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이 그녀를 데리고 한 업소로 향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뭘 하려는지 몰라 살짝 멍한 상태였다.이내 이준혁은 윤혜인을 한 유리창 앞에 서게 하더니 헤드셋을 끼워주며 말했다.“한번 확인해 봐.”이준혁이 안으로 들어가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에 갑자기 외국 성인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몰입감이 좋다고 소문난 4D였다.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소리가 적나라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그 현장에 같이 있는 것처럼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윤혜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이준혁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몸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윤혜인은 그가 어떻게 증명해 보이려는지 알 것 같았다.동영상은 길이가 45분이었다. 보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장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다.윤혜인은 아예 헤드셋을 벗어버렸다. 정말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장면이었다.동영상이 드디어 끝났다. 이준혁은 화면을 끄더니 윤혜인을 끌어당겼다.“봤어?”윤혜인은 귀까지 빨개졌다. 정말 너무 황당했다.이준혁은 핸드폰으로 검진 결과 하나를 보여줬다. 큰 병원에서 발급받은 결과였다.“네가 떠나고 5년간 나는 여자를 만날 생각조차 없었어. 엄마는 이런 내가 걱정돼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 그때 받은 결과야.”검진 결과에는 환자가 마음의 상처로 발기 능력을 잃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문현미도 이 결과를 받아보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이준혁이 왜 원지민 배 속의 아이가 친자가 아니라고 확신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몸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랫동안 그 어떤 여자도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하지만 윤혜인이 귀국하고 처음 마주친 그날, 잃어버린 그 욕구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이준혁이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너만이 나를 설레게 해.”“그만해요...”윤혜인은 더는 낯 뜨거워서 들어줄 수가 없었다.이준혁이 그녀를 안고
아까 원지민과 문현미가 먼저 현장을 빠져나갔다.그들이 서 있던 곳에 이 약통이 떨어져 있었다. 금이 도금되어 있었기에 비서가 흘린 것 아닌 것 같았다.자세히 살펴보니 위에 M라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었다. 하여 원지민이 흘린 것인지 문현미가 흘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도금한 문양으로 보면 젊은이가 애용하는 문양은 아니었고 문현미가 좋아할 만한 문양에 더 가까웠다.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엄마가 흘린 거야.”전에 문현미가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문현미에게 안에 뭐가 들었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몸에 좋은 약이 들어있다고 했다.이준혁이 보낸 사람이 문현미를 조사해 봤지만 딱히 특이점은 없었다.문현미는 평소에 원지민과 쇼핑하고 즐기는 것 외에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문현미의 상태가 정말 이상한 것 같았다.이준혁이 약통을 받아서 들며 이렇게 말했다.“성분 분석 맡겨볼게.”“네. 아무것도 안 나오길 기대해야죠.”윤혜인은 혹시나 잘못 생각한 게 아닌지 두려웠지만 그래도 검사하고 안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돌아가는 길 내내 이준혁은 윤혜인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요즘 거의 못 잤어. 눈을 뜨든 감든 다 네가 생각나서.”윤혜인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못 느꼈는데요.”오늘 윤혜인이 먼저 전화하지 않았다면 이준혁은 그녀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오해가 풀리긴 했지만 이틀이나 자기가 뒷전이었다는 생각에 윤혜인은 심술이 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윤혜인의 말투에 애교가 섞이기 시작했다.이준혁이 웃으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치더니 키스했다.“읍...”윤혜인이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이준혁에 의해 몸이 등받이에 밀착된 상태였다.이준혁이 혀로 윤혜인의 이를 가르고 요지를 공략했다.윤혜인은 저돌적인 키스에 못 이겨 신음했다.이준혁이 미소를 지었다. 