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마음속에 네가 있으면 여자는 네가 몇 마디만 해줘도 마음이 사르르 약해져. 하지만 네가 마음속에서 사라지면, 그때는 네가 뭘 말해도 여자는 신경 쓰지 않아.”그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그렇다. 윤혜인의 마음속에는 현재 그가 없다.심지어는 이준혁이 마음에 없을 뿐만 아니라 상처 주는 법까지 배워 그의 마음을 마구 찌르고 있다.그러나 다행히 이준혁도 이제 정신을 차렸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난 뒤로 그는 머리가 조금 냉정해졌다.“아버지가 정씨 집안의 대체 에너지를 원한다면 우리도 그 소원을 도와줘야지. 가능한 한 빨리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말이야.”김성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연기가 아니라 진짜야.”이준혁은 길고 예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정씨 집안도 그렇게 멍청한 건 아닐 테니 회사의 발전과 딸의 결혼을 엮자는 않을거야.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유리한 면이 보이면 정씨 집안도 자연히 흥미를 느끼겠지.”김성훈은 심장이 덜컹했다. 이준혁은 손을 쓰는 순간 상대방의 급소를 노리기 때문이다.그가 천천히 말했다.“네가 감정적인 문제에서 머리가 깨어있었다면 이혼에 이르지도 않았을 거야.”‘역시 하느님은 공평해. 다른 사람은 꺾을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너에게 주는 동시에 어느 다른 한 부분은 꼭 부족하게 만들었으니까.’이준혁은 이마를 어루만지며 불쾌한 듯이 말했다.“혜인이 더 언급하지마, 나랑 상관없어 이제.”김성훈은 어떤 기분인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웃었다.이준혁이 이렇게 거듭 말하는 것은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속이려는 것뿐....육경한은 나오자마자 오아시스 아파트로 향했다.이곳은 그가 소유한 수많은 건물 중 하나였고 최근 육경한은 이곳에 소원이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건물 아래에 있을 때, 그는 단번에 18층의 희미한 불빛을 발견했다. 그것은 소원이 집에 있다는 뜻이었다.육경한은 그곳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1
집 안에서.소원은 새빨개진 눈으로 쓰레기통에 있는 핏덩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기침을 하며 뱉은 것이었다.얼마 전에 의사는 그녀가 중증 위궤양이라고 진단했다. 가능한 한 빨리 손을 쓰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는 위암이라고 하면서 말이다.최근 회사에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녀는 고객과 함께 죽도록 술을 마셔댔었다.술자리에서 그녀는 절대 취하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다.사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술을 마시는 과정에서 그녀는 화장실에 가서 억지로 토를 하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그렇지 않으면 소원과 같이 혼자 있는 여자는 취하면 쉽게 침대로 끌려갈 수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이렇게 억지로 토를 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탓에 위산이 역류하여 그녀는 위에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그녀는 조금 짜증이 났다. 병원에서는 내일 재검사를 진행하라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녀는 매우 무서웠다.‘만약 정말 위암이면 어떡해...’소원의 부모님 모두 현재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이라고는 딸 하나밖에 없으니 만약 그녀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괴로워할 것이다.소원은 더이상 생각하기가 싫어 쓰레기봉투를 치우고 휴지로 덮은 뒤 공기 탈취제를 뿌렸다.그녀는 정성스레 음식을 한 테이블 차려놓고는 육경한과 함께 먹으려고 기다렸다.육경한은 항상 늦게 들어왔고 소원 역시 늦게 준비했기에, 그녀는 육경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10분 안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집?’소원은 화면에 보이는 ‘집’이라는 글자를 보고 넋을 잃었다.‘나랑 경한 씨의 집?’이곳은 기껏해야 그가 카나리아를 가두고 기르는 소굴일 뿐이다.오늘 백화점에서 계속 말을 하려다 마는 윤혜인의 모습을 보고 소원은 그녀가 분명히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를 보고 걱정했을 것으로 추측했다.그리고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소원은 육경한이 속이기 쉬운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사실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소원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은 육경한을 증오하는
‘한 번이면 충분하지, 또 나를 속이려 들어?’눈동자가 움츠러들더니 육경한이 또 한 번 독한 소리를 내뱉었다.“안 나가고 싶어? 되지. 그럼 너희 엄마한테 내가 손님 접대하러 갈 시간 있는지 물어볼까?”말을 끝마치자마자 그는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자 불편한 몸을 뒤로 한 채, 소원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나 갈 수 있어.”육경한은 경멸이 찬 눈빛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소원은 아픈 몸을 이끌고 육경한의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차는 미친 듯이 달려 한 클럽에 도착했고 소원은 내리자마자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위산 역류가 너무 심해 소원은 티슈를 꺼내 입을 닦았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핏덩이가 한 움큼 묻어났다.불편함이 조금 해소되자 그녀는 몸을 곧게 폈고 육경한은 소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클럽에 들어섰다.소원은 서둘러 따라갔다. 