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조건을 수용했다.“알겠어.”윤혜인은 그의 순종적인 태도를 의심스러워하며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약속 지켜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모든 게 무산될 거니까.”이준혁은 주저 없이 말했다.“알겠어. 다 네 말대로 할게.”그렇게 윤혜인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걸어갔다.하지만 이준혁이 그녀를 따라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회사까지 데려다줄게. 마침 같은 방향이라서.”“필요 없어요.”윤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리고 앞으로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지 마요. 밤새우는 건 늙고 빨리 죽는 지름길이니까.”핏발 선 그의 눈과 밤새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윤혜인은 그녀의 운전 기사에게서 이미 모두 들었다.당연히 윤혜인은 그가 아름이에게 정을 붙이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지,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이준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알겠어. 앞으로 그러지 않을게.”뒤이어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집 앞에 기다리고 있는 운전 기사에게로 향했다.그러고는 차에 올라타며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이준혁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동시에 약간의 희망도 느꼈다.‘적어도 조금 진전이 있어.’차에 올라탄 후, 주훈은 차를 시동을 걸며 말했다.“대표님, 최근 아버님께서 L 국을 자주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조사에 따르면 그곳에서 생물학 박사를 만난 것 같아요.”그러자 이준혁은 넥타이를 풀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또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아봐.”과거에 그의 아버지인 이천수는 권력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 이후로 한동안 조용했다. 한때는 이준혁에게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가문을 이어가라고 권하기도 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주훈은 그의 명령을 받아들였고 백미러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조금 쉬시는 게 어떨까요?”밤을 새운 탓에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지만 피
윤혜인은 열어서 내용이 뭔지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사이트를 다시 클릭하니 없는 화면이라고 나왔다.검색어 순위를 새로 고치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검색어들이 한순간 사라졌다.누군가 ‘특수’ 처리를 한 게 틀림없었다.신기하다고 생각한 구지윤도 앨범에서 기사를 찾아냈다.“다행히 전에 기사 캡처했어. 한 번 봐봐.”호소자는 듣보잡 작업실이었는데 사진을 비교하며 몇 년 전에 이미 전시한 제품이라고 주장했다.그리고 달밤 작업실은 그들이 작은 작업실인 걸 노리고 이렇게 대담하게 베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윤혜인은 사진 속 복장을 보며 무언가 번쩍 생각났다.꽤 연식이 있어 보이는 옷이었는데 작업실에서 잘 보관해서 그런지 보존 상태는 완벽했다. 한눈에 봐도 정성스레 봉제한 옷 같았다.자수의 디테일이나 패턴은 윤혜인이 패스티벌에서 사용한 전통 시리즈와 거의 똑같았다.유일한 차이라면 바로 텍스쳐와 컬러였다.비교 샷과 상대 작업실에서 남긴 영상으로 보면 누가 디자인을 베꼈는지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하지만...윤혜인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이 상대 작업실에 연락 좀 해줘.”“뭐?”구지윤은 살짝 놀랐다. 피해도 모자랄 판에 상대에게 연락하겠다는 윤혜인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윤혜인이 말했다.“상대에게 이 작품을 사겠다고 해봐. 그리고 일단 값부터 부르라고 하고.”구지윤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정말 연락해?”구지윤은 윤혜인이 베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아직 사태 파악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상대에게 연락해 그 작품을 사겠다고 하면 약점을 다른 사람 손에 쥐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구지윤이 귀띔했다.“검색어는 내렸지만 주문을 취소하겠다는 고객이 꽤 밀려들고 있어요.”북성이 주최한 연중 패스티벌에서 성공을 거머쥔 뒤로 작업실도 많은 주문을 받게 되었다.적합하지 않은 주문은 모두 거절했다.윤혜인은 돈을 벌고 싶어서 품질에 들여야 할 시간을 단축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검색
