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임세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발걸음을 멈춘 이준혁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뒤돌아봤다.“한 번뿐인 인생, 너의 선택이지, 내 알 바는 아니야. 수술까지는 내가 그동안의 정을 봐서 준비했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마.”임세희가 수술받든, 말든, 그가 결정을 바꿀 일은 없을 것이다.“뭐라고?”임세희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얗게 질렸다. 오직 그녀만 바라보며, 다정하게 굴던 완벽한 왕자님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임세희는 이준혁이 오늘따라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아아악!!!!”그녀가 아무리 소리 높여 운다 한들, 바뀌지 않을 현실이었다. 임세희는 실성한 사람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다 거짓이야. 다 거짓이라고! 오빠가, 준혁 오빠가 나한테 이럴 리 없어! 오빠가 날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데…. 다 윤혜인 탓이야! 윤혜인 배 속에 있는 그 애만 아니었어도!”악독한 표정을 지은 임세희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이때, 갑자기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세희는 설 힘도 없어 기어가 전화를 받았다.한참 대화가 오갔고, 임세희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계획을 변경해야겠어. 좀 더 독하게 가자.”전화를 끊은 임세희 얼굴에 소름 끼치는 미소가 맺혔다. ‘준혁 오빠는 반드시 내 것이야 해! 윤혜인, 넌 이제 끝장이야!’한편, 윤혜인은 병원에 갇힌 채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를 가던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니, 그녀는 무기력함에 일찍 침대에 누웠다. 윤혜인은 자기 전 꼭 에어컨을 끄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 유난히 더웠던 날씨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잠결에 따뜻한 것을 찾아 움직였다. 그런데 마침, 무언가 뜨끈한 것이 옆에 닿았다. 윤혜인은 점점 그 알 수 없는 것에 파고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하고 깊은 잠이 쏟아졌다.이준혁은 온밤 윤혜인 전용 난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녀의 잠버릇이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키스를 하기 위해 입술을 가져다 댄 순간, 갑자기 윤혜인이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끝까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의 입술에서 주룩 하고 피가 나왔다. 이준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곧 입꼬리를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눈 부신 햇살, 힘줄 돋은 팔뚝, 입술을 더 탐스럽게 만드는 빨간 핏자국, 어디 영화에서 본 듯한 뱀파이어 같은 피폐한 분위기까지, 윤혜인은 홀린 듯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러다 문득, 늦게나마 자신의 추태를 자각한 윤혜인은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내가 좀 잘 생겼지?”이준혁이 물었다.“아니요.”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윤혜인은 괜히 인정하기 싫었다.이준혁이 코끝으로 간질거리듯 그녀에게 비비며 말했다. “임세희, 삼 일 뒤면 떠나.”그가 말했다.“그러던가요.”윤혜인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녀는 이미 이준혁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혜인은 심세희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면, 이준혁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윤혜인을 달래기 위해 고생스럽게 임세희를 내쳤는데, 전혀 알아주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게 사실이면, 진짜 떠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윤혜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에게 이 말을 들은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었다. 그리고 매번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상처 입기를 반복했다.이준혁이 그녀를 달래듯 눈가에 입맞춤하려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윤혜인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에, 고래를 돌려 그를 피해버렸다.윤혜인을 강압적으로 다루기 싫었던 이준혁은 입맞춤을 포기한 채,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허리를 끌어안았다.“좀만 더 자자.”이준혁은 시간이 지나면 윤혜인도 오해를 풀 거라 확신했다. “싫어요. 다른 방에 가서 자요.”윤혜인은 칼같이 거절했지만, 이준혁은 포기할 줄 몰랐다. 그가 윤혜인
송소미의 비명은 머리에 씌워진 두건으로 모두 막혀 버렸다. 그녀는 양손이 결박된 채, 비로 축축이 젖은 쓰레기통 옆에 던져졌다. 허리띠로 살갗을 내리치는 소리, 여자의 숨 막히는 비명,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송소미는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짓밟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두 남자가 송소미를 향해 침을 내뱉으며 말했다.“생긴 건 멀쩡한데, 왜 이렇게 딱딱해? 에이, 맛대가리 없어!”이때 송소미의 귀에 그들의 나누는 통화 소리가 들렸다. “주 비서, 여기 일은 잘 마무리됐어. 이제 여자구실 다시는 못할 거야.”통화가 마무리된 뒤, 두 남자가 떠나며 대화를 나눴다.“즐기면서 돈 받다니, 이런 좋은 날도 있네! 하하하….”“자기 여자를 달래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요즘 보기 드문 남자야….”송소미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온몸이 피와 멍으로 범벅 된 것은 물론, 옷도 넝마가 된 채 제대로 걸칠 수조차 없었다. 그냥 지나가다 나쁜 마음을 먹고 저질렀 다기엔, 너무 잔인한 수법이었다. 누가 봐도 일부러 송소미를 노리고 벌인 짓이었다. 이때, 호화스러운 차 하나가 골목을 지나치다가 갑자기 후진했다. 