약간 가빠진 숨을 참으며 이렇게 물었다.“이제 느껴져?”윤혜인의 얼굴이 순간 터질 것처럼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전에 부사장으로 있던 원지민이 이준혁의 아이를 뱄다니, 정말 놀라운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이준혁은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원지민은 이구운과 손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까발려졌을 때 어떤 후과를 감당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는 의미였다.이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는 그 아이와 아무 관계가 아닌 것 없는데.”“준혁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원지민은 큰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부드럽고 온화한 커리어우먼 이미지가 강했던 원지민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자 조금 믿음직스러워 보이기도 했다.이구운이 느긋하게 다른 보고서를 꺼내며 웃었다.“형, 나도 혹시나 우리 이씨 가문이 핏줄이 아니면 어쩌나 해서 특별히 친자 감정까지 했어요.”친자감정서에는 혈연관계가 99.99%로 적혀 있었다.이구운이 웃으며 말했다.“이 증거로도 부족해요? 아직도 이 아이를 부정할 거예요?”이준혁이 대꾸하기도 전에 이천수가 안으로 들어오며 호통쳤다.“나쁜 자식. 지민이 임신시킨 것도 모자라 인정도 안 하는 거야?”이준혁이 덤덤하게 말했다.“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제 아이가 아니라고요. 이 감정 결과도 충분히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어요.”이천수가 코웃음 쳤다.“지민이가 뭐가 모자라서 가짜 감정서까지 위조해서 너한테 누명을 뒤집어씌우겠어?”이준혁이 세 불청객을 쭉 스캔하더니 차갑게 웃었다.“혼자 계획한 일이 아닐 거예요.”이천수는 이준혁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여 얼른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못 믿겠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감정해.”이천수가 점잖은 척하며 말했다.“근데 요새 지민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회복하면 그때 다시 하는 걸로 하자.”이준혁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들이 준비하는 쇼를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한편으로 보이지만 사실 한편이 아니었다.원지민은 이용당하고도 멍청하게 아무것도 몰랐다.아
이구운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사실 진작부터 원지민이 독한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형수님, 흥분하지 마요. 이게 형수님을 돕는 거예요.”“돕는다고요?”원지민이 차갑게 웃었다.“이구운 씨 본인이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돕는 거겠죠. 서자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이 말에 이구운의 표정이 음침해졌지만 이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형수님, 지금 같은 상황이 되어야 형님도 형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겠어요?”이 말에 원지민이 멈칫했다.이구운이 설명했다.“잘나갈 때 도와주면 기억도 못 해요.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야 감격하지.”원지민은 이구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이준혁은 궁지에 몰린 상태다. 원지민을 제외하고는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이구운의 옅은 수로 이준혁을 흔들 수는 있어도 무너트리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조금만 흔들어도 원지민에겐 기회가 될 것이다.이준혁이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감사실 사람들이 비서실로 들어가 박스에 자료를 마구 쓸어 담기 시작했다.의외인 건 문현미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현미는 원지민을 부축하고 있었다. 이준혁을 보는 눈빛이 어딘가 흔들렸다.“준혁아, 엄마 말 들으면 안 되겠지? 지민이랑 화해해...”상황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 문현미는 아직도 이준혁이 원지민을 받아들이면 전세가 역전될 것이라고 믿었다.원지민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울면서 하소연했다.“준혁아, 난 정말 이구운 씨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어. 내가 되돌릴게. 네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당연히 공짜는 아니었다. 도움을 받고 싶으면 이준혁도 진정성을 보여야 했다.문현미가 얼른 맞장구를 치며 이준혁을 설득했다.“준혁아, 지민이도 몰랐다잖니. 나는 지민이가 너를 사랑한다고 믿어.”이준혁이 웃었다.“두 사람이 원하던 게 이거였나 봐요?”“준혁아, 오해야. 나는...”“원지민, 나는 네가 그래도 총명한 여자인 줄 알았어. 근데 이구운보다 덜떨어진 사람일 줄은 몰랐다.”원지민이 미간을 찌푸
