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조금 설렌 이준혁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 네가 약만 발라주면 돼.”“그럼 가시죠, 차에 약이 있다면서요?”윤혜인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그녀에게 있어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약을 발라주는 것이 큰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을 부축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은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주훈이 그녀를 막았다.“눈치 좀 챙겨요.”주훈이 그녀를 나무라자 여은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아가씨는 의사도 간호사도 아닙니다. 당신네 대표가 아가씨를 차에 데려가서 뭘 하려는 건지 모르잖아요.”그 말에 주훈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사실 이준혁은 윤혜인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그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고 싶어 했다.그러나 주훈은 충성스러운 그의 비서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주훈은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저희 대표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항상 정직하고 바르게 행동하시는 분이에요. 게다가 대표님께서는 어깨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아가씨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겁니다.”주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사실 어깨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 정도 상처는 이준혁에게 있어 아무렇지도 않았다.그러나 주훈은 여은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를 약하게 보이게 했다.뒤이어 그는 여은을 뒤에 있는 차로 데려가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지켜봐요. 안심해도 됩니다.”차 안에서, 윤혜인은 피에 젖은 셔츠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래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무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정말 괜찮아, 약만 바르면 돼.”이준혁은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 상처로 병원에 갈 필요는 없었다.그러자 윤혜인이 불만스럽게 말했다.“왜 이렇게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요?”이준혁에게는 그녀의 말이 천상의 음악처럼 들렸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신호였다.“근데... 손이 불편해서 네가 셔츠를 벗겨줘야 할 것 같아.”“이...”얼굴이 빨개지며 윤혜
윤혜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준혁을 보며 말했다.“조금 더 옆으로 돌아봐요, 이렇게는 하기 어려워요.”그러자 이준혁은 순순히 옆으로 돌아섰다.앉은 높이로는 충분하지 않아 윤혜인은 무릎을 차 시트 위에 올렸다.이렇게 하면 상체를 세울 수 있어서 이준혁의 어깨높이와 맞출 수 있었으니 말이다.무릎이 시트에 가볍게 눌려서 가죽 시트가 조금 움푹 들어갔고 이준혁은 백미러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시선을 따라 거울을 보았다.거울 속에서 윤혜인은 이준혁 뒤에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그 자세는 말로 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내 얼굴이 뜨거워지며 윤혜인은 급히 해명했다.“무릎 꿇는 게 더 편해서 그래요...”이준혁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응, 편한 대로 해.”그 말 속에는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었다.윤혜인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지만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그녀는 빨리 셔츠를 벗겨내고 싶었다.곧 남자의 등에 있는 깊은 척추와 선명한 근육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윤혜인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남자의 등을 무시하고 상처를 확인했다.다행히, 유리 조각이 깊게 박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처 속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보다 조금 짧은 유리 조각이 있었다. 윤혜인은 핀셋을 꺼내며 말했다.“조금만 참아요, 유리 조각 빼낼게요.”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윤혜인은 조심스럽게 유리 조각을 제거하고, 상처에 ‘호’하며 입김을 불어 넣었다.이 행동은 그녀가 아름이에게도 해주는 습관이었다.잔뜩 긴장한 상태로 이준혁은 눈썹을 찌푸렸다.고통은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지만, 계속 이렇게 한다면 더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윤혜인은 알코올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이 과정은 이준혁에게 큰 인내심을 요구했다. 마지막 단계는 상처를 감싸는 것이었다.하지만 상처의 위치가
