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이면 충분하지, 또 나를 속이려 들어?’눈동자가 움츠러들더니 육경한이 또 한 번 독한 소리를 내뱉었다.“안 나가고 싶어? 되지. 그럼 너희 엄마한테 내가 손님 접대하러 갈 시간 있는지 물어볼까?”말을 끝마치자마자 그는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자 불편한 몸을 뒤로 한 채, 소원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나 갈 수 있어.”육경한은 경멸이 찬 눈빛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소원은 아픈 몸을 이끌고 육경한의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차는 미친 듯이 달려 한 클럽에 도착했고 소원은 내리자마자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위산 역류가 너무 심해 소원은 티슈를 꺼내 입을 닦았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핏덩이가 한 움큼 묻어났다.불편함이 조금 해소되자 그녀는 몸을 곧게 폈고 육경한은 소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클럽에 들어섰다.소원은 서둘러 따라갔다. 어느새 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육경한은 그녀가 들어오려는 것을 봤음에도 냉정하게 닫힘 버튼을 눌렀다.갑자기 엘리베이터에 끼인 소원은 하마터면 또 피를 토할 뻔했다.그리고 그런 소원을 보는 육경한의 눈빛에는 조롱이 담겨있었다.순간, 소원의 마음도 차갑게 가라앉았다.‘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지? 분명 요즘 우리 관계는 많이 좋아졌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그녀가 주저하며 물었다.“왜 그래, 경한 씨? 무슨 할 말 있으면 나랑 직접 얘기하면 안 돼?”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육경한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 룸에 들어가기 전, 그가 멈춰 섰다.“소원, 또 한 번 더 나를 갖고 장난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아니, 난...”육경한은 미소를 짓더니 동영상을 클릭해 보였다. 뒤이어 윤혜인과 나눴던 대화가 소원의 귀에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들려왔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눈처럼 창백해졌다.“경한 씨, 진짜 이런 거 아니야. 이 동영상 뒤에...”육경한이 소원의 목을 세게 잡더니 그녀의 몸을 벽에 ‘쾅’하고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무자비하게 말
소원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내가 안에 뭘 입고 있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외투를 벗으면 아무것도 안 입은 거나 다름없는 건데?’이전에 고객들과 술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도 그녀는 세련된 정장을 입었었다.모두들 그녀가 소씨 집안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무리 육경한이 그렇게 말했다 한들 정말 그녀를 술집 여자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지금 이런 클럽 같은 장소에서 그녀더러 옷을 벗고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라는 것은 정말로 소원은 술집 여자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다른 두 대표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몸 팔러 나왔으면서 왜 아직도 비싼 척 하고 있어? 우린 네가 이런 모습으로 서 있는 거 볼 시간 없어. 그러니 어서 벗어.”“맞아. 벗으면 내가 보너스 챙겨줄게.”몇몇 사람들이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입만 열면 더러운 욕설을 뱉으며 말이다.소원은 마치 얼굴 가죽이 벗겨진 것처럼 화끈거리며 아파 났다.그녀가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육경한이 갑자기 낮게 웃었다.“소원 씨가 얼마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는데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좀 생각할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생각이요? 재미없게 뭡니까. 우리 먼저 다른 몇 명 불러서 놀까요?”조 대표가 이렇게 말하면서 박수를 두 번 치자, 클럽 측에서 보내온 몇몇 젊은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그녀들은 모두 파격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곧이어 조 대표는 가운데에 가장 눈에 띄는 외국 여자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너희 둘은 우리 육 대표님을 잘 모셔.”이 클럽에서 일하는 외국 여자들은 모두 교육을 잘 받아 한국어를 알아듣고 소통할 수 있었다.육경한을 본 그녀들의 눈빛이 밝아졌다.‘이렇게 멋진 손님은 반년 동안 일하면서 한 명도 만나지 못했는데!’두 사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육경한의 곁에 양옆으로 앉아 그의 허벅지에 손을 끼고 애교스럽게 말했다.“육 대표님, 어떻게 노시고 싶으세요?”조 대표는 침을 흘리는 두 여자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욕했다.“
