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퉤. 괜히 한식구가 아니라니까. 둘이 아주 같은 족속이구먼.”“에잇, 더는 못 봐주겠네...”사람들이 사이좋게 한마디씩 보탰다.아까까지 윤혜인이 당하는 걸 웃으면서 지켜보던 두 사람은 지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원지민은 안색이 하얬다 빨개지기를 반복하더니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척했다.문현미가 얼른 비서를 불러왔다.원지민의 보디가드 임호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원지민을 번쩍 안아 들었다. 자리를 뜨기 전 임호가 윤혜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매섭게 쏘아붙였다.“아가씨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여은이 얼른 앞을 막아서며 똑같이 노려봤다. 기세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주인 인성이 문제 있는 것 같은데. 켕기는 게 있어서 쓰러졌는데 우리 아가씨랑 무슨 상관이죠? 수하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협박할 생각이나 하고. 하긴, 주인이 남 헐뜯는 걸 좋아하니 키우는 개도 똑같겠지.”구경꾼들은 정말 보면 볼수록 가관이라고 생각했다. 이 보디가드도 쓸만한 물건은 아니었다.그들은 윤혜인을 오해한 것에 미안해했다. 저딴 사람들에게 괴롭힘 받고 있으니 결국 제일 불쌍한 건 윤혜인 쪽이었기 때문이다.누군가 씩씩거리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다 봤어요. 그 집 아가씨가 쓰러진 건 모함하다가 실패하니까 쪽팔려서 다리에 힘이 풀린 거지 저 아가씨는 털끝 하나도 닿지 않았다고요.”“그러게나 말이에요. 나도 봤어요.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어이가 없네.”“보디가드가 저렇게 친근하게 안고 있는 걸 봐서는 배 속에 아이도 누구 아인지 모르겠는데...”“그러네요. 저렇게 익숙하게 안는 걸 봐서는 전에도 많이 안아본 솜씨 같네요...”쓰러진 척하던 원지민은 이 말을 듣자마자 몸에 가시라도 돋친 듯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원지민이 이를 악물고는 이렇게 말했다.“당장 내려놔.”임호가 잠깐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가씨, 지금...”임호가 내려놓기도 전에 원지민이 알아서 내렸다.문현미는 마음이
임호가 고분고분 무릎을 꿇었다.원지민이 스스름없이 임호의 손등에 발을 돌려놓더니 뒤꿈치로 세게 지르밟았다.임호의 손등에 박인 굳은살을 다 긁어낼 때까지 사정없이 지르밟았다. 손등은 이미 볼품없이 갈라져 피가 철철 흘러서야 천천히 발을 내렸다.임호는 고문을 당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임호에게 이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원지민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오늘 쪽팔려도 너무 쪽팔렸다. 크면서 이렇게까지 체면이 구겨진 적은 없었다.지켜보던 사람들의 맞장구에 그녀는 마치 따귀라도 연거푸 맞은 듯 얼굴이 얼얼했다.원지민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눈치 없는 새끼, 하마터면 내 일을 망칠 뻔했잖아.”원지민이 씩씩거리며 발로 임호의 머리를 걷어차려 했지만 임호가 발목을 잡았다.원지민의 안색이 순간 변하더니 소리쳤다.“개자식, 이거 놔.”임호가 원지민의 발을 천천히 내려놓더니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배에 힘주면 안 돼요. 아가씨. 제가 할게요.”임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차 뒤편에 놓아둔 골프채를 발견했다. 그는 골프채를 가져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머리를 내리쳤다.퍽.둔탁한 소리와 함께 임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그는 마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다시 한번 머리를 내리쳤다.비산된 혈액이 원지민의 얼굴까지 튀었다.“에잇.”원지민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임호는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골프채를 들어 다시 머리에 갖다 댔다. 한 번만 더 내리쳤다가는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됐어. 그만해.”원지민이 말렸다.아직 쓸모가 있었기에 지금 죽어버리는 건 살짝 아까웠다.임호는 지금 말하기도 버거웠다. 눈에는 피가 가득 차올라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아가씨...”“내려. 내 차 더럽히지 말고.”원지민이 매정하게 명령
원지민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준혁아, 나 맹세할 수 있어. 이 아이 정말 너의 아이야.”“내 아이라고?”이준혁의 눈동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나와 관계도 가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를 가지는 거지? 혼자 가질 수 있다는 거야?”“나는… 나는…”원지민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준혁아, 믿어줘. 이 아이의 아빠는 너야.”“믿어달라고?”이준혁이 그런 원지민을 차갑게 쏘아보며 눈썹을 추켜세웠다.“원지민, 아무리 허기져도 너는 아니야.”이준혁은 원지민에 대한 역겨움을 대놓고 드러냈다.지금 생각하고 있는 걸 절대 이룰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했다.원지민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비참하게 애원했다.“준혁아. 난 거짓말한 적 없어. 이 아이가 달갑지 않다고 해도 네 핏줄이잖아. 받아들여야지.”이준혁은 더는 원지민과 입씨름하기 싫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경고했다.“원지민,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윤혜인은 안 돼. 그 선 절대 넘지 마.”“저번에 이미 명확하게 말했을 텐데. 자기가 한 언행에 책임지라고. 근데 지금 보니까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네. 온씨 가문에서 너의 멍청함을 책임질 수 있길 바라.”원지민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준혁아,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우리 가문에 무슨 짓을 하려고?”“기다려봐. 곧 알게 될 거야.”이준혁의 말투는 꽤 덤덤했지만 듣는 사람을 소름 끼치게 했다.원지민은 이준혁의 수단이 어떤지 옆에서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말이다.원지민은 큰 억울함이라도 당한 듯 목이 터질 것처럼 울었다. 임호 앞에서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준혁아, 우리 지금까지 잘 협력했고 성과도 좋았잖아. 