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으로 아픔을 참는 그녀의 모습에 육경한의 마음이 약해졌다.하지만 그녀가 다시 자신을 속이려 했다는 생각에 육경한의 눈빛은 순간 다시 어두워졌다.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온기가 없어지더니 그가 갑자기 소원의 턱을 움켜쥐었다.“소원, 언제는 널 갖고 놀라더니 인제 와서 못 견디겠는 거야?”그 말을 들은 소원은 구역질이 났다.이 미치광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소원은 눈을 감더니 모처럼 약한 척했다.“지금은 정말 안 돼, 너무 아파...”하지만 육경한은 냉소를 지으며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럼 짖어 봐. 네가 나를 만족시킨다면 오늘은 그냥 놔줄게.”문득 고개를 치켜든 소원은 그 하얀 벽을 보더니 육경한의 뜻을 알아차렸다.단지 서현재의 앞에서 그녀더러 짖게 하고 모욕을 주며 그들의 관계를 떠보게 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예전의 소원이라면 그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렇게 굴욕적인 술 접대를 경험한 후, 그녀는 체면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없어도 될 존재라고 생각했다.위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은 소원에게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데 굳이 체면을 지키며 자신의 몸을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는지 일깨워주었다.소원은 혀끝으로 남자의 배꼽 아래를 능숙하게 핥았다. 입술을 약간 벌리니 부드러운 신음 소리가 입술과 이빨 사이로 흘러나왔다.“으음...음...”마침내 그녀는 60초 동안 소리를 내며 육경한이 스톱을 외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소리 지르지 마.”육경한은 싸늘해진 눈빛으로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몸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움직이면서 말이다.그는 순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소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육경한은 그녀를 눌러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이런 통제 불능의 느낌은 육경한을 더욱 짜증 나게 했다.소원은 입술을 깨물고 비웃었다.“벌써 안 되겠어?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경한 씨 비웃어.”육경한의 눈
서현재는 한 손으로만 소원의 발목을 잡고 있었지만 약을 바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그는 손에 일회용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파스에는 진통을 완화해주는 성분이 들어있었다.발가락을 움츠릴 수 있을 정도로 나아진 소원의 머릿속은 온통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뿐이었다.반면 서현재는 여전히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약을 발라준 뒤, 서현재는 장갑을 벗어 휴지통에 버리는 김에 육경한이 사 온 죽도 함께 버렸다.잠시 나갔다 온 그는 보온병을 들고 들어와 침대에 앉더니 소원을 향해 물었다.“누나, 제가 먹여줄까요, 아니면 직접 드실래요?”소원은 아직 약을 바르던 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두 번째 질문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내가 직접 먹을게.”“가만히 있어요. 제가 준비할 테니까요.”서현재는 작은 상을 내려놓고 능숙하게 죽을 작은 그릇에 옮겨 담고 젓가락을 챙겨주었다.그의 손은 매우 예뻤고 긴 손톱도 없었으며 뼈마디가 뚜렷한 것이 그야말로 섬섬옥수였다.살짝 주먹을 쥐었을 때 핏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걸 보아 힘도 아주 센 것이 분명했다.한참 그의 손을 본 소원의 얼굴은 또 뜨거워졌다.서현재가 소원에게 약을 발라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젓가락을 뜯어 건네주는 서현재의 모습을 본 소원은 비로소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특히 그 죽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옥수수 새우죽이였기에 소원은 별말을 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다 먹은 후, 서현재는 상을 깨끗이 치우고 소원의 침대를 다시 정리해 주었다.“누나, 이젠 주무세요, 제가 돌봐드릴게요.”소원은 오히려 서현재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다고 했다.“괜찮아, 현재야.”서현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소원은 얼굴을 돌린 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얼마 후, 소원이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너뿐만이 아닌데... 네가 나 병원에서 두 번이나 돌봐준 것만으로 해도 이미 충분해. 그