그녀는 곁눈질로 육경한을 바라보았다. 셔츠는 단추가 이미 세 개나 풀어져 옆에 있는 여자들이 손을 안으로 넣고 있었다.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 분명히 매우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소원은 고개를 돌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조 대표의 곁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대표님과 함께하죠.”조 대표는 기세를 몰아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감아 품에 안더니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소원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지만 이내 다시 그 감정을 숨겼다.조 대표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뜨거운 기운을 내 뿜으며 흥분하여 말했다.“나는 이렇게 개방적인 여자가 좋다니까.”메스꺼움이 다시 심해져 소원은 그 빨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술을 마신다는 명목으로 조 대표의 음흉한 손길을 피했다.“제가 술 따라드릴게요.”조 대표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술을 마시고는 또 다가와 한잔을 요구했다.소원은 조금 피하다가 얼굴에 유혹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한잔 더 드릴게요.”조 대표는 마음에 들었는지 소원의 부드럽고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너 이름이 뭐야?”그러자 소원은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 새빨간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저는 소이라고 합니다.”순간, 불빛 아래 육경한의 눈동자가 조금 더 어두워졌다.‘소이...’그것은 이전에 두 사람이 열애했을 때 그가 그녀에게 지어준 별명이었다.당시 소원은 따스한 얼굴로 육경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생에 나를 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하지만 지금 그녀는 만난 지 몇 분 밖에 되지 않은 늙은 남자에게 자신을 소이라 부르라고 한다.육경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급함이 억누를 수 없이 솟구쳐올랐다.‘정말 천하고 방탕한 여자야.’옆에 있는 몇몇 대표들은 아양을 떠는 소원의 모습을 보고 참지 못했는지 하나둘 수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중 한 명은 두껍게 묶여있는 돈을 직접 소원의 얼굴에 뿌리기까지 했다.‘퍽’하
룸 안에 갑자기 차가운 분위기가 감돌았다.하지만 소원은 마치 알아채지 못한 듯 조 대표, 안 대표, 장 대표 등 몇 사람과 어깨를 걸고 모여들어 술을 마셨다.그녀의 눈웃음은 봄처럼 아름다웠고, 사람의 혼을 사로잡는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조 대표는 이미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지금 소원의 몸 위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갑자기 온몸에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솟구쳐올라 조 대표는 소원을 확 끌어당겨 소파에 눕혔다.마찬가지로 취할 대로 취한 몇몇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불만스러운 듯 비틀거리며 다가왔다.“나도...”“조 대표! 혼자 즐기는 건 아니지...”그들은 헤헤하고 웃으며 모두 늑대와 호랑이처럼 소원에게 뛰어들었다.“펑!”술병 한 개가 조 대표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뚝뚝...”한 방울, 한 방울씩 피가 소원의 얼굴에 떨어졌고, 그녀는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바로 구토했다.저녁을 먹지 않은 탓에 그녀가 토해낸 것은 핏덩이가 전부였다.하지만 조 대표의 머리가 찢어져 피가 여기저기로 퍼져 있었기에 도대체 누구의 피인지 명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조 대표가 이마를 가리고 욕설을 퍼부었다.“어떤 미친놈이야? 눈 안 달렸어? 나한테 죽고 싶어서 이리로 물건을 던지는 거야?”“펑!”조 대표는 머리에 또 한 번 술병을 맞았다.순간,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가 온 방 안에 울려 퍼졌다.다른 두 사람도 땅에 쓰러져 외쳤다.“경호원, 경호원...”육경한은 손에 있는 술 얼룩을 닦고 와인 한 병을 들고 일어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모두 다 나가.”몇몇 대표들은 육경한이 왜 이토록 화가 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러나 지금은 이것을 연구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여자들도 모두 자리를 피했다.뒤이어 육경한은 주변을 서성이다가 소원의 앞으로 다가왔다.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운 모습을 없이 소파에 누워 그를 보고 심지어 웃고 있었다.육경한은 와인 한 병을 소원의 얼굴에 쏟아부어
