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더 격렬한 반응에, 남자들이 멈칫했다.그 틈을 타, 윤혜인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해 나갔다. 옷차림새나, 분위기만 봐도 두 남자는 전문 납치범은 아닌 것 같았다. 송소미가 사람을 매수하는데 돈을 얼마 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윤혜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괜히 범죄 저질러서 인생 종치지 말고, 이쯤에서 멈춰. 그럼 신고도 안 하고, 저 여자의 두 배를 줄게. 그 편이 당신들한테도 더 좋지 않겠어?”그들이 받은 돈은 합쳐서 600만이 다였다. 하루치 급여로 치면 많은 돈이었지만, 범죄의 대가로 받은 돈 치고는 적은 편에 속했다. 그들은 윤혜인의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송소미는 이 황당한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만히 있다가는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당장 윤혜인의 입을 막아버려야만 했다.“이 여우 같은 년!”윤혜인이 묶여 있던 의자를 세차게 걷어찬 송소미가 외쳤다. 꽈당하는 소리가 창고에 울려 퍼지며 강력한 고통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고통의 수치로 봤을 때, 이건 최소 골절이었다. 윤혜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자가 아닌 배를 걷어찼다면, 아이가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어깨가 부러지는 것쯤은 아이를 잃는 거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가 아주 미쳤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놀려! 넌 절대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 내가 그렇게 안 둘 거니까!”송소미가 차갑게 웃으며 윤혜인을 위협했다. 오늘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윤혜인에게 자신이 느꼈던 그 비참함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때,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마지막 기회 줄게. 이준혁한테 전화해서 돈 가지고 오라고 해. 그러면 널 풀어줄게.”윤혜인은 그제야 고통이 조금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송소미가 마음을 바꿀까, 다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거라면, 문제없어.”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심장이 불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윤혜인은 참고 또 참았다. 이준혁의 태도가 어떠하던, 일단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 아이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했다. 윤혜인이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또박또박 자신의 상황을 전달했다.“장난 아니고 실제 상황이에요! 니 납치됐다고요!”윤혜인의 간절함이 조금은 통했는지, 이준혁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거의 끝나가니까,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자. 얼른 돌아갈게.”“이준혁 씨!”하지만 그는 여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임세희의 말은 다 믿어줬잖아요! 왜 저만 거짓말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매번 이래요!”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준혁은 여전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윤혜인, 정도껏 하라고 했지! 나 지금 네 투정 받아줄 상황 아니야!”눈앞이 컴컴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굳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든 노력이 투정이라는 단어 하나에 허사가 되었다. 이준혁은 희망이 아닌, 지독한 절망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나와 우리 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이래도 임세희가 더 중요해요?”이번에도 이준혁은 확실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도리어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스럽게 답했다.“돌아가서 얘기하자. 바쁘니까, 이만 끊어.”그 말을 듣는 순간, 배에서 또 찌르르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아이가 그녀에게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혜인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이준혁에게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안 돼요! 끊지 마요, 준혁 씨! 이대로 끊으면 나랑 아이는….”전화 연결이 끊겼다. 윤혜인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자그마치 십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다. 이제 둘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는데, 이준혁의 선택은 여전히 임세희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일지도 몰랐다. 송소미가 바라던 모습이 바로 이거였다. 윤혜인의 절망한 표정을 보며, 그녀는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송소미가 두 남자를 바라보며 경고를 날렸다."저 여자 남편이 하는 말, 들었지? 이 여자가 진짜로 당신들한테 돈 줄 수 있을 것 같아? 지금부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내 말이나 잘 들어!"그제야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남자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절대로 봐주지 마. 나랑 약속했던 대로 하면 돼."이 말과 함께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습을 본 송소미는 창고 밖으로 나갔다. 저번 사건 이후로 비슷한 광경만 봐도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차라리 자리를 비켜주기로 한 것이다. 뒤에서 허리띠를 휘두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송소미는 창고 문을 닫았다.윤혜인의 팔에 빨간 선혈이 그어졌다. 그와 동시에 알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공포에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윤혜인은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이때, 뒤늦게 허리띠를 푼 남자가 말했다. "빨리 시작하자. 못 기다리겠어."얼굴이 땀과 먼지로 뒤덮인 상황이었지만, 윤혜인의 미모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남자들이 눈을 빛내며 입술을 축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욕구를 풀 때였다. 상상하던 가장 최악의 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윤혜인은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아이만은 지켜야 했다. 이때, 윤혜인의 머릿속에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남자들의 방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기가 시작됐다. "오빠들, 이렇게 절 묶은 채로 하는 거 불편하지 않겠어요? 이거 풀어주면 제가 제대로 상대해 줄게요."두 남자의 눈동자가 서로 맞닿았다. 실제로 의자에 묶인 상태에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윤혜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먼저 허리띠를 풀었던 키 큰 남자가 윤혜인에게 다가왔다."죽고 싶지 않으면 허튼짓할 생각 하지 마!"그가 경고하며 윤혜인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기 시
