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시중들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이준혁의 갈라진 목소리가 매혹적으로 들렸다.“내가 벗겨줄게.”지퍼가 천천히 열리고 따듯한 물이 몸에 닿자 너무 편안해졌다.“...”물안개가 자욱하게 핀 욕실에는 듣기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소리로 가득했다.“읍... 거기는... 안 돼요...”이준혁이 우쭐대며 웃더니 고개를 들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만족해?”윤혜인은 너무 수치스러워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즐거움에 겨운 신음이 자꾸만 목구멍을 타고 새어 나왔다.정말 미칠 지경이었다.‘출근 안 하면 남자들 정력이 좋아지나? 어떻게 매번 유혹하는 방법도 바뀌지?’이튿날.이준혁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쳤다.윤혜인은 알람이 울리자 자기도 모르게 꺼버렸다. 잠깐 더 눈을 붙이던 윤혜인이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오늘 중요한 고객을 만나기로 한 날이라 절대 지각하면 안 된다.윤혜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너무 오래 잔 건 아니라서 시간이 충분했다.슬리퍼를 신은 윤혜인이 비몽사몽해서 씻으러 들어갔다.방으로 돌아온 이준혁이 칫솔을 입에 문 채 혼이 반쯤 나가 있는 윤혜인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이준혁은 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며 양치를 도와주고는 세면까지 시켜줬다.윤혜인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자 이준혁이 부드럽게 말했다.“조금 더 잘래?”윤혜인이 머리를 이준혁의 어깨에 기대더니 나른하게 말했다.“안 돼요. 고객 만나기로 했단 말이에요. 이게 다 준혁 씨 때문이에요...”어젯밤 욕실에서 거울 앞으로, 그러다 끝내는 침대까지 올라가 또 한참 사랑을 나눴다. 몸이 탈탈 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윤혜인이 품에 기대자 기분이 좋아진 이준혁은 호수 같은 눈망울에 웃음이 번졌다.“그래. 다 내 탓이야. 잘 보이려고 너무 힘줬네.”윤혜인이 얼굴을 붉히더니 이준혁의 가슴을 솜방망이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다 이준혁이 슈트를 입고 넥타이까지 맸다는 걸 발견했다.“어디 가려고요?”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원지민이 이렇게 말하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윤혜인이 약혼에 관한 문제를 물어보기를 기다렸다.하지만 윤혜인이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알겠습니다. 수요만 알려주세요.”“...”원지민은 윤혜인이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자 말문이 막혔다. 윤혜인이 궁금해하면 자연스럽게 이선 그룹 이사회의 감사 결과를 말해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윤혜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있어서요. 달밤은 주문만 도와드리지 담소를 나누고 싶다면 커피숍으로 가는 걸 추천합니다.”일반 손님이라면 윤혜인도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지민이 자꾸만 괴롭히니 더는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원지민은 고분고분 갈 리가 없었다. 여기에 온 것도 드레스를 맞추러 온 게 아니었다.윤혜인이 만든 드레스를 원지민이 입을 리 만무했다. 입었다가 두고두고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내가 말했죠. 주문한다고.”윤혜인이 눈썹을 추켜세웠다.“달밤은 주문 시 선불금이 필요합니다.”“...”“얼만데요?”“10%를 받고 있습니다.”고작 천만 원이라 원지민도 통쾌하게 카드를 긁더니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드레스 완성되면 바로 이선 그룹으로 보내면 돼요. 미납금은 이선 그룹에서 낼 거예요.”원지민은 이 말을 듣고도 윤혜인이 차분함을 유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혜인은 오히려 흔쾌히 수락했다.“네, 그러죠.”게다가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았다.원지민은 인내심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윤혜인이 물어보지 않는다 해서 말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 일단 목을 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윤혜인 씨, 오늘 이선 그룹에 큰 인사이동이 있는 거 알고 있어요?”윤혜인이 고개를 들었다.“원지민 씨, 화이트 좋아해요, 아니면 레드 좋아해요?”이 말에 원지민은 표정이 굳더니 이를 악물었다. 윤혜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뭐 어떤 색이든 좋아요. 돈은 다 낼 테니 일단 만들어봐요. 그때 가서 고를게요.”윤혜인은 자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원지민이 윤혜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윤혜인이 앞으로 팔짱을 끼고는 편안한 자세로 바꾸더니 느긋하게 말했다.“이준혁과 결혼하고 이선 그룹 주식까지 사들이면 두 사람 관계도 있으니 부정당 거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준혁이 맞닥트린 위기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요?”“날 감시라도 하는 거예요?”원지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혜인이 몰래 자기 몸에 도청 장치라도 단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이구운이 한 말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뜻은 같은 뜻이었다.