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마음속이 복잡했다. 이혼에 대해서 그들 두 사람은 당시 이태수에게 숨기기로 했고 문현미에게도 숨기기로 했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더 이상 문현미를 속이고 싶지 않다.“어머님, 죄송해요. 사실 저희 이혼했어요.”문현미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너희! 너희가 이혼했다고?!”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혜인아, 너 정말 멍청한 거 아니니? 준혁이가 겉으론 차가워서 그렇지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데, 걔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네가 있을 거라고!”문현미가 비통해하며 말했다.그녀는 윤혜인은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저 수술실 안에 중상을 입고 누워있는 사람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다!어머니로서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윤혜인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단 한 마디도 변명할 수 없었다.문현미의 마음속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윤혜인은 그녀에게 욕을 먹고 맞는다고 해도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굳게 닫힌 수술실 문과 윤혜인을 번갈아 보다가 문현미는 가슴이 통증이 극심해져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어머님! 어머님!”윤혜인은 문현미를 부축하고 두어 번 소리쳤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당황한 윤혜인이 외쳤다.“의사 선생님!!!”곧이어 의사가 문현미를 다른 응급실로 보냈다.다행히 문현미는 일시적으로 심장 박동수가 너무 빠른 탓에 쓰러진 거라, 응급처치를 거쳐 다시 심박 수를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이런 경우 그저 조용히 안정을 취하면 된다.윤혜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수술실 쪽으로 돌아가 이준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이하진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까지 이준혁의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정유미도 오려고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강제로 데려가는 바람에 올 수 없었다.이하진은 서리 맞은 가지처럼 축 쳐져 있었다.그는 이신우에게도 이 사실을 알았다. 통화 속 이신우의 말투는 여전히 간결했지만, 이하진은 그가 돌아오면 자신이 엄청 혼나게 될 거라는
그의 손에는 힘이 많이 실려있었다.이하진은 입가에 피가 조금 났고 충격에 비틀거리며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혔다.“쿵!”딱 봐도 매우 아플 것 같은 소리였다.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곧 다시 곧게 자리에 섰다.이신우는 늘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 순간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이하진, 내가 너를 가만히 두는 건 세상이 무법천지인 것처럼 굴라는 말이 아니야!”이하진은 입을 벌렸지만, 여전히 말을 할 수 없었다.“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네 형이다. 준혁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어 그건.”이하진은 마침내 약간 두려워하며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예요. 저.. 저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그러자 이신우가 냉혹하게 외쳤다.“미안하다는 말은 오직 너 자신만을 위로할 수 있어.”이 말을 들은 이하진의 안색은 완전히 혈색을 잃었다.이신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난 너를 장장 15년 동안 키워왔다. 엄마를 잃은 비통함을 달래주고자 너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인제 와 보니 내가 틀린 것 같구나. 네 지금 모습이 어떤지 한번 봐봐라. 네 엄마가 목숨 바쳐 널 구한 가치가 있기나 하니?”갑자기 이하진이 고개를 들더니 붉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엄마가... 정말 자신의 목숨으로 절 구한 거예요?”여러 해 동안 이신우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일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그는 또한 항상 자신이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다.이하진은 이신우의 팔을 붙잡고 분노하며 외쳤다.“알려주세요! 엄마에 관한 일을 전부 알려달라고요!”이신우의 눈동자가 더욱 어두워졌다.“네 엄마랑 약속했어. 네가 능력이 되면 모든 걸 알려주기로.”이하진이 더욱 크게 고함을 질렀다.“지금 알아야겠어요! 왜 안 알려주시는 건데요!”그러나 이신우는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이만 돌아가. 여기는 네가 필요하지 않으니.”그 후, 이신우는 돌아서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진료
‘그래도 나를 이렇게 싫어할 일인가? 흥, 나도 싫다 뭐?!’...윤혜인은 병실에서 수액을 다 맞은 다음, 힘든 나머지 기절했다.고열과 고도의 정신적 긴장으로 인해 그녀는 밤새 잠을 잤다.그러나 꿈을 꾸다가 그녀는 불안에 떨며 식은땀에 젖은 채 깨어났다.윤혜인은 창밖의 눈부신 햇살을 보며 그녀에게 수액을 주러 들어온 간호사에게 지금이 몇 시인지 물었다.간호사가 대답한 후에야 윤혜인은 자신이 이렇게 오래 잤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곧이어 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간호사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손에 꽂은 수액 관을 뽑은 뒤 중환자실로 달려갔다.중환자실에 도착해 의사에서 물어보니 이준혁은 이미 위험시기를 벗어나 VIP 병동으로 옮겨졌다고 했다.윤혜인은 바로 돌아서서 위층 VIP 병동으로 달려갔다.하지만 열이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 않아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찼고 이마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VIP 병동 입구에 도착하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입구를 막아나서며 그녀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죄송합니다만 대신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윤혜인이 이준혁 씨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경호원은 차갑게 거절했다.“저희는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윤혜인은 잠시 멍해졌다.‘조금 전 의사 선생님이 준혁 씨가 이미 깨어났다고 말했는데? 설마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건가?’그녀의 마음속에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그와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이곳에 앉아있으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아서 말이다.그렇게 그녀는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었다.경호원조차도 이미 교대를 했다.또 한참이 지난 후, 윤혜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준혁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앞으로 다가가 경호원과 상의했다.“저 좀 도와서 한번 물어봐 주시겠어요? 만약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저 잠깐 보고 금방 돌아갈게요.”
