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임세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발걸음을 멈춘 이준혁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뒤돌아봤다.“한 번뿐인 인생, 너의 선택이지, 내 알 바는 아니야. 수술까지는 내가 그동안의 정을 봐서 준비했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마.”임세희가 수술받든, 말든, 그가 결정을 바꿀 일은 없을 것이다.“뭐라고?”임세희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얗게 질렸다. 오직 그녀만 바라보며, 다정하게 굴던 완벽한 왕자님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임세희는 이준혁이 오늘따라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아아악!!!!”그녀가 아무리 소리 높여 운다 한들, 바뀌지 않을 현실이었다. 임세희는 실성한 사람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다 거짓이야. 다 거짓이라고! 오빠가, 준혁 오빠가 나한테 이럴 리 없어! 오빠가 날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데…. 다 윤혜인 탓이야! 윤혜인 배 속에 있는 그 애만 아니었어도!”악독한 표정을 지은 임세희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이때, 갑자기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세희는 설 힘도 없어 기어가 전화를 받았다.한참 대화가 오갔고, 임세희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계획을 변경해야겠어. 좀 더 독하게 가자.”전화를 끊은 임세희 얼굴에 소름 끼치는 미소가 맺혔다. ‘준혁 오빠는 반드시 내 것이야 해! 윤혜인, 넌 이제 끝장이야!’한편, 윤혜인은 병원에 갇힌 채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를 가던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니, 그녀는 무기력함에 일찍 침대에 누웠다. 윤혜인은 자기 전 꼭 에어컨을 끄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 유난히 더웠던 날씨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잠결에 따뜻한 것을 찾아 움직였다. 그런데 마침, 무언가 뜨끈한 것이 옆에 닿았다. 윤혜인은 점점 그 알 수 없는 것에 파고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하고 깊은 잠이 쏟아졌다.이준혁은 온밤 윤혜인 전용 난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녀의 잠버릇이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키스를 하기 위해 입술을 가져다 댄 순간, 갑자기 윤혜인이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끝까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의 입술에서 주룩 하고 피가 나왔다. 이준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곧 입꼬리를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눈 부신 햇살, 힘줄 돋은 팔뚝, 입술을 더 탐스럽게 만드는 빨간 핏자국, 어디 영화에서 본 듯한 뱀파이어 같은 피폐한 분위기까지, 윤혜인은 홀린 듯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러다 문득, 늦게나마 자신의 추태를 자각한 윤혜인은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내가 좀 잘 생겼지?”이준혁이 물었다.“아니요.”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윤혜인은 괜히 인정하기 싫었다.이준혁이 코끝으로 간질거리듯 그녀에게 비비며 말했다. “임세희, 삼 일 뒤면 떠나.”그가 말했다.“그러던가요.”윤혜인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녀는 이미 이준혁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혜인은 심세희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면, 이준혁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윤혜인을 달래기 위해 고생스럽게 임세희를 내쳤는데, 전혀 알아주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게 사실이면, 진짜 떠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윤혜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에게 이 말을 들은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었다. 그리고 매번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상처 입기를 반복했다.이준혁이 그녀를 달래듯 눈가에 입맞춤하려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윤혜인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에, 고래를 돌려 그를 피해버렸다.윤혜인을 강압적으로 다루기 싫었던 이준혁은 입맞춤을 포기한 채,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허리를 끌어안았다.“좀만 더 자자.”이준혁은 시간이 지나면 윤혜인도 오해를 풀 거라 확신했다. “싫어요. 다른 방에 가서 자요.”윤혜인은 칼같이 거절했지만, 이준혁은 포기할 줄 몰랐다. 그가 윤혜인
송소미의 비명은 머리에 씌워진 두건으로 모두 막혀 버렸다. 그녀는 양손이 결박된 채, 비로 축축이 젖은 쓰레기통 옆에 던져졌다. 허리띠로 살갗을 내리치는 소리, 여자의 숨 막히는 비명,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송소미는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짓밟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두 남자가 송소미를 향해 침을 내뱉으며 말했다.“생긴 건 멀쩡한데, 왜 이렇게 딱딱해? 에이, 맛대가리 없어!”이때 송소미의 귀에 그들의 나누는 통화 소리가 들렸다. “주 비서, 여기 일은 잘 마무리됐어. 이제 여자구실 다시는 못할 거야.”통화가 마무리된 뒤, 두 남자가 떠나며 대화를 나눴다.“즐기면서 돈 받다니, 이런 좋은 날도 있네! 하하하….”“자기 여자를 달래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요즘 보기 드문 남자야….”송소미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온몸이 피와 멍으로 범벅 된 것은 물론, 옷도 넝마가 된 채 제대로 걸칠 수조차 없었다. 그냥 지나가다 나쁜 마음을 먹고 저질렀 다기엔, 너무 잔인한 수법이었다. 누가 봐도 일부러 송소미를 노리고 벌인 짓이었다. 이때, 호화스러운 차 하나가 골목을 지나치다가 갑자기 후진했다. 