남자가 윤혜인의 머리를 바닥에 찍고 또 찍었다. 끈적이는 피가 이마를 타고 내려와 시야를 빨갛게 물들였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면서 위아래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이대로 진짜로 죽겠구나 싶은 순간,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키 큰 남자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미쳤어? 이러다가 이 여자 죽으면 어쩌려고? 만약 잡히기라도 하면, 이건 무기징역 감이야! 하던 거나 마저 하자고!”그제야 키 큰 남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가 얼굴에 묻은 땀과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그러니까 왜 사람을 열받게 해가지고! 아오!”“됐어, 됐어. 얼른 할 거나 하자고!”남자가 이번엔 윤혜인을 향해 말했다."너도 우리를 너무 원망하지 마. 우린 받은 대로 일하는 것뿐이니까. 탓하려면 네 남편이나 탓해. 네 남편이 널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 일은 없었어.”가해자의 말도 안 되는 합리화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윤혜인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제로 이준혁이 그녀를 믿어줬더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윤혜인은 그를 사랑했던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이때,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인기척이 느껴졌다.“꺼져!”윤혜인이 힘겹게 그들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그들을 더 자극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이 망할 년이, 반항하길 뭘 반항해!”키 큰 남자가 발길질을 날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가해자는 고통에 윤혜인은 제대로 숨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서서히 또 의식이 날아가던 순간, 이번에도 옆에 있던 남자가 말리며 나섰다.“야, 사람 죽겠어! 시체 가지고 놀 거야?”피범벅인 모습에도 남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범하려 들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상황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 갑자기 복부에서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듯한 감
남자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윤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이라도 형량 적게 받고 싶으면, 당장 핸드폰 이리 내놔!""그건 또 왜?"윤혜인은 말없이 유리 조각을 더 지그시 눌렀다. 흐르는 피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지며 상의를 빨갛게 물들였다. 다급해진 남자들이 몰래 갖고 온 핸드폰을 윤혜인 앞으로 던졌다.손이 덜덜 떨리며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지만, 그녀는 간신히 112에 연락하는 것에 성공했다."저 납치당했어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배 속에 아이도 있는데, 제발 빨리 와주세요."순간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후드득, 폭포수처럼 떨어졌다."아이가, 아이가 위급해요... 제발 아이만이라도, 아이만이라도 구해주세요...."윤혜인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간절히 빌었다.의식이 모호해지며 눈앞이 온통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보였다. 이제는 남자들이 앞에 있어도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피가 빠져나가면서 통증이 마비되어 갔다. 하지만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남자들이 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윤혜인은 어떻게든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더 세게 유리 조각을 붙잡았다."위치 추적 완료됐어요. 구급대원이 도착할 때까지 전화 끊으시면 안 돼요.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그제야 팽팽했던 긴장이 조금 풀렸지만, 그녀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빨리 와주세요. 저 지금 꼭 연락할 데가 있어요...."윤혜인은 다시 한번 힘을 쥐어짜며 전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기계음의 안내 음성이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이 소리를 들은 윤혜인은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쯤 임세희를 구출하느라 나 같은 건 잊어버렸겠지.'그래도 마지막 말은 전해야 했다."이준혁 씨, 이제 저랑 아기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몰라요. 장례식 치르고 나면 저랑 아기는 외할머니 있는 곳에 묻어주세요. 부디 다음 생엔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길 바라요."눈물과 피가 뒤섞여 바닥에 뚝뚝 떨
창고 밖,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이준혁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대표님, 다 막아뒀어요.""좋아."주변은 다 포위되었고, 임세희만 구출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준혁은 자꾸만 불안감이 차올랐다. 특히 좀 전에 연락 온 모르는 전화가 가장 신경이 쓰였다. 당장이라도 윤혜인과 통화해야만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전화해도 윤혜인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주훈에게 연락을 넣었다."혜인은 만났어?""못 만났어요. 주변에 물어보니, 택시 타고 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네요.""그럼 바로 스카이 별장으로 가서 확인해 봐.""네.""그리고 5분 전에 모르는 전화번호로 연락이 왔는데, 위치 추적 한번 해줘."전화를 끊은 뒤, 이준혁은 우선 윤혜인에게 문자라도 남겨보기로 했다.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도무지 읽음이라는 표시가 뜨지 않았다. '많이 삐졌나? 아니면 소원 씨라도 만나러 갔나?'그는 애써 침착하려 생각을 전환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은 더 커질 뿐이었다. 결국 그는 소원에게 연락을 넣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 순간, 갑자기 창고 문이 쾅 하고 굉음을 내며 검은색 MPV 차량이 돌진해 나왔다.경호원 한 명이 다급히 그에게 달려오며 말했다."대표님, 놈들이 도망쳤어요. 쫓을까요?""쫓아."이준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린 뒤, 곧바로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창고 문은 이미 좀 전에 충격으로 반파되어 있었다. 이준혁이 안으로 들어서며 남은 문짝까지 걷어차자, 문은 종잇장처럼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먼지 사이로 작은 체구의 인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임세희의 몸은 채찍질로 엉망이 되어 있었으며, 손목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다급히 셔츠 자락을 찢어 손목을 지혈한 뒤, 그녀를 곧바로 차로 옮겼다. 그녀의 몸은 마치 불덩이처럼 매우 뜨거웠다.임세희가 가녀린
