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다 빠진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배남준의 이름을 불렀다.배남준은 그윽한 책 냄새를 풍기면서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윤혜인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괜찮아, 내가 부축해 줄 테니까 천천히 일어나봐.”배남준은 그녀의 등을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그녀를 안정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차까지 부축해서 이동했다.윤혜인도 아무런 저항과 말도 없이 그에게 자기의 몸을 맡겼다.뒤따라온 이준혁은 포옹하는 듯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한참 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깊은 어둠이 내린 밤.이준혁은 차로 두 사람의 뒤를 밟아 그녀의 집 앞까지 따라왔다.배남준과 윤혜인이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한 이준혁은 1분 1초가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일순간의 충동으로 일을 망쳐버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세뇌했다.한참 후, 배남준이 윤혜인의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배남준이 떠난 뒤에도 이준혁은 자기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흘러가는 현실에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넋 놓고 그녀의 집 대문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그는 윤혜인이 자기에 대한 미운 감정이 남아 있어서 적대시한다고 생각했을 뿐, 자기를 낯선 사람으로 여긴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게다가 이때까지 윤혜인에게 한 행동이 그녀의 반감을 더욱 불러일으켰다는 걸 오늘 그녀가 보여준 눈빛과 행동으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이준혁은 복잡한 마음에 밤새도록 그녀의 집 앞에서 재떨이가 꽉 찰 정도로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다음 날 아침 8시, 집 문을 나선 윤혜인은 눈에 띄는 곳에 익숙한 검은색 고급 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준혁이 자기 집 앞에서 밤을 새웠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 한 윤혜인은 그의 등장에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이 검게 변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이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남자의 말에 윤혜인이 우뚝 멈춰 섰다.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멍한 표정으로 약간 놀란 듯 물었다.“정말이요?”기쁨의 기색이 눈에 훤히 드러났다.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 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엿보였다.윤혜인은 아침에 문을 나서자마자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녀는 기뻐하면서 얘기했다.“그럼 잠깐만 기다려줘요.”신분증을 챙기지 않았기에 돌아가 신분증을 챙겨야 했다.돌아서는 그녀의 몸짓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그 모습에 이준혁은 가슴이 약간 아픈 것 같았다.요즘 들어 그의 심장은 시도 때도 없이 아파졌다.그는 심장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하지만 신체검사를 받아본 결과 아무 문제도 없었다.윤혜인이 기뻐하면서 신분증을 들고나올 때, 이준혁은 한층 어두워진 시선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진중한 말투로 얘기했다.“두 가지 조건이 있어.”그 순간 윤혜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나랑 장난해요?!”이준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얘기했다.“약속하면 나도 두말하지 않을게.”“얘기해 봐요.”윤혜인은 어쩔 수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나를 피하지 않기. 반년 안에 재혼 금지.”“그게 다예요?”윤혜인은 약간 의아해했다.그녀는 이준혁이 대단한 조건이라도 내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간단한 요구일 줄은 몰랐다.이준혁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반년 안에 결혼하기는 불가능하다.아름에게 새아빠를 찾아준다고 해도 사람을 잘 골라야 했다.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이준혁을 피하지 말기. 두 사람은 원래도 마주칠 일이 적었기에 이 조건은 큰 소용이 없다. 게다가 이준혁과 큰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 남편과 인사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이준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그것뿐이야.”윤혜인은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하지만 이준혁이 말을 이었다.“포기하려는 게 아니야. 공평해지길 원한다면서? 그렇게 해줄게. 내가 다시 널 짝사랑할 테
절차는 빠르게 끝났다. 이혼을 한 순간, 윤혜인의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장면이 떠올랐다.익숙한 듯한 장면에 그녀의 머리가 약간 띵해졌다. 하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이준혁은 이혼 서류를 꽉 쥔 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법원을 나설 때, 이준혁이 말했다.“데려다줄까?”윤혜인은 기분이 좋아서 얼른 축하 파티라도 열고 싶었다. 그녀는 손을 저으며 얘기했다.“괜찮아요, 오빠가 데리러 올 거예요.”이렇게 좋은 소식은 바로 곽경천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어두운 푸른 색의 차가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가고 곽경천이 윤혜인을 보면서 차에 타라고 했다.윤혜인은 발을 떼려던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몸을 돌려서 웃으면서 얘기했다.“이 대표님, 이혼 축하해요.”그 순간, 운명의 굴레가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언젠가 그도 이렇게 웃으면서 말할 것이다. 재혼을 축하한다고 말이다.예전의 장면을 떠올린 이준혁은 가슴에 비수가 박힌 것처럼 아팠다.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었다.윤혜인이 차에 타자 곽경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혜인아, 돌싱 축하해.”이윽고 차는 이준혁의 앞으로 지나갔다. 곽경천은 일부러 차를 느릿하게 운전하면서 이준혁을 쳐다보았다.고통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곽경천은 팔을 창문에 걸쳤다. 봐도 봐도 모자란 표정이었다.그녀의 여동생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윤혜인은 구지윤과 함께 클럽으로 가서 파티를 열었다. SU가 돌아온 것도 축하할 겸 말이다.세 사람은 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다.윤혜인은 섹시한 스타일이었고 구지윤은 조용한 스타일이었으며 SU는 어떤 스타일이든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윤혜인이 이혼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면서 웃었다.“너희들 이혼해 봤어?”두 사람은 다 이혼 과정에 대해서 들었다.다만 그렇게 순조로울 줄은 몰랐다.SU가 얘기했다.“그 이 대표님이 지금 그런 말을 하다니. 생각도 못 할 일이야!”윤혜인과 S