‘역시 보잘것없는 출신 아니랄까 봐, 아무렇게나 툭 내뱉은 말에도 충격을 받다니.’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그녀를 위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을 생각하자, 이천수는 화가 나 이를 갈았다.하지만 그는 이준혁이 윤혜인을 구하다 부상을 입은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뜻밖의 사고라고 여겼을 뿐.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천수는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됐네, 이미 이혼한 이상 이제 준혁이 앞에도 적당히 나타나 주게. 걔 앞길 방해하지 말고.”이천수는 경멸의 눈빛을 띠며 계속 윤혜인을 압박하려고 했다.“여자답게, 조신하게 행동하길 바라네.”평소 같으면, 이천수는 절대 이런 젊은 여자에게 특별히 시간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준혁이 윤혜인을 보호하려 한다는 것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그는 평소 아들과 소통이 잘되지 않았다. 대부분 이준혁은 담담하게 대응하고 이천수에게 대드는 일도 거의 없었다.하지만 지금 와서 직접 윤혜인을 보고 이천수는 깨달았다.그녀의 외모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출중했다!‘문제가 더 심해지기 전에 반드시 기를 꺾어놔야지.’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곧이어 이천수가 발걸음을 돌려 떠나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 아버님. 저는 아버님의 말씀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이천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어두워진 안색으로 윤혜인을 바라보았다.윤혜인도 전혀 비굴해 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저는 제 배경이 결코 남에게 보일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비록 평범한 집안 출신에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녀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았다.오히려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는 외할머니가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다.이전에 이준혁에게서 느꼈던 열등감은 단지 그라는 사람에게 비롯된 것이었다.이준혁은 확실히 대단한 사림이었다. 20대 초반에 그는 외국에서 복수학위를 땄고 해외에서 업계 기적을 창조한 적이 있었다.비즈니스 분야에서 그의 나이에 이룩한
이천수와 이렇게 이념이 다르니 그가 여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이천수는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콧방귀를 뀌었다.“2년 동안 내 아들은 너무 본능에 충실해 살았어. 자네도 재벌 집 며느리 생활을 잘 누렸을 테니 이제 다시 준혁이 앞에 나타나지 말게.”비열하고도 역겨운 말이었다.윤혜인이 이천수에게 물었다.“아버님은 뭐가 두려우셔서 이러시는 건가요?”정곡을 찔린 이천수가 뜨끔했다.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그들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자신의 계획을 망칠까 두려워서였다.“농담하는 거지? 내가 두려워한다고? 자네한테 내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지?”이천수는 득의양양해서 말했다.“사실 준혁이가 어젯밤에 이미 나더러 정씨 집안에 가서 혼사에 관한 얘기를 나누라고 했네. 곧 우리 두 집안은 가족이 될 거야.”‘혼사? 준혁 씨가 정씨 집안과 혼사를 논하라 했다고?’순간, 윤혜인은 벼락에 맞은 것처럼 어리둥절해졌다.‘정유미 씨랑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면서 왜 죽음을 무릅쓰고 나를 구하려고 하고 또 그런 말을 한 거지?’모든 것이 이천수의 계획대로 흘러갔고 윤혜인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해졌다.‘감히 나한테 대들다니! 제 주제가 어떤지도 모르고!’“내 미래 며느리 될 아이를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니면...”이천수는 마치 개미를 보듯 경멸에 찬 눈빛으로 윤혜인을 바라보았다.“자네, 준혁이의 불륜녀이라도 될 생각인가?”불륜녀라는 말에 윤혜인은 끓는 기름에 내던져져 피부가 전부 벗겨진 듯 했다. 그 정도로 부끄럽고 화가 났다.주체할 수 없이 손이 떨렸지만, 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곧이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전 평생 그런 사람은 되지 않을 거거든요. 준혁 씨가 정유미 씨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저는 절대 준혁 씨와 얽매이지 않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이천수가 매우 만족스
윤혜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조금 전에는 이천수의 말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하고 있었다면, 윤혜인은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장선자가 그와 같이 거짓말을 하려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는지라 윤혜인은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장선자는 윤혜인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이천수에게 물었다. “이분은?”정유미도 윤혜인을 보고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이천수의 말에 입을 닫았다.“모르는 사람입니다.”이천수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장선자에게 말했다.“병원 청소하는 사람일 거에요.”그 말을 들은 윤혜인이 발걸음을 멈칫했다.이천수는 정말이지 그녀를 비하할 기회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말은 더이상 그녀에게 어떠한 타격도 되지 않았다.이준혁이 누구와 함께 있든 그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임은 사실이다.윤혜인이 그를 용서하기로 약속한 이상, 이제 정말 그를 놔줘야 할 때인 것이다.마음속으로 이준혁의 행복을 바라며 말이다.게다가 상황을 보니 이준혁의 목숨엔 큰 우려가 없을 것 같았고 다행히 호전되고 있는 것 같았다.