이준혁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대표님...."주훈이 걱정스레 이준혁을 불렀다. 위기의 상황일수록 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던 이준혁의 약한 모습이라니, 그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겉모습이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 인간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사랑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대표님, 괜찮으세요...?"한참이 지나도 이준혁이 몸을 가누지 못하자, 주훈이 부축하러 다가섰다. 하지만 이준혁이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도움을 거절했다. "너는, 여기 남아서 임세희나 돌봐."그리고는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윤혜인을 찾아 떠났다. 이준혁은 어렵지 않게 윤혜인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수술 중이라 당장 만날 수는 없었다.이때,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마음을 조리고 있던 소원이 그를 발견하곤 싸늘하게 말했다."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이를 악문 채 그를 비꼬았다.하지만 이준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조용히 물었다. "혜인은 어떻게 됐어요?"소원은 기가 막혔다. 끓는 불에 기름 붓는 것도 아니고, 이준혁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혜인이 어떻게 됐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그녀가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자 이준혁은 점점 인내심이 바닥났다.“묻잖아! 혜인이 어떻게 됐냐고!”이준혁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소원을 밀어붙였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그녀와 말싸움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 윤혜인이 어떻게 됐는지, 그걸 아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하지만 소원은 그의 분위기에 전혀 겁먹지 않고 더 강하게 나왔다."이 위선자!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 굴지 마! 누가 모를 줄 알아? 너, 그 여우 같은 년 구하느라 혜인이를 방치한 거잖아! 혜인인 내가 돌볼 테니, 그쪽 선택했으면 그쪽으로 꺼지라고!"소원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퇴원한다던 사람이 갑자기 응급실행이라니, 그것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로
한껏 쏘아붙이면 속이라도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의 표정을 보자, 소원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준혁,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알아? 사람의 뇌는 사고라는 걸 하라고 있는 거야. 근데 왜 자꾸 하지 말아야 할 짓만 골라서 해? 부부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이준혁과 윤혜인은 법적인 부부였다. 윤혜인이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임세희를 포기 못 하겠으면, 혜인이라도 놔줘. 아무 잘못 없는 애 좀 그만 괴롭히라고!”이준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소원의 말한마디, 한 마디가 화살이 되어 그의 심장에 꽂혔다.“그만 닥쳐!”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더 세게 그를 몰아붙였다.“당신, 절대로 혜인이한테 용서받지 못할 거야.”소원은 누구보다 윤혜인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이까지 잘못된 마당에, 윤혜인이 그를 용서할 일은 없었다. 이제 둘 사이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겼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으나, 이준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분노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수술실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윤혜인이 나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의사가 분주히 중환자실과 무전을 하며, 윤혜인이 창백하게 누워 있는 침상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윤혜인의 머리는 온통 피 칠갑이 되어 있었고, 입에는 호흡기가, 몸에는 각종 의료 기기가 붙어 있어 누가 봐도 심각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석상이 된 것처럼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한 간호사가 그를 옆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선생님, 죄송하지만 비켜주세요.”간호사가 강하게 잡아당긴 것도 아닌데, 이준혁은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휘청거렸다. 놀란 간호사가 하얗게 질린 그의 표정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진료 필요하세요?”이준혁이 고개를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의사에게 다가갔다.“제 아내는 왜 안 깨어나나요?”그가 윤혜
소원은 서현재와 진아연을 만난 사실을 숨겼다.서현재는 이제 육연주의 남편이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모르는데 존재가 신비로운 여자까지 나타났으니 서현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육경한은 무조건 육연주의 편을 들 게 뻔했다. 그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이 적기도 했고 육연주네 가족과 인연이 꽤 깊었다.게다가 소원이 관찰한 데 의하면 육경한은 매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육연주만큼은 아주 잘 챙겼다 아마도 육연주와 육연주의 어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의 말에 잠깐 침묵했다. 소원은 이런 침묵이 불편하기도 했고 육경한에 의해 침대와 벽 사이에 갇혀 있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 맡아야 했다.“술 마셨어?”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한테 해장국 좀 끓여달라고 할게.”소원이 이렇게 말한 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비키자 소원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에 소종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소종이 모은 정보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소원이 선미를 진아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그도 진아연이 이 정도로 얼굴을 갈아엎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가 소원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경계해야 했지만 그때는 육경한도 머리가 복잡했고 죽은 여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바람에 사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그리고 그 진아연이 용케 살아남아 소원을 해치려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진아연이 소원을 해친다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육경한이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사지로 내몰았으니 사랑이 원망으로 변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소종이 병원에 잠복해 관찰한 데 의하면 그렇게 단순한 아니라 진아연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 배후가 도대체 누구길래 진아연을 이용해 육경한을 해치려는 건지, 게다가 그 배후는 진아연을 소원의 모습으로 성형하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진아연은 도망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고 모습