소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러니까 우리 지금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 다른 변화 없이 말이야. 그게 나을 것 같아.”이것은 아주 명백한 거절이었다.소원은 말을 마친 뒤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서현재가 살짝 그녀의 팔을 잡았다.서현재는 아무 말 없이 몇 초 동안 그녀를 보았다.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입술은 소원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하다가 멈추고 말았다.서현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소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내가 그 남자보다 더 잘 되면 나한테 와요.”서현재가 떠난 후에도 소원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분명히 예전 소원의 눈에 서현재는 그저 꼬맹이일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소원은 점차 그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금요일 날 아침, 이하진은 윤혜인에게 데리러 갈 테니 주소를 보내 달라고 했다.그렇게 윤혜인은 곧바로 주소를 보냈고 이하진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뒤 집 아래로 내려왔다.두 발짝 앞으로 나가자 검은색 지프차가 보였다. 이하진은 조수석에 앉아 윤혜인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문을 열고 차에 탄 윤혜인은 뒤에 한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정유미였다.윤혜인을 본 순간 정유미는 적개심에 불타 이하진을 향해 물었다.“하진아, 과외 선생님이 이분이야?”이하진은 대답이라 치고 ‘흥’하며 짧게 소리 냈다.정유미는 윤혜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윤혜인도 두 사람이 서로 앙숙 관계라 생각했다.윤혜인은 문을 닫고 정유미와 멀리 떨어진 문 옆에 앉았다. 정유미는 윤혜인이 작은 배낭을 메고 온 것을 보고 표독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러고 가요?”그러자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정유미는 더 신이 나서 웃어댔다.순간 정유미는 앞으로 이틀간의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차가 시동을 걸고 나서야 윤혜인은 고개를 들어 앞줄을 훑어보았고, 그제야 차를 몰고 있는 사람이 이준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선글라스에 양복 대신 네이비 컬러의 바
정유미의 힘은 세지 않았다.하지만 윤혜인의 피부가 워낙 하얀 탓에 정유미가 뺨을 때리자 얼굴에는 금세 빨간 손자국이 남겨졌고 보기도 좋지 않았다.뺨을 때리고 난 뒤, 정유미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정혜인의 뺨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챘다.소리를 듣고 놀란 이하진이 멀리서 뛰어오더니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야, 정유미,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사람을 때리고 난리야!”이하진도 윤혜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매를 맞은 사실에 매우 불쾌했다. 어쨌든 윤혜인은 자신이 데려온 사람이니 말이다.사실 정유미는 곧바로 윤혜인에게 사과하려 했다. 비록 성격이 나쁘고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만 골라 하는 그녀지만 먼저 남을 때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보다 어린 이하진이 대뜸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정유미도 욱하는 성질이 올라왔다.“넌 왜 난리인데, 내가 일부러 그런건 아니잖아.”“그럼 사과해.”이하진의 성질머리는 더 더러웠다. 당장이라도 정유미의 옷깃을 잡아당겨 윤혜인에게 사과시키려 하였다.놀란 정유미는 이준혁의 뒤로 숨던 그의 옷을 잡았다.이준혁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하진의 손을 홱 잡고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무슨 짓이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잖아.”손을 잡힌 이하진은 뾰로통해서 말했다.“형, 틀린 건 바로잡아줘야지, 감싸줄 게 아니라.”“감싸줄 건데, 왜?”말을 마친 이준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산에 오를래, 말래?”사실 윤혜인은 조금 전에 발생한 일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정유미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준혁이 정유미를 이렇게 감싸는 것을 보니 윤혜인의 안색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누군가가 감싸준 다라... 참 좋겠네.’정유미는 웃으며 이준혁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더니 뒤돌아서 약오르는 표정으로 이하진을 돌아봤다.이런 그녀의 모습에 이하진은 화가 났다.‘아버지가 국내에 없는
이하진은 윤혜인의 체력에 굴복하여 손을 내저으며 중도에 정유미와 휴식을 취하였다.윤혜인은 계속 올라갔고 한참을 걷다가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배낭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물 한 병을 꺼내 마실 준비를 했다.하지만 뚜껑을 열기도 전에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광활한 산골짜기를 보니 두피가 저릿저릿해나는 것 같았다.그러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이준혁의 모습에 놀라 뒤로 젖혀졌다.이준혁은 곧 넘어질 것 같은 윤혜인을 큰 손바닥으로 잡아당겼다.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안겼고 손에 있던 물도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발밑은 온통 돌과 움푹 패여 있는 골짜기들로 가득해 넘어지면 엉덩이가 두 동강 날 정도였다.