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훈은 이준혁의 비서였다. 비서가 대표의 지시 없이 함부로 움직일 리 없었다. ‘자기 여자를 달래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두 남자가 떠나면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송소미는 이 모든 것이 윤혜인으로 비롯됐음을 깨달았다. ‘역시 그년이 문제였어! 날 이렇게 만든 거야!’송소미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던 임세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가 의도했던 대로, 송소미는 이 사건의 원천으로 윤혜인을 지목한 것 같았다. 이제 송소미의 분노를 더 부추이기만 하면 됐다. 임세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일단 다 나을 때까진 어디 나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겠지?”“왜요?”“윤혜인도 이 병원에 있으니까, 괜히 마주칠까 봐 그러지. 그 여자가 또 준혁 오빠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너 감당할 수 있겠어?”“뭐라고요? 그년도 이 병원에 있다고요?”송소미가 입술을 꽉 깨문 채 사람 하나 죽일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임세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나도 앞으로 널 도와주지 못할 것 같아. 윤혜인이 날 싫어해서, 준혁 오빠가 날 외국으로 보내려고 해. 너도 그 여자 조심하면서, 몸조리 잘해.”그 말을 들은 송소미는 놀란 동시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단순히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천하의 임세희도 외국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됐는데, 송소미는 심지어 윤혜인한테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다 이준혁이 또 그녀를 노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제까짓게 뭔데, 이런 대우를 받아!’“윤혜인, 죽여버릴 거야!”“소미야, 왜 이래?”임세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연기하며 그녀를 붙잡았다.“제발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 준혁 오빠가 얼마나 그 여자를 아끼는지 알아?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면, 너 끝장날 수도 있어!”이 말을 들은 송소미는 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윤혜인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할 이유도 없었다. 이제 아래마저 찢어져, 영원히 하자 있는 여자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재벌 며느리로
그 뒤로 이틀이 지났다. VIP 병실은 거의 호텔 수준이었기 때문에, 없는 것이 없었다.이틀 내내 이준혁은 윤혜인 옆을 떠나지 않고, 병실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윤혜인은 이런 이준혁이 신경이 쓰였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될까 차마 말을 걸진 못했다. 점심, 윤혜인은 오늘 입맛이 없어 얼마 식사하지 못했다.밖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이런 날씨면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지곤 했다. 윤혜인은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곧바로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을 훑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의 눈에 국제학교를 다니던 소소한 일상이 그립다는 글귀가 들어왔다. 문득, 윤혜인은 과거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는 매일 아침과 점심을 학교 앞 분식집에서 해결하곤 했다. 떡볶이 한 컵에, 김밥 한 줄, 이게 그녀의 일상이었다. 분식집 아줌마는 또 얼마나 친절했던가? 적게 먹는 그녀가 안쓰럽다며, 항상 몰래 삶은 계란을 챙겨주곤 했다. 그 분식집 덕분에 굶지 않고 이 정도 자랄 수 있었다. 임신한 탓인가, 그녀는 자꾸만 익숙한 입맛이 떠올랐다. 윤혜인은 그 시절 먹던 떡볶이와 김밥이 너무나 그리웠다. 하지만 주인장 아줌마가 은퇴한 탓에, 이제 다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이었다. 한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윤혜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준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그는 소매를 걷어붙인 채, 인상을 쓰며 열심히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한참 일하던 이준혁이 핸드폰을 집어 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윤혜인은 다시 고개를 원래의 위치로 돌렸다.이때, 이준혁이 다가와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버렸다.“임산부가, 너무 길게 핸드폰 보면 안 좋아.”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했다. 그런 다음, 외투를 챙기더니, 몸을 일으켰다. “자고 있어. 잠깐 나갔다가 올게.”이준혁이 병실 밖으로 나간 뒤, 윤혜인은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서서히 잠에 빠져 들었다. 번쩍, 우르릉 쾅!