“풉.”맞은편에 앉은 김성훈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하얗게 질린 이준혁의 얼굴을 보면서 장난스레 얘기했다.“윤혜인 씨도 이제는 호락호락하지 않네. 널 속여서 이혼하다니.”그 말에 이준혁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김성훈이 먼저 윤혜인이 이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준혁을 불러온 것이다.김성훈은 세 사람의 대화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혁은 와서 쓰레기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하지만 김성훈은 그녀들이 아까 했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이준혁에게 알려주었다.친구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 김성훈은 약간 재밌다고 생각했다.계속 솔로라고 놀릴 때는 언제고.지금은 마찬가지잖아.“근데 너도 참 입이 무겁네. 재혼한 일을 알려주지도 않는다니.”김성훈은 이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홀로 얘기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선물을 준비했을 텐데.”이준혁은 못 들은 것 같았다. 김성훈은 다시 세 여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윤혜인에게 남자 친구를 찾아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김성훈이 웃으면서 얘기했다.“이번에는 네 실수야. 기회는 없어.”“아니.”이준혁은 술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남자 친구를 찾을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오늘 한 말처럼, 다시 한번 윤혜인을 짝사랑할 것이다.그리고 백지장이 된 그녀의 기억 속에 이준혁이라는 이름을 다시 새겨넣을 것이다.그래서 속아서 이혼한 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지금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그녀를 붙잡아두는 것이 아니라.김성훈은 그를 등지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말하기 어려운 익숙함이 보이는 것 같았다.한참 생각하던 그는 그제야 그 여자가 소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귀를 기울여 보면 목소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호기심이 동한 그가 앞으로 가서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할 때, 세 여자는 함께 자리를 떴다.이준혁은 그들을 따라가
여자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색해하기는커녕, 혼자 말을 이어 나갔다.“죽다가 살아났다면서요? 정말 축하해요. 언제 한번 같이 밥이나 먹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전히 이준혁의 옆에 서 있었다. 그저 몸을 약간 윤혜인 쪽으로 기울일 뿐이었다.마치 이준혁 뒤에 숨어있는 가녈픈 사슴 같았다.여자로서, 윤혜인은 바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 여자는 이준혁을 좋아한다고.그 순간, 이혼하면서 이준혁에게 쌓인 호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하, 쓰레기 같은 남자!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자를 두 명이나 끼고 사시겠다?윤혜인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죄송하지만 사람 잘못 보셨어요.”원지민이 뭐라고 얘기하려는데 엘리베이터가 마침 14층에 도착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그 자리에는 어색해하는 원지민과 차가운 표정의 이준혁만 남았다.코너를 돌기 전에 윤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은 그녀는 “남준 오빠”라고 불렀다. 그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마치 남자 친구의 전화를 받는 여자 같았다.그 생각에 이준혁의 표정이 확 굳었다.이혼할 때, 그를 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피하지는 않았지만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윤혜인은 온 힘을 다해서 두 사람이 아무 사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옆의 원지민은 이준혁의 표정을 보면서 그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챘다. 그 이유는...거의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면서 원지민이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그녀는 이준혁에게서 윤혜인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들었다. 하지만 이준혁은 다른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원지민이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보면서 물었다.“윤혜인 씨가 너한테 삐진 거야?”이준혁의 정신은 윤혜인이 입은 드레스에 빠져있었다. 몸에 딱 붙는 드레스는 몸매의 굴곡을 잘 드러내 주었고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옷을 입다니...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원지민에게 얘기했다.“아니. 기억을 잃었어