본능적으로 윤혜인은 손을 뻗어 이준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얼굴은 그의 단단한 가슴에 바짝 갖다 댔다.“쿵쿵쿵.”이준혁의 차분하면서도 힘찬 심장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윤혜인은 잠시 숨을 돌린 뒤에야 자신이 이준혁을 매우 애매한 자세로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숨을 ‘합’하고 참더니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데인 것처럼 이준혁을 바로 밀어냈다.쓰자마자 버리는 행동과 같은 모습에 순간 안색이 굳어지더니, 이준혁이 사나운 말투로 말했다.“이런 밀당같은 수작 좀 작작 해. 등산하는 남자는 많고 나는 너한테 관심 없어.”윤혜인은 입을 열기도 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안색도 이따금씩 붉으락푸르락하며 변했다.때마침 서너 명이 짝을 지어 산을 오르는 남자들이 그들 곁을 지나갔다.이준혁의 말을 들은 그들은 바로 윤혜인에게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그녀가 등산하는 목적이 남자를 꼬시기 위해서인 줄 알고 말이다.그런 눈빛을 견디지 못한 윤혜인은 한참 이준혁을 쳐다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위로 걸어갔다.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윤혜인은 방금 지나가던 남자 몇 명이 마치 쉬고 있는 것처럼 앞에서 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하지만 윤혜인은 자신을 바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은 이준혁이 제자리에서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준혁은 힐끗 쳐다보았지만, 윤혜인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아 더 아래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나무 그늘에 앉아 이하진을 기다렸다.정오의 산 중턱이 어찌나 더운지 윤혜인은 자신의 목에서 연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유일하게 갖고 있던 물병은 조금 전 굴러 내려가 사라졌다.이틀 동안 그녀는 아직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다. 윤혜인이 자발적으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하진은 아마 그녀에게 물을 주지 않을 것이다.윤혜인은 이준혁인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으면 짜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하지만 그가 앞에 지나갈 때 익숙한 차가운 향기가 불어왔다.‘둥’하는 소리에 윤혜인은 눈을 떴다. 이준혁이 다 마신 생수병을 던지는 것이었다.그 모습에 윤혜인은 눈썹을 찌푸렸다.‘아무 데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다니... 왜 전에는 이렇게 시민의식이 낮은 걸 몰랐지?’햇빛이 비치자 그 안에 은은하게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윤혜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약 반병의 물이 남아있었다.그녀는 5분을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또 5분이 지나자 정말 참을 수 없어 윤혜인은 물병을 향해 다가갔다.물병을 주운 후, 그녀의 표정이 매우 복잡해졌다.윤혜인은 자신을 위로했다. 이준혁에게 아무런 병이 없다는 것은 적어도 알고 있었다.햇빛을 굴절시키며 생수병 안에 있는 물이 그녀를 유혹했다. 목은 타다 못해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곧 윤혜인은 마음을 먹고 병뚜껑을 열었다. 하지만 바로 입을 대지는 않고 조금 고개를 들어 입에 병 입구가 닿지 않도록 하고 물을 입에 부었다.총 반병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많이 마실 수 없어서 두세 모금 정도로 조금만 마셨다.생수병을 내려놓자마자 윤혜인은 돌아오는 이준혁을 발견했다. 그는 두 팔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뜨며 윤
‘저렇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전처가 있는데 내가 떠난다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정유미는 이준혁의 조각 같은 얼굴을 보고 순간 힘이 넘쳐나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려가지 않을래요.”역시 외모를 가장 밝히는 정유미였다.그녀는 여태껏 이준혁보다 잘생긴 사람을 보지 못했었다.이준혁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시간은 어느새 12시가 넘었다.이하진은 가져온 각종 요리를 꺼내 그들이 고르도록 했다. 도발하는듯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이다.그 눈빛은 마치 배고프면 패배를 인정하라는 의미 같았다.윤혜인은 얼굴을 돌려 그들이 먹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잠시 후 향긋한 반찬 냄새가 풍겨오자 윤혜인도 조금 배가 고픈 나머지 가방에 있는 육포를 꺼내 몇 조각 나눈 후 세 조각을 먹어 굶주림을 달랬다.다행히 그녀도 어느 정도 준비는 되어 있었다. 비록 가방은 작았지만, 안에는 모두 실용적인 물건들이 담겨있었다.식사를 마치고 또 길을 떠나 마침내 어둠이 드리우기 전에 산꼭대기에 도착했다.이하진은 고용인들을 데리고 텐트를 쳤다. 하지만 윤혜인에게만은 달랑 텐트만 던져주며 스스로 치라고 했다.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텐트가 다 완성되어도 윤혜인은 여전히 못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실수로 그녀는 망치로 자신의 손을 찧게 되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그녀는 “아!”