차에서 한때 아름다웠던 송소미의 시절처럼, 우아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송소미를 지나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자켓을 벗어주며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그리고는 매우 놀란 듯,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송소미에게 물었다.“소미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송소미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세희 언니….”그런 다음 곧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러자 임세희는 그 즉시 경멸 어린 눈빛과 함께 그녀를 밀쳐냈다. 힘 좀 써 달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 지경이 될 정도로 잔인하게 다룰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야만 송소미가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우려 들 테니까.얼마 후, 송소미가 병원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트럭에 치
주훈은 이준혁의 비서였다. 비서가 대표의 지시 없이 함부로 움직일 리 없었다. ‘자기 여자를 달래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두 남자가 떠나면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송소미는 이 모든 것이 윤혜인으로 비롯됐음을 깨달았다. ‘역시 그년이 문제였어! 날 이렇게 만든 거야!’송소미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던 임세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가 의도했던 대로, 송소미는 이 사건의 원천으로 윤혜인을 지목한 것 같았다. 이제 송소미의 분노를 더 부추이기만 하면 됐다. 임세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일단 다 나을 때까진 어디 나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겠지?”“왜요?”“윤혜인도 이 병원에 있으니까, 괜히 마주칠까 봐 그러지. 그 여자가 또 준혁 오빠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너 감당할 수 있겠어?”“뭐라고요? 그년도 이 병원에 있다고요?”송소미가 입술을 꽉 깨문 채 사람 하나 죽일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임세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나도 앞으로 널 도와주지 못할 것 같아. 윤혜인이 날 싫어해서, 준혁 오빠가 날 외국으로 보내려고 해. 너도 그 여자 조심하면서, 몸조리 잘해.”그 말을 들은 송소미는 놀란 동시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단순히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천하의 임세희도 외국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됐는데, 송소미는 심지어 윤혜인한테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다 이준혁이 또 그녀를 노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제까짓게 뭔데, 이런 대우를 받아!’“윤혜인, 죽여버릴 거야!”“소미야, 왜 이래?”임세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연기하며 그녀를 붙잡았다.“제발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 준혁 오빠가 얼마나 그 여자를 아끼는지 알아?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면, 너 끝장날 수도 있어!”이 말을 들은 송소미는 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윤혜인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할 이유도 없었다. 이제 아래마저 찢어져, 영원히 하자 있는 여자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재벌 며느리로
그 뒤로 이틀이 지났다. VIP 병실은 거의 호텔 수준이었기 때문에, 없는 것이 없었다.이틀 내내 이준혁은 윤혜인 옆을 떠나지 않고, 병실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윤혜인은 이런 이준혁이 신경이 쓰였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될까 차마 말을 걸진 못했다. 점심, 윤혜인은 오늘 입맛이 없어 얼마 식사하지 못했다.밖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이런 날씨면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지곤 했다. 윤혜인은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곧바로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을 훑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의 눈에 국제학교를 다니던 소소한 일상이 그립다는 글귀가 들어왔다. 문득, 윤혜인은 과거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는 매일 아침과 점심을 학교 앞 분식집에서 해결하곤 했다. 떡볶이 한 컵에, 김밥 한 줄, 이게 그녀의 일상이었다. 분식집 아줌마는 또 얼마나 친절했던가? 적게 먹는 그녀가 안쓰럽다며, 항상 몰래 삶은 계란을 챙겨주곤 했다. 그 분식집 덕분에 굶지 않고 이 정도 자랄 수 있었다. 임신한 탓인가, 그녀는 자꾸만 익숙한 입맛이 떠올랐다. 윤혜인은 그 시절 먹던 떡볶이와 김밥이 너무나 그리웠다. 하지만 주인장 아줌마가 은퇴한 탓에, 이제 다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이었다. 한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윤혜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준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그는 소매를 걷어붙인 채, 인상을 쓰며 열심히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한참 일하던 이준혁이 핸드폰을 집어 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윤혜인은 다시 고개를 원래의 위치로 돌렸다.이때, 이준혁이 다가와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버렸다.“임산부가, 너무 길게 핸드폰 보면 안 좋아.”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했다. 그런 다음, 외투를 챙기더니, 몸을 일으켰다. “자고 있어. 잠깐 나갔다가 올게.”이준혁이 병실 밖으로 나간 뒤, 윤혜인은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서서히 잠에 빠져 들었다. 번쩍, 우르릉 쾅!