“나는... 이거 지민이가 준 거 아니야.”문현미가 말했다.이준혁은 실망인지 냉정함인지 모를 눈빛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언젠가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요.”이준혁이 이렇게 말하더니 몸을 돌렸다.문현미는 그 자리에 선 채 손까지 바들바들 떨었다.아무 지병도 없는데 지금까지 오랫동안 정신질환 치료 약을 먹어온 것이다.안 그래도 요즘 자꾸만 머리가 복잡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분명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는데 몸은 마음과 다르게 움직였다.이준혁의 말이 맞다면 원지민이 지금까지 그녀를 속인 것이다.‘내가 도대체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거지? 그리고 혜인이...’이때 원지민이 문현미를 향해 걸어왔다. 문현미가 그 자리에 선 채 멍때리고 있자 얼른 부드럽게 물었다.“어머님, 여기 서서 뭐 해요?”“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손이 자꾸 말썽이라니까.”원지민은 아무래도 약을 너무 많이 먹어 부작용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더니 문현미의 손을 잡으며 온화하게 말했다.“어머님. 준혁이 많이 타일러 주세요. 여자한테 홀려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니까요. 준혁이 몸도 생각하셔야죠.”문현미가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대답했다.“응. 알았어. 내가 가서 타이를게.”“오늘 바로 가서 타이르세요. 준혁이 또 그 여자 찾으러 간 게 틀림없어요.”원지민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어머님은 아직 모르죠? 윤혜인 씨한테 애까지 딸린 거. 그런 애는 애지중지하면서 자기 핏줄은 나 몰라라 하니, 그게 다 윤혜인 씨한테 홀려서 그래요.”문현미가 이를 들으며 윤혜인과의 과거를 떠올렸다.윤혜인에 대한 인상과 의식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것 같았다. 문현미의 인상 속에 윤혜인은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였지만 의식은 원지민이 말이 맞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윤혜인이 요물이라고, 아들을 해치러 온 괴물이라고 말이다.문현미는 머리가 아파 얼른 이마에 손을 올렸다.“지민아, 머리가 아파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원지민은 기분이 잡쳤지만 밖으로
이준혁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윤혜인은 그의 까만 눈동자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윤혜인이 멍해서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이준혁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턱을 윤혜인의 어깨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목소리가 너무 피곤해 보였다.“혜인아, 너무 보고 싶었어.”이준혁이 윤혜인에게 몸을 완전히 기대면서도 그녀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할까 봐 힘 조절에 신경 썼다.언제든 이준혁은 늘 그녀를 먼저 생각해 줬다. 몸에 밴 습관처럼 말이다.순간 윤혜인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곽경천이 이준혁의 상황을 전부 들려줬다.오후에 이천수, 이구운, 원지민, 그리고 문현미까지 합세해 그를 핍박했다고 말이다.혈연관계가 있는 사람과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이 모두 그의 반대편에 서서 그를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 나 있었다.그를 향해 칼을 겨누는 그들을 보며 이준혁은 얼마나 마음이 시렸을까, 정말 갈 곳이 없는 게 아니라 집이라고 할만한 곳이 없었다.윤혜인이 그런 이준혁을 꽉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나도 있고 아름이도 있잖아요. 우리가 옆에 있어 줄게요.”이준혁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윤혜인은 늘 그랬듯 착했다. 그가 반한 모습 그대로 말이다.“그래서 내가 이렇게 왔잖아.”윤혜인이 이준혁의 품에 머리를 파묻으며 웅얼거렸다.“네.”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그녀와 이마를 맞대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영원히 내 곁에 남아주면 안 돼?”이준혁의 눈빛은 마치 밤하늘 같았다. 어둡고 짙었지만 별처럼 빛나기도 했다.윤혜인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순간 이준혁은 오후에 겪었던 일로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다시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그 따듯함은 몸 구석구석 빠짐없이 녹여줬다.길고 뜨거운 키스가 끝나고 이준혁이 윤혜인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윤혜인이 이준혁의 품에 기대어 아직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준혁 씨가 그