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곧이어 눈물이 쏟아졌다.순간 윤혜인의 앞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준혁이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습관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그를 한 번 보았다.하지만 조롱이 섞인 그의 눈빛을 발견하고 윤혜인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속으로 자신을 바보 같다고 욕하며 말이다.‘저 사람은 나를 아주 싫어하잖아, 왜 잊었을까...’그때 정유미가 나와 이준혁을 불렀다.“준혁 씨, 와서 저녁 먹어요. 하진이가 정말 엄청 많이 가지고 왔어요. 맥주도 있어요.”정유미는 먹을 것
남자가 머리를 너무 세게 잡아당기는 탓에 두피가 벗겨질 것만 같았다. 윤혜인은 고통에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그렇게 얼마간 끌려가고 나서야, 남자가 멈춰 섰다.그러고는 윤혜인의 입에 수건을 집어넣었고 또 굵은 밧줄로 그녀의 손을 묶었다.남자의 형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있었다. 오직 두 눈동자만이 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 음흉한 기운이 몸서리쳐질 정도였다.윤혜인은 그제야 자신을 잡아 온 사람이 뜻밖에도 두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달빛을 빌어 그녀는 이 두 사람이 바로 낮에 자신을 조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마음속에서 순간 두려움이 미친 듯이 증폭하였다.낮에 좋은 말을 하며 그녀더러 가게 한 남자가 먼저 다가와서 웃으며 윤혜인에게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너를 다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순순히 말만 잘 들으면 내가 잘해줄게.”다른 한 남자의 표정은 매우 사나웠다. 그는 날카로운 외국제 칼을 꺼내며 말했다.“감히 반항하려 든다면 이걸로 네 얼굴을 긁어버릴 거야. 알겠어?!”차가운 바람에 윤혜인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꽃같이 예쁜 얼굴에는 어느새 창백한 빛만 남아있었다.“알아들었냐고!”칼을 든 남자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 포악한 눈빛은 줄곧 윤혜인의 풍만한 가슴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전혀 가리지 않았다.정신이 든 윤혜인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놀란 탓에 넋을 잃은듯했다.순간, 두 남자의 경계태세도 많이 줄어들었다.‘굳이 칼을 대지 않아도 충분히 겁을 줄 수 있겠는데?’그나마 선하게 생긴 남자가 윤혜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칭찬했다.“참 예쁜 아가씨야.”“아진아, 그만하고 얼른 하자. 나 더 이상 못 참겠어.”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말을 하며 동시에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참다못해 병이라도 난 것처럼 아주 급하게 말이다.점심에 윤혜인을 만났을 때, 그는 사실 그 자리에서 바로 그녀를 “처리”하고 싶었다.하지만 눈치가 빨랐던 아진은 그녀와 싸우던 남자가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있었어요. 방금 떠났고요.”소원은 속으로 계산했다.‘이 시간대라면... 그럼 우리도 내일 아침쯤에 떠나겠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완전히 수동적인 상황은 아니야.’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늦은 시간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깨어 있는 상태였다. 좋은 기회가 아니었다.소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양옆의 사람들에게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것을 차례로 전달하도록 했다.말이 끝나자 모두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잠들지 못하더라도 눈을 감고 몸을 편히 쉬었다.드디어 밤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닫혀 있던 나무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남자가 손전등을 들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비추더니 소원의 얼굴을 비추고는 손짓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너, 나와.”그 목소리는 소원에게 익숙했다.소원에게 머리를 맞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설마 했는데 그가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소원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말 그대로 기회가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마치 이제야 남자를 알아본 것처럼 깜짝 놀라며 말했다.“오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신호를 보냈다.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소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문지기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았고 소원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움직이라는 손짓을 보냈다.그렇게 남자는 소원을 데리고 작은 초가집으로 향했다.그 초가집은 굉장히 작아 두 사람이 몸을 돌리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다.하지만 내부에는 등불이 있었고 그녀들이 있던 곳보다 훨씬 상태가 나았다.냄새도 심하지 않아 아마도 문지기가 교대할 때 쉬는 공간으로 보였다.문이 닫히자마자 남자는 소원의 손에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그러고는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손을 뻗어 소원의 가슴 쪽으로 만지려고 했다.소원은 몸을 재빨리 비켜 손길을 피했다.그