윤혜인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얼굴은 물론 귓불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녀가 돌처럼 굳은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본 이준혁이 걱정스레 다가왔다.“방금 뭐라고 했어?”윤혜인은 시선을 어디에다가 둬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눈은 온통 살색으로 가득했다. 결국 한참 망설이던 끝에, 윤혜인은 겨우 말을 꺼냈다.“화장실 가서 갈아입으면 안 돼요?”“알겠어.”고분고분, 이준혁은 그녀의 말에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그는 어느새 가운을 입고 있었다. 식사를 끝낸 윤혜인이 이준혁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좀 전과 달리 그는 가운을 걸치고 있었지만, 가슴은 풀어헤친 상태였다.윤혜인은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결국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해 화장실로 들어갔다.씻고 나오니, 이준혁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지난밤들과 별다를 게 없는 것 같았지만, 윤혜인은 오늘 자꾸만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이준혁이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네.”윤혜인은 침대 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이준혁이 순식간에 그녀를 뒤에서 끌어당기며, 품에 가둔 것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온 방을 가득 채웠다. 윤혜인은 긴장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준혁 씨….”이준혁이 솔직한 충동을 그녀에게 전했다.“하기 싫으면, 안 할게.”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러다 문득, 아까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분식 먹고 싶어 한다는 걸?”이준혁이 덤덤히 답했다.“누가 알려 줬어.”사실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최근에 윤혜인이 식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SNS에 그녀가 분식집 글에 좋아요를 표시한 것을 보고, 빗속에서 어렵게 사람을 찾아내 얻은 것이었다. 찾아서 다행이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필이면 분식집
임세희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물론 살갗이 드러난 모든 곳에 멍과 피로 범벅 되어 있었다. 두건을 쓴 세 남자 중 한 명이, 임세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임세희가 눈물 젖은 얼굴로 이준혁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준혁 오빠, 나 좀 구해줘… 제발 좀 구해줘… 내가 오빠 목숨을 구해준 것을 봐서라도, 구해줘….”과거의 은혜를 들먹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역시나 임세희의 예상대로 이준혁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짝, 한 남자가 임세희의 뺨을 무자비하게 내리치며 위협했다.“쓸데없는 소리 왜 이렇게 많아.”한두 번 맞은 것이 아닌지, 임세희의 입에서 고인 피가 후드득하고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죽고 싶어 환장했어?”재밌는 농담을 들은 듯, 남자들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들이 웃을 때마다 변조된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그쪽이 이 여자 남편이라면서? 돈도 꽤 많다던데, 맞아?”갑자기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옆에서 있던 윤혜인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이준혁이 이 호칭에 긍정하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긴장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한 남자가 임세희를 향해 강한 발차기를 날렸다.임세희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산 사람보단, 죽은 사람과 더 가까운 회색빛이 돌고 있었다. “감히 우릴 속여? 넌 내 손에 죽었어!”남자가 다시 발길질하기 위해 다리를 올린 순간, 이준혁이 힘들게 답을 내놓았다.“그래, 남편 맞아.”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별거 아닌 말 한마디였겠지만, 윤혜인에겐 너무나도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서서히 이준혁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온통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던 이준혁은 눈치채지 못했다.그의 답을 들은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렇다면 현금으로 3억 준비해서, 한동교 밑으로 와. 안 그러면….”남자
외곽에 있는 한 창고에서, 수상한 남자가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정말 이거 놔요?”임세희가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해.”얇은 주삿바늘이 오른팔 혈관을 타고 서서히 들어갔다. 이 주사에는 특수한 물질이 있어, 아프지 않은 사람을 아파 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준혁을 더 철저히 속이기 위해선 이것만으로 부족했다.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던 임세희가 또 다른 남자에게 손짓했다.“이리 와봐. 따귀 몇 대 더 때려줘.”따귀를 때려 달라고 요청하는 미녀라니, 정말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이었다. 남자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짝, 짝, 짝…. 창고 안에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세희는 다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부어 있었고, 입술도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임세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이준혁도 충분히 속아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좀 전에 뺨 맞을 때의 고통이 떠오르자,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쪼개지 마, 누가 너 좋아하라고 이 짓 하는 줄 알아?”임세희가 느닷없이 남자의 뺨을 후려치며 말했다.때려달라고 해서 때려준 건데, 뜬금없이 화풀이 당하자 남자는 억울했다. 하지만 상대는 목적을 위해 서슴없이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여자였다. 남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사람과는 원래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니까. 이때, 임세희가 옆에 놓여 있던 낡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위조 여권 준비해 놓았으니까, 돈 받는 대로 바로 여길 떠. 알겠어?”남자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입장에서도 범죄 현장에 오래 있어봤자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송소미도 무사히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시간 기다리며 준비해 온 계획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임세희의 얼굴에 욕망과 흥분으로 뒤섞인 미소가 맺혔다.‘준혁 오빠