정말 이렇게 매정하게 나올 거야?”“이 아이가 정말 너의 아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나를 이렇게 대한 걸 후회하게 될 거라고.”“후회하지 않아.”이준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원지민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런 수모를 당한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남자한테 말이다.“앞으로 너도, 원씨 가문도 더는 체면을 봐주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이렇게 말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원지민은 머리가 복잡했지만 일단은 이준혁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준혁아, 내가 너를 도울 수 있어.”원지민은 이준혁의 손을 달려가 잡으며 설득하려 했다.“준혁아, 너 지금 회사에서 어려운 상황인 거 알아. 해외 시장 루트도 이구운에게 뺏겼다고 들었어. 우리 원씨 가문이 해외 시장 점유율은 아직 꽤 되거든.”“우리 사이를 대외로 발표하고 아이를 인정한다면 우리 원씨 가문도 아낌없는 지원을 쏟을 거야. 거기에 너의 재능까지 더하면 이구운이 아무리 해외 시장 루트를 뺏어갔다고 해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원지민은 점점 차분해졌다. 그녀는 이준혁의 손을 내려놓으며 조리 있게 말을 이어갔다.“지금 우리 원씨 가문과 틀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봤어? 지금 회사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너도 알잖아. 누가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원지민이 이렇게 오래 기다렸다가 말을 꺼낸 건 다 이유가 있었다.이준혁이 지금 처한 난감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예전에는 이천수가 이준혁을 몰아내려 했다면 지금은 이구운이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만약 다른 때에 임신 사실을 알렸다면 거의 기회가 없을 수도 있지만 지금 얘기하면 기회가 90%는 된다.이준혁은 장사꾼이었기에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대기업 오너 일가에서 가족의 난은 어쩌면 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나락으로 떨어져 다시는 올라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만약 이준혁이 이번 정략결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난에서 누가 승리할지는 알 수 없다.“준혁아...”원지민이 나긋하게 말했다. 차키에 입술이 긁힌 상처가 어딘가 우스워 보였다. 그래도 마음을 가득 담아 이렇게 말했다.“내가 도울
임호는 일 처리가 깔끔했다. 경고받은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전화를 끊은 원지민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렇게 한참 침묵하던 원지민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는 서늘한 말투로 말했다.“그날 같이 도모하자고 했던 거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윤혜인은 상가에서 바로 집으로 향했다. 우울했던 기분도 많이 풀렸다.지금 알 수 있는 정보는 이준혁이 원지민의 아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반해 원지민과 문현미는 그 아이가 이준혁의 아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원지민만 우긴다면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문제는 문현미도 우긴다는 것이다.아무리 원지민을 좋아한다 해도 아들에게 남의 자식을 억지로 밀어 넣지는 않을 것 같았다.윤혜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져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준혁이 그녀를 속인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분히 힘들었기 때문이다.집에 돌아와 곽아름과 놀아주던 윤혜인은 시기가 조금 애매하니 이준혁을 아빠로 인정하는 일을 조금만 미루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곽아름은 꽤 어른스러웠다. 약간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엄마 말에 따를게요.”윤혜인이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부드럽게 곽아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너무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윤혜인은 오늘 원지민의 위선에서 왠지 모를 매서움을 느꼈다.오늘 그런 수모를 준 데다 곽아름이 이준혁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면 원지민이 이성을 잃고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아무튼 곽아름에 관한 건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저녁.곽아름이 잠에 들었는데 도우미가 윤혜인을 찾아왔다.“아가씨, 대표님이 찾습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이렇게 말했다.“이미 잠들었다고 하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다시 올라왔다.“아가씨, 그렇게 전달했는데 계속 밖에 계십니다.”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알겠어요. 상관하지 말고 쉬세요.”도우미가 가고 윤혜인은
이준혁이 그녀를 데리고 한 업소로 향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뭘 하려는지 몰라 살짝 멍한 상태였다.이내 이준혁은 윤혜인을 한 유리창 앞에 서게 하더니 헤드셋을 끼워주며 말했다.“한번 확인해 봐.”이준혁이 안으로 들어가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에 갑자기 외국 성인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몰입감이 좋다고 소문난 4D였다.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소리가 적나라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그 현장에 같이 있는 것처럼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윤혜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이준혁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몸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윤혜인은 그가 어떻게 증명해 보이려는지 알 것 같았다.