이준혁이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해서야 성준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피해는 돈으로 메꿀 수 없었다.예를 들면 연예인의 가치가 이번 일로 크게 요동치거나 많이 깎일 수도 있다.“대표님, 사실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24시간 이내에 제가 해결하겠습니다.”윤혜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성준의 마음도 조금 풀렸다.사실이 아니기만 하면 된다.윤혜인이 덧붙였다.“그리고 검색어는 내리실 필요 없어요. 그냥 판이 점점 더 커지게 놔두세요. 괜찮아요.”성준이 눈썹을 추켜세웠다.“오해한 것 같네요. 검색어는 제가 내린 게 아니에요. 이 대표님이 내렸지.”이 일을 만든 게 윤혜인이니 수습도 남편인 이준혁이 해야 했다. 성준은 다른 사람이 싸지른 똥을 치워줄 생각이 없었다.윤혜인이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최근 며칠간 제가 대표님 회사로 피팅하러 갔을 때 CCTV를 전부 저한테 넘겨주실 수 있나요?”성준도 총명한 사람이었기에 바로 반응했다.“회사 내부에 범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커요.”윤혜인이 말했다.“그래요. 직접 주긴 어렵지만 조사하라고 할게요. 찾아내면 연락하죠.”“네, 부탁드릴게요.”전화를 끊고 윤혜인은 태블릿에 보이는 사진을 매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한편, 서재.머리를 높게 묶은 원지민은 세련된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 폼이 매우 깔끔하면서도 멋졌다.임호가 들어와서 보고했다.“아가씨, 달밤이 작업실에 연락해 큰돈을 주고 전시품을 구매하겠다고 했답니다.”“허허.”원지민이 차갑게 웃더니 비아냥댔다.“이준혁이 좋아하는 여자가 고작 이 정도라니. 결국엔 허울뿐이지 아예 실력이 없네. 지금까지 받은 영예도 다 베껴서 받은 거고.”원지민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했다.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이준혁은 보물처럼 감싸고 도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에 반해 원지민은 일에서 과감하고 패기 넘쳤다. 이선 그룹에서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성사한
원지민은 마치 여왕처럼 옆으로 누우며 명령했다.“머리 좀 안마해 줘.”임호가 고분고분 쪼그리고 앉았다.웅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지금은 부드럽게 원지민의 머리를 안마해 주고 있다.임호는 어둠의 섬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보기 드물게 깔끔한 걸 좋아하는 죽음의 기사였다.항상 몸은 뽀송뽀송했고 땀 냄새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모발이 매우 풍성한 편이라 남성적인 매력도 다분했다.안마를 한참 받았지만 뭔가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호르몬 문제인지 요즘 그쪽으로 욕구가 들끓어 올랐다.원지민은 빨간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임호를 보며 암시했다.“조금만 더 아래로 가봐.”임호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거친 손으로 목덜미를 스쳐 쇄골을 안마했다.두꺼운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만지니 묘한 자극적인 맛이 있었다.원지민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볍게 신음했다.“힘 조금만 더 써도 될 것 같아...”임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원지민이 교태를 부리자 몸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 혹시...”“음...”원지민은 지금 정신이 약간 몽롱한 상태라 무의식적으로 이런 소리를 냈다.임호는 원지민이 동의했다는 생각에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머리를 천천히 숙였다.“읍...”원지민은 자기도 모르게 또 신음했다. 그러다 안색이 변하더니 손을 들었다.찰싹.원지민이 임호의 따귀를 찰지게 내리쳤다. 목에 난 키스 마크를 보고는 매섭게 쏘아붙였다.“빌어먹을 새끼, 누가 너더러 키스하래.”꿈에서 깬 임호는 안색이 삭 변했다.원지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털썩 바닥에 꿇어앉더니 자기 따귀를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철썩, 철썩, 철썩.그렇게 임호는 연거푸 10대를 내리쳤다. 손에 힘을 풀기는커녕 때리면 때릴수록 점점 더 세게 후려쳤다.임호도 자기가 그렇게 불경한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정말 무엇에 단단히 홀린 것 같았다.여자의 향기를 맛보고 싶었지만 결벽이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임호의 마음속에는 오직