소원은 서현재와 진아연을 만난 사실을 숨겼다.서현재는 이제 육연주의 남편이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모르는데 존재가 신비로운 여자까지 나타났으니 서현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육경한은 무조건 육연주의 편을 들 게 뻔했다. 그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이 적기도 했고 육연주네 가족과 인연이 꽤 깊었다.게다가 소원이 관찰한 데 의하면 육경한은 매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육연주만큼은 아주 잘 챙겼다 아마도 육연주와 육연주의 어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의 말에 잠깐 침묵했다. 소원은 이런 침묵이 불편하기도 했고 육경한에 의해 침대와 벽 사이에 갇혀 있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 맡아야 했다.“술 마셨어?”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한테 해장국 좀 끓여달라고 할게.”소원이 이렇게 말한 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비키자 소원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에 소종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소종이 모은 정보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소원이 선미를 진아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그도 진아연이 이 정도로 얼굴을 갈아엎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가 소원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경계해야 했지만 그때는 육경한도 머리가 복잡했고 죽은 여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바람에 사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그리고 그 진아연이 용케 살아남아 소원을 해치려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진아연이 소원을 해친다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육경한이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사지로 내몰았으니 사랑이 원망으로 변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소종이 병원에 잠복해 관찰한 데 의하면 그렇게 단순한 아니라 진아연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 배후가 도대체 누구길래 진아연을 이용해 육경한을 해치려는 건지, 게다가 그 배후는 진아연을 소원의 모습으로 성형하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진아연은 도망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고 모습
그렇게 소원은 병원을 나섰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그녀는 곧바로 전미영과 아주머니를 보러 갔다.요즘 아주머니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눈을 깜빡이며 간단한 질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비록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 상황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이는 모두 육경한 덕분이었다.그가 국내외의 유명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아주머니를 위한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냈고 그 덕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었고 평생을 전문가로 살아온 이들에게 돈은 큰 유혹이 되지 않았다.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인간관계와 신뢰였다.육경한이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소원은 알고 있었다.소종 역시 은근히 암시를 주며 육경한의 헌신을 그녀에게 알렸다.게다가 소원의 어머니 역시, 한때는 의사들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았던 상태에서 지금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비록 소원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원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과거 소원이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가족도 의지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꼈다.오직 배 속의 아이만이 그녀를 붙잡았다.그때, 혹시라도 자신과 아이가 함께 죽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소원은 그 상황이 어쩌면 해방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전미영, 유진이, 아주머니, 서현재...이제 그녀는 결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이들은 윤혜인과는 다른 존재였다.윤혜인은 그녀가 없더라도 이준혁이 그녀를 충분히 잘 돌볼 것이었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소원이 없으면 정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소원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게 됐네.’그녀의 삶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그 무거움이야말로 일종의 행복이었다.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그녀가 별장