“...”둘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푹 잤다.홍 아줌마도 이준혁이 왔다는 걸 알고 방해하지 않았다.윤혜인도 이렇게 안심하고 푹 잤다는 게 신기했다.에어컨을 틀어놓아 시원한 방에서 이준혁의 따듯한 품에 안겨 자는 게 참으로 포근했다.윤헤인은 이준혁이 아직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걸 보고 시간을 확인하려고 몰래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주방으로 내려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침 신선한 전복이 보였다. 윤혜인은 그 전복을 꺼내 전복죽을 끓이기 시작했다.재료를 준비하고 가스 불을 켜자마자 윤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머나먼 외국에 있는 곽경천이 걸어온 영상통화였다.윤혜인이 손을 닦고는 전화를 받았다.“오빠.”곽경천은 윤혜인이 주방에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늦었는데 아직도 밥을 안 먹은 거야?”“응, 낮잠 자느라 늦었어.”“아까는 회의하느라 길게 얘기 못 했어.”“알아.”윤혜인이 바로 입장을 표명했다.“오빠. 우리 회사는 이선 그룹과 협력할 만한 프로젝트 없어?”“아이고. 한 달 나와 있었다고 벌써 팔이 밖으로 굽는 거야?”곽경천이 비아냥댔다.“가서 다시 뼈를 맞춰줘야 하나?”“오빠.”윤혜인이 투정을 부렸다. 곽경천이 농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준혁과 재결합하기로 한 날 윤혜인은 바로 곽경천에게 이 일을 알렸다.그때 곽경천은 만약 이준혁이 그녀에게 상처 준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죽여버리겠다고 했다.“됐어. 이제 나는 뒷전인 거지.”곽경천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오버했다.“아오, 심장 아파.”“장난 그만해. 오빠, 정말 준혁 씨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곽경천이 눈썹을 추켜세웠다.“나도 돕고 싶어.”곽경천은 오후에 상황을 다시 되짚어봤지만 어딘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이 장사에 뛰어든 지도 오래되었고 수많은 전설을 창조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아무 실적도 없는 늙은이와 새로 올라온 아마추어에게 당할까?곽경천이 신경 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동생을 달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윤혜인은 손을 귀에 갖다 대며 달려온 이준혁을 멍하니 쳐다봤다.“깼어요?”뚝배기에서 거품이 흘러나와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가 손을 덴 것이다.이준혁은 빨개진 윤혜인의 손끝을 보며 가스 불을 끄더니 얼른 싱크대로 데려가 손을 씻어줬다. 그러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소파에 앉히더니 익숙하게 화상 연고를 가져와 발라줬다.윤혜인이 손을 흔들었다.“괜찮아요. 이쯤이면 얼음찜질하면 바로 나아요.”이준혁이 그 말을 듣고 얼음을 가져와 윤혜인의 손끝에 올려두고 문질렀다. 차가운 촉감이 참으로 시원했다.“바보같이 늦은 밤에 무슨 죽이야?”윤혜인이 말했다.“당신이 깨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두려고 했죠.”이준혁의 동작이 멈칫했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앞에 앉은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깨끗하고 순수하고 아무 계산이 없는 눈빛이었다.마음이 상하면 매정했지만 사랑할 때면 남김없이 다 퍼주었다.이준혁의 눈가에 웃음이 짙어졌다.어릴 적 바라던 것이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진 것 같았다.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뽀뽀하더니 갈라진 소리로 말했다.“근데 지금은 일단 너부터 맛보고 싶은데.”윤혜인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다시 키스해 왔다.차가운 촉감이... 얼음이었다.얼음을 물고 그녀에게 키스한 것이다.뜨거운 혀로 얼음을 감싸자 혀끝의 신경이 극한의 자극을 받아 온몸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이준혁의 한 손은 윤혜인의 머리에, 다른 손은 윤혜인의 옷 속을 천천히 파고들었다.달콤한 키스와 말캉한 그녀의 몸에 이준혁은 점점 빠져들었다. 그녀를 자기 몸속에 녹아들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욕심내지 않을 것 같았다.윤혜인의 몸에서 고양이와도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이준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그는 윤혜인의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차가운면서도 또 뜨거웠다.찌릿한 고통을 동반한 짜릿함이 곧 달콤함이 되어 온몸으로 퍼졌다.윤혜인이 두 팔로 이준혁의 몸을 감싸더니 약간은 서툴게 반응했다. 그런 반응이 이준혁에겐 더 매혹적으로 다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