이준혁의 얇은 입술이 윤혜인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아 불꽃이 튀는 듯했다.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느낌의 심장, 몸속의 모든 세포가 그의 몸속에 있는 갈망을 전달하고 있는 듯했다.가슴속은 애틋함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혜인을 이렇게 품에 안고 키스하는 순간을 얼마나 바라왔던가...그녀가 돌아온 후로 느꼈던 상실감과 허무함, 기쁨과 슬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너무 많은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고 그녀를 자신의 뼈와 피에 녹여 넣고 싶은 정도였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짧고 가벼운 입맞춤만을 나누며 그녀에게 애정을 표현했다.몇 초 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윤혜인은 남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읍...”아프다는 듯이 이준혁이 소리를 냈다.아마도 어깨의 상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때문에 윤혜인은 자연스레 손에 힘을 뺏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부끄러움과 화가 뒤섞여 있었다.“혜인아...”이준혁은 아쉬운 마음으로 윤혜인의 입술에서 멀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부드럽게 불렀다.“나 때리기 아까운 거지?”“누가 아깝대요?!”윤혜인은 다시 주먹을 들었지만, 이준혁이 그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결국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그러자 이준혁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네 입술은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어.”또다시 윤혜인의 얼굴이 빨개졌다.“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헛소리 그만해요!”그러자 이준혁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내가 증명할 수 있다면?”윤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굴렸다.‘그걸 어떻게 증명하겠다는 거야?’하지만 말할 틈도 없이, 서로의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지며 이준혁은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당신...”윤혜인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밀어냈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는 이로 그녀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읍...”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준혁은 윤혜인의 등을
그러나 윤혜인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곽경천은 이준혁이 공격을 멈춘 틈을 타 망설임 없이 또 한 번 강력한 주먹을 날렸다.그 바람에 이준혁은 한바탕 피를 토해냈고 한쪽 얼굴은 얼얼하게 아팠다.입안에는 피 맛이 가득했다.하지만 윤혜인이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며 그는 그저 참아냈다.이준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혀끝으로 뒤쪽 어금니를 누르며 곽경천의 연이은 공격을 참아냈다.솔직히 말해 진짜로 싸운다면 곽경천은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은 이준혁을 이길 수 없었다.심지어 현재 이준혁이 부상을 당한 상태라 해도 곽경천에게 밀릴 일이 없었다.그러나 만약 그가 곽경천을 때린다면, 윤혜인은 그를 더욱 싫어하고 무시할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이준혁은 참아야만 했다. 곽경천의 주먹이 자신의 몸에 하나씩 꽂혀도 그는 반격하지 않았다.곽경천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피를 보려고 작정한 듯 주먹 하나하나에 분노를 담아 때렸다.방금 막 비행기에서 내려온 그는 여은의 보고를 듣고 급히 달려왔다.도착했을 때, 그는 이준혁이 반쯤 벌거벗은 상태로 차 안에서 자신의 여동생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의 시점에서 볼 때, 이준혁은 윤혜인을 강제로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결국 망설임 없이 이준혁의 차를 부쉈다.지금 그는 이준혁의 신분이나 지위 따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자신의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오빠일 뿐이었다.윤혜인은 두 사람이 왜 싸우기 시작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주훈과 여은도 동시에 달려왔다.주훈은 상황을 보고 도와주려고 했지만, 이준혁이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이준혁이 곽경천에게 수십 대를 맞아도 반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주훈은 당황했다.“사모님... 아니 혜인 씨! 빨리 곽경천 씨 말려주세요, 대표님께서는 다치셨다고요!”주훈이 급히 말하자 윤혜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오빠, 그만해!”하지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곽경천은 윤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주먹은 멈추지 않았다.윤
곽경천은 망설임 없이 윤혜인을 안고 차에 태웠고 여은은 앞에서 운전했다.차에 타기 전, 누구도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이준혁을 돌아보지 않았다.이준혁은 윤혜인이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곽경천에게 맞았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힘조차 없을 정도로 아팠다.몸이 마치 플라스틱 거품처럼 휘청거리며 차체에 의지할 수도 없었다.그러자 주훈이 급히 다가와 이준혁을 부축했다.이준혁의 눈에 드러난 깊은 슬픔을 보고 주훈은 가슴이 뜨거워졌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닐 겁니다...”위로하고 싶었지만 주훈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누구나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죽음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조금 전 상황에서도 이준혁은 곽경천과 싸울 수 있었지만, 윤혜인의 말 때문에 참았다.그는 곽경천에게 맞으면서도 위기 상황에서 상처를 무릅쓰고 윤혜인을 보호하려 했다. 그런데 왜 윤혜인은 그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곧 주훈이 이준혁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준혁은 그의 손을 밀어내고 한 손으로 차 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그러고는 말없이 차에 다시 앉았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 이준혁은 그 모든 고통이 가슴 속 깊은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육체적 고통보다도 마음이 아픈 것이 훨씬 더 컸다.오랜 시간 억눌려 왔던 감정이 터져 나와 그는 결국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남은 피는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고 그는 의자에 무겁게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대표님!”주훈은 놀라 차를 멈추고 이준혁의 상태를 확인했다.맥박이 어찌나 약한지 호흡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주훈은 떨리는 손으로 이준혁을 다시 운전석으로 옮긴 뒤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차 뒷좌석에 기대어 앉아 있는 윤혜인의 얼굴은 창백했다.그러자 곽경천은 따뜻한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아직도 불편해? 조금만 참아,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