그렇게 소원은 병원을 나섰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그녀는 곧바로 전미영과 아주머니를 보러 갔다.요즘 아주머니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눈을 깜빡이며 간단한 질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비록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 상황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이는 모두 육경한 덕분이었다.그가 국내외의 유명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아주머니를 위한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냈고 그 덕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었고 평생을 전문가로 살아온 이들에게 돈은 큰 유혹이 되지 않았다.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인간관계와 신뢰였다.육경한이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소원은 알고 있었다.소종 역시 은근히 암시를 주며 육경한의 헌신을 그녀에게 알렸다.게다가 소원의 어머니 역시, 한때는 의사들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았던 상태에서 지금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비록 소원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원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과거 소원이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가족도 의지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꼈다.오직 배 속의 아이만이 그녀를 붙잡았다.그때, 혹시라도 자신과 아이가 함께 죽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소원은 그 상황이 어쩌면 해방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전미영, 유진이, 아주머니, 서현재...이제 그녀는 결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이들은 윤혜인과는 다른 존재였다.윤혜인은 그녀가 없더라도 이준혁이 그녀를 충분히 잘 돌볼 것이었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소원이 없으면 정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소원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게 됐네.’그녀의 삶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그 무거움이야말로 일종의 행복이었다.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그녀가 별장
소원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안상철에게 연락한 거 맞아?”진아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소원이 이미 안상철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만약 소원이 안상철을 찾아낸다면 자신 역시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뻔했다.왜냐하면 그녀와 안상철은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육경한에게 접근하라고 명령했던 그 신비로운 인물이었다.진아연은 그 인물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육경한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이로 인해 받았던 처벌은 너무나도 끔찍했다.그날의 기억은 생생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그녀의 팔에서 피를 뽑아내며 했던 말 말이다.“네가 살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그는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에서 피를 한 방울씩 뽑아냈다.그렇게 피와 물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만약 그날 구조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진아연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소원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진아연 같은 사람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진아연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고 그녀는 반드시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진아연은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쉰 듯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알고 싶으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소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뭔데?”진아연은 떨리는 손으로 몸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며 말했다.“이걸 육경한의 음식이나 마실 것에 넣어.”소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죽이려는 거야?”“아니야. 천천히 약화시킬 거야.”진아연은 입술을 꽉 물고 대답했고 소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그 사람 사랑하지 않았어?”“...사랑? 그런 건 이미 끝났어.”진아연의 눈빛에는 분노와 미움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육경한이 소원과 결혼했다는
여자는 의사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서현재까지 데리고 갔다.소원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 따라가려 했지만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어쩔 수 없이 포기한 소원은 이전에 도움을 요청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번에 부탁했던 일, 소식 있어?]친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마침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 여자는 무녀 가문 사람이야.”‘무녀 가문?’소원은 이 이름이 생소했다.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친구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녀 가문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진 원시 부족이야. 그 부족의 무녀들은 주술과 독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수단이 잔인해. 게다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그 말에 소원의 마음속엔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현재 곁에 왜 무녀 같은 사람이 있는 거지? 