아마 이런 일을 계속하다 보니 습관이 된 것 같았다.소원은 양옆으로 펼쳐진 길을 관찰했다. 지금은 아마 깊은 산속에 있는 것 같았다.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소원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다른 두 여자도 졸렸는지 바로 잠에 들었다. 하지만 소원은 손바닥을 꼬집고 입을 악물며 절대 잠들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때는 일분일초도 놓치지 말고 기회를 잡아야 했다.아쉽게도 소원은 이 차가 개조한 적이 있는 차라는 걸 발견했다. 잠금이 바깥으로 되어 있어 안에서는 절대 열 수 없는 구조였다. 아마도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도망갈까 봐 이렇게 설계한 것 같았다.소원은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새들을 바라봤다.그렇게 한 시간쯤 달리던 차는 정원 같은 곳에서 멈췄다. 이 정원은 비탈진 산 아래에 지어져 있어 매우 은밀했고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운전기사가 경적을 세 번 울리자 대문이 안에서 열렸다. 운전기사는 차를 운전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봤던 것과 또 다른 풍경이었다. 산길이 길게 쭉 뻗어 있었는데 밖에서 보이던 정원은 그저 나무판자로 만든 가짜 건물이었다.안으로 들어가 험난한 산길을 20분쯤 운전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엔 크고 작은 판잣집이 아주 많았다.운전기사가 경적을 두 번 울리자 안에서 무기를 장착한 사람 둘이 걸어 나와 차 문으로 다가오더니 안에 앉은 여자들에게 중얼중얼 시끄럽게 뭐라고 얘기했다. 한국인이 아닌 것 같았고 지금은 내려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소원은 고분고분 차에서 내렸다. 뒤에 있던 여자가 잠깐 넋을 놓고 있자 무기를 들고 앞장선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여자의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자는 중얼거리며 계속 뭐라고 말했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욕하는 것 같았다.여자는 울고 싶었지만 울었다가 매를 맞을까 봐 얼른 구르다시피 차에서 내려왔다.소원은 앞에 선 사람에게 이끌려 어떤 초막으
남자는 얌전하게 창틀에 묶었던 손을 풀더니 두 손을 고쳐 묶고는 차로 압송했다.소원은 터덜터덜 걸어가며 대책을 생각했다.일단 저 차에 오르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여 기회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4, 5명이나 지키고 있어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소원이 너무 느리다고 잡고 있던 밧줄을 확 당겼다.“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좀 걸어.”소원은 좋은 기회를 찾지 못해 희망을 전부 남자에게 걸었다.“오빠...”소원이 소리를 낮추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나 너무 무서워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남자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더니 경계했다.“내가 말했지. 몰라도 될 건 묻지 말라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연홍 누나가 말한 것처럼 정말 도망이라도 갈려고?”소원은 그제야 안경 쓴 여자의 이름이 연홍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남자가 눈치챌까 봐 일부러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감히 도망갈 생각을 하겠어요. 오빠가 인상이 좋기도 하고 여기서 아는 사람이 오빠밖에 없으니까 오빠하고만 대화하는 거죠. 오빠는 나 안 때릴 것 같거든요...”남자가 이 말을 듣더니 우쭐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칭찬을 마다할 남자가 없었다. 그게 예쁜 여자라면 더더욱 말이다.남자가 말했다.“하긴, 이제 행복할 날이 별로 안 남았네. 거기 가면 너 사람으로 봐줄 사람이 있을까?”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무서워서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오빠, 나 가기 싫어요.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남자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얼른 차 타. 내가 널 왜 놓아줘. 마지막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수는 있지만... 헤헤.”남자가 얍삽하게 웃었다. 아까 했던 생각을 아직 버리진 않은 것 같았다.이 말에 소원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다. 아직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기회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홍이 말했던 것처럼 남자가 아랫도리를 잘 간수하지 않으면 재수 없어질 수밖에 없다.