윤혜인은 원지민에게 설명해주는 것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원지민 씨, 꿈 깨요. 준혁 씨는 절대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원지민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질투 나서 그러는 거죠? 서로 어깨를 견줄만한 가문이라 결혼하면 윈윈일 수밖에 없어요. 나는 준혁이가 사업을 펼침에 있어서 큰 힘이 될 거라고요. 준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왜 받아들이지 않겠어요?”윤혜인이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느긋하게 말했다.“준혁 씨가 총명하니까 이런 뻔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거예요.”지난 몇 년간 윤혜인은 아버지가 국제 무역을 할 때 옆에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윤혜인의 경험이 모자라 혹시나 사기를 당하면 어쩌나 걱정했다.국제 무역은 여러 나라의 각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거래라 암투가 국내 시장보다 훨씬 심각했고 수단도 훨씬 독했다.한구운은 절대 원지민을 돕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퇴로를 남겨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일 것이다.첫째, 한구운의 능력으로 아직 이선 그룹을 먹어 치우기엔 역부족이라는 것. 둘째, 이준혁이 원지민과 결혼하게 되면 감사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언제든 한구운이 준비만 되면 이를 다시 문제 삼으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게 된다는 것이다.원지민은 총알받이가 되었는데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했다.미련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한 건지 꼼꼼하기로 소문난 원지민도 결국 이렇게 어리석은 모습으로
원지민이 멈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현미가 타일렀다.“지민아,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 믿어. 근데 준혁이 그 아이를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있잖아. 너랑 절대 관계를 가진 적 없다고 하니까 나도 좀 그러네. 도대체 너희 둘 중 누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어머님, 저는 절대 어머님 속인 적 없어요.”원지민이 큰 소리로 말했다.“이 아이 준혁이 아이 맞아요.”“하... 너희가 서로 딴소리하고 있으니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힘이 달리네. 임신 몇 개월인지도 모르잖아.”“3개월이에요.”원지민은 얼떨결에 이렇게 말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절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다행히 문현미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지민아, 나는 네가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너는 내가 믿을 수 있거든. 나는 너 무조건 응원한다.”불안했던 원지민의 마음도 살짝 풀렸다. 원지민은 억울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어머님, 몇 개월인지는 일단 비밀로 해주세요. 준혁이 알면 배가 불러오기 전에 애 떼라고 할 거예요.”“걱정하지 마. 내가 비밀로 할게.”문현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우리 이씨 집안 첫 손주인데 손대면 내가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원지민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어머님.”그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어머님, 요즘도 머리 아파요? 약 거의 다 먹었죠? 선생님께 더 부탁해 볼까요?”“그래, 거의 다 먹긴 했어. 잘됐네. 마침 말하려고 했는데.”“네, 내일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원지민이 전화를 끊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문현미만 잘 구슬리면 이준혁이 넘어오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준혁에게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이선 그룹, 회의실.회사 내부 감사팀에서 나오자마자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이선 그룹과 온진 그룹 간의 부정당 거래에 관한 자료였고 거래할 때마다 어김없이 이준혁의 사인이 보였다.이준혁은 자리에 앉아 아무 표정 없이 상대가 질책하는