원지민이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기억해. 너는 영원히 내 발치만 맴도는 개 같은 존재야. 내 개가 됐으면 영원히 주인 말을 잘 들어야겠지? 네 주장이나 생각 같은 건 있어서는 안 돼. 알아들어?”임호는 입이 피투성이라 말하는 것도 아팠다. 그래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네, 아가씨.”원지민은 뭐나 생각난 듯 차갑게 물었다.“임세희 쪽은 가서 알아봤어?”“알아봤습니다. 아직 안에서 치료받는 중입니다. 다음 달 판결 예정이라고 합니다.”원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입막음은 잘 해뒀지?”“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예 혀를 잘라버렸는데 혼비백산해서 이미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입니다.”임호는 병원에서 선수를 쳤다. 야밤에 병원으로 잠입해 임세희의 혀를 자르면서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혼비백산한 임세희는 당장에 바지에 실수하더니 완전히 미쳐버렸다.정말 미친 거라면 임세희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걸 빌미로 며칠 더 살다 죽을 수 있으니 말이다.원지민은 임세희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뒤처리만 깔끔히 하면 된다는 취지였다.사실 원지민도 아직은 임세희가 죽는 게 싫었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이용할 셈이었기 때문이다.임세희는 죽음도 가치 있는 죽음이어야 했다.원지민은 임호의 손을 야무지게 지르밟더니 욕설을 퍼부었다.“꺼져.”임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이런 대우를 받고도 눈빛은 여전히 미련 가득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굽신거리며 방에서 나갔다.원지민은 임호의 충심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면 시중들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임호는 생긴 것도 꽤 잘생겼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는 준수하면서도 튼튼해 보였고 짐승미가 다분한 터프가이 같았다.신분만 바꾼다면 원지민도 그를 거들떠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임호는 비천한 신분을 가졌기에 시중을 드는 데에만 만족해야 했다.원지민은 거울 앞으로 걸어가 옷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는 하얀 뱃가죽을 내려다보았다.만삭
아주 예의 바른 볼 키스였기에 사실 정상이었다. 외국에서는 흔한 인사였다.하지만 윤혜인이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곽아름의 볼을 꼬집으며 이준혁의 품에서 내렸다.“엄마가 안 아프다고 했잖아. 얼른 손 씻고 와서 아침 먹어야지.”곽아름은 살짝 실망했지만 이준혁과 같이 밥 먹는다는 생각에 그래도 기뻤다.하여 잽싸게 대답했다.“알겠어요. 엄마.”곽아름이 자리를 비우자 윤혜인이 얼굴을 굳히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이준혁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죠?”윤혜인이 내비치는 거리감과 적대감에 이준혁은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아파져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름이랑 아침 먹고 싶어서.”윤혜인은 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다.이준혁이 찾아온 목적은 얼굴에 쓰여있을 만큼 선명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곽아름을 핑계 삼아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윤혜인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그저 준혁 씨가 아름이의 상 하굣길에 동행하는 것만 동의했을 뿐이지 우리 생활까지 공유하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우리라는 단어에는 이준혁을 아예 포함하지 않고 있었다.이준혁은 목구멍이 막혀왔지만 진심으로 말했다.“혜인아, 난 정말 그냥 아름이랑 더 같이 있고 싶을 뿐이야.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을 놓쳐버려서 더는 한 순간도 낭비하기가 싫어.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아름이 자주 보게 해줘.”당연히 곽아름뿐만 아니라 윤혜인도 보고 싶었다.하지만 이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겨우 한걸음 가까워졌는데 다시 망칠 수는 없었다.만약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윤혜인은 곽아름도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에 이준혁도 곽아름을 뺏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윤혜인도 부녀의 만남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이준혁은 꼴 보기 싫었지만 곽아름이 실망하는 것도 싫었다.잠깐 고민하던 윤혜인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밥 먹고 얼른 가요.”이준혁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표