차에서 한때 아름다웠던 송소미의 시절처럼, 우아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송소미를 지나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자켓을 벗어주며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그리고는 매우 놀란 듯,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송소미에게 물었다.“소미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송소미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세희 언니….”그런 다음 곧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러자 임세희는 그 즉시 경멸 어린 눈빛과 함께 그녀를 밀쳐냈다. 힘 좀 써 달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 지경이 될 정도로 잔인하게 다룰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야만 송소미가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우려 들 테니까.얼마 후, 송소미가 병원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트럭에 치
주훈은 이준혁의 비서였다. 비서가 대표의 지시 없이 함부로 움직일 리 없었다. ‘자기 여자를 달래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두 남자가 떠나면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송소미는 이 모든 것이 윤혜인으로 비롯됐음을 깨달았다. ‘역시 그년이 문제였어! 날 이렇게 만든 거야!’송소미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던 임세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가 의도했던 대로, 송소미는 이 사건의 원천으로 윤혜인을 지목한 것 같았다. 이제 송소미의 분노를 더 부추이기만 하면 됐다. 임세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일단 다 나을 때까진 어디 나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겠지?”“왜요?”“윤혜인도 이 병원에 있으니까, 괜히 마주칠까 봐 그러지. 그 여자가 또 준혁 오빠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너 감당할 수 있겠어?”“뭐라고요? 그년도 이 병원에 있다고요?”송소미가 입술을 꽉 깨문 채 사람 하나 죽일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임세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나도 앞으로 널 도와주지 못할 것 같아. 윤혜인이 날 싫어해서, 준혁 오빠가 날 외국으로 보내려고 해. 너도 그 여자 조심하면서, 몸조리 잘해.”그 말을 들은 송소미는 놀란 동시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단순히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천하의 임세희도 외국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됐는데, 송소미는 심지어 윤혜인한테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다 이준혁이 또 그녀를 노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제까짓게 뭔데, 이런 대우를 받아!’“윤혜인, 죽여버릴 거야!”“소미야, 왜 이래?”임세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연기하며 그녀를 붙잡았다.“제발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 준혁 오빠가 얼마나 그 여자를 아끼는지 알아?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면, 너 끝장날 수도 있어!”이 말을 들은 송소미는 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윤혜인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할 이유도 없었다. 이제 아래마저 찢어져, 영원히 하자 있는 여자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재벌 며느리로
그 뒤로 이틀이 지났다. VIP 병실은 거의 호텔 수준이었기 때문에, 없는 것이 없었다.이틀 내내 이준혁은 윤혜인 옆을 떠나지 않고, 병실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윤혜인은 이런 이준혁이 신경이 쓰였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될까 차마 말을 걸진 못했다. 점심, 윤혜인은 오늘 입맛이 없어 얼마 식사하지 못했다.밖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이런 날씨면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지곤 했다. 윤혜인은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곧바로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을 훑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의 눈에 국제학교를 다니던 소소한 일상이 그립다는 글귀가 들어왔다. 문득, 윤혜인은 과거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는 매일 아침과 점심을 학교 앞 분식집에서 해결하곤 했다. 떡볶이 한 컵에, 김밥 한 줄, 이게 그녀의 일상이었다. 분식집 아줌마는 또 얼마나 친절했던가? 적게 먹는 그녀가 안쓰럽다며, 항상 몰래 삶은 계란을 챙겨주곤 했다. 그 분식집 덕분에 굶지 않고 이 정도 자랄 수 있었다. 임신한 탓인가, 그녀는 자꾸만 익숙한 입맛이 떠올랐다. 윤혜인은 그 시절 먹던 떡볶이와 김밥이 너무나 그리웠다. 하지만 주인장 아줌마가 은퇴한 탓에, 이제 다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이었다. 한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윤혜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준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그는 소매를 걷어붙인 채, 인상을 쓰며 열심히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한참 일하던 이준혁이 핸드폰을 집어 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윤혜인은 다시 고개를 원래의 위치로 돌렸다.이때, 이준혁이 다가와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버렸다.“임산부가, 너무 길게 핸드폰 보면 안 좋아.”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했다. 그런 다음, 외투를 챙기더니, 몸을 일으켰다. “자고 있어. 잠깐 나갔다가 올게.”이준혁이 병실 밖으로 나간 뒤, 윤혜인은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서서히 잠에 빠져 들었다. 번쩍, 우르릉 쾅!