어느새 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육경한은 그녀가 들어오려는 것을 봤음에도 냉정하게 닫힘 버튼을 눌렀다.갑자기 엘리베이터에 끼인 소원은 하마터면 또 피를 토할 뻔했다.그리고 그런 소원을 보는 육경한의 눈빛에는 조롱이 담겨있었다.순간, 소원의 마음도 차갑게 가라앉았다.‘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지? 분명 요즘 우리 관계는 많이 좋아졌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그녀가 주저하며 물었다.“왜 그래, 경한 씨? 무슨 할 말 있으면 나랑 직접 얘기하면 안 돼?”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육경한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 룸에 들어가기 전, 그가 멈춰 섰다.“소원, 또 한 번 더 나를 갖고 장난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아니, 난...”육경한은 미소를 짓더니 동영상을 클릭해 보였다. 뒤이어 윤혜인과 나눴던 대화가 소원의 귀에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들려왔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눈처럼 창백해졌다.“경한 씨, 진짜 이런 거 아니야. 이 동영상 뒤에...”육경한이 소원의 목을 세게 잡더니 그녀의 몸을 벽에 ‘쾅’하고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무자비하게 말
소원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내가 안에 뭘 입고 있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외투를 벗으면 아무것도 안 입은 거나 다름없는 건데?’이전에 고객들과 술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도 그녀는 세련된 정장을 입었었다.모두들 그녀가 소씨 집안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무리 육경한이 그렇게 말했다 한들 정말 그녀를 술집 여자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지금 이런 클럽 같은 장소에서 그녀더러 옷을 벗고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라는 것은 정말로 소원은 술집 여자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다른 두 대표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몸 팔러 나왔으면서 왜 아직도 비싼 척 하고 있어? 우린 네가 이런 모습으로 서 있는 거 볼 시간 없어. 그러니 어서 벗어.”“맞아. 벗으면 내가 보너스 챙겨줄게.”몇몇 사람들이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입만 열면 더러운 욕설을 뱉으며 말이다.소원은 마치 얼굴 가죽이 벗겨진 것처럼 화끈거리며 아파 났다.그녀가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육경한이 갑자기 낮게 웃었다.“소원 씨가 얼마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는데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좀 생각할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생각이요? 재미없게 뭡니까. 우리 먼저 다른 몇 명 불러서 놀까요?”조 대표가 이렇게 말하면서 박수를 두 번 치자, 클럽 측에서 보내온 몇몇 젊은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그녀들은 모두 파격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곧이어 조 대표는 가운데에 가장 눈에 띄는 외국 여자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너희 둘은 우리 육 대표님을 잘 모셔.”이 클럽에서 일하는 외국 여자들은 모두 교육을 잘 받아 한국어를 알아듣고 소통할 수 있었다.육경한을 본 그녀들의 눈빛이 밝아졌다.‘이렇게 멋진 손님은 반년 동안 일하면서 한 명도 만나지 못했는데!’두 사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육경한의 곁에 양옆으로 앉아 그의 허벅지에 손을 끼고 애교스럽게 말했다.“육 대표님, 어떻게 노시고 싶으세요?”조 대표는 침을 흘리는 두 여자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욕했다.“
그녀는 곁눈질로 육경한을 바라보았다. 셔츠는 단추가 이미 세 개나 풀어져 옆에 있는 여자들이 손을 안으로 넣고 있었다.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 분명히 매우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소원은 고개를 돌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조 대표의 곁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대표님과 함께하죠.”조 대표는 기세를 몰아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감아 품에 안더니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소원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지만 이내 다시 그 감정을 숨겼다.조 대표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뜨거운 기운을 내 뿜으며 흥분하여 말했다.“나는 이렇게 개방적인 여자가 좋다니까.”메스꺼움이 다시 심해져 소원은 그 빨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술을 마신다는 명목으로 조 대표의 음흉한 손길을 피했다.“제가 술 따라드릴게요.”조 대표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술을 마시고는 또 다가와 한잔을 요구했다.소원은 조금 피하다가 얼굴에 유혹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한잔 더 드릴게요.”조 대표는 마음에 들었는지 소원의 부드럽고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너 이름이 뭐야?”그러자 소원은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 새빨간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저는 소이라고 합니다.”순간, 불빛 아래 육경한의 눈동자가 조금 더 어두워졌다.‘소이...’그것은 이전에 두 사람이 열애했을 때 그가 그녀에게 지어준 별명이었다.당시 소원은 따스한 얼굴로 육경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생에 나를 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하지만 지금 그녀는 만난 지 몇 분 밖에 되지 않은 늙은 남자에게 자신을 소이라 부르라고 한다.육경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급함이 억누를 수 없이 솟구쳐올랐다.‘정말 천하고 방탕한 여자야.’옆에 있는 몇몇 대표들은 아양을 떠는 소원의 모습을 보고 참지 못했는지 하나둘 수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중 한 명은 두껍게 묶여있는 돈을 직접 소원의 얼굴에 뿌리기까지 했다.‘퍽’하
