보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사 준비가 다 됐어요. 와서 앉으세요.”연유성이 과연 조금 전의 대화를 들었을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정답은 들었다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찌 됐든 그가 나타난 덕분에 강하랑은 굳이 입을 열지 않고서도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물론 고마운 한편 마음이 약간 복잡하기도 했다. 그가 이곳에
190cm의 큰 몸집을 아담한 소파와 낮은 테이블 사이에 구겨서 밥 먹는 모습은 아주 측은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가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강하랑은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연유성은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다친 손이 오른쪽이었지? 유성이는 오른손잡이니까, 평소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불편하겠네... 근데 아까 상처가 찢어진 것 같던데, 괜찮나?’“하랑아.”강하랑이 멍때리는 것을 보고 온서애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