윤혜인은 곽경천의 태도를 생각하며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그래서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냥 일어나서 좀 걸으려고.”그러자 곽경천은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먼저 밥부터 먹자.”곽경천은 집에서 홍 아줌마가 특별히 끓인 위에 좋은 죽과 몇 가지 가벼운 반찬을 준비해왔다.테이블에 한 상 차려놓은 뒤 그는 윤혜인에게도 앉으라고 했다.그녀는 테이블로 다가가 준비된 죽과 반찬을 보았다.맛은 담백해 보였지만 모두 그녀의 입맛에 맞춰 준비된 것들이었다.곽경천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직접 윤혜인에게 죽을 떠주며 그녀가 싫어하는 생강을 다 골라냈다.윤혜인은 생강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위에 좋은 재료이기 때문에 곽경천은 그것을 죽에 넣으라고 분부했었다.그래서 다 끓인 후에 생강을 하나하나 골라낸 뒤 그는 윤혜인의 앞에 갖다 놓았다.“오빠,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윤혜인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곽경천은 언제나 그녀에게 너무 잘해줬고 항상 그녀를 소중하게 여겼다.“응, 이 죽 꼭 다 먹어야 해.”그가 단호하게 명령하자 윤혜인은 순순히 말을 듣고 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곽경천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뒤이어 윤혜인은 곽경천이 건네준 휴지로 입을 닦으며 물었다.“오빠, 근데 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 아빠는 괜찮으셔?”“많이 좋아지셨어. 아빠도 너랑 아름이가 걱정되셔서 나더러 빨리 가보라고 하신 거야.”“아, 다행이다.”윤혜인은 안도하며 말했다.매일 아빠와 통화를 했지만 아빠는 항상 그녀에게 괜찮다고만 했다.괜히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돼 윤혜인은 아름이와 함께 아빠를 보러 갈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아름이가 막 유치원에 입학한 상황에서 휴가를 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다.이미 이곳에서 아름이가 즐겁게 보내고 있으니 이리저리 이동하지 말라면서 말이다.“그 남자랑 무슨 일 있었어?”곽경천이 물었다.여은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은도 자세히는 몰랐기 때문에 그는 윤혜인에게 직접
곽경천은 윤혜인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다만 그는 그녀가 이준혁에게 감동받을까 봐 걱정했다.단순히 칼을 대신 맞아줬다고 해서 죄를 속죄받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로 보였으니 말이다.“알았어.”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조각난 기억 속에 윤혜인은 그 남자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자신을 위해 칼을 막아준 것을 떠올렸다.최근 들어 그녀는 과거의 일들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어떤 순간에는 선명하게 기억나고 또 다른 순간에는 완전히 잊어버리곤 했다.그녀는 곽경천이 걱정할까 봐 이러한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이준혁이 걱정되면서도 오빠인 곽경천이 또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오빠가 충동적으로 이준혁 씨를 때린 것 때문에 영향을 받으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내가 반드시 지금 그 남자가 무슨 상황인지 알아봐야 해.’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소원이 들어왔다.“혜인아, 괜찮아?”소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응, 괜찮아.”그러나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듯 그녀는 윤혜인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렇게 두 눈으로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소원은 한숨을 내쉬었다.곽경천은 두 사람이 여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자리를 피했지만 여은에게 문 앞을 지키며 윤혜인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했다.윤혜인은 곽경천이 나간 후, 소원에게 말했다.“소원아, 나 좀 도와줘.”소원은 윤혜인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물었다.“무슨 일이야?”그러자 윤혜인은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고 잠시 생각한 후 소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결국 너는 그 남자를 피할 수 없는 거구나?”윤혜인은 소원의 반응에 약간 의아해하며 물었다.“너 이준혁 씨에 대해 잘 알아?”윤혜인은 때때로 이준혁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없는 반면 소원은 그녀보다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소원은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이 궁금해?”그 말에 윤혜인은 얼굴이 빨개졌다.“아니야.”더 이상 놀리지 않고 소원은