룸 안에 갑자기 차가운 분위기가 감돌았다.하지만 소원은 마치 알아채지 못한 듯 조 대표, 안 대표, 장 대표 등 몇 사람과 어깨를 걸고 모여들어 술을 마셨다.그녀의 눈웃음은 봄처럼 아름다웠고, 사람의 혼을 사로잡는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조 대표는 이미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지금 소원의 몸 위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갑자기 온몸에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솟구쳐올라 조 대표는 소원을 확 끌어당겨 소파에 눕혔다.마찬가지로 취할 대로 취한 몇몇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불만스러운 듯 비틀거리며 다가왔다.“나도...”“조 대표! 혼자 즐기는 건 아니지...”그들은 헤헤하고 웃으며 모두 늑대와 호랑이처럼 소원에게 뛰어들었다.“펑!”술병 한 개가 조 대표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뚝뚝...”한 방울, 한 방울씩 피가 소원의 얼굴에 떨어졌고, 그녀는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바로 구토했다.저녁을 먹지 않은 탓에 그녀가 토해낸 것은 핏덩이가 전부였다.하지만 조 대표의 머리가 찢어져 피가 여기저기로 퍼져 있었기에 도대체 누구의 피인지 명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조 대표가 이마를 가리고 욕설을 퍼부었다.“어떤 미친놈이야? 눈 안 달렸어? 나한테 죽고 싶어서 이리로 물건을 던지는 거야?”“펑!”조 대표는 머리에 또 한 번 술병을 맞았다.순간,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가 온 방 안에 울려 퍼졌다.다른 두 사람도 땅에 쓰러져 외쳤다.“경호원, 경호원...”육경한은 손에 있는 술 얼룩을 닦고 와인 한 병을 들고 일어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모두 다 나가.”몇몇 대표들은 육경한이 왜 이토록 화가 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러나 지금은 이것을 연구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여자들도 모두 자리를 피했다.뒤이어 육경한은 주변을 서성이다가 소원의 앞으로 다가왔다.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운 모습을 없이 소파에 누워 그를 보고 심지어 웃고 있었다.육경한은 와인 한 병을 소원의 얼굴에 쏟아부어
육경한은 완전히 화가 났고 술기운은 그의 진실된 생각도 가려버렸다.‘이런 천한 여자한테 내가 다시 한번 설레고 흔들렸던 거야? 내가 멍청했지.’육경한은 피에 굶주린 듯 손을 꽉 움켜잡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우습게도 그는 또 그녀에게 속았다.무정하고 의리 없는 여자는 육경한을 배신하고 그에게 상처를 주고 속였다. 그야말로 갖고 논 것이었다!‘내가 절대 너를 편하게 두지 않을거야! 지옥이 어떤지 보여줄게!’소원의 위는 알코올 때문에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끝끝내 굴복하지는 않았다.“대표님도 그냥 그렇네요, 여자 앞에서 허풍이나 떨 뿐.”육경한이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웃었다.“듣는 바에 의하면 너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하던데.”마침 술이 깬 소원은 그 말을 듣고 명확하게 대답했다.“아닌데요.육경한은 차갑게 냉소하며 가볍게 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가 아마 서현재라고 했지?”소원은 몸이 갑자기 굳어졌고 육경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그는 일어나서 바지 단추를 채우고 일어나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너 데리고 서현재 만나러 갈까?”표정이 얼어붙었지만, 소원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경한 씨, 서 선생님과 나는 단지 환자와 의사 관계일 뿐이야. 그러니 여기저기 사람 불편하게 하지 마. 알았어?”“서 선생님? 참 친절하게도 말하네, 어린 동생을 좋아할지는 몰랐네?”소원은 기계 사람처럼 말을 내뱉었다.“미친 사람처럼 굴지 마!”그러자 육경한은 무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미쳐? 서 선생님을 만나면 난 네가 얼마나 미쳤는지 잘 보여줄 거야!”말을 끝내고 그는 바닥에 있는 양복을 주워 소원을 감싸고 그녀를 어깨에 들쳐멨다.소원은 미친 듯이 어깨를 두드리며 욕했다.“육경한, 이 미친놈! 당장 내려놔!”육경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차에 넣고 미친 듯이 질주해 병원에 도착했다.오늘 밤 응급 외과는 마침 서현재가 당직이었다.소원은 예감이 좋지 않자
소원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곧바로 약을 가지고 돌아온 육경한은 두 사람이 원래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눈빛을 잠깐 반짝였다.육경한이 서현재에게 약을 건네며 물었다.“수액을 먼저 할까요, 아니면 상처부터 먼저 치료할까요?”서현재는 간호사에게 약을 건네며 대답했다.“상처는 약 갖고 가셔서 치료하시고 수액은 지금 투여해야 해요."그러자 육경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서 선생님께서 찜질해주시는 거 아닌가요?”서현재는 육경한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아닙니다. 필요하시다면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해도 됩니다.”육경한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러면 제가 직접 소원이에게 해줄게요.”서현재는 듣지 못한 척하고 간호사가 수액을 놓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병상을 떠나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육경한은 담배를 들고 책상에 있는 서현재를 살펴보았다.