남자가 팬티를 벗기 시작하자 소원은 몸에 힘을 바짝 주고 기회를 노렸다.일촉즉발의 순간,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온 발차기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넋을 잃은 소원은 남자의 비명과 함께 들어온 사람이 전에 본 안경을 낀 점잖은 여자라는 걸 발견했다.발차기 한 번에 남자를 쓰러트리는 걸 봐서는 유단자라는 의미였다. 소원은 그 짧은 순간에 고민을 마쳤는지 손에 들었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아 감추고는 마치 괴롭힘이라도 당했다는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봤다.여자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앞으로 달려가 남자에게 발차기를 두 번 더 날리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모자란 놈, 아랫도리 관리가 그렇게 안 돼? 물건에 문제라도 생기면 돈은 어떻게 받으려고? 돈 있으면 유흥가에 가든가. 돈만 주면 너랑 자겠다고 나서는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 꼭 이래야겠니?”“아야. 난... 난 그냥 재미 좀 보려고 그랬던 것뿐이지 정말 뭘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퉤.”여자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남자의 얼굴에 침을 내뱉더니 말했다.“그 더러운 생각 집어치워. 전에 지성이가 운반하는 물건이랑 잤다가 일 터진 거 몰라? 너도 이 여자 손에 죽고 싶어서 그래?”소원은 여자의 말에서 팀원 중 한 명이 여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다가 일이 터진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여자의 말투와 전투력만 봐도 남자보다 훨씬 월등했기에 절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전에 태연하게 신고를 도와주는 척했지만 사실은 팀원의 전화번호를 신고 센터로 고쳐 소원이 믿을 수 있게 유도한 것이었다.이 여자는 머리마저 무서울 정도로 비상한 사람이었다.남자는 다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알았어요. 알았어. 지성이랑 똑같은 잘못은 안 저질러요. 얼마나 쓸모없었으면 여자 하나 못 이겨서 오히려 죽임을 당해. 다행히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잡히긴 했지만.”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소원을 힐끔 쳐다보더니 에둘러서 경고했다.“잡히면 곱게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몸이 이성을 앞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순간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남자는 소원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고개를 쳐들게 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발랑 까졌네. 남자 꼬시는 건 어디서 배웠어?”소원은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가끔은 성격을 앞세우기보다 머리를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지금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는 머리를 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오빠,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소원은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손바닥엔 어느새 튼실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까 남자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남자가 소원을 확 끌어당겨 품에 껴안자 소원은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지금 이 상태로는 너무 불편한데 손이라도 좀 풀어줄래요?”남자는 소원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바로 경각심을 세웠다.“무슨 꿍꿍이야?”“아니. 이러면 뭘 하기도 불편하잖아요.”소원이 제안했다.“혹시 걱정되면 한쪽만 풀어주고 다른 한쪽은 창문에 묶어두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남자는 제법 소원의 아이디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알아서 결박해달라고 하니 정말 땡큐였다.“정말 다른 꿍꿍이 없는 거지?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리면 당장 그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거야.”남자가 소원에게 경고했다.소원은 너무 무서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는 듯 연기했다.“오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사람 하나 죽여도 모를 곳에 버려졌는데 오빠 말이라도 잘 들어야 고통이라도 덜 받을 거 아니에요.”“그래, 총명하긴 하네.”남자가 만족스럽게 말했다.“당연하죠. 오빠, 나 지금 클럽에서 도우미로 일하고 있어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오빠 잘 모실 테니까 제발 때리지만 말아줘요.”어차피 소원이 아가씨라고 신분을 속여도 남자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의 말
여자는 소원이 쓰러지는 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꽤 오래 버티네. 다른 사람보다 몇분 더 버텼어.”여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계속 앞으로 질주했다....얼마나 잤을까, 어렴풋이 잠에서 깨보니 작은 판잣집에 누워 있었다. 크지 않은 걸 봐서는 아마 임시 피난처 같아 보였다.손발이 묶인 소원은 약물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밧줄을 풀고 도망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여 아예 포기하고 체력을 보존하며 주변을 살피며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소원의 판단에 의하면 바깥엔 두 사람이 돌아가며 지키는 것 같았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대화 소리가 사라지고 한 사람이 걸어 다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머리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어젯밤 소원을 차에 태운 그 운전기사였다.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더니 소원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침을 내뱉었다.“빌어먹을 년. 내가 운반만 몇 년을 했는데 이렇게 당해본 건 처음이네. 이 화를 참을 수가 있어야지.”소원은 이 남자가 전문적으로 이런 거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운반 작업만 몇 년을 했다고 토로하는 걸 봐서는 지금까지 쭉 이런 거래를 해왔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다는 뜻이기도 했다.