룸 안에서.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목울대 부분을 단추로 딱 맞춰져 있었다.무표정한 얼굴의 그는 조금 금욕적이고 냉정한 느낌을 주었다.그러나 소원이 들어오자마자 그의 얼굴에 있던 냉정함이 순간 사라졌고 대신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누나.”그는 소원의 외투를 벗겨 잘 걸어두었다.“오래 기다렸어?”소원이 물었다.“아니요, 나도 방금 왔어요.”두 사람이 앉자마자 서현재는 음식을 주문했다.곧 음식이 나왔고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심해어를 좋아했던 소원은 참지 못하고 테이블에 있는 생선요리를 몇 조각 더 먹었다. 비록 맛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는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을 좋아했다.서현재는 그녀에게 야채를 집어주며 말했다.“소원 누나, 편식하면 안 돼요. 이거 다 먹어야 생선 한 조각 더 먹을 수 있어요.”소원이 위 수술을 받은 후, 서현재는 항상 이렇게 그녀를 달래며 먹였다.만약 좋아하는 음식이 전혀 먹지 못하게 한다면 그녀는 기분 나빠할 것이고 식욕도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소원은 그의 말대로 야채를 먹었다.아무 맛도 없었지만 그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그러자 서현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누나, 회사를 저희 셋째 삼촌 회사 명의로 올리는 게 어때요? 서울에서는 그 업종이 유명하지 않거든요.”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현재야, 그 일은 다시 말하지 마.”그녀는 서현재의 도움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었다.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소원은 이제 더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소원의 결정이라면 거의 반대하지 않는 서현재였지만 이런 그녀의 말에 그는 잠시 눈빛이 어두워졌다.“알겠어요. 하지만 타깃 작업에 대해서는 삼촌이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서 도와줄게요.”“정말 필요 없다니까...”“누나, 이건 양보할 수 없어요.”곧이어 서현재는 테이블 너머로 그녀의 손을 잡고 강한 눈빛으로 말했다.“이 일, 빨리 끝내고 싶어요.”소원은 손을 움직이지
원진우가 점점 다가오자 윤혜인은 마지막 기회를 잡고 숨겨둔 막대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원진우가 맨손으로 막대를 가볍게 붙잡아 꽉 쥐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은 막대를 빼앗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그 순간, 원진우는 다른 손으로 윤혜인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고 그녀를 다락방 유일한 창틀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목이 졸려 말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두 손으로 창틀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이 다락방은 지상에서 족히 10미터는 넘게 높았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이 순간, 원진우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그의 눈에 더 이상 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처음에는 딸에게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난 것은 원진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누구든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심지어 친자식이라도 용서받지 못한다.윤혜인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원진우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아직도 말 안 할 거냐?”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이 말과 함께 윤혜인의 몸 반쯤이 창밖으로 나갔다.“멈춰!”갑자기 아래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윤혜인은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곽경천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빠가... 오빠가 드디어 왔어...’원진우가 서둘러 나왔던 탓에 데려온 네 명의 경호원은 이미 곽경천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 원진우도 곽경천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무슨 날인가? 죽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군.”“이 미친놈! 내 여동생 당장 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곽경천이 외쳤다.원진우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곽경천을 겨누며 말했다.“뭐? 날 죽
‘그래서 나한테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거였어.’윤혜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푸른 섬에 눈길을 빼앗긴 윤아름을 돌아봤다.윤아름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된 듯, 맑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윤혜인은 마음을 굳히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윤아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게임 하나 해요...”원진우는 차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운전하는 경호원은 고속으로 차를 몰며 윤혜인이 타고 도주한 검은 차량을 추적했다.그러던 와중 차량이 눈에 보이자 경호원은 차를 세우며 보고했다.“대표님, 저 앞에 있습니다.”원진우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차 안을 들여다봤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말 들을 애가 아니지.”딱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 관절을 꺾더니 원진우는 생각에 잠겼다.‘찾으면 어떤 벌을 줘야 할까. 다리 힘줄과 손 힘줄을 끊을까, 아니면 독을 써서 목소리를 없앨까... 아니면 둘 다 한꺼번에 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그는 특히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도망치려 한 점에 분노했다.