생김새가 깨끗하고 피부가 매우 하야며 검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보기에 아주 착해 보이는 것이 대학교 때 꽤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았다.그는 피식 차갑게 웃으며 생각했다.‘소원이가 정말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고? 어린애 같은 게 여자랑은 밤도 안 보낼 것 같이 생겼는데.’사실 육경한은 소원이 서현재를 좋아한다고 추측할 뿐, 아직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발견하지 못했다.그들의 유일한 만남은 아침 식사 뿐이었다.육경한은 문에 기대어 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가지고 놀았다. 그러더니 웃으며 서현재에게 물었다.“선생님은 소원이랑 아는 사이 아니세요? 왜 모르는 척하고 계시는 거죠?”서현재는 머리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한 달에 소원 씨가 네 번이나 입원했는데 당연히 얼굴은 알죠. 처음에는 소원 씨한테 신고할 필요가 있냐고 물었어요, 나중에는 안 그랬지만요.”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잠깐 멍해 있었다. 한 달에 네 번,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라는 것이다.육경한은 이 일들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대부분 육경한은 집에 들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몸이 이성을 앞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순간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남자는 소원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고개를 쳐들게 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발랑 까졌네. 남자 꼬시는 건 어디서 배웠어?”소원은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가끔은 성격을 앞세우기보다 머리를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지금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는 머리를 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오빠,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소원은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손바닥엔 어느새 튼실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까 남자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남자가 소원을 확 끌어당겨 품에 껴안자 소원은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지금 이 상태로는 너무 불편한데 손이라도 좀 풀어줄래요?”남자는 소원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바로 경각심을 세웠다.“무슨 꿍꿍이야?”“아니. 이러면 뭘 하기도 불편하잖아요.”소원이 제안했다.“혹시 걱정되면 한쪽만 풀어주고 다른 한쪽은 창문에 묶어두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남자는 제법 소원의 아이디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알아서 결박해달라고 하니 정말 땡큐였다.“정말 다른 꿍꿍이 없는 거지?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리면 당장 그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거야.”남자가 소원에게 경고했다.소원은 너무 무서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는 듯 연기했다.“오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사람 하나 죽여도 모를 곳에 버려졌는데 오빠 말이라도 잘 들어야 고통이라도 덜 받을 거 아니에요.”“그래, 총명하긴 하네.”남자가 만족스럽게 말했다.“당연하죠. 오빠, 나 지금 클럽에서 도우미로 일하고 있어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오빠 잘 모실 테니까 제발 때리지만 말아줘요.”어차피 소원이 아가씨라고 신분을 속여도 남자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의 말
여자는 소원이 쓰러지는 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꽤 오래 버티네. 다른 사람보다 몇분 더 버텼어.”여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계속 앞으로 질주했다....얼마나 잤을까, 어렴풋이 잠에서 깨보니 작은 판잣집에 누워 있었다. 크지 않은 걸 봐서는 아마 임시 피난처 같아 보였다.손발이 묶인 소원은 약물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밧줄을 풀고 도망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여 아예 포기하고 체력을 보존하며 주변을 살피며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소원의 판단에 의하면 바깥엔 두 사람이 돌아가며 지키는 것 같았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대화 소리가 사라지고 한 사람이 걸어 다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머리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어젯밤 소원을 차에 태운 그 운전기사였다.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더니 소원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침을 내뱉었다.“빌어먹을 년. 내가 운반만 몇 년을 했는데 이렇게 당해본 건 처음이네. 이 화를 참을 수가 있어야지.”소원은 이 남자가 전문적으로 이런 거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운반 작업만 몇 년을 했다고 토로하는 걸 봐서는 지금까지 쭉 이런 거래를 해왔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다는 뜻이기도 했다.“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소원이 일부러 놀란 척 물었다. 지금은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매를 버는 걸 수도 있으니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매라도 적게 맞아 체력을 보존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당연히 모르지. 당신이 나를 알았으면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어?”남자가 손을 비비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냅다 소원을 걷어차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날 말했지.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야.”다리뼈를 정통으로 맞은 소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나도 그저 살고 싶어서...”남자가 그런 소원을