“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소원이 일부러 놀란 척 물었다. 지금은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매를 버는 걸 수도 있으니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매라도 적게 맞아 체력을 보존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당연히 모르지. 당신이 나를 알았으면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어?”남자가 손을 비비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냅다 소원을 걷어차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날 말했지.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야.”다리뼈를 정통으로 맞은 소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나도 그저 살고 싶어서...”남자가 그런 소원을
소원이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혹시 신고 좀 해주실 수 있나요?”안경을 쓴 여자는 꽤 통쾌했다.“당연하죠. 지금 바로 신고해 줄게요.”여자는 소원이 근심할까 봐 그러는지 바로 스피커폰으로 돌렸고 수화기 너머로 콜센터의 노련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 여기는 서울 경찰서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여자가 말했다.“안녕하세요. 길에서 많이 다친 여성분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나쁜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지금 혼자 길에 버려졌는데 신고해달라고 해서요.”“그 여성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여자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소원이 이름을 말했다.“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저를 납치했어요. 모르는 사람이고 차량번호는 XX...”“네, 지금 바로 경찰 인력을 그쪽에 보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세요.”통화가 끝나자 소원의 경계심도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타요. 밖에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깨에서 아직 피나잖아요. 그러다가 경찰 올 때까지 못 버틸 것 같아요...”소원은 아까 일을 겪으면서 여자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아까 콜센터와 통화하며 자기 이름을 진세연이라고 밝혔다.“네.”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원이 차에 오르자 여자는 조수석 캐비닛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서 건네며 말했다.“일단 좀 닦아요.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요.”“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받아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더니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닦았다.“콜록콜록...”소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진세연 씨, 오늘 정말 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건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맙긴요.”여자가 수건을 받아 가다니 조수석에 던지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한쪽 팔을 차창에 기대고는 말했다.“어차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뭐.”빗소리가 너무 커서 소원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해 다시 한번 물었다.“진세연 씨, 뭐라고 하셨어요?”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별거
이것이 오히려 소원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소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앞쪽을 주시하며 속도를 확인했다. 속도가 70대까지 내려가자 기회를 잡은 소원은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다 기회를 잡고 운전기사가 방심한 틈을 타 손잡이에 손을 넣고 차 문을 열었다.탈칵.그렇게 운전기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었다.“어, 저 빌어먹을...”화들짝 놀란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소원의 귀로 들어왔다가 차와 함께 사라졌다.쿵.소원이 바닥에 떨어지며 여러 번 뒹굴었다. 오른쪽 어깨가 빠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소원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칼로 팔을 자르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앞으로 질주하던 차는 이내 방향을 틀고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큰비로 시야가 가려진 덕분에 소원은 옆에 있던 풀밭으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바닥이 물컹해 발자국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이내 운전기사가 뒤따라왔다. 건장한 남자였기에 달리는 게 소원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걸음을 멈추더니 몽둥이 하나를 줍고 풀숲에 숨어 소리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자박자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아가씨,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와. 내가 찾아내면 다리부터 분질러 버릴 테니까. 헤헤. 그러면 좋은 값에 팔 수가 없잖아. 그러면 장기를 뜯어내 팔고 사지를 잘라서 인형으로 만드는 수밖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거지?’순간 머릿속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방민아, 육연주, 그리고 서씨 가문...’“아가씨, 말 들어. 다리라도 온전하면 아가씨도 덜 아프지 않겠어?”“숨어도 소용없어. 여기 내 친구들 많아. 어딜 가든 쉽게 도망치진 못할 거야.”소원은 마음이 강한 편이었기에 상대가 어떻게 말하든 그 자리에 숨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2미터도 남지 않은 곳까지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쥔 나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