서씨 가문에서 현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현재를 노리고 있는 건가?’소원은 최근 유진이와 아주머니 일로 정신이 없어서 서현재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더군다나 서씨 가문의 감시가 너무 엄격해서 서현재를 만날 기회조차 잡기 힘들었다.뭔가 심상치 않았다.소원은 방금 녹음한 음성을 친구에게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이 대화 내용 번역해 줄 수 있어?]친구가 답장을 보냈다.[배경 소음이 너무 심해서 지금은 잘 안 들려. 무녀 가문 언어라 내가 알아듣지 못해. 우선 음질을 정리한 뒤에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확인해 볼게.][그래, 부탁할게.][우린 서로 그런 말 필요 없어.]이 친구는 소원이 해외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소원이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친구는 소원에게 깊이 감사하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그때 한 간호사가 다가와 소원을 불렀다.“저기, 병실에 있는 분 아는 분 맞죠? 방금 깨어나셨어요.”소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넣고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갔
그가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려는 이유는 단순히 공부를 시키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육연주가 집에 머무르는 상황에서는 이런 일들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어쨌든 육연주는 서씨 가문의 며느리였다.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진태가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변형된 보호책이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속내를 이지애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이지애는 말이 많고 입이 가벼운 편이라 자칫 잘못하면 이 사실이 새어나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육경한은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방금 하려던 일을 떠올리고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핸드폰 화면에는 ‘아내’라는 이름이 떴다. 얼마 전 혼인신고를 마치자마자 그는 소원의 이름을 이렇게 저장해 두었다.그러나 전화는 한참 동안 울리기만 했고 끝내 받는 사람이 없었다.육경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전원이 꺼져 있었다.얼굴이 굳어진 그는 내선 전화를 눌러 소종에게 지시했다.“병원에 가서 확인해. 사모님 아직 거기 계신지.”소종은 곧바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한편.이지애는 육경한이 전화를 끊자 기분이 매우 나빴다.그녀는 육경한의 새 아내가 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자신과 딸을 외면할 정도로 말이다.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곧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명령했다.“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 알아내.”서울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기반을 닦아온 이지애는 돈만 있으면 사람들을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그녀의 눈에는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어디 한번 보자고. 그 여자한테 대체 어떤 능력이 있길래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대는 건지.’...병원.진아연은 여전히 응급실에서 치료 중이었다.소원은 문밖에서 서현재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괜찮아?”그녀가 물었을 때 서현재
“경한아, 연주 좀 도와줘... 부탁이야.”이지애의 입장에서는 소원이 고소를 철회하는 일쯤은 육경한에게 한마디면 충분한 일이었다.육경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건 반역이나 다름없지 않은가?이지애는 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배경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분명 어딘가 치밀한 술수를 써서 그 몰래 낳은 아이를 빌미 삼아 육경한을 유혹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지애는 그 여자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육경한은 이미 가족이 거의 없는 사람이니 지금 그녀들과 육경한의 관계는 어떻게 봐도 피보다 진한 관계였다.육경한이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때문에 그녀들에게 등을 돌릴 리 없다고 믿었다.그럴 리가 없었다.한참 후, 육경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누나, 연주가 전에 피아노에 관심 많다고 했잖아요. 제가 이미 국제적인 피아노 대가 이엘 선생님과 연결해 뒀습니다. 연주 나중에 외국에서 그분께 배우면 성격도 좀 가라앉을 겁니다.”이지애는 이 일은 이미 확실히 해결됐다고 여겼다.육경한이 이렇게 말했으니 연주를 돕겠다는 뜻 아니겠는가?그녀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말했다.“경한아, 내가 뭐랬어? 너는 정말 연주에게 최고야. 연주도 너 이 삼촌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존경한다고. 피아노 공부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우선 연주를 당장 풀어줘야지.”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 확신하며 이지애는 기분이 좋아졌다.하지만 육경한의 말은 예상치 못하게 이어졌다.“누나, 연주도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행동이 늘 이렇게 무모한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이번엔 좀 반성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말이에요.”“...”이지애는 육경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연주를 풀어줄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경한아,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방금 연주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어?”“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육