윤혜인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얼굴은 물론 귓불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녀가 돌처럼 굳은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본 이준혁이 걱정스레 다가왔다.“방금 뭐라고 했어?”윤혜인은 시선을 어디에다가 둬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눈은 온통 살색으로 가득했다. 결국 한참 망설이던 끝에, 윤혜인은 겨우 말을 꺼냈다.“화장실 가서 갈아입으면 안 돼요?”“알겠어.”고분고분, 이준혁은 그녀의 말에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그는 어느새 가운을 입고 있었다. 식사를 끝낸 윤혜인이 이준혁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좀 전과 달리 그는 가운을 걸치고 있었지만, 가슴은 풀어헤친 상태였다.윤혜인은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결국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해 화장실로 들어갔다.씻고 나오니, 이준혁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지난밤들과 별다를 게 없는 것 같았지만, 윤혜인은 오늘 자꾸만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이준혁이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네.”윤혜인은 침대 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이준혁이 순식간에 그녀를 뒤에서 끌어당기며, 품에 가둔 것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온 방을 가득 채웠다. 윤혜인은 긴장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준혁 씨….”이준혁이 솔직한 충동을 그녀에게 전했다.“하기 싫으면, 안 할게.”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러다 문득, 아까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분식 먹고 싶어 한다는 걸?”이준혁이 덤덤히 답했다.“누가 알려 줬어.”사실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최근에 윤혜인이 식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SNS에 그녀가 분식집 글에 좋아요를 표시한 것을 보고, 빗속에서 어렵게 사람을 찾아내 얻은 것이었다. 찾아서 다행이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필이면 분식집
임세희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물론 살갗이 드러난 모든 곳에 멍과 피로 범벅 되어 있었다. 두건을 쓴 세 남자 중 한 명이, 임세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임세희가 눈물 젖은 얼굴로 이준혁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준혁 오빠, 나 좀 구해줘… 제발 좀 구해줘… 내가 오빠 목숨을 구해준 것을 봐서라도, 구해줘….”과거의 은혜를 들먹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역시나 임세희의 예상대로 이준혁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짝, 한 남자가 임세희의 뺨을 무자비하게 내리치며 위협했다.“쓸데없는 소리 왜 이렇게 많아.”한두 번 맞은 것이 아닌지, 임세희의 입에서 고인 피가 후드득하고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죽고 싶어 환장했어?”재밌는 농담을 들은 듯, 남자들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들이 웃을 때마다 변조된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그쪽이 이 여자 남편이라면서? 돈도 꽤 많다던데, 맞아?”갑자기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옆에서 있던 윤혜인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이준혁이 이 호칭에 긍정하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긴장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한 남자가 임세희를 향해 강한 발차기를 날렸다.임세희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산 사람보단, 죽은 사람과 더 가까운 회색빛이 돌고 있었다. “감히 우릴 속여? 넌 내 손에 죽었어!”남자가 다시 발길질하기 위해 다리를 올린 순간, 이준혁이 힘들게 답을 내놓았다.“그래, 남편 맞아.”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별거 아닌 말 한마디였겠지만, 윤혜인에겐 너무나도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서서히 이준혁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온통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던 이준혁은 눈치채지 못했다.그의 답을 들은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렇다면 현금으로 3억 준비해서, 한동교 밑으로 와. 안 그러면….”남자
외곽에 있는 한 창고에서, 수상한 남자가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정말 이거 놔요?”임세희가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해.”얇은 주삿바늘이 오른팔 혈관을 타고 서서히 들어갔다. 이 주사에는 특수한 물질이 있어, 아프지 않은 사람을 아파 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준혁을 더 철저히 속이기 위해선 이것만으로 부족했다.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던 임세희가 또 다른 남자에게 손짓했다.“이리 와봐. 따귀 몇 대 더 때려줘.”따귀를 때려 달라고 요청하는 미녀라니, 정말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이었다. 남자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짝, 짝, 짝…. 창고 안에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세희는 다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부어 있었고, 입술도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임세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이준혁도 충분히 속아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좀 전에 뺨 맞을 때의 고통이 떠오르자,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쪼개지 마, 누가 너 좋아하라고 이 짓 하는 줄 알아?”임세희가 느닷없이 남자의 뺨을 후려치며 말했다.때려달라고 해서 때려준 건데, 뜬금없이 화풀이 당하자 남자는 억울했다. 하지만 상대는 목적을 위해 서슴없이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여자였다. 남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사람과는 원래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니까. 이때, 임세희가 옆에 놓여 있던 낡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위조 여권 준비해 놓았으니까, 돈 받는 대로 바로 여길 떠. 알겠어?”남자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입장에서도 범죄 현장에 오래 있어봤자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송소미도 무사히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시간 기다리며 준비해 온 계획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임세희의 얼굴에 욕망과 흥분으로 뒤섞인 미소가 맺혔다.‘준혁 오빠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