육경한은 완전히 화가 났고 술기운은 그의 진실된 생각도 가려버렸다.‘이런 천한 여자한테 내가 다시 한번 설레고 흔들렸던 거야? 내가 멍청했지.’육경한은 피에 굶주린 듯 손을 꽉 움켜잡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우습게도 그는 또 그녀에게 속았다.무정하고 의리 없는 여자는 육경한을 배신하고 그에게 상처를 주고 속였다. 그야말로 갖고 논 것이었다!‘내가 절대 너를 편하게 두지 않을거야! 지옥이 어떤지 보여줄게!’소원의 위는 알코올 때문에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끝끝내 굴복하지는 않았다.“대표님도 그냥 그렇네요, 여자 앞에서 허풍이나 떨 뿐.”육경한이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웃었다.“듣는 바에 의하면 너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하던데.”마침 술이 깬 소원은 그 말을 듣고 명확하게 대답했다.“아닌데요.육경한은 차갑게 냉소하며 가볍게 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가 아마 서현재라고 했지?”소원은 몸이 갑자기 굳어졌고 육경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그는 일어나서 바지 단추를 채우고 일어나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너 데리고 서현재 만나러 갈까?”표정이 얼어붙었지만, 소원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경한 씨, 서 선생님과 나는 단지 환자와 의사 관계일 뿐이야. 그러니 여기저기 사람 불편하게 하지 마. 알았어?”“서 선생님? 참 친절하게도 말하네, 어린 동생을 좋아할지는 몰랐네?”소원은 기계 사람처럼 말을 내뱉었다.“미친 사람처럼 굴지 마!”그러자 육경한은 무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미쳐? 서 선생님을 만나면 난 네가 얼마나 미쳤는지 잘 보여줄 거야!”말을 끝내고 그는 바닥에 있는 양복을 주워 소원을 감싸고 그녀를 어깨에 들쳐멨다.소원은 미친 듯이 어깨를 두드리며 욕했다.“육경한, 이 미친놈! 당장 내려놔!”육경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차에 넣고 미친 듯이 질주해 병원에 도착했다.오늘 밤 응급 외과는 마침 서현재가 당직이었다.소원은 예감이 좋지 않자
소원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곧바로 약을 가지고 돌아온 육경한은 두 사람이 원래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눈빛을 잠깐 반짝였다.육경한이 서현재에게 약을 건네며 물었다.“수액을 먼저 할까요, 아니면 상처부터 먼저 치료할까요?”서현재는 간호사에게 약을 건네며 대답했다.“상처는 약 갖고 가셔서 치료하시고 수액은 지금 투여해야 해요."그러자 육경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서 선생님께서 찜질해주시는 거 아닌가요?”서현재는 육경한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아닙니다. 필요하시다면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해도 됩니다.”육경한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러면 제가 직접 소원이에게 해줄게요.”서현재는 듣지 못한 척하고 간호사가 수액을 놓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병상을 떠나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육경한은 담배를 들고 책상에 있는 서현재를 살펴보았다.생김새가 깨끗하고 피부가 매우 하야며 검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보기에 아주 착해 보이는 것이 대학교 때 꽤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았다.그는 피식 차갑게 웃으며 생각했다.‘소원이가 정말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고? 어린애 같은 게 여자랑은 밤도 안 보낼 것 같이 생겼는데.’사실 육경한은 소원이 서현재를 좋아한다고 추측할 뿐, 아직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발견하지 못했다.그들의 유일한 만남은 아침 식사 뿐이었다.육경한은 문에 기대어 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가지고 놀았다. 그러더니 웃으며 서현재에게 물었다.“선생님은 소원이랑 아는 사이 아니세요? 왜 모르는 척하고 계시는 거죠?”서현재는 머리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한 달에 소원 씨가 네 번이나 입원했는데 당연히 얼굴은 알죠. 처음에는 소원 씨한테 신고할 필요가 있냐고 물었어요, 나중에는 안 그랬지만요.”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잠깐 멍해 있었다. 한 달에 네 번,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라는 것이다.육경한은 이 일들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대부분 육경한은 집에 들