하지만 이태수의 자필 편지가 공개되자 주주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중에는 한구운도 있었다.이씨 가문 사람으로 인정받은 그날을 평생 기다려왔다.이제 남은 건 천천히 잠식해 이선 그룹을 완전히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준혁이라는 사람이 이선 그룹의 미래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이천수도 기분이 좋았다.주주들이 이 소식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결국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준혁도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계획을 한번 쭉 돌이켜본 이천수는 좋은 사람인 척 쇼를 이어갔다.“오늘 제가 할 말은 이상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저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더 부연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3일 뒤에 다시 의논할 예정이니 여러분 의견에 따라서 결론을 내시면 됩니다.”이천수는 예정대로 3일이라는 시간을 남겨두고 이준혁을 핍박하는 데 쓰려고 했다.거기에 원지민과 문현미까지 합세하면 이준혁이 타협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은 입을 꼭 앙다물었다. 여전히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회의실 분위기가 매우 딱딱했다.이천수와 이준혁은 전에는 그저 암투였지만 지금은 대놓고 서로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니 주주들도 더는 어물쩍 넘기지 못하고 라인을 잘 타야 했다.이제 파벌이 명확하게 나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천수의 마지막 히든카드는 늙은 보수파를 흔드는 데 쓰였다. 보수파들이 전처럼 표정이 어둡지 않자 기분이 좋아진 이천수는 서류를 정리하더니 수장이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이제 다들 나가보셔도 됩니다.”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준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잠깐만요.”지배자와도 같은 아우라에 일어났던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미 이준혁의 명령에 습관된 것 같았다.이천수가 코웃음 치더니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준혁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봤다.이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끝났어요?”이천수가 대답했다.“네.”“그러면 제가 보충하는 걸로 하죠.”이준혁이 이렇게 말하며 중지로 테이블
이천수가 씩씩거리며 손에 든 서류철을 이준혁에게 힘껏 던졌다.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이준혁은 머리만 살짝 갸우뚱하는 것으로 피했다.주훈이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이천수의 팔을 뒤로 꺾더니 그의 얼굴을 테이블에 꽉 눌렀다.이천수는 처량한 모습으로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야 이 자식아. 지금 존속 살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애초에 너 같은 짐승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주주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천수가 아들을 욕하는 게 너무 듣기 거북했기 때문이다. 켕기는 게 있어서 이렇게 발악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한구운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더니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아빠, 진정해요.”이천수는 그제야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정신을 차렸다. 인정하지만 않으면 이준혁도 어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한구운은 이천수가 차분해지자 주훈에게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사님한테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어요?”주훈은 한구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이천수의 목덜미를 꽉 잡은 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한구운의 안색이 순간 너무 어두워졌다. 주먹을 꽉 움켜쥐었지만 이내 다시 풀었다.한구운은 일단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바라봤다.“형,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리 아빠잖아요. 이러면 주주들도 실망할 거라고요.”그는 일부러 ‘우리 아빠’라고 하면서 이준혁을 자극하려 했다.게다가 진실을 흐리려고 했다. 주훈은 그저 이천수가 이준혁에게 상해를 가하지 못하게 막았을 뿐인데 한구운은 이를 아버지에 대한 불경이라고 과장했다.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을 빙빙 둘러서 하고 있었다.이준혁이 입꼬리를 당기며 경멸에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주 비서, 이사님이 꿈꾸는 큰 그림을 주주들께 보여드려.”주훈은 그제야 이천수를 풀어주더니 미리 준비한 프로젝터로 스크린에 재생하기 시작했다.이내 이천수의 목소리가 스크린에서 들려왔다.“주 대표님, 이 대표님, 황 대표님, 저희 둘째를 지지해 주세요. 둘째가
제보자의 아버지는 온진 그룹이 보낸 철거자들의 핍박에 못 이겨 차를 끌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구조되었는데 결국 뇌사 상태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제보자는 원래 피신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내 신변을 보호해 주며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제보자의 제보 덕분에 피해자들이 용기를 얻고 하나둘씩 인터넷에 폭로하기 시작했다.다른 피해자들은 비록 사망한 건 아니지만 철거를 토론하는 동안 외출하면 꼭 재수 없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다 혹시나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른 철거 동의서에 사인했다.이선 그룹은 이 프로젝트의 초기 공정에는 참여한 적이 없었고 그저 뒤에 이름만 걸어놓은 상태였다. 