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마음속이 복잡했다. 이혼에 대해서 그들 두 사람은 당시 이태수에게 숨기기로 했고 문현미에게도 숨기기로 했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더 이상 문현미를 속이고 싶지 않다.“어머님, 죄송해요. 사실 저희 이혼했어요.”문현미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너희! 너희가 이혼했다고?!”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혜인아, 너 정말 멍청한 거 아니니? 준혁이가 겉으론 차가워서 그렇지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데, 걔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네가 있을 거라고!”문현미가 비통해하며 말했다.그녀는 윤혜인은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저 수술실 안에 중상을 입고 누워있는 사람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다!어머니로서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윤혜인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단 한 마디도 변명할 수 없었다.문현미의 마음속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윤혜인은 그녀에게 욕을 먹고 맞는다고 해도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굳게 닫힌 수술실 문과 윤혜인을 번갈아 보다가 문현미는 가슴이 통증이 극심해져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어머님! 어머님!”윤혜인은 문현미를 부축하고 두어 번 소리쳤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당황한 윤혜인이 외쳤다.“의사 선생님!!!”곧이어 의사가 문현미를 다른 응급실로 보냈다.다행히 문현미는 일시적으로 심장 박동수가 너무 빠른 탓에 쓰러진 거라, 응급처치를 거쳐 다시 심박 수를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이런 경우 그저 조용히 안정을 취하면 된다.윤혜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수술실 쪽으로 돌아가 이준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이하진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까지 이준혁의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정유미도 오려고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강제로 데려가는 바람에 올 수 없었다.이하진은 서리 맞은 가지처럼 축 쳐져 있었다.그는 이신우에게도 이 사실을 알았다. 통화 속 이신우의 말투는 여전히 간결했지만, 이하진은 그가 돌아오면 자신이 엄청 혼나게 될 거라는
그의 손에는 힘이 많이 실려있었다.이하진은 입가에 피가 조금 났고 충격에 비틀거리며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혔다.“쿵!”딱 봐도 매우 아플 것 같은 소리였다.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곧 다시 곧게 자리에 섰다.이신우는 늘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 순간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이하진, 내가 너를 가만히 두는 건 세상이 무법천지인 것처럼 굴라는 말이 아니야!”이하진은 입을 벌렸지만, 여전히 말을 할 수 없었다.“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네 형이다. 준혁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어 그건.”이하진은 마침내 약간 두려워하며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예요. 저.. 저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그러자 이신우가 냉혹하게 외쳤다.“미안하다는 말은 오직 너 자신만을 위로할 수 있어.”이 말을 들은 이하진의 안색은 완전히 혈색을 잃었다.이신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난 너를 장장 15년 동안 키워왔다. 엄마를 잃은 비통함을 달래주고자 너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인제 와 보니 내가 틀린 것 같구나. 네 지금 모습이 어떤지 한번 봐봐라. 네 엄마가 목숨 바쳐 널 구한 가치가 있기나 하니?”갑자기 이하진이 고개를 들더니 붉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엄마가... 정말 자신의 목숨으로 절 구한 거예요?”여러 해 동안 이신우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일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그는 또한 항상 자신이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다.이하진은 이신우의 팔을 붙잡고 분노하며 외쳤다.“알려주세요! 엄마에 관한 일을 전부 알려달라고요!”이신우의 눈동자가 더욱 어두워졌다.“네 엄마랑 약속했어. 네가 능력이 되면 모든 걸 알려주기로.”이하진이 더욱 크게 고함을 질렀다.“지금 알아야겠어요! 왜 안 알려주시는 건데요!”그러나 이신우는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이만 돌아가. 여기는 네가 필요하지 않으니.”그 후, 이신우는 돌아서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진료
‘그래도 나를 이렇게 싫어할 일인가? 흥, 나도 싫다 뭐?!’...윤혜인은 병실에서 수액을 다 맞은 다음, 힘든 나머지 기절했다.고열과 고도의 정신적 긴장으로 인해 그녀는 밤새 잠을 잤다.그러나 꿈을 꾸다가 그녀는 불안에 떨며 식은땀에 젖은 채 깨어났다.윤혜인은 창밖의 눈부신 햇살을 보며 그녀에게 수액을 주러 들어온 간호사에게 지금이 몇 시인지 물었다.간호사가 대답한 후에야 윤혜인은 자신이 이렇게 오래 잤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곧이어 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간호사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손에 꽂은 수액 관을 뽑은 뒤 중환자실로 달려갔다.중환자실에 도착해 의사에서 물어보니 이준혁은 이미 위험시기를 벗어나 VIP 병동으로 옮겨졌다고 했다.윤혜인은 바로 돌아서서 위층 VIP 병동으로 달려갔다.하지만 열이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 않아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찼고 이마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VIP 병동 입구에 도착하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입구를 막아나서며 그녀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죄송합니다만 대신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윤혜인이 이준혁 씨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경호원은 차갑게 거절했다.“저희는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윤혜인은 잠시 멍해졌다.‘조금 전 의사 선생님이 준혁 씨가 이미 깨어났다고 말했는데? 설마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건가?’그녀의 마음속에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그와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이곳에 앉아있으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아서 말이다.그렇게 그녀는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었다.경호원조차도 이미 교대를 했다.또 한참이 지난 후, 윤혜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준혁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앞으로 다가가 경호원과 상의했다.“저 좀 도와서 한번 물어봐 주시겠어요? 만약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저 잠깐 보고 금방 돌아갈게요.”
