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진은 윤혜인의 체력에 굴복하여 손을 내저으며 중도에 정유미와 휴식을 취하였다.윤혜인은 계속 올라갔고 한참을 걷다가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배낭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물 한 병을 꺼내 마실 준비를 했다.하지만 뚜껑을 열기도 전에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광활한 산골짜기를 보니 두피가 저릿저릿해나는 것 같았다.그러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이준혁의 모습에 놀라 뒤로 젖혀졌다.이준혁은 곧 넘어질 것 같은 윤혜인을 큰 손바닥으로 잡아당겼다.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안겼고 손에 있던 물도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발밑은 온통 돌과 움푹 패여 있는 골짜기들로 가득해 넘어지면 엉덩이가 두 동강 날 정도였다.본능적으로 윤혜인은 손을 뻗어 이준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얼굴은 그의 단단한 가슴에 바짝 갖다 댔다.“쿵쿵쿵.”이준혁의 차분하면서도 힘찬 심장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윤혜인은 잠시 숨을 돌린 뒤에야 자신이 이준혁을 매우 애매한 자세로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숨을 ‘합’하고 참더니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데인 것처럼 이준혁을 바로 밀어냈다.쓰자마자 버리는 행동과 같은 모습에 순간 안색이 굳어지더니, 이준혁이 사나운 말투로 말했다.“이런 밀당같은 수작 좀 작작 해. 등산하는 남자는 많고 나는 너한테 관심 없어.”윤혜인은 입을 열기도 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안색도 이따금씩 붉으락푸르락하며 변했다.때마침 서너 명이 짝을 지어 산을 오르는 남자들이 그들 곁을 지나갔다.이준혁의 말을 들은 그들은 바로 윤혜인에게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그녀가 등산하는 목적이 남자를 꼬시기 위해서인 줄 알고 말이다.그런 눈빛을 견디지 못한 윤혜인은 한참 이준혁을 쳐다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위로 걸어갔다.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윤혜인은 방금 지나가던 남자 몇 명이 마치 쉬고 있는 것처럼 앞에서 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하지만 윤혜인은 자신을 바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은 이준혁이 제자리에서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준혁은 힐끗 쳐다보았지만, 윤혜인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아 더 아래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나무 그늘에 앉아 이하진을 기다렸다.정오의 산 중턱이 어찌나 더운지 윤혜인은 자신의 목에서 연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유일하게 갖고 있던 물병은 조금 전 굴러 내려가 사라졌다.이틀 동안 그녀는 아직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다. 윤혜인이 자발적으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하진은 아마 그녀에게 물을 주지 않을 것이다.윤혜인은 이준혁인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으면 짜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하지만 그가 앞에 지나갈 때 익숙한 차가운 향기가 불어왔다.‘둥’하는 소리에 윤혜인은 눈을 떴다. 이준혁이 다 마신 생수병을 던지는 것이었다.그 모습에 윤혜인은 눈썹을 찌푸렸다.‘아무 데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다니... 왜 전에는 이렇게 시민의식이 낮은 걸 몰랐지?’햇빛이 비치자 그 안에 은은하게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윤혜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약 반병의 물이 남아있었다.그녀는 5분을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또 5분이 지나자 정말 참을 수 없어 윤혜인은 물병을 향해 다가갔다.물병을 주운 후, 그녀의 표정이 매우 복잡해졌다.윤혜인은 자신을 위로했다. 이준혁에게 아무런 병이 없다는 것은 적어도 알고 있었다.햇빛을 굴절시키며 생수병 안에 있는 물이 그녀를 유혹했다. 목은 타다 못해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곧 윤혜인은 마음을 먹고 병뚜껑을 열었다. 하지만 바로 입을 대지는 않고 조금 고개를 들어 입에 병 입구가 닿지 않도록 하고 물을 입에 부었다.총 반병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많이 마실 수 없어서 두세 모금 정도로 조금만 마셨다.생수병을 내려놓자마자 윤혜인은 돌아오는 이준혁을 발견했다. 그는 두 팔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뜨며 윤