다 원지민이 뒤에서 몰래 저지른 일이었다.게다가 저번에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선포하며 대중을 향해 사건의 전말을 사실대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주주들은 큰 위기를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희열을 느꼈다.폭력 철거와 핍박 살인, 그중 어떤 키워드든 이선 그룹이 오랫동안 수립한 성실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번 좌절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다.순간 주주들은 이준혁의 과감함에 감탄했다. 주주들은 이제 더는 이천수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숨겨둔 자식을 대표 자리에 올리기 위해 그룹의 이익을 외부로 돌리고 사리사욕을 차리기 위해 그룹을 사경으로 내몰았다.이런 사람 밑에서 나온 이구운이 좋은 리더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준혁은 달랐다. 이준혁은 이태수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었다. 뛰어난 장군 아래에 졸병은 없다는 말이 있다.이천수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이미 승리는 한물갔다는 걸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이준혁이 준비한 카드가 너무 완벽했다.먼저 이천수가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길 기다렸다가 그 죄를 하나씩 뒤엎으면서 반전의 반전을 선보였다.이천수가 갑자기 이구운의 손을 잡으며 울기 시작했다.“아들아, 아빠가 어리석었다. 네 말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는 착
녹색 비단옷을 입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 주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이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노인은 바로 이태수의 집사 주진희였다.이태수가 죽고 주진희는 이태수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만보산을 지키러 갔다.몇 년이 지났기에 이천수는 주진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작에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불효자식. 아저씨는 집에서 노후를 잘 보내고 계셨을 텐데 왜 번거롭게 여기까지 불러낸 거야?”이천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본인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주진희는 이태수의 옆을 지키던 집사라 권력이 꽤 컸다. 이태수가 있을 때도 주진희는 이천수의 체면을 챙겨준 적이 없었다.이준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진희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에서 연륜이 느껴졌지만 아직 또렷하고 힘 있었다.“천수 도련님, 작은 도련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먼저 오겠다고 했어요.”이천수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얼른 웃으며 말했다.“왜 먼 길 나오셨나요?”“요즘 이선 그룹에서 일어난 이변은 마침 들어서 압니다. 그러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했던 당부가 떠 올라서요.”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천수가 성격이 온전치 못하니 옆에서 자주 귀띔해 주라고 하셨습니다.”옆에 있은 시간이 오래돼서 그런지 주진희의 표정은 이태수와 꽤 닮아 있었다.이천수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냈다.‘망할 놈의 영감, 평생 기 한번 펴지 못하게 억압하더니. 죽어서도 가만히 놔두질 않네.’이천수가 죽은 척하는데 이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이사님, 할아버지 자필 편지를 주진희 아저씨한테 좀 보여주는 게 어때요?”“...”이천수는 말문이 막혔다.주진희가 흥미를 느끼고 이렇게 물었다.“그런 게 있어요? 어르신의 자필 편지라, 천수 도련님, 제게 한번 보여주세요.”이천수가 버벅거리며 말했다.“뭐 굳이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을까요? 아저씨도 내용을 갈고 있을 테
“됐어. 민아 너는 얼른 가. 좋은 시간 방해하지 말고.”방민기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단추를 마구 풀어제끼기 시작했다.방민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정신이 몽롱해서도 억지로 버티는 여자를 보며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재밌게 놀아.”방민아는 이 말만 남기고 문을 닫고 나갔다. 옷을 입었을 땐 몰랐는데 윗옷을 벗으니 가려졌던 뽀얀 속살과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 딱 봐도 운동한 적이 별로 없는, 향락에만 빠져있는 몸 같았다.방민기가 앞으로 다가가 소원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음침하게 웃었다.“우리 예쁜이, 재밌는 놀이 좀 해볼까?”소원은 머리가 윙 했고 의식이 끊겼다 이어지는 게 너무 흐리멍덩해서 방민기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보지 못한 채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뭐 하는 거예요?”소원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고 유진을 죽여버리겠다던 그 여자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아니, 절대 안 되지. 