윤혜인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얼굴은 물론 귓불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녀가 돌처럼 굳은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본 이준혁이 걱정스레 다가왔다.“방금 뭐라고 했어?”윤혜인은 시선을 어디에다가 둬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눈은 온통 살색으로 가득했다. 결국 한참 망설이던 끝에, 윤혜인은 겨우 말을 꺼냈다.“화장실 가서 갈아입으면 안 돼요?”“알겠어.”고분고분, 이준혁은 그녀의 말에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그는 어느새 가운을 입고 있었다. 식사를 끝낸 윤혜인이 이준혁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좀 전과 달리 그는 가운을 걸치고 있었지만, 가슴은 풀어헤친 상태였다.윤혜인은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결국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해 화장실로 들어갔다.씻고 나오니, 이준혁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지난밤들과 별다를 게 없는 것 같았지만, 윤혜인은 오늘 자꾸만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이준혁이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네.”윤혜인은 침대 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이준혁이 순식간에 그녀를 뒤에서 끌어당기며, 품에 가둔 것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온 방을 가득 채웠다. 윤혜인은 긴장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준혁 씨….”이준혁이 솔직한 충동을 그녀에게 전했다.“하기 싫으면, 안 할게.”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러다 문득, 아까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분식 먹고 싶어 한다는 걸?”이준혁이 덤덤히 답했다.“누가 알려 줬어.”사실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최근에 윤혜인이 식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SNS에 그녀가 분식집 글에 좋아요를 표시한 것을 보고, 빗속에서 어렵게 사람을 찾아내 얻은 것이었다. 찾아서 다행이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필이면 분식집
임세희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물론 살갗이 드러난 모든 곳에 멍과 피로 범벅 되어 있었다. 두건을 쓴 세 남자 중 한 명이, 임세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임세희가 눈물 젖은 얼굴로 이준혁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준혁 오빠, 나 좀 구해줘… 제발 좀 구해줘… 내가 오빠 목숨을 구해준 것을 봐서라도, 구해줘….”과거의 은혜를 들먹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역시나 임세희의 예상대로 이준혁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짝, 한 남자가 임세희의 뺨을 무자비하게 내리치며 위협했다.“쓸데없는 소리 왜 이렇게 많아.”한두 번 맞은 것이 아닌지, 임세희의 입에서 고인 피가 후드득하고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죽고 싶어 환장했어?”재밌는 농담을 들은 듯, 남자들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들이 웃을 때마다 변조된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그쪽이 이 여자 남편이라면서? 돈도 꽤 많다던데, 맞아?”갑자기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옆에서 있던 윤혜인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이준혁이 이 호칭에 긍정하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긴장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한 남자가 임세희를 향해 강한 발차기를 날렸다.임세희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산 사람보단, 죽은 사람과 더 가까운 회색빛이 돌고 있었다. “감히 우릴 속여? 넌 내 손에 죽었어!”남자가 다시 발길질하기 위해 다리를 올린 순간, 이준혁이 힘들게 답을 내놓았다.“그래, 남편 맞아.”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별거 아닌 말 한마디였겠지만, 윤혜인에겐 너무나도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서서히 이준혁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온통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던 이준혁은 눈치채지 못했다.그의 답을 들은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렇다면 현금으로 3억 준비해서, 한동교 밑으로 와. 안 그러면….”남자
외곽에 있는 한 창고에서, 수상한 남자가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정말 이거 놔요?”임세희가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해.”얇은 주삿바늘이 오른팔 혈관을 타고 서서히 들어갔다. 이 주사에는 특수한 물질이 있어, 아프지 않은 사람을 아파 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준혁을 더 철저히 속이기 위해선 이것만으로 부족했다.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던 임세희가 또 다른 남자에게 손짓했다.“이리 와봐. 따귀 몇 대 더 때려줘.”따귀를 때려 달라고 요청하는 미녀라니, 정말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이었다. 남자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짝, 짝, 짝…. 창고 안에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세희는 다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부어 있었고, 입술도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임세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이준혁도 충분히 속아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좀 전에 뺨 맞을 때의 고통이 떠오르자,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쪼개지 마, 누가 너 좋아하라고 이 짓 하는 줄 알아?”임세희가 느닷없이 남자의 뺨을 후려치며 말했다.때려달라고 해서 때려준 건데, 뜬금없이 화풀이 당하자 남자는 억울했다. 하지만 상대는 목적을 위해 서슴없이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여자였다. 남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사람과는 원래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니까. 이때, 임세희가 옆에 놓여 있던 낡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위조 여권 준비해 놓았으니까, 돈 받는 대로 바로 여길 떠. 알겠어?”남자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입장에서도 범죄 현장에 오래 있어봤자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송소미도 무사히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시간 기다리며 준비해 온 계획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임세희의 얼굴에 욕망과 흥분으로 뒤섞인 미소가 맺혔다.‘준혁 오빠