이지애는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뭐라고? 결혼을 했다고? 난 왜 몰랐지?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가 있어? 그럼 민아 씨는?”해외여행을 갓 마치고 돌아온 이지애는 육경한과 방민아의 파혼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여전히 방민아가 육경한의 운명적인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지금까지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 외에 다른 여자가 없었고 방민아는 자신과 딸 육연주를 기쁘게 해주는 데 능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잘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방민아가 육경한의 아내가 되는 건 그녀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지애는 방민아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우리 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육경한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결혼은 조촐하게 했어요. 그냥 혼인신고만 한 거라서 누구도 몰라요.”그는 더 이상 뭐든 요란하게 하고 싶어 하는 나이가 않았다. 무엇보다 설령 자신이 성대한 결혼식을 원한다고 해도 소원이 이를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두 차례나 자멸했던 소원은 서울에서 이미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결혼식을 대대적으로 치르면 그녀의 과거와 관련된 소문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게 분명했다.그건 마치 소원을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위치에 세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하여 육경한은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지애는 기가 막힌 듯 말했다.“경한아, 그게 어떻게 작은 일이니? 네 결혼이 작은 일이라니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야? 민아 씨가 아니라도 아무 여자나 데려다가 결혼하면 안 되지 않니?”“아무 여자가 아니에요.”육경한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그 사람은 내가 오래 고민하고 선택한 사람이에요.”속으로는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걸 사촌 누나 이지애에게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그는 대화를 본론으로 돌렸다.“연주 문제는 이미 확인했어요. 연주가 폭행에 가담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약물을 쓴 건 아니었으니 처벌은 그렇게 무겁지 않을 거예요. 아마 15일
이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소종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소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그래도 오랜 시간 육경한을 보좌하면서 익힌 대로 뭐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 마음에 걸린 말은 모두 털어놓았다.“대표님, 어쨌든 전 사모님이 서현재 도련님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둘이 약속해서 만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사모님께서 꽤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더군요.”소종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대표님, 사모님께 그렇게 잘해주는데 사모님은 그걸 조금도 몰라주는 것 같아요. 서 도련님하고는 아직도 뭔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 같고 정말...”“그냥 우연히 만난 거겠지. 별일 아니야.”육경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소종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소원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는 모습에 놀랐다. 심지어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니 말이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런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 특별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행동은 없었어요. 다만 제 생각엔 사모님이 대표님과 결혼했으면 서현재 도련님과는 거리를 두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특히 서현재는 다른 남자들과는 성격이 달랐다.그는 과거에 소원을 데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애매한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소원이 육경한과 결혼한 것도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한 결과였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소종은 이런 상황이 결국 다시 불씨가 될까 걱정했다.“게다가 대표님, 제가 보기엔 서현재 도련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소종은 말을 이어갔다.“사람을 보는 눈빛이 너무 차갑고 깊어요. 누구를 봐도 같은 표정이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엔 사모님과 무슨 갈등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굴더군요. 마치 나무 인형 같았습니다.”“서씨 가문에서 전에 서현재 도련님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하지만 기억을 잃어도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결국 미우 그룹의 복지와 대우는 업계에서 최상위급이었고 요즘같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이런 직장을 떠나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소종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을 정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방씨 가문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없었다.그는 육경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남자는 여전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지했고 그 모습은 단정하고 매력적이었다.“대표님, 방 대표님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태도로 봐선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밖에 퍼진 소문들은 전부 방씨 가문에서 흘린 겁니다.”소종이 말했다.“알고 있어.”육경한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소종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고는 참다못해 물었다.“이대로 소문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그럼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육경한은 눈을 살짝 들어 올렸고 소종은 답답한 듯 말했다.“하지만 그들이 퍼뜨린 말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큽니다. 직원들조차 집중을 못 하고 일에 소홀해지고 있어요.”“그게 더 좋지 않나.”육경한은 담담히 말했다.소종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육경한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깨끗하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냉정히 말했다.“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부 팀을 정리할 수 있잖아. 방씨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리하라는 거야.”소종은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그동안 두 가문이 협력하며 방씨 가문과 연결된 사람이 그룹 내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일부는 방씨 가문으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익을 공유하며 내부에서 세력을 구축했을 수도 있었다.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을 모두 걸러내겠다는 것이었다.“그럼 방씨 가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소종이 물었다.“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이미 기회를 줬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