소원이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혹시 신고 좀 해주실 수 있나요?”안경을 쓴 여자는 꽤 통쾌했다.“당연하죠. 지금 바로 신고해 줄게요.”여자는 소원이 근심할까 봐 그러는지 바로 스피커폰으로 돌렸고 수화기 너머로 콜센터의 노련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 여기는 서울 경찰서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여자가 말했다.“안녕하세요. 길에서 많이 다친 여성분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나쁜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지금 혼자 길에 버려졌는데 신고해달라고 해서요.”“그 여성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여자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소원이 이름을 말했다.“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저를 납치했어요. 모르는 사람이고 차량번호는 XX...”“네, 지금 바로 경찰 인력을 그쪽에 보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세요.”통화가 끝나자 소원의 경계심도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타요. 밖에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깨에서 아직 피나잖아요. 그러다가 경찰 올 때까지 못 버틸 것 같아요...”소원은 아까 일을 겪으면서 여자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아까 콜센터와 통화하며 자기 이름을 진세연이라고 밝혔다.“네.”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원이 차에 오르자 여자는 조수석 캐비닛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서 건네며 말했다.“일단 좀 닦아요.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요.”“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받아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더니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닦았다.“콜록콜록...”소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진세연 씨, 오늘 정말 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건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맙긴요.”여자가 수건을 받아 가다니 조수석에 던지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한쪽 팔을 차창에 기대고는 말했다.“어차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뭐.”빗소리가 너무 커서 소원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해 다시 한번 물었다.“진세연 씨, 뭐라고 하셨어요?”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별거
이것이 오히려 소원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소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앞쪽을 주시하며 속도를 확인했다. 속도가 70대까지 내려가자 기회를 잡은 소원은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다 기회를 잡고 운전기사가 방심한 틈을 타 손잡이에 손을 넣고 차 문을 열었다.탈칵.그렇게 운전기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었다.“어, 저 빌어먹을...”화들짝 놀란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소원의 귀로 들어왔다가 차와 함께 사라졌다.쿵.소원이 바닥에 떨어지며 여러 번 뒹굴었다. 오른쪽 어깨가 빠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소원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칼로 팔을 자르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앞으로 질주하던 차는 이내 방향을 틀고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큰비로 시야가 가려진 덕분에 소원은 옆에 있던 풀밭으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바닥이 물컹해 발자국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이내 운전기사가 뒤따라왔다. 건장한 남자였기에 달리는 게 소원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걸음을 멈추더니 몽둥이 하나를 줍고 풀숲에 숨어 소리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자박자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아가씨,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와. 내가 찾아내면 다리부터 분질러 버릴 테니까. 헤헤. 그러면 좋은 값에 팔 수가 없잖아. 그러면 장기를 뜯어내 팔고 사지를 잘라서 인형으로 만드는 수밖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거지?’순간 머릿속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방민아, 육연주, 그리고 서씨 가문...’