소원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안상철에게 연락한 거 맞아?”진아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소원이 이미 안상철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만약 소원이 안상철을 찾아낸다면 자신 역시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뻔했다.왜냐하면 그녀와 안상철은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육경한에게 접근하라고 명령했던 그 신비로운 인물이었다.진아연은 그 인물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육경한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이로 인해 받았던 처벌은 너무나도 끔찍했다.그날의 기억은 생생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그녀의 팔에서 피를 뽑아내며 했던 말 말이다.“네가 살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그는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에서 피를 한 방울씩 뽑아냈다.그렇게 피와 물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만약 그날 구조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진아연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소원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진아연 같은 사람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진아연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고 그녀는 반드시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진아연은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쉰 듯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알고 싶으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소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뭔데?”진아연은 떨리는 손으로 몸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며 말했다.“이걸 육경한의 음식이나 마실 것에 넣어.”소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죽이려는 거야?”“아니야. 천천히 약화시킬 거야.”진아연은 입술을 꽉 물고 대답했고 소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그 사람 사랑하지 않았어?”“...사랑? 그런 건 이미 끝났어.”진아연의 눈빛에는 분노와 미움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육경한이 소원과 결혼했다는
여자는 의사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서현재까지 데리고 갔다.소원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 따라가려 했지만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어쩔 수 없이 포기한 소원은 이전에 도움을 요청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번에 부탁했던 일, 소식 있어?]친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마침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 여자는 무녀 가문 사람이야.”‘무녀 가문?’소원은 이 이름이 생소했다.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친구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녀 가문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진 원시 부족이야. 그 부족의 무녀들은 주술과 독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수단이 잔인해. 게다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그 말에 소원의 마음속엔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현재 곁에 왜 무녀 같은 사람이 있는 거지? 서씨 가문에서 현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현재를 노리고 있는 건가?’소원은 최근 유진이와 아주머니 일로 정신이 없어서 서현재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더군다나 서씨 가문의 감시가 너무 엄격해서 서현재를 만날 기회조차 잡기 힘들었다.뭔가 심상치 않았다.소원은 방금 녹음한 음성을 친구에게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이 대화 내용 번역해 줄 수 있어?]친구가 답장을 보냈다.[배경 소음이 너무 심해서 지금은 잘 안 들려. 무녀 가문 언어라 내가 알아듣지 못해. 우선 음질을 정리한 뒤에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확인해 볼게.][그래, 부탁할게.][우린 서로 그런 말 필요 없어.]이 친구는 소원이 해외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소원이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친구는 소원에게 깊이 감사하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그때 한 간호사가 다가와 소원을 불렀다.“저기, 병실에 있는 분 아는 분 맞죠? 방금 깨어나셨어요.”소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넣고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갔
그가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려는 이유는 단순히 공부를 시키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육연주가 집에 머무르는 상황에서는 이런 일들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어쨌든 육연주는 서씨 가문의 며느리였다.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진태가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변형된 보호책이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속내를 이지애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이지애는 말이 많고 입이 가벼운 편이라 자칫 잘못하면 이 사실이 새어나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육경한은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방금 하려던 일을 떠올리고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핸드폰 화면에는 ‘아내’라는 이름이 떴다. 