‘역시 보잘것없는 출신 아니랄까 봐, 아무렇게나 툭 내뱉은 말에도 충격을 받다니.’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그녀를 위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을 생각하자, 이천수는 화가 나 이를 갈았다.하지만 그는 이준혁이 윤혜인을 구하다 부상을 입은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뜻밖의 사고라고 여겼을 뿐.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천수는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됐네, 이미 이혼한 이상 이제 준혁이 앞에도 적당히 나타나 주게. 걔 앞길 방해하지 말고.”이천수는 경멸의 눈빛을 띠며 계속 윤혜인을 압박하려고 했다.“여자답게, 조신하게 행동하길 바라네.”평소 같으면, 이천수는 절대 이런 젊은 여자에게 특별히 시간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준혁이 윤혜인을 보호하려 한다는 것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그는 평소 아들과 소통이 잘되지 않았다. 대부분 이준혁은 담담하게 대응하고 이천수에게 대드는 일도 거의 없었다.하지만 지금 와서 직접 윤혜인을 보고 이천수는 깨달았다.그녀의 외모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출중했다!‘문제가 더 심해지기 전에 반드시 기를 꺾어놔야지.’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곧이어 이천수가 발걸음을 돌려 떠나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 아버님. 저는 아버님의 말씀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이천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어두워진 안색으로 윤혜인을 바라보았다.윤혜인도 전혀 비굴해 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저는 제 배경이 결코 남에게 보일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비록 평범한 집안 출신에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녀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았다.오히려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는 외할머니가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다.이전에 이준혁에게서 느꼈던 열등감은 단지 그라는 사람에게 비롯된 것이었다.이준혁은 확실히 대단한 사림이었다. 20대 초반에 그는 외국에서 복수학위를 땄고 해외에서 업계 기적을 창조한 적이 있었다.비즈니스 분야에서 그의 나이에 이룩한
이천수와 이렇게 이념이 다르니 그가 여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이천수는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콧방귀를 뀌었다.“2년 동안 내 아들은 너무 본능에 충실해 살았어. 자네도 재벌 집 며느리 생활을 잘 누렸을 테니 이제 다시 준혁이 앞에 나타나지 말게.”비열하고도 역겨운 말이었다.윤혜인이 이천수에게 물었다.“아버님은 뭐가 두려우셔서 이러시는 건가요?”정곡을 찔린 이천수가 뜨끔했다.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그들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자신의 계획을 망칠까 두려워서였다.“농담하는 거지? 내가 두려워한다고? 자네한테 내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지?”이천수는 득의양양해서 말했다.“사실 준혁이가 어젯밤에 이미 나더러 정씨 집안에 가서 혼사에 관한 얘기를 나누라고 했네. 곧 우리 두 집안은 가족이 될 거야.”‘혼사? 준혁 씨가 정씨 집안과 혼사를 논하라 했다고?’순간, 윤혜인은 벼락에 맞은 것처럼 어리둥절해졌다.‘정유미 씨랑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면서 왜 죽음을 무릅쓰고 나를 구하려고 하고 또 그런 말을 한 거지?’모든 것이 이천수의 계획대로 흘러갔고 윤혜인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해졌다.‘감히 나한테 대들다니! 제 주제가 어떤지도 모르고!’“내 미래 며느리 될 아이를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니면...”이천수는 마치 개미를 보듯 경멸에 찬 눈빛으로 윤혜인을 바라보았다.“자네, 준혁이의 불륜녀이라도 될 생각인가?”불륜녀라는 말에 윤혜인은 끓는 기름에 내던져져 피부가 전부 벗겨진 듯 했다. 그 정도로 부끄럽고 화가 났다.주체할 수 없이 손이 떨렸지만, 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곧이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전 평생 그런 사람은 되지 않을 거거든요. 준혁 씨가 정유미 씨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저는 절대 준혁 씨와 얽매이지 않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이천수가 매우 만족스
윤혜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조금 전에는 이천수의 말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하고 있었다면, 윤혜인은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장선자가 그와 같이 거짓말을 하려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는지라 윤혜인은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장선자는 윤혜인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이천수에게 물었다. “이분은?”정유미도 윤혜인을 보고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이천수의 말에 입을 닫았다.“모르는 사람입니다.”이천수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장선자에게 말했다.“병원 청소하는 사람일 거에요.”그 말을 들은 윤혜인이 발걸음을 멈칫했다.이천수는 정말이지 그녀를 비하할 기회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말은 더이상 그녀에게 어떠한 타격도 되지 않았다.이준혁이 누구와 함께 있든 그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임은 사실이다.윤혜인이 그를 용서하기로 약속한 이상, 이제 정말 그를 놔줘야 할 때인 것이다.마음속으로 이준혁의 행복을 바라며 말이다.게다가 상황을 보니 이준혁의 목숨엔 큰 우려가 없을 것 같았고 다행히 호전되고 있는 것 같았다.