“아가씨, 말 들어. 다리라도 온전하면 아가씨도 덜 아프지 않겠어?”“숨어도 소용없어. 여기 내 친구들 많아. 어딜 가든 쉽게 도망치진 못할 거야.”소원은 마음이 강한 편이었기에 상대가 어떻게 말하든 그 자리에 숨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2미터도 남지 않은 곳까지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쥔 나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소원은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반차를 냈다. 다른 직원도 한 달에 겨우 2날 반 정도만 반차를 낼 수 있었기에 소원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영숙은 어머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원의 말을 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덧붙였다. 소원은 얼른 기사에게 방향을 돌려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했다.요양원에 도착한 소원을 보고 간병인 아줌마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소원 씨, 어쩐 일이에요?”소원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전미영을 보고 한시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요양원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와서요.”“괜찮아요. 사모님 오후에 약간의 경련이 있긴 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어요.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 쭉 안정적이에요.”간병인 아줌마가 소원을 다독였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요.”“다행이네요.”소원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중도에 잠깐 깨긴 했지만 전미영은 여전히 소원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매주 보러 와도 전미영은 소원을 알아보는 법이 없었기에 소원도 이제 적응했다. 언젠가 육경한이 전미영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육경한을 보고는 매우 즐겁게 반겨줬다. 소원을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감만 보면 오히려 육경한이 친자식 같기도 했다.소원도 이 일에 관해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의사는 전미영이 깨어나자마자 본 사람이 육경한이라 육경한에게 익숙함과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몸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게다가 애초에 전미영을 보살피는 일은 육경한이 전부 책임졌기에 무턱대고 육경한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문병 오는 시간을 피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일이 바빴기에 소원을 보러 오는 일이 드물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간병인 아줌마는 소원이 어딘가 피곤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얼른 들어가 쉬어요. 출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멀리서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병 온지 얼마나 됐다고
집사는 일 처리를 마치고 서현재의 핸드폰을 서진태에게 바쳤다.“도련님 핸드폰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여자가 계속 찾는 것 같은데 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처리할까요?”집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고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라 서진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진태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에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렸다.“이 여자가 정말...”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육경한 그 자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이 여자를 죽이든 풀어주든 일단 육경한의 생각부터 파악해야 해.”서진태는 겉으로만 육경한에게 공손했지 속으로는 죽일 듯이 미워했다. 서현재를 빌미로 서씨 가문을 여러 번이나 물고 늘어졌지만 목숨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강했고 외국에서 레전드로 남을만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이 바닥에서 명성을 널리 날린 터라 서씨 가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씨 가문은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이 여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결혼식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땐 육씨 가문과 원수를 질뿐더러 도련님을 휘두를 핑계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모든 일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요.”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집사는 사실 서진태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소원을 제거해 서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사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서현재가 아니었다.선동당한 서진태는 집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현재도 이 여자를 위해 여러 번 서진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기에 미래를 대비해 소원을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진태가 집사에게 귀띔했다.“사람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도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절대