그녀는 이선 그룹 부사장 자리를 얻었다.이후 이준혁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결코 재혼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이씨 집안의 일관된 침묵은 언론에 원지민이 이씨 집안의 미래 며느리라는 인식을 주었다. 다만 문현미가 미신을 믿어 아직 결혼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말이다. 또한 원지민이 오랜 기간 자선 활동을 하며 대중 앞에서 온화하고 선량한 이미지를 보여준 탓에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했다.하지만 원씨 집안이 이 기회를 이용해 남청의 부자에서 이제 서울에서도 자리 잡은 등의 수많은 이익을 챙긴 것이 과연 누구 덕인지 생각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지민은 여론과 어른들의 핍박에도 대인배의 이미지를 유지하며 이익을 얻어 이준혁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데 성공했다.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이 많았고 이준혁이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그의 곁에 있는 여자는 결국 자신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이 살아 돌아온 지금, 원지민이 초조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결같이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이준혁의 곁에 오래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같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순간에도 원지민은 여전히 여유롭게,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준혁아, 이번에 며칠 동안 L 국에서 치료받은 건 효과가 어땠어? 머리 아직도 아파?”“그럭저럭.”이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이준혁은 간단하게 대답했다.윤혜인이 사라진 후,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가장 길게는 일주일 동안 단 한순간도 잠을 자지 못했다.문현미는 그가 급사라도 할까 봐 강제로 병원에 보냈었고, 이후 그는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신경통이 생기고 말았다. 병이 발병하면 이준혁은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고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때문에 해외 연구소에서 특정 장비로 개입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발병했지만 이번 이혼 후 또다시 발병했다.지난
룸 입구에 거의 도착할 무렵, 이준혁이 무언가를 분부하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5년 동안 지내면서 원지민은 그에 대해 이제 아주 잘 알게 되었다.‘혜인 씨가 마음에 놓이지 않나 보네.’곧이어 원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준혁아, 우리 조금 늦었어. 귀하신 손님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지. 얼른 가자.”그러나 이준혁은 그녀를 그저 힐끗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진 원지민은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이번에 마침 네가 치료를 받으러 가는 바람에 마이크 씨께서 며칠을 기다렸어. 하지만 걱정 마. 내가 잘 달래 뒀으니까.”때마침 그때, 종업원이 룸의 문을 열었고 이준혁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던 동작을 멈추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다른 방에서 윤혜인은 들어가자마자 시누 엔터의 장 대표가 이미 와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매우 죄송해하며 살짝 몸을 굽혔다.“장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너무 막혀서요.”뒤이어 장 대표가 말하기도 전에 옆에서 한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이고, 달밤의 CEO가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 맞긴 하나 봐요? 저희를 이렇게 한자리에 모셔놓고 기다리게 하다니.”귀에 거슬리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인고 하니 윤혜인의 눈에 익숙한 여자가 들왔다. 그 여자는 바로 이준혁의 첫사랑이자 불륜녀였다.윤혜인은 웃으며 말했다.“그쪽은 그 불륜녀 아니세요?”이 한마디에 임세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지금 무슨 개소리를!”임세희는 말을 채 잇지 못했고 테이블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저년이 직접 그 얘기를 꺼낼 줄이야... 하마터면 힘들게 유지해 온 내 청순 이미지가 무너질 뻔했잖아?!’임세희는 이를 갈며 억지웃음을 지었다.“대표님도 참,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농담이 맞겠네요. 참 웃긴 일이거든요.”윤혜인은 그녀에게 체면 따위 주지 않았다. 임세희가 먼저 도발하며 자신을 비꼬았으니 말이다.그러자 장 대표가
장 대표는 눈가에 주름이 잡힌 채로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마음 써주다니, 역시 자기야...”그러자 임세희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다 당신을 위해서죠.”...약 15분 후, 두 사람은 일을 마쳤고 임세희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아니, 이제 막 흥분할까 했더니 벌써 끝난 거야?’장 대표는 경박하게 그녀의 허리를 꼬집으며 물었다.“자기야, 좋았어?”그 말에 임세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좋기는 뭐가 좋아. 이럴 거면 차라리 부르는 서비스가 낫겠다. 걔네들은 세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데, 이 정도로 짧게 해놓고도 좋아한다니... 진짜 별로야.’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물론이죠, 장 대표님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그 말에 장 대표는 만족해하며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살짝 꼬집었다.“다 너 같이 매력적인 애를 만나서 그런 거지.”임세희는 아부를 계속했다.“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러세요. 다 장 대표님께서 타고난 거죠...”그녀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장 대표는 이번엔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며 말했다.“말도 참 잘한단 말이야. 너 설마 나 없을 땐 여기저기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거 아니야?”그러자 임세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하늘에 맹세해요. 전 장 대표님께만 이렇게 해요...”진실이든 아니든 듣기에는 좋았기에 장 대표의 어깨는 이미 하늘로 솟구칠 듯했다.임세희는 아부를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대표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장 대표님, 올해는 문제없겠죠?”이 말은 올해도 DS가 이길 거라는 의미였다.하지만 이 말을 들은 장 대표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올해는 아닐지도 몰라.”그러자 안색이 급변하며 임세희가 다급히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닐지도 모른다뇨?”“달밤 뒤에 큰손이 있는 것 같아. 올해는 상관에서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 하더라고.”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보통 뒷거래가 많지만 올해 상관이 특별히 이 말을 한 것은 달밤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