누구든 유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바닥에서 깨진 유리 조각을 주어 손에 꽉 움켜쥔 소원은 피와 고통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했다. 방민기가 쓰레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민기는 약을 탄 음료수를 소원의 턱을 잡고 억지로 먹이더니 이렇게 말했다.“마셔. 이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있다 재밌는 구경 좀 시켜줘.”방민기도 직접 즐기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 여자를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놀려고 해도 놀 수가 없었다.소원이 얌전하게 협조할 리가 없었기에 일단 얌전해지게 하려면 ‘뽕’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손을 든 소원이 음료수를 엎지르려는데 이를 눈치챈 방민기가 소원의 손을 잡고 뒤로 꺾는 바람에 손에 힘이 풀려 잡고 있던 유리 조각마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방민기가 대수롭지 않
방민아는 가벼운 말투로 비웃었다.“어쨌든 오빠는 경한 씨의 매형인데 그 사람이 이런 하찮은 여자 때문에 오빠를 곤란하게 하겠어?”방민기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 내가 육 대표님의 매형이니 그분이 날 곤란하게 하면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겠지.”하지만 방민기는 방민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예전에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협박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로 인해 몸에 문제가 생겼던 방민기는 아무리 육경한 측에서 부정한다고 해도 분명히 그의 짓이라고 확신했다.다른 누가 그런 일을 벌였을 리 없었다.그저 소원을 두어 마디 농담 삼아 희롱했을 뿐인데 육경한이 미친 듯이 사람을 보내 협박한 것이다.만약 이번에 소원을 건드린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그 남자는 진짜 건드려선 안 돼. 이건 내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야.’방민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육경한 같은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한눈에 돋보이는 사람이었다.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오랜 배고픔에 시달린 늑대처럼 사람을 단숨에 집어삼킬 것 같은 위협감을 주었다.방민아는 비웃으며 말했다.“오빠, 겁쟁이라더니 진짜로 겁먹었네. 이 여자가 뭔데? 경한 씨가 놀다 버린 여자잖아. 오빠가 진지하게 볼 가치가 있어?”그녀의 말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육경한이 이 여자를 버렸다는 사실에 방민아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그저 소원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싶을 뿐이었다.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다 이 여자 때문이야. 이 여자가 없었다면 경한 씨가 아이에 대한 혐오감을 갖지 않았을 거야. 아니면 왜 아이를 싫어해서 정관수술까지 받겠어?’점점 이런 생각에 방민아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곧 방민기가 천천히 말했다.“민아야, 오늘 네가 한 말 기억해둘 거야.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께 네 계획이라고 보고할 거야. 내 비서가 다 듣고 있으니까 발뺌하지 마.”방민아는 방민기의 지나친 신중함에 화가 치밀었다.“오빠, 왜 그
소원은 비록 초췌하고 기진맥진했지만 강한 의지로 벽에 기대며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방민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에 찬 웃음을 지었다.“보아하니 겁먹은 모양이구나? 아니, 겁먹었을 뿐 아니라 내가 네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믿고 있는 것 같아.”소원의 평온한 말투는 방민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무너지던 심리적 방어벽을 드러내게 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방민아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소원은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자신을 겁주려는 것뿐이라고.그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경한 씨가 저런 여자를 받아들일 리 없어.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결혼식에서 난동을 부린 여자를 원한다고? 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그런 수치를 감수할 리 없잖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방민아는 마음을 다잡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속이려고 하지 마. 너 같은 게 그럴 힘이 어디 있겠어.”그러자 소원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내가 허세를 부리는지 아닌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내게 그 힘이 있는지 없는지도 네가 더 잘 알 거야.”방민아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그녀의 눈에 육경한은 마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소원 같은 여자에게 계속해서 모욕당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곧 방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의 손을 힐 신은 발로 짓밟으며 꾹 눌렀다.