‘저렇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전처가 있는데 내가 떠난다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정유미는 이준혁의 조각 같은 얼굴을 보고 순간 힘이 넘쳐나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려가지 않을래요.”역시 외모를 가장 밝히는 정유미였다.그녀는 여태껏 이준혁보다 잘생긴 사람을 보지 못했었다.이준혁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시간은 어느새 12시가 넘었다.이하진은 가져온 각종 요리를 꺼내 그들이 고르도록 했다. 도발하는듯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이다.그 눈빛은 마치 배고프면 패배를 인정하라는 의미 같았다.윤혜인은 얼굴을 돌려 그들이 먹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잠시 후 향긋한 반찬 냄새가 풍겨오자 윤혜인도 조금 배가 고픈 나머지 가방에 있는 육포를 꺼내 몇 조각 나눈 후 세 조각을 먹어 굶주림을 달랬다.다행히 그녀도 어느 정도 준비는 되어 있었다. 비록 가방은 작았지만, 안에는 모두 실용적인 물건들이 담겨있었다.식사를 마치고 또 길을 떠나 마침내 어둠이 드리우기 전에 산꼭대기에 도착했다.이하진은 고용인들을 데리고 텐트를 쳤다. 하지만 윤혜인에게만은 달랑 텐트만 던져주며 스스로 치라고 했다.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텐트가 다 완성되어도 윤혜인은 여전히 못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실수로 그녀는 망치로 자신의 손을 찧게 되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그녀는 “아!”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곧이어 눈물이 쏟아졌다.순간 윤혜인의 앞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준혁이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습관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그를 한 번 보았다.하지만 조롱이 섞인 그의 눈빛을 발견하고 윤혜인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속으로 자신을 바보 같다고 욕하며 말이다.‘저 사람은 나를 아주 싫어하잖아, 왜 잊었을까...’그때 정유미가 나와 이준혁을 불렀다.“준혁 씨, 와서 저녁 먹어요. 하진이가 정말 엄청 많이 가지고 왔어요. 맥주도 있어요.”정유미는 먹을 것
남자가 머리를 너무 세게 잡아당기는 탓에 두피가 벗겨질 것만 같았다. 윤혜인은 고통에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그렇게 얼마간 끌려가고 나서야, 남자가 멈춰 섰다.그러고는 윤혜인의 입에 수건을 집어넣었고 또 굵은 밧줄로 그녀의 손을 묶었다.남자의 형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있었다. 오직 두 눈동자만이 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 음흉한 기운이 몸서리쳐질 정도였다.윤혜인은 그제야 자신을 잡아 온 사람이 뜻밖에도 두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달빛을 빌어 그녀는 이 두 사람이 바로 낮에 자신을 조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마음속에서 순간 두려움이 미친 듯이 증폭하였다.낮에 좋은 말을 하며 그녀더러 가게 한 남자가 먼저 다가와서 웃으며 윤혜인에게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너를 다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순순히 말만 잘 들으면 내가 잘해줄게.”다른 한 남자의 표정은 매우 사나웠다. 그는 날카로운 외국제 칼을 꺼내며 말했다.“감히 반항하려 든다면 이걸로 네 얼굴을 긁어버릴 거야. 알겠어?!”차가운 바람에 윤혜인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꽃같이 예쁜 얼굴에는 어느새 창백한 빛만 남아있었다.“알아들었냐고!”칼을 든 남자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 포악한 눈빛은 줄곧 윤혜인의 풍만한 가슴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전혀 가리지 않았다.정신이 든 윤혜인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놀란 탓에 넋을 잃은듯했다.순간, 두 남자의 경계태세도 많이 줄어들었다.‘굳이 칼을 대지 않아도 충분히 겁을 줄 수 있겠는데?’그나마 선하게 생긴 남자가 윤혜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칭찬했다.“참 예쁜 아가씨야.”“아진아, 그만하고 얼른 하자. 나 더 이상 못 참겠어.”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말을 하며 동시에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참다못해 병이라도 난 것처럼 아주 급하게 말이다.점심에 윤혜인을 만났을 때, 그는 사실 그 자리에서 바로 그녀를 “처리”하고 싶었다.하지만 눈치가 빨랐던 아진은 그녀와 싸우던 남자가
