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심장이 불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윤혜인은 참고 또 참았다. 이준혁의 태도가 어떠하던, 일단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 아이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했다. 윤혜인이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또박또박 자신의 상황을 전달했다.“장난 아니고 실제 상황이에요! 니 납치됐다고요!”윤혜인의 간절함이 조금은 통했는지, 이준혁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거의 끝나가니까,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자. 얼른 돌아갈게.”“이준혁 씨!”하지만 그는 여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임세희의 말은 다 믿어줬잖아요! 왜 저만 거짓말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매번 이래요!”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준혁은 여전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윤혜인, 정도껏 하라고 했지! 나 지금 네 투정 받아줄 상황 아니야!”눈앞이 컴컴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굳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든 노력이 투정이라는 단어 하나에 허사가 되었다. 이준혁은 희망이 아닌, 지독한 절망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나와 우리 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이래도 임세희가 더 중요해요?”이번에도 이준혁은 확실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도리어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스럽게 답했다.“돌아가서 얘기하자. 바쁘니까, 이만 끊어.”그 말을 듣는 순간, 배에서 또 찌르르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아이가 그녀에게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혜인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이준혁에게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안 돼요! 끊지 마요, 준혁 씨! 이대로 끊으면 나랑 아이는….”전화 연결이 끊겼다. 윤혜인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자그마치 십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다. 이제 둘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는데, 이준혁의 선택은 여전히 임세희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일지도 몰랐다. 송소미가 바라던 모습이 바로 이거였다. 윤혜인의 절망한 표정을 보며, 그녀는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송소미가 두 남자를 바라보며 경고를 날렸다."저 여자 남편이 하는 말, 들었지? 이 여자가 진짜로 당신들한테 돈 줄 수 있을 것 같아? 지금부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내 말이나 잘 들어!"그제야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남자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절대로 봐주지 마. 나랑 약속했던 대로 하면 돼."이 말과 함께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습을 본 송소미는 창고 밖으로 나갔다. 저번 사건 이후로 비슷한 광경만 봐도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차라리 자리를 비켜주기로 한 것이다. 뒤에서 허리띠를 휘두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송소미는 창고 문을 닫았다.윤혜인의 팔에 빨간 선혈이 그어졌다. 그와 동시에 알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공포에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윤혜인은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이때, 뒤늦게 허리띠를 푼 남자가 말했다. "빨리 시작하자. 못 기다리겠어."얼굴이 땀과 먼지로 뒤덮인 상황이었지만, 윤혜인의 미모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남자들이 눈을 빛내며 입술을 축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욕구를 풀 때였다. 상상하던 가장 최악의 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윤혜인은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아이만은 지켜야 했다. 이때, 윤혜인의 머릿속에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남자들의 방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기가 시작됐다. "오빠들, 이렇게 절 묶은 채로 하는 거 불편하지 않겠어요? 이거 풀어주면 제가 제대로 상대해 줄게요."두 남자의 눈동자가 서로 맞닿았다. 실제로 의자에 묶인 상태에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윤혜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먼저 허리띠를 풀었던 키 큰 남자가 윤혜인에게 다가왔다."죽고 싶지 않으면 허튼짓할 생각 하지 마!"그가 경고하며 윤혜인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기 시
남자가 윤혜인의 머리를 바닥에 찍고 또 찍었다. 끈적이는 피가 이마를 타고 내려와 시야를 빨갛게 물들였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면서 위아래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이대로 진짜로 죽겠구나 싶은 순간,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키 큰 남자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미쳤어? 이러다가 이 여자 죽으면 어쩌려고? 만약 잡히기라도 하면, 이건 무기징역 감이야! 하던 거나 마저 하자고!”그제야 키 큰 남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가 얼굴에 묻은 땀과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그러니까 왜 사람을 열받게 해가지고! 아오!”“됐어, 됐어. 얼른 할 거나 하자고!”남자가 이번엔 윤혜인을 향해 말했다."너도 우리를 너무 원망하지 마. 우린 받은 대로 일하는 것뿐이니까. 탓하려면 네 남편이나 탓해. 네 남편이 널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 일은 없었어.”가해자의 말도 안 되는 합리화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윤혜인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제로 이준혁이 그녀를 믿어줬더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윤혜인은 그를 사랑했던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이때,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인기척이 느껴졌다.