얼마 전 혼인신고를 마치자마자 그는 소원의 이름을 이렇게 저장해 두었다.그러나 전화는 한참 동안 울리기만 했고 끝내 받는 사람이 없었다.육경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전원이 꺼져 있었다.얼굴이 굳어진 그는 내선 전화를 눌러 소종에게 지시했다.“병원에 가서 확인해. 사모님 아직 거기 계신지.”소종은 곧바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한편.이지애는 육경한이 전화를 끊자 기분이 매우 나빴다.그녀는 육경한의 새 아내가 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자신과 딸을 외면할 정도로 말이다.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곧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명령했다.“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 알아내.”서울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기반을 닦아온 이지애는 돈만 있으면 사람들을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그녀의 눈에는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어디 한번 보자고. 그 여자한테 대체 어떤 능력이 있길래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대는 건지.’...병원.진아연은 여전히 응급실에서 치료 중이었다.소원은 문밖에서 서현재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괜찮아?”그녀가 물었을 때 서현재
“경한아, 연주 좀 도와줘... 부탁이야.”이지애의 입장에서는 소원이 고소를 철회하는 일쯤은 육경한에게 한마디면 충분한 일이었다.육경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건 반역이나 다름없지 않은가?이지애는 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배경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분명 어딘가 치밀한 술수를 써서 그 몰래 낳은 아이를 빌미 삼아 육경한을 유혹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지애는 그 여자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육경한은 이미 가족이 거의 없는 사람이니 지금 그녀들과 육경한의 관계는 어떻게 봐도 피보다 진한 관계였다.육경한이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때문에 그녀들에게 등을 돌릴 리 없다고 믿었다.그럴 리가 없었다.한참 후, 육경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누나, 연주가 전에 피아노에 관심 많다고 했잖아요. 제가 이미 국제적인 피아노 대가 이엘 선생님과 연결해 뒀습니다. 연주 나중에 외국에서 그분께 배우면 성격도 좀 가라앉을 겁니다.”이지애는 이 일은 이미 확실히 해결됐다고 여겼다.육경한이 이렇게 말했으니 연주를 돕겠다는 뜻 아니겠는가?그녀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말했다.“경한아, 내가 뭐랬어? 너는 정말 연주에게 최고야. 연주도 너 이 삼촌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존경한다고. 피아노 공부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우선 연주를 당장 풀어줘야지.”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 확신하며 이지애는 기분이 좋아졌다.하지만 육경한의 말은 예상치 못하게 이어졌다.“누나, 연주도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행동이 늘 이렇게 무모한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이번엔 좀 반성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말이에요.”“...”이지애는 육경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연주를 풀어줄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경한아,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방금 연주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어?”“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육
이지애는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뭐라고? 결혼을 했다고? 난 왜 몰랐지?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가 있어? 그럼 민아 씨는?”해외여행을 갓 마치고 돌아온 이지애는 육경한과 방민아의 파혼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여전히 방민아가 육경한의 운명적인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지금까지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 외에 다른 여자가 없었고 방민아는 자신과 딸 육연주를 기쁘게 해주는 데 능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잘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방민아가 육경한의 아내가 되는 건 그녀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지애는 방민아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우리 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육경한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결혼은 조촐하게 했어요. 그냥 혼인신고만 한 거라서 누구도 몰라요.”그는 더 이상 뭐든 요란하게 하고 싶어 하는 나이가 않았다. 무엇보다 설령 자신이 성대한 결혼식을 원한다고 해도 소원이 이를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두 차례나 자멸했던 소원은 서울에서 이미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결혼식을 대대적으로 치르면 그녀의 과거와 관련된 소문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게 분명했다.그건 마치 소원을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위치에 세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하여 육경한은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지애는 기가 막힌 듯 말했다.“경한아, 그게 어떻게 작은 일이니? 네 결혼이 작은 일이라니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야? 민아 씨가 아니라도 아무 여자나 데려다가 결혼하면 안 되지 않니?”“아무 여자가 아니에요.”육경한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그 사람은 내가 오래 고민하고 선택한 사람이에요.”속으로는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걸 사촌 누나 이지애에게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그는 대화를 본론으로 돌렸다.“연주 문제는 이미 확인했어요. 연주가 폭행에 가담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약물을 쓴 건 아니었으니 처벌은 그렇게 무겁지 않을 거예요. 아마 15일