곽아름은 이준혁이 단팥 호빵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직접 조금 나눠서 주었다.하지만 뜨거운 단팥이 손등까지 흘러내려 뜨거웠던 곽아름은 손에 들었던 호빵을 이준혁에게 던지고 말았다.이준혁은 더럽혀진 옷은 상관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곽아름을 안고 다급하게 물었다.“데었어?”이준혁의 생각은 윤혜인과 같았다. 윤혜인도 첫 반응이 곽아름의 손을 살피는 것이었다.“아름아…”다급해진 윤혜인이 곽아름을 안으려 했지만 이준혁이 한발 빨리 곽아름을 안고 싱크대로 향해 차가운 물로 씻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몸에 묻은 단팥이 곽아름에게 묻지 않게 조심했다.손을 씻고 나니 홍 아줌마가 화상 연고를 가져왔다.“제가 할게요.”홍 아줌마가 곽아름을 안아가려는데 이준혁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연고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주세요.”윤혜인은 이준혁이 발라주는 게 신경 쓰여 홍 아줌마에게 이렇게 말했다.“나한테 줘요.”홍 아줌마는 화상 연고를 윤혜인에게 건네주었다. 이준혁은 곽아름을 안아 다리 위에 앉혔고 윤혜인은 쪼그리고 앉아 곽아름에게 약을 발라주었다.약을 바르는데 윤혜인의 팔이 이따금 남자의 바지를 스쳤지만 윤혜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이준혁은 까만 눈동자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렇게 평화롭게 윤혜인과 지낸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늦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심을 듬뿍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 곽아름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엄마, 아빠, 아름이 안 아파요.”제때 처리한 덕분에 곽아름의 손등은 별 영향이 없어 보였다. 그제야 두 사람은 한시름 놓았다.홍 아줌마가 얼른 곽아름을 안아가더니 이준혁에게 말했다.“대표님,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세요.”이준혁의 옷을 힐끔 살펴보니 더는 입지 못할 것 같았다.얼마냐고 변상해 주겠다고 하려는데 곽아름이 입을 열었다.“아빠, 엄마가 외삼촌 주려고 만든 옷이 위층에 있는데 올라가
순간 윤혜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화가 나서인지 더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윤혜인은 숨을 꾹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나가 있을게요.”윤혜인은 이준혁과 부딪칠까 봐 몸을 최대한 옆으로 틀고 지나가다가 거기 놓아둔 작은 걸상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이제 옷장 문에 쓰러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윤혜인은 눈을 감고 낮게 비명을 질렀다.“아!”하지만 비명이 이내 신음이 되었다.이준혁이 잽싸게 팔을 내밀어 그녀를 건져냈다.퍽.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문제는 윤혜인의 얼굴이 이준혁의 튼튼한 가슴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건 입술이 닿지 말아야 할 곳에 닿았다는 것이다.“흡.”이준혁이 숨을 들이마셨다. 끓어오르는 욕구에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엎드려 있던 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몸이 이상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순간 윤혜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이때 밖에서 홍 아줌마가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괜찮아요?”장난감을 가지러 올라왔다가 둔탁한 소리를 듣고는 걱정되기 시작했다.하지만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홍 아줌마는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아가씨, 안에 계세요? 저 들어갑니다…”윤혜인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이 장면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윤혜인은 이준혁의 가슴을 짚고 일어나다가 이준혁의 중요 부위를 살짝 건드렸다. 이에 이준혁이 신음하더니 윤혜인의 발목을 움켜잡고는 하얘진 얼굴로 말했다.“나 고자 만들고 싶어?”윤혜인은 그제야 자기가 어디를 걷어찼는지 알았다. 이에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그때 탈칵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윤혜인이 눈을 부릅뜨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이거 놔…”‘요’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준혁이 갑자기 손을 뻗어 윤혜인의 허리를 감싸더니 옷장으로 숨어들었다.문이 열림과 동시에 옷장 문도 따라서 닫혔다.옷장은 컸지만 두 사람이 들어가니 갑자기 비좁아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