“꺼져!”윤혜인이 힘겹게 그들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그들을 더 자극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이 망할 년이, 반항하길 뭘 반항해!”키 큰 남자가 발길질을 날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가해자는 고통에 윤혜인은 제대로 숨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서서히 또 의식이 날아가던 순간, 이번에도 옆에 있던 남자가 말리며 나섰다.“야, 사람 죽겠어! 시체 가지고 놀 거야?”피범벅인 모습에도 남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범하려 들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상황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 갑자기 복부에서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듯한 감
남자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윤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이라도 형량 적게 받고 싶으면, 당장 핸드폰 이리 내놔!""그건 또 왜?"윤혜인은 말없이 유리 조각을 더 지그시 눌렀다. 흐르는 피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지며 상의를 빨갛게 물들였다. 다급해진 남자들이 몰래 갖고 온 핸드폰을 윤혜인 앞으로 던졌다.손이 덜덜 떨리며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지만, 그녀는 간신히 112에 연락하는 것에 성공했다."저 납치당했어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배 속에 아이도 있는데, 제발 빨리 와주세요."순간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후드득, 폭포수처럼 떨어졌다."아이가, 아이가 위급해요... 제발 아이만이라도, 아이만이라도 구해주세요...."윤혜인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간절히 빌었다.의식이 모호해지며 눈앞이 온통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보였다. 이제는 남자들이 앞에 있어도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피가 빠져나가면서 통증이 마비되어 갔다. 하지만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남자들이 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윤혜인은 어떻게든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더 세게 유리 조각을 붙잡았다."위치 추적 완료됐어요. 구급대원이 도착할 때까지 전화 끊으시면 안 돼요.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그제야 팽팽했던 긴장이 조금 풀렸지만, 그녀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빨리 와주세요. 저 지금 꼭 연락할 데가 있어요...."윤혜인은 다시 한번 힘을 쥐어짜며 전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기계음의 안내 음성이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이 소리를 들은 윤혜인은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쯤 임세희를 구출하느라 나 같은 건 잊어버렸겠지.'그래도 마지막 말은 전해야 했다."이준혁 씨, 이제 저랑 아기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몰라요. 장례식 치르고 나면 저랑 아기는 외할머니 있는 곳에 묻어주세요. 부디 다음 생엔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길 바라요."눈물과 피가 뒤섞여 바닥에 뚝뚝 떨
창고 밖,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이준혁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대표님, 다 막아뒀어요.""좋아."주변은 다 포위되었고, 임세희만 구출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준혁은 자꾸만 불안감이 차올랐다. 특히 좀 전에 연락 온 모르는 전화가 가장 신경이 쓰였다. 당장이라도 윤혜인과 통화해야만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전화해도 윤혜인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주훈에게 연락을 넣었다."혜인은 만났어?""못 만났어요. 주변에 물어보니, 택시 타고 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네요.""그럼 바로 스카이 별장으로 가서 확인해 봐.""네.""그리고 5분 전에 모르는 전화번호로 연락이 왔는데, 위치 추적 한번 해줘."전화를 끊은 뒤, 이준혁은 우선 윤혜인에게 문자라도 남겨보기로 했다.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도무지 읽음이라는 표시가 뜨지 않았다. '많이 삐졌나? 아니면 소원 씨라도 만나러 갔나?'그는 애써 침착하려 생각을 전환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은 더 커질 뿐이었다. 결국 그는 소원에게 연락을 넣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 순간, 갑자기 창고 문이 쾅 하고 굉음을 내며 검은색 MPV 차량이 돌진해 나왔다.경호원 한 명이 다급히 그에게 달려오며 말했다."대표님, 놈들이 도망쳤어요. 쫓을까요?""쫓아."이준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린 뒤, 곧바로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창고 문은 이미 좀 전에 충격으로 반파되어 있었다. 이준혁이 안으로 들어서며 남은 문짝까지 걷어차자, 문은 종잇장처럼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먼지 사이로 작은 체구의 인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임세희의 몸은 채찍질로 엉망이 되어 있었으며, 손목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다급히 셔츠 자락을 찢어 손목을 지혈한 뒤, 그녀를 곧바로 차로 옮겼다. 그녀의 몸은 마치 불덩이처럼 매우 뜨거웠다.임세희가 가녀린