동영상은 길이가 45분이었다. 보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장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다.윤혜인은 아예 헤드셋을 벗어버렸다. 정말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장면이었다.동영상이 드디어 끝났다. 이준혁은 화면을 끄더니 윤혜인을 끌어당겼다.“봤어?”윤혜인은 귀까지 빨개졌다. 정말 너무 황당했다.이준혁은 핸드폰으로 검진 결과 하나를 보여줬다. 큰 병원에서 발급받은 결과였다.“네가 떠나고 5년간 나는 여자를 만날 생각조차 없었어. 엄마는 이런 내가 걱정돼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 그때 받은 결과야.”검진 결과에는 환자가 마음의 상처로 발기 능력을 잃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문현미도 이 결과를 받아보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이준혁이 왜 원지민 배 속의 아이가 친자가 아니라고 확신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몸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랫동안 그 어떤 여자도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하지만 윤혜인이 귀국하고 처음 마주친 그날, 잃어버린 그 욕구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이준혁이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너만이 나를 설레게 해.”“그만해요...”윤혜인은 더는 낯 뜨거워서 들어줄 수가 없었다.이준혁이 그녀를 안고
아까 원지민과 문현미가 먼저 현장을 빠져나갔다.그들이 서 있던 곳에 이 약통이 떨어져 있었다. 금이 도금되어 있었기에 비서가 흘린 것 아닌 것 같았다.자세히 살펴보니 위에 M라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었다. 하여 원지민이 흘린 것인지 문현미가 흘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도금한 문양으로 보면 젊은이가 애용하는 문양은 아니었고 문현미가 좋아할 만한 문양에 더 가까웠다.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엄마가 흘린 거야.”전에 문현미가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문현미에게 안에 뭐가 들었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몸에 좋은 약이 들어있다고 했다.이준혁이 보낸 사람이 문현미를 조사해 봤지만 딱히 특이점은 없었다.문현미는 평소에 원지민과 쇼핑하고 즐기는 것 외에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문현미의 상태가 정말 이상한 것 같았다.이준혁이 약통을 받아서 들며 이렇게 말했다.“성분 분석 맡겨볼게.”“네. 아무것도 안 나오길 기대해야죠.”윤혜인은 혹시나 잘못 생각한 게 아닌지 두려웠지만 그래도 검사하고 안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돌아가는 길 내내 이준혁은 윤혜인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요즘 거의 못 잤어. 눈을 뜨든 감든 다 네가 생각나서.”윤혜인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못 느꼈는데요.”오늘 윤혜인이 먼저 전화하지 않았다면 이준혁은 그녀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오해가 풀리긴 했지만 이틀이나 자기가 뒷전이었다는 생각에 윤혜인은 심술이 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윤혜인의 말투에 애교가 섞이기 시작했다.이준혁이 웃으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치더니 키스했다.“읍...”윤혜인이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이준혁에 의해 몸이 등받이에 밀착된 상태였다.이준혁이 혀로 윤혜인의 이를 가르고 요지를 공략했다.윤혜인은 저돌적인 키스에 못 이겨 신음했다.이준혁이 미소를 지었다. 약간 가빠진 숨을 참으며 이렇게 물었다.“이제 느껴져?”윤혜인의 얼굴이 순간 터질 것처럼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전에 부사장으로 있던 원지민이 이준혁의 아이를 뱄다니, 정말 놀라운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이준혁은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원지민은 이구운과 손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까발려졌을 때 어떤 후과를 감당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는 의미였다.이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는 그 아이와 아무 관계가 아닌 것 없는데.”“준혁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원지민은 큰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부드럽고 온화한 커리어우먼 이미지가 강했던 원지민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자 조금 믿음직스러워 보이기도 했다.이구운이 느긋하게 다른 보고서를 꺼내며 웃었다.“형, 나도 혹시나 우리 이씨 가문이 핏줄이 아니면 어쩌나 해서 특별히 친자 감정까지 했어요.”친자감정서에는 혈연관계가 99.99%로 적혀 있었다.이구운이 웃으며 말했다.“이 증거로도 부족해요? 아직도 이 아이를 부정할 거예요?”이준혁이 대꾸하기도 전에 이천수가 안으로 들어오며 호통쳤다.“나쁜 자식. 지민이 임신시킨 것도 모자라 인정도 안 하는 거야?”이준혁이 덤덤하게 말했다.“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제 아이가 아니라고요. 이 감정 결과도 충분히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어요.”이천수가 코웃음 쳤다.“지민이가 뭐가 모자라서 가짜 감정서까지 위조해서 너한테 누명을 뒤집어씌우겠어?”이준혁이 세 불청객을 쭉 스캔하더니 차갑게 웃었다.“혼자 계획한 일이 아닐 거예요.”이천수는 이준혁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여 얼른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못 믿겠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감정해.”이천수가 점잖은 척하며 말했다.“근데 요새 지민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회복하면 그때 다시 하는 걸로 하자.”이준혁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들이 준비하는 쇼를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한편으로 보이지만 사실 한편이 아니었다.원지민은 이용당하고도 멍청하게 아무것도 몰랐다.아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