‘제 엄마를 유혹해 나를 떠나려 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곧 원진우는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주변을 샅샅이 수색해.”차량의 전력 시스템을 끊은 뒤부터 지금까지 겨우 15분이 지났다.때문에 그녀들이 멀리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잠시 후, 경호원이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앞쪽에 사람이 없는 교회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주변에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교회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원진우는 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가슴과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주님, 제 죄를 용서하소서.”그 후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수색해.”건장한 경호원 네 명이 흩어져 교회 곳곳을 뒤졌다.그렇게 모든 곳을 수색한 후,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못한 곳
게다가 원진우의 계획을 보니 해운성에서 그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할 생각인 듯했다.아마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군데를 거쳐 이동하겠다는 의도였으니 그의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윤혜인은 그제야 이해했다.그녀가 보낸 신호가 전송되었어도 곽경천 일행이 빠르게 도착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나라 하나를 건너야 하는 거리에서 아무리 빨리 와도 금방 닿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녀는 차량에 내장된 스마트 시스템을 떠올리고 외국어로 시스템에 말을 걸어 보았다.“나 대신 신고 좀 해줘!”그러자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대답했다.“현재 해운성 해안경비대로 연결 중입니다.”돌아오는 답변에 윤혜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대다수의 차량 시스템이 전화 통화는 불가능해도 긴급 신고는 가능할 것이라 짐작했다.‘해안경비대에 연락만 닿는다면 오빠가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어. 아무리 원진우가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든 나라에 그 세력이 미치게 할 수는 없을 거야.’윤혜인은 차를 멈추고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 연결을 기다렸다.삐빅 하는 두 번의 신호음 뒤에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너머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상담원이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윤혜인은 다급히 말했다.“저와 제 어머니가 납치되었습니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범인이 저희를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담원은 침착하게 물었다.“상대방이 누구인지, 그리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세요.”윤혜인은 대답했다.“저희를 납치한 사람은 국제적으로 수배가 되어있습니다. 혐의도 한두 개가 아닐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고 주변에 바다밖에 없어요. 내비게이션에서는 블루섬이라고 나옵니다.”윤혜인은 상대가 국제 수배범이라는 말을 일부러 꺼냈다. 경찰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게다가 이번 원진우에 대한 폭로로 곽경천 일행이 그의 과거 행적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므로 국제 수배범이라는 표현이 적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윤혜인의 손에는 스마트 디스플레이 키가 들려있었는데 조금 전 원진우에게서 몰래 훔쳐 온 것이었다.그녀는 단 1초 만에 시동을 걸고 곧장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대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대로 부딪힐 각오인 듯 말이다.대문 앞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차에 부딪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을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급히 원진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선생님, 저기... 대문을 어떻게 할까요...”원진우는 차의 기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그 모습에, 겉보기에는 얌전해 보이는 윤혜인이 자신의 열정과 영리함을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그는 짧게 고심한 후 단호히 말했다.“문 열어!”아무리 비싼 슈퍼카라 해도 이 속도로 대문을 들이받으면 운전자의 안전이 100%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문을 열어주더라도 그녀가 도망칠 수는 없었다.슈퍼카가 대문에 닿기 직전, 대문이 위로 열렸다.순식간에 슈퍼카는 대문을 빠져나갔다.윤혜인은 눈 앞에 펼쳐진 넓은 도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몇십 초를 기다린 끝에야 상황을 이해했다.“엄마, 우리 탈출했어요!”기쁨에 찬 외침이었다.윤아름은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딸의 말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탈출’이라는 말은 지하실에 수십 년 동안 갇혀 있던 그녀에게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윤아름이 기뻐하며 창문을 두드리자 윤혜인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하지만 안전을 위해 반 정도만 내렸다.그 작은 틈으로도 윤아름은 크게 기뻐했다. 손가락을 밖으로 조금 내밀어 바람을 느끼며 냄새를 맡았다.자유로운 바람이 스치는 윤아름의 얼굴은 완전히 행복해 보였다.윤혜인은 엄마 윤아름의 이런 모습을 보며 모든 게 다 가치 있다고 느껴졌다.긴장으로 땀이 찼던 손바닥도 이제는 차갑게 식었고 조금 전 그녀는 원진우에게 조금의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