이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소종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소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그래도 오랜 시간 육경한을 보좌하면서 익힌 대로 뭐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 마음에 걸린 말은 모두 털어놓았다.“대표님, 어쨌든 전 사모님이 서현재 도련님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둘이 약속해서 만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사모님께서 꽤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더군요.”소종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대표님, 사모님께 그렇게 잘해주는데 사모님은 그걸 조금도 몰라주는 것 같아요. 서 도련님하고는 아직도 뭔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 같고 정말...”“그냥 우연히 만난 거겠지. 별일 아니야.”육경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소종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소원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는 모습에 놀랐다. 심지어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니 말이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런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 특별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행동은 없었어요. 다만 제 생각엔 사모님이 대표님과 결혼했으면 서현재 도련님과는 거리를 두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특히 서현재는 다른 남자들과는 성격이 달랐다.그는 과거에 소원을 데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애매한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소원이 육경한과 결혼한 것도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한 결과였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소종은 이런 상황이 결국 다시 불씨가 될까 걱정했다.“게다가 대표님, 제가 보기엔 서현재 도련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소종은 말을 이어갔다.“사람을 보는 눈빛이 너무 차갑고 깊어요. 누구를 봐도 같은 표정이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엔 사모님과 무슨 갈등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굴더군요. 마치 나무 인형 같았습니다.”“서씨 가문에서 전에 서현재 도련님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하지만 기억을 잃어도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결국 미우 그룹의 복지와 대우는 업계에서 최상위급이었고 요즘같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이런 직장을 떠나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소종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을 정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방씨 가문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없었다.그는 육경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남자는 여전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지했고 그 모습은 단정하고 매력적이었다.“대표님, 방 대표님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태도로 봐선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밖에 퍼진 소문들은 전부 방씨 가문에서 흘린 겁니다.”소종이 말했다.“알고 있어.”육경한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소종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고는 참다못해 물었다.“이대로 소문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그럼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육경한은 눈을 살짝 들어 올렸고 소종은 답답한 듯 말했다.“하지만 그들이 퍼뜨린 말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큽니다. 직원들조차 집중을 못 하고 일에 소홀해지고 있어요.”“그게 더 좋지 않나.”육경한은 담담히 말했다.소종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육경한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깨끗하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냉정히 말했다.“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부 팀을 정리할 수 있잖아. 방씨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리하라는 거야.”소종은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그동안 두 가문이 협력하며 방씨 가문과 연결된 사람이 그룹 내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일부는 방씨 가문으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익을 공유하며 내부에서 세력을 구축했을 수도 있었다.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을 모두 걸러내겠다는 것이었다.“그럼 방씨 가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소종이 물었다.“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이미 기회를 줬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