“요즘 바빠?”윤혜인이 물었다.“음... 조금.”소원의 대답은 거짓말이기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클럽 일은 확실히 바빴다. 낮에는 잠을 보충하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전미영을 보러 갈 때도 퇴근하고 바로 가야 했기에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그리고 이 일에 윤혜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육경한은 유진의 친부니 이준혁이 개입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그래. 나도 요즘 애가 어려서 모임을 줄였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아름이까지 데리고 너랑 유진이 보러 갈게.”“그래.”소원은 딱히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유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윤혜인이 말했다.“그래. 꼭 그럴게.”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원은 윤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지내라는데 유진이 육경한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육경한 혼자라면 소원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소원의 몸 상태로는 유진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육경한 옆에 있으면 어느 날 소원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해도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방민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민아는 사악한 속내를 숨기는데 능했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가지면 유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제거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소원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유진이 표적이 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서현재의 개인 번호를 보내왔다. 소원이 얼른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번 걸어도 받지 않자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서현재 씨, 나 소원이에요. 보면 회신해요.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소원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일 뒤면 결혼인데 그때 가서 서씨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려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옆에 있던 사람이 좋다고 손뼉을 쳤다.“그래. 그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인플루언서가 된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자.”순간 구경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소원의 얼굴을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육연주는 이런 상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꼬리 치길 좋아하는 소원을 인터넷에 폭로해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세간에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소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 눈에 육연주는 서현재의 와이프였고 서씨 가에서 인정한 며느릿감이었지만 소원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런 소원이 서한 그룹까지 찾아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하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씨 가문에서 육연주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육연주는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 금융은 일절 몰랐기에 서한 그룹의 경영에 간섭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연주는 육씨 가문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었다.“육연주 씨, 서현재와 얘기 나누러 온 것뿐인데 뭐가 방해된다고 그래요.”소원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가방을 들어 소원에게 던졌다.“정말 여간 뻔뻔한 게 아니네요. 이런 수모를 겪어도 그런 말이 나와요?”소원이 옆으로 쓱 비키며 공격을 피했지만 육연주는 소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보디가드를 불러 소원을 끌어냈다.“빌어먹을 년.”육연주는 소원이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벌건 대낮만 아니었으면 정말 소원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결혼이 코앞이라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으니 여기서 멈췄지 아니면 정말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거기.”육연주가 데스크 직원들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경고했다.“오늘 일 현재 씨 귀에 들어가는 날엔 당신들부터 해고할 거야.”육연주는 이미 서한 그룹의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데스크 직원들은 육연주가 언젠간 서씨 가문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 대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