아진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조금 전 넘어지며 다친 것인지 윤혜인의 발에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확실히 현재 그녀가 있는 곳에는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돌들이 잔뜩 있었다.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강현이 윤혜인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너 왜 이렇게 시간 끌어? 내가 먼저 할 거야, 그럼.”말을 끝마치고 그는 윤혜인을 조금 더 평평한 곳으로 끌어갔다.그러자 윤혜인이 작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외쳤다.“오빠, 조금만 천천히... 이렇게 끌지 말아 주세요. 바닥이 전부 돌이라고요.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한마디 말에 강현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예쁜 목소리로 여자가 오빠라 불러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강현은 그녀를 끌지 않고 앞에 있는 공터를 가리켰다.“빨리 가서 누워. 나 정말 얼어 죽을 것 같다고.”산속에서의 낮과 밤의 온도차는 매우 컸다. 바지도 입지 않은 터라 그는 추위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윤혜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손으로는 계속 밧줄을 풀려고 애를 쓰며 말이다.다행히도 조금 전 아진이 너무 세게 밧줄을 묶지는 않았고 또한 그녀의 손목이 매우 가늘었기에, 밧줄은 이미 대부분 벗겨져 있었다.공터에 다다르자 그녀는 순순히 쪼그려 앉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두 남자 몰래 손에 묶인 밧줄을 완전히 풀어냈다.강현이 조급한 듯 말했다.“너더러 누우라고 했지 언제 앉으라고 했어?”윤혜인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이 자세가 좋아서요.”그러자 강현이 헤벌쭉하며 웃었다.“뭘 좀 아네? 이런 자세도 다 알고...”그는 윤혜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빨리, 빨리, 나 낮부터 지금까지 참고 있었다고. 곧 터져버릴 것 같아...”“알겠어요, 오빠.”윤혜인은 아주 쿨하게 승낙했고 심지어는 조금 기뻐하는 듯한 기색도 보였다.의심스러워진 강현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아아아!”그는 돼지
윤혜인은 자신이 너무 이 상황에서 구원되고 싶은 나머지 헛것을 들었다 생각했다.그러나 곧이어 또 한 소리가 들려왔다.“윤혜인, 어디 있어?”익숙한 목소리였다.윤혜인은 힘차게 외쳤다.“진혁 씨, 나 여기 있어요! 읍...”앞에 있는 사람이 그녀의 입을 가렸다.곧 아진과 강현,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그녀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윤혜인은 온 힘을 다해 죽을 각오로 몸부림쳤다.그러나 두 건장한 성인 남자를 막기에는 무리였고 둘은 그녀를 어둠으로 끌고 들어갔다.그러나 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뒤꿈치로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무언가 이상하다 느낀 이진은 곧장 윤혜인의 머리를 힘껏 당겨 그녀가 힘을 쓰지 못하게 했다.그렇게 윤혜인이 거의 포기할 정도로 지쳐있을 때, 강한 바람이 불어보며 그녀를 끌고 가던 남자의 참혹한 울부짖음 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아!”남자가 누군가에 걷어차여 날아갔다.이 시각, 이진혁의 눈동자에는 비할 바 없이 끔찍하고 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어찌나 강한 발차기였는지, 남자는 걷어차여 굴러간 후로 앓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뒤이어 그의 차가운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그 예쁘고 얇은 입술로 뱉는 말은 덧없이 험악했다.“스스로 죽기를 자처하는 거지?”순간, 강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그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서 있을 때, 이진혁은 큰 손으로 강현의 목을 잡더니 옆으로 내던졌다.그러고는 윤혜인의 앞에 와 반쯤 쪼그려 앉더니 팔을 살짝 앞으로 뻗었다.하지만 곧 윤혜인이 자신의 손길을 꺼린다는 것을 떠올리고 묵묵히 다시 손을 거뒀다.“어디 다친 데 없어?”그는 포악한 기운을 감추고 눈썹을 찌푸렸다.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걱정에 찬 듯 잔뜩 긴장한 그의 표정을 보아냈다.곧이어 오랫동안 버텨왔던 그녀의 강인함이 단번에 무너졌다.왈칵 눈물을 흘리며 윤혜인은 갑자기 이진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그 동작이 이진혁의 마음을 완전히 강타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윤혜인