소원은 손끝에 힘을 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소원, 내가 너를 위해 선물 하나 준비했는데, 알아?”고통에 찡그린 얼굴로 소원이 자신을 쳐다보자 방민아는 비웃으며 말했다.“내 오빠가 널 좀 갖고 놀고 싶다더라. 잘 해줘 봐. 오빠 기분만 잘 맞춰주면 네 아들 죽기 전에 한 번쯤 볼 수 있게 해줄게. 어때?”소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방민아의 이복오빠, 방민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방민기는 몇 년 전 일이 터진 뒤로 몸이 망가져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그럴수록 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쪽으로 빠져
방민아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너무 오래 억눌린 감정이, 희망이 무너지고 절망으로 변하면서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방민아는 소리쳤다.“그런 사생아는 세상에 나와선 안 됐어! 가장 큰 잘못은 네 뱃속에서 태어난 거야!”이어 소원의 귀에 대고 하나하나 똑똑히 말했다.“소원, 모든 건 네 잘못이야!”이 순간 육연주는 이미 술에 취해 방민아의 또 다른 면모를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눈엔 오직 소원만 보였고 그저 소원을 미친 듯이 괴롭히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방민아!”갑자기 소원이 머리에 씌워진 쓰레기봉투를 확 벗어던졌는데 눈은 피로 물든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네가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유진이 건들 생각도 하지 마!”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그 말을 듣고 놀란 방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술병을 집어 들어 소원의 머리에 세게 내리쳤다.그 순간 소원의 이마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얼굴 위에 핏빛 꽃처럼 퍼졌다.핏자국과 함께 소원의 초췌한 모습은 더욱 처절하면서도 기묘하게 아름다워 보였다.방민아는 손에 든 술병을 천천히 소원의 얼굴에 대고 내렸다. 병 끝이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찌르며 고통을 가했다.소원은 얼굴이 분명 엉망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지쳐 있던 소원은 더는 저항할 힘이 없었고 바닥에 무기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이 모습을 본 방민아는 기고만장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소원, 네가 날 벌하겠다고? 대체 어떻게? 부모도 죽었고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잖아. 돈이 좀 있겠지. 하지만 네 돈이 우리 방씨, 육씨 가문의 재산보다 많을 것 같아? 네가 날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네.”소원은 천천히 말했다.“궁금해?”방민아는 코웃음을 쳤다.“흥미 없어. 너 같은 건 내 눈에 그냥 개미야. 잡아 죽이거나 살려두거나 그건 내 마음이지. 네가 감히 뭘 어쩌겠어?”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덧붙였다.“내가 경한 씨랑 결혼한 후엔 더 봐줄
육연주는 정말로 소원을 죽이고 싶어 했다.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 소원은 머리에 씌워진 쓰레기봉투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손바닥에 힘을 실어 머리 주변에 약간의 공간을 만들며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그 와중에 방민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소원은 속으로 방민아가 나서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직접 나서서 분노를 폭발시키고 자신을 때릴 것을 기대했다.하지만 방민아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소원은 실망스러웠다. 방민아가 나서지 않는다면 오늘 이 모든 고통이 헛된 일이 되어버릴 터였다.다행히 소원은 방민아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두 가지 대비책을 준비했다. 바로 이 방에서 벌어진 일을 몰래 촬영하는 것이었다.방민아보다 소원은 이곳이 더 익숙했고 카메라를 눈에 띄지 않게 숨길 방법도 알고 있었다.방민아가 한 번이라도 직접 손을 댄다면 그걸 증거로 삼아 이 여자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다는 걸 증명할 계획이었다.그러던 중 소원은 희미하게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다.방민아가 일어나 방을 나가 전화를 받으러 간 모양이었다.겨우 2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방민아는 소원에게 다가오더니 발끝으로 그녀의 손을 세게 짓밟으며 말했다.“소원 씨, 왜 안 죽어요?”그녀의 목소리엔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소원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조금 전까지도 여유롭게 보고만 있더니 왜 전화를 받은 뒤에 갑자기 이렇게 분노에 찬 모습이 된 거지?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야?’사실 방민아는 병원에 있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은 육경한이 정관수술을 예약했다는 것이었다.정관수술이라는 말에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왜 정관수술을 하기로 결심한 거야? 그럼 난 이제 평생 경한 씨의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만약 아이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육경한이 곧 자신에