전처라는 신분은 매우 난감했다. 모두들 그들이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않으니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이 맞다.이런 생각이 드는 즉시 윤혜인은 등을 곧게 펴고 유유히 떠났다.정유미는 윤혜인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정유미는 이천수가 윤혜인을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다. 심지어 그녀가 병원 청소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사실 현재 정유미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준혁이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전처를 구하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정유미의 집념이 많이 줄어들었다.얼마나 사랑해야 하면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 수 있는 것일까.정유미는 부러웠지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뺏는 악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어차피 이준혁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고 말이다.그러나 오늘 아침 장선자는 갑자
장선자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애를 너무 곱게 곱게 키웠어요. 앞으로 부디 아버님과 준혁이가 많이 돌봐줬으면 합니다.”이 말은 들은 이천수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물론입니다. 안심하세요, 사모님. 저희 집에서는 유미를 절대로 마음고생 시키지 않게 할 겁니다.”그들이 얘기를 나눌수록 이준혁은 점점 얼굴이 싸늘해지면서 예의를 차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그는 장선자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피식 냉소하며 말했다.“사모님, 한동안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태도도 이전과 다르지 않아요. 사모님의 따님분을 저는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혼할 생각도 없습니다.”사모님, 따님...거리를 두는 듯한 생소한 단어 사용에 장선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곧이어 그녀도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준혁아, 이게 무슨 뜻이니? 네 아버지가 어젯밤 직접 집에 와서 너랑 유미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하셨어.”어제 이천수가 직접 와 약속을 했기에 장선자도 이러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장선자는 이준혁이 정유미의 장점을 보고 태도가 바뀐 줄로 알았다.비록 정유미는 조금 고집스럽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이준혁이 이렇게 우수하고 정유미도 마침 좋아하니 장선자는 이것이 두 집안에 있어 모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녀가 오늘 정유미를 데리고 이준혁을 보러 온 것이었다.옆에 있던 이천수도 이준혁을 힐끗 째려보더니 곧 장선자를 위로했다.“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준혁이가 이상한 소리 한 거예요.”말을 마친 후 그는 다시 이준혁을 쳐다보며 꾸짖었다.“이놈아, 얼른 장모님한테 사과해! 자꾸 나 화나게 만들거야?!”이준혁은 분명히 이천수가 뒤에서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왜냐하면, 이미 며칠 전 그가 장선자에게 태도를 밝혔기 때문에 다른 이유가 아닌 이상 그녀가 이렇게 직접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천수가 이준혁 대신 결혼을 약속하리
“너, 너!” 이천수는 이준혁을 한참을 꾸짖었다. 화가 나다 못해 이가 간지러울 정도였다.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업적으로 후일을 도모할 사람이 현재는 이준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곧바로 그는 화를 애써 누른 후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정유미와 결혼하는 건 잠시일 뿐이야. 협력 건을 손에 넣고 이혼하면 되는 거 아니냐. 어차피 이혼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이천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득의양양하게 말을 계속 이어 말했다.“우리 이씨 집안의 남자들이 열 번이나 이혼했더라도, 그 재벌가 여식들은 너도나도 빼앗으려 들 거야.”이천수의 눈에 여자는 항상 도구일 뿐이었다.이익만 있다면 결혼과 이혼은 모두 문제가 아니었다.문현미조차도 애초 그는 문씨 집안의 세력을 보고 그녀와 결혼했던 것이다.혐오스러운 발언에 이준혁은 더더욱 이천수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는 절대로 정유미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이만 가세요. 쉬겠습니다.”친아들이 이렇게 자신을 대하자 이천수는 곧 화가 치밀어올랐다.그러나 이준혁의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을 보고 별수 없이 참았다.“그럼 쉬어라. 하지만 마지막 경고야. 지난번에도 나를 속이고 결혼하더니... 게다가 아버지도 네 편을 드셔서 그냥 참았던 거야. 그러나 이번은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이씨 집안의 남자로서 너는 선택권이 없다. 정씨 집안이 아니더라도 안씨 집안이 있고, 주씨 집안도 있고, 임씨 집안도 있어. 앞으로 다시 한번 허튼소리로 하지 말거라. 안 그럼 좋은 결과가 없을 테니.”마지막 몇 글자는 위협의 뜻이 분명했다.친아들에게 이천수는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위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준혁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순간 이준혁은 눈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혼인에 집착하시는데... 차라리 아버지가 직접 하시는 건 어때요? 어차피 아버지는 밖에 여자도 많으시니 아예 안씨, 주씨, 임씨 집안 사람과 함께 결혼하세요. 그래야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