윤혜인은 손으로 이준혁의 등을 받쳤다. 놀란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고 말도 울음소리에 먹혀 똑똑하게 들리지 않았다.“준혁 씨... 정신 차려요, 나 놀라게 하지 말고요!”이준혁의 가슴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과다출혈로 인해 그의 잘생긴 얼굴도 하얗게 변해갔다.윤혜인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그의 이름을 거듭 불렀다.“준혁 씨, 잠들면 안 돼요. 나랑 얘기해요, 제발, 나랑 얘기해요, 네?”“울지 마, 바보야... 나 하나도 안 아파...”힘이 들어 손을 들 수는 없었지만, 이준혁의 의식은 여전히 깨어있었다.윤혜인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이준혁은 하얗게 변한 입술로 씩 미소를 지었다.진통제를 맞은 듯 상처도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날 여전히 신경 쓰고 있구나... 그래도... 자기 자신만 모르는 거였네.’그동안 윤혜인은 이준혁을 외면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상처를 주었다.그러나 이준혁은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감정을 감춰왔던 터라 겉으로는 담담한 척 할 수밖에 없었다.“혜인아, 아이 일은 나도 많이 슬퍼...”이준혁은 하얘진 입을 힘들게 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을 때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다 쓰는 것 같았다.“미안해. 나 용서해주면 안 될까...”이혼 후, 아이라는 화제는 건드릴 수 없는 금기처럼 여겨졌다.그들은 모두 침묵하여 여태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었다.그러나 현재 이준혁은 제 생각을 윤혜인에게 말하고 싶어한다.그 아이는 이준혁에게 있어 첫째 아이였다. 자신의 슬픔을 다른 사람처럼 뚜렷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준혁이 슬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윤혜인은 눈물을 가득 머금고 연신 말했다.“용서할게요. 용서해요. 준혁 씨만 괜찮으면 돼요...”아이를 잃었을 때, 윤혜인은 그를 증오하다 못해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그러나 그거 부상입은 몸을 던져 또 한 번 자신을 구해줬을 때, 그 증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현재 윤혜인은 그저 이준혁이
윤혜인은 마음속이 복잡했다. 이혼에 대해서 그들 두 사람은 당시 이태수에게 숨기기로 했고 문현미에게도 숨기기로 했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더 이상 문현미를 속이고 싶지 않다.“어머님, 죄송해요. 사실 저희 이혼했어요.”문현미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너희! 너희가 이혼했다고?!”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혜인아, 너 정말 멍청한 거 아니니? 준혁이가 겉으론 차가워서 그렇지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데, 걔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네가 있을 거라고!”문현미가 비통해하며 말했다.그녀는 윤혜인은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저 수술실 안에 중상을 입고 누워있는 사람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다!어머니로서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윤혜인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단 한 마디도 변명할 수 없었다.문현미의 마음속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윤혜인은 그녀에게 욕을 먹고 맞는다고 해도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굳게 닫힌 수술실 문과 윤혜인을 번갈아 보다가 문현미는 가슴이 통증이 극심해져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어머님! 어머님!”윤혜인은 문현미를 부축하고 두어 번 소리쳤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당황한 윤혜인이 외쳤다.“의사 선생님!!!”곧이어 의사가 문현미를 다른 응급실로 보냈다.다행히 문현미는 일시적으로 심장 박동수가 너무 빠른 탓에 쓰러진 거라, 응급처치를 거쳐 다시 심박 수를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이런 경우 그저 조용히 안정을 취하면 된다.윤혜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수술실 쪽으로 돌아가 이준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이하진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까지 이준혁의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정유미도 오려고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강제로 데려가는 바람에 올 수 없었다.이하진은 서리 맞은 가지처럼 축 쳐져 있었다.그는 이신우에게도 이 사실을 알았다. 통화 속 이신우의 말투는 여전히 간결했지만, 이하진은 그가 돌아오면 자신이 엄청 혼나게 될 거라는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