육연주는 다짜고짜 소원의 머리채를 붙잡아 탁자 위로 내리눌렀다.힘껏 눌러대며 외쳤다.“오늘 반드시 내가 그날 느낀 굴욕과 분노를 똑같이 느끼게 해줄 거야!”하지만 소원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이 정도의 고통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방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은 지키셔야죠. 우리가 한 대로 이행해주세요.”방민아는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한 말은 꼭 지킵니다.”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는 자기 이름이 거론될 일을 피하려고 애써 돌려서 말했다.소원은 방민아가 무슨 꾀를 부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렇지 않다면 육연주가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육연주는 샴페인과 맥주를 들고 소원의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술 좋아한다며?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게 만들어 줄 테니 잘 마셔 봐!”알코올이 따갑게 소원의 머리와 얼굴을 적셨다.소원은 눈을 꼭 감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육연주는 더욱 흥분하며 소원의 뺨을 두 차례나 세게 때렸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술병을 집어 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려고까지 했다.그 순간, 방민아가 육연주의 손목을 꽉 잡아 멈췄다.“연주야, 내가 뭐라고 했어? 겉으로 티 나는 상처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러면 너한테도 안 좋아.”그들의 관심은 소원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벌가 자제 이미지가 더러워질까 하는 것이었다.그렇게 육연주는 힘없이 손을 풀었고 술병은 바닥으로 떨어져 몇 번 굴러갔다.방민아는 처음부터 이렇게 경고했다. 목숨을 앗아가선 안 되고 모욕하고 짓밟는 건 가능하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절대 안 된다고.처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육연주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소원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그날 결혼식에서 소원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는지, 모든 사람들에
“네, 괜찮아질 거예요...”잠시 충전한 덕에 상태가 많이 나아진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언니, 이제 가서 일 봐요. 저도 제 일하러 갈게요.”“응.”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갈 길을 갔다.소원은 방민아가 말한 그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민아가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고 옆에 육연주가 함께 앉아 있었다.소원은 무표정하게 다가가 물었다.“방민아 씨, 제가 뭘 하면 되죠?”방민아는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무슨 일이 있어서 그쪽을 부른 게 아니에요. 연주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소원은 육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갑자기 육연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어 소원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며칠 못 봤더니 눈이 멀었나 봐? 나 못 봤어?”소원의 얼굴은 한쪽으로 젖혀졌고 귀가 웅웅거릴 정도로 아팠다.이 뺨 한 대를 때리기 위해 육연주는 며칠 동안이나 참아왔던 것이다.지난번 그녀가 결혼식에 난동을 부렸을 때 이미 목이라도 졸라 죽이고 싶었다. 당시 육경한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소원은 이미 서씨 가문 사람들에게 반쯤 죽도록 맞았을 것이다.그런데 육경한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소문에 따르면 그는 소원을 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고 했다. 북쪽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들은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육연주와 같은 재벌 2세는 그들에게 단지 걸어 다니는 금고와 같았다.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 육경한이 앞으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북쪽 사람들은 원한을 잊지 않고 반드시 갚는다고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결혼식 후, 육연주는 소원을 제대로 혼내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소원이 육경한의 사람들에게 데려가져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그녀는 부모도 두렵지 않고 세상 무엇도 겁내지 않았지만 육경한만큼은 무서웠다.