습관적으로 아픔을 참는 그녀의 모습에 육경한의 마음이 약해졌다.하지만 그녀가 다시 자신을 속이려 했다는 생각에 육경한의 눈빛은 순간 다시 어두워졌다.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온기가 없어지더니 그가 갑자기 소원의 턱을 움켜쥐었다.“소원, 언제는 널 갖고 놀라더니 인제 와서 못 견디겠는 거야?”그 말을 들은 소원은 구역질이 났다.이 미치광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소원은 눈을 감더니 모처럼 약한 척했다.“지금은 정말 안 돼, 너무 아파...”하지만 육경한은 냉소를 지으며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럼 짖어 봐. 네가 나를 만족시킨다면 오늘은 그냥 놔줄게.”문득 고개를 치켜든 소원은 그 하얀 벽을 보더니 육경한의 뜻을 알아차렸다.단지 서현재의 앞에서 그녀더러 짖게 하고 모욕을 주며 그들의 관계를 떠보게 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예전의 소원이라면 그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렇게 굴욕적인 술 접대를 경험한 후, 그녀는 체면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없어도 될 존재라고 생각했다.위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은 소원에게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데 굳이 체면을 지키며 자신의 몸을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는지 일깨워주었다.소원은 혀끝으로 남자의 배꼽 아래를 능숙하게 핥았다. 입술을 약간 벌리니 부드러운 신음 소리가 입술과 이빨 사이로 흘러나왔다.“으음...음...”마침내 그녀는 60초 동안 소리를 내며 육경한이 스톱을 외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소리 지르지 마.”육경한은 싸늘해진 눈빛으로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몸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움직이면서 말이다.그는 순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소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육경한은 그녀를 눌러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이런 통제 불능의 느낌은 육경한을 더욱 짜증 나게 했다.소원은 입술을 깨물고 비웃었다.“벌써 안 되겠어?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경한 씨 비웃어.”육경한의 눈
서현재는 한 손으로만 소원의 발목을 잡고 있었지만 약을 바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그는 손에 일회용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파스에는 진통을 완화해주는 성분이 들어있었다.발가락을 움츠릴 수 있을 정도로 나아진 소원의 머릿속은 온통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뿐이었다.반면 서현재는 여전히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약을 발라준 뒤, 서현재는 장갑을 벗어 휴지통에 버리는 김에 육경한이 사 온 죽도 함께 버렸다.잠시 나갔다 온 그는 보온병을 들고 들어와 침대에 앉더니 소원을 향해 물었다.“누나, 제가 먹여줄까요, 아니면 직접 드실래요?”소원은 아직 약을 바르던 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두 번째 질문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내가 직접 먹을게.”“가만히 있어요. 제가 준비할 테니까요.”서현재는 작은 상을 내려놓고 능숙하게 죽을 작은 그릇에 옮겨 담고 젓가락을 챙겨주었다.그의 손은 매우 예뻤고 긴 손톱도 없었으며 뼈마디가 뚜렷한 것이 그야말로 섬섬옥수였다.살짝 주먹을 쥐었을 때 핏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걸 보아 힘도 아주 센 것이 분명했다.한참 그의 손을 본 소원의 얼굴은 또 뜨거워졌다.서현재가 소원에게 약을 발라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젓가락을 뜯어 건네주는 서현재의 모습을 본 소원은 비로소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특히 그 죽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옥수수 새우죽이였기에 소원은 별말을 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다 먹은 후, 서현재는 상을 깨끗이 치우고 소원의 침대를 다시 정리해 주었다.“누나, 이젠 주무세요, 제가 돌봐드릴게요.”소원은 오히려 서현재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다고 했다.“괜찮아, 현재야.”서현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소원은 얼굴을 돌린 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얼마 후, 소원이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너뿐만이 아닌데... 네가 나 병원에서 두 번이나 돌봐준 것만으로 해도 이미 충분해. 그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