이준혁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대표님...."주훈이 걱정스레 이준혁을 불렀다. 위기의 상황일수록 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던 이준혁의 약한 모습이라니, 그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겉모습이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 인간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사랑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대표님, 괜찮으세요...?"한참이 지나도 이준혁이 몸을 가누지 못하자, 주훈이 부축하러 다가섰다. 하지만 이준혁이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도움을 거절했다. "너는, 여기 남아서 임세희나 돌봐."그리고는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윤혜인을 찾아 떠났다. 이준혁은 어렵지 않게 윤혜인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수술 중이라 당장 만날 수는 없었다.이때,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마음을 조리고 있던 소원이 그를 발견하곤 싸늘하게 말했다."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이를 악문 채 그를 비꼬았다.하지만 이준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조용히 물었다. "혜인은 어떻게 됐어요?"소원은 기가 막혔다. 끓는 불에 기름 붓는 것도 아니고, 이준혁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혜인이 어떻게 됐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그녀가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자 이준혁은 점점 인내심이 바닥났다.“묻잖아! 혜인이 어떻게 됐냐고!”이준혁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소원을 밀어붙였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그녀와 말싸움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 윤혜인이 어떻게 됐는지, 그걸 아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하지만 소원은 그의 분위기에 전혀 겁먹지 않고 더 강하게 나왔다."이 위선자!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 굴지 마! 누가 모를 줄 알아? 너, 그 여우 같은 년 구하느라 혜인이를 방치한 거잖아! 혜인인 내가 돌볼 테니, 그쪽 선택했으면 그쪽으로 꺼지라고!"소원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퇴원한다던 사람이 갑자기 응급실행이라니, 그것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로
한껏 쏘아붙이면 속이라도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의 표정을 보자, 소원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준혁,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알아? 사람의 뇌는 사고라는 걸 하라고 있는 거야. 근데 왜 자꾸 하지 말아야 할 짓만 골라서 해? 부부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이준혁과 윤혜인은 법적인 부부였다. 윤혜인이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임세희를 포기 못 하겠으면, 혜인이라도 놔줘. 아무 잘못 없는 애 좀 그만 괴롭히라고!”이준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소원의 말한마디, 한 마디가 화살이 되어 그의 심장에 꽂혔다.“그만 닥쳐!”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더 세게 그를 몰아붙였다.“당신, 절대로 혜인이한테 용서받지 못할 거야.”소원은 누구보다 윤혜인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이까지 잘못된 마당에, 윤혜인이 그를 용서할 일은 없었다. 이제 둘 사이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겼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으나, 이준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분노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수술실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윤혜인이 나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의사가 분주히 중환자실과 무전을 하며, 윤혜인이 창백하게 누워 있는 침상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윤혜인의 머리는 온통 피 칠갑이 되어 있었고, 입에는 호흡기가, 몸에는 각종 의료 기기가 붙어 있어 누가 봐도 심각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석상이 된 것처럼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한 간호사가 그를 옆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선생님, 죄송하지만 비켜주세요.”간호사가 강하게 잡아당긴 것도 아닌데, 이준혁은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휘청거렸다. 놀란 간호사가 하얗게 질린 그의 표정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진료 필요하세요?”이준혁이 고개를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의사에게 다가갔다.“제 아내는 왜 안 깨어나나요?”그가 윤혜
이준혁은 누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상태를 눈치챈 의사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으니까, 너무 낙담하지 마시고 본인 몸부터 돌보세요. 그래야 환자를 돌볼 기력도 생기죠."의사가 떠난 후, 옆에 있던 비서가 전화를 가져왔다.이준혁은 곧바로 김성훈에게 연락을 넣었다."성훈아, 나 좀 도와줘."통화를 마치자, 음성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이준혁은 뭔가에 홀린 듯, 그것을 눌렀다. 그리고는 들려오는 윤혜인의 갈라진 목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눈앞이 까매지고, 바닥이 꺼지는 듯한 절망이 찾아왔다. 모든 말이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의 안일한 생각이 가져다준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터져 나왔다. 결국 마지막 한마디, 다음 생엔 절대로 다시 만나지 말자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준혁은 무너지고 말았다. 세상이 끝난 것만 같은 절규가 쏟아져 나왔다.하지만 소원은 그런 그가 불쌍하기는커녕, 너무나도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준혁의 멱살을 잡으며 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혜인이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아이 가진 몸으로 그 모진 고통 견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이준혁이 반박하지 못하자, 소원은 더 분노하며 그를 공격했다."혜인이 못 깨어나면, 당신 내 손에 죽을 줄 알아!"평소의 이준혁이었다면, 절대로 이런 그녀를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원은 윤혜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가 여기서 소원을 뿌리쳐 다치기라도 한다면, 윤혜인한테 더 미움을 살 것 같았다.소원은 분노에 이성을 잃은 채 독한 말들을 쏟아냈다."혜인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혜인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잔인하게 대하느냐고! 당신 정말 최악이야!"이준혁이 소원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준혁아!"이때, 육경한과 김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