육경한은 냉혹하게 행동할 때 진정으로 냉혹했으며 혈연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다행히 방민아가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괜찮아요. 사실 크게 다친 것도 없었고요.”그러나 사실 그녀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육경한만큼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그녀도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각한 일을 겪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숙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작은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영숙은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래도 여기 왜 온 건지 말해봐.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봐도 좀 더 쉬어야 하는 거 같은데?”“오늘은 일이 있어서 왔어요. 제가 아는 단골 손님이 요청해서요.”소원이 답했다.“단골 손님?”영숙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누군데?”소원은 이곳에서 일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녀의 손님은 대부분 영숙이 직접 배정해준 사람들이었다.때문에 소원이 말하는 ‘단골 손님’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영숙은 알 수 없었다.영숙의 걱정은 진심이었다.소원은 왜 영숙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숙이 굳이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하지만 소원은 이번 일의 진실을 영숙에게 말할 수 없었다.방민아가 오늘 밤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밖에 흘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이를 어기면 아이를 만나게 해주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었다.“괜찮아요, 언니. 정말 아는 손님이라니까요.”소원은 모호하게 대답하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그러자 영숙은 ‘그래’라고 짧게 대답하며 비웃듯 말했다.“넌 이제 네 멋대로 하는구나. 내가 상관할 수 없겠네.”소원은 피식 웃었다.“그럴 리가요. 언니가 저를 이 일로 이끌어주셨잖아요. 하루라도 스승이면 영원히 스승인데 제가 언제 영숙 언니 말 안 들은 적 있나요?”이 말을 듣고 영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이렇게 말재간이 좋은 애인 줄 몰랐네.”“스승이니 뭐니 하지 마. 내 밑에 평생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조금 안정되면 얼른 나가.”사실 영숙은 방민아와 관련된 일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래서 그는 방민아가 나중에 유진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다.유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방민아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그녀도 충분히 고려할 것이라 믿었다.“필요 없어. 임 교수님에게 빨리 수술 일정 잡아달라고 해줘.”육경한이 결혼을 위해 결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임수에 휘말려 또 다른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그는 다른 사람이 낳지 않은 아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소종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육경한은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는 이미 그의 마음이 완전히 굳었다는 것을 의미했다.육경한이 결정한 일은 아무도 바꿀 수 없었다.다만 소종은 이런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재산이 그다지 많지 않은 소종조차도 대를 이을 아이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성별을 떠나 건강한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었다.어쩌면 대를 잇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하지만 육경한의 방식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그럼에도 소종은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전화를 걸기 위해 소종이 막 나가려다가 육경한이 불러 세웠다.“잠깐.”“무슨 일이세요?”육경한은 말했다.“이 소식을 민아 씨에게 알려.”소종은 잠시 멍해졌다.‘정관 수술 한다는 걸 예비 신부에게 알리라고? 이건 결혼하기 전에 도망가라고 부추기는 일 아닌가?’그러나 육경한의 목적은 방민아를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다.이전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 말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방민아더러 함께하자고 했다.그러자 방민아는 주저 없이 동의했다.육경한이 방민아에게 난관 수술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건 이것이 신체에 손상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결혼을 약속한 상대라면 충분한 존중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스스로 수술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이번에 소종을 통해 이 소식을 흘린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