전처라는 신분은 매우 난감했다. 모두들 그들이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않으니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이 맞다.이런 생각이 드는 즉시 윤혜인은 등을 곧게 펴고 유유히 떠났다.정유미는 윤혜인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정유미는 이천수가 윤혜인을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다. 심지어 그녀가 병원 청소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사실 현재 정유미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준혁이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전처를 구하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정유미의 집념이 많이 줄어들었다.얼마나 사랑해야 하면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 수 있는 것일까.정유미는 부러웠지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뺏는 악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어차피 이준혁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고 말이다.그러나 오늘 아침 장선자는 갑자
장선자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애를 너무 곱게 곱게 키웠어요. 앞으로 부디 아버님과 준혁이가 많이 돌봐줬으면 합니다.”이 말은 들은 이천수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물론입니다. 안심하세요, 사모님. 저희 집에서는 유미를 절대로 마음고생 시키지 않게 할 겁니다.”그들이 얘기를 나눌수록 이준혁은 점점 얼굴이 싸늘해지면서 예의를 차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그는 장선자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피식 냉소하며 말했다.“사모님, 한동안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태도도 이전과 다르지 않아요. 사모님의 따님분을 저는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혼할 생각도 없습니다.”사모님, 따님...거리를 두는 듯한 생소한 단어 사용에 장선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곧이어 그녀도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준혁아, 이게 무슨 뜻이니? 네 아버지가 어젯밤 직접 집에 와서 너랑 유미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하셨어.”어제 이천수가 직접 와 약속을 했기에 장선자도 이러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장선자는 이준혁이 정유미의 장점을 보고 태도가 바뀐 줄로 알았다.비록 정유미는 조금 고집스럽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이준혁이 이렇게 우수하고 정유미도 마침 좋아하니 장선자는 이것이 두 집안에 있어 모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녀가 오늘 정유미를 데리고 이준혁을 보러 온 것이었다.옆에 있던 이천수도 이준혁을 힐끗 째려보더니 곧 장선자를 위로했다.“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준혁이가 이상한 소리 한 거예요.”말을 마친 후 그는 다시 이준혁을 쳐다보며 꾸짖었다.“이놈아, 얼른 장모님한테 사과해! 자꾸 나 화나게 만들거야?!”이준혁은 분명히 이천수가 뒤에서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왜냐하면, 이미 며칠 전 그가 장선자에게 태도를 밝혔기 때문에 다른 이유가 아닌 이상 그녀가 이렇게 직접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천수가 이준혁 대신 결혼을 약속하리
“너, 너!” 이천수는 이준혁을 한참을 꾸짖었다. 화가 나다 못해 이가 간지러울 정도였다.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업적으로 후일을 도모할 사람이 현재는 이준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곧바로 그는 화를 애써 누른 후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정유미와 결혼하는 건 잠시일 뿐이야. 협력 건을 손에 넣고 이혼하면 되는 거 아니냐. 어차피 이혼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이천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득의양양하게 말을 계속 이어 말했다.“우리 이씨 집안의 남자들이 열 번이나 이혼했더라도, 그 재벌가 여식들은 너도나도 빼앗으려 들 거야.”이천수의 눈에 여자는 항상 도구일 뿐이었다.이익만 있다면 결혼과 이혼은 모두 문제가 아니었다.문현미조차도 애초 그는 문씨 집안의 세력을 보고 그녀와 결혼했던 것이다.혐오스러운 발언에 이준혁은 더더욱 이천수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는 절대로 정유미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이만 가세요. 쉬겠습니다.”친아들이 이렇게 자신을 대하자 이천수는 곧 화가 치밀어올랐다.그러나 이준혁의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을 보고 별수 없이 참았다.“그럼 쉬어라. 하지만 마지막 경고야. 지난번에도 나를 속이고 결혼하더니... 게다가 아버지도 네 편을 드셔서 그냥 참았던 거야. 그러나 이번은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이씨 집안의 남자로서 너는 선택권이 없다. 정씨 집안이 아니더라도 안씨 집안이 있고, 주씨 집안도 있고, 임씨 집안도 있어. 앞으로 다시 한번 허튼소리로 하지 말거라. 안 그럼 좋은 결과가 없을 테니.”마지막 몇 글자는 위협의 뜻이 분명했다.친아들에게 이천수는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위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준혁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순간 이준혁은 눈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혼인에 집착하시는데... 차라리 아버지가 직접 하시는 건 어때요? 어차피 아버지는 밖에 여자도 많으시니 아예 안씨, 주씨, 임씨 집안 사람과 함께 결혼하세요. 그래야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