예상보다 더 격렬한 반응에, 남자들이 멈칫했다.그 틈을 타, 윤혜인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해 나갔다. 옷차림새나, 분위기만 봐도 두 남자는 전문 납치범은 아닌 것 같았다. 송소미가 사람을 매수하는데 돈을 얼마 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윤혜인이 침착한 목소리로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괜히 범죄 저질러서 인생 종치지 말고, 이쯤에서 멈춰. 그럼 신고도 안 하고, 저 여자의 두 배를 줄게. 그 편이 당신들한테도 더 좋지 않겠어?”그들이 받은 돈은 합쳐서 600만이 다였다. 하루치 급여로 치면 많은 돈이었지만, 범죄의 대가로 받은 돈 치고는 적은 편에 속했다. 그들은 윤혜인의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송소미는 이 황당한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만히 있다가는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당장 윤혜인의 입을 막아버려야만 했다.“이 여우 같은 년!”윤혜인이 묶여 있던 의자를 세차게 걷어찬 송소미가 외쳤다. 꽈당하는 소리가 창고에 울려 퍼지며 강력한 고통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고통의 수치로 봤을 때, 이건 최소 골절이었다. 윤혜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자가 아닌 배를 걷어찼다면, 아이가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어깨가 부러지는 것쯤은 아이를 잃는 거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가 아주 미쳤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놀려! 넌 절대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 내가 그렇게 안 둘 거니까!”송소미가 차갑게 웃으며 윤혜인을 위협했다. 오늘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윤혜인에게 자신이 느꼈던 그 비참함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때,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마지막 기회 줄게. 이준혁한테 전화해서 돈 가지고 오라고 해. 그러면 널 풀어줄게.”윤혜인은 그제야 고통이 조금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송소미가 마음을 바꿀까, 다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거라면, 문제없어.”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심장이 불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윤혜인은 참고 또 참았다. 이준혁의 태도가 어떠하던, 일단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 아이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했다. 윤혜인이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또박또박 자신의 상황을 전달했다.“장난 아니고 실제 상황이에요! 니 납치됐다고요!”윤혜인의 간절함이 조금은 통했는지, 이준혁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거의 끝나가니까,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자. 얼른 돌아갈게.”“이준혁 씨!”하지만 그는 여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임세희의 말은 다 믿어줬잖아요! 왜 저만 거짓말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매번 이래요!”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준혁은 여전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윤혜인, 정도껏 하라고 했지! 나 지금 네 투정 받아줄 상황 아니야!”눈앞이 컴컴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굳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든 노력이 투정이라는 단어 하나에 허사가 되었다. 이준혁은 희망이 아닌, 지독한 절망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나와 우리 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이래도 임세희가 더 중요해요?”이번에도 이준혁은 확실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도리어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스럽게 답했다.“돌아가서 얘기하자. 바쁘니까, 이만 끊어.”그 말을 듣는 순간, 배에서 또 찌르르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아이가 그녀에게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혜인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이준혁에게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안 돼요! 끊지 마요, 준혁 씨! 이대로 끊으면 나랑 아이는….”전화 연결이 끊겼다. 윤혜인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자그마치 십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다. 이제 둘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는데, 이준혁의 선택은 여전히 임세희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일지도 몰랐다. 송소미가 바라던 모습이 바로 이거였다. 윤혜인의 절망한 표정을 보며, 그녀는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송소미가 두 남자를 바라보며 경고를 날렸다."저 여자 남편이 하는 말, 들었지? 이 여자가 진짜로 당신들한테 돈 줄 수 있을 것 같아? 지금부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내 말이나 잘 들어!"그제야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남자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절대로 봐주지 마. 나랑 약속했던 대로 하면 돼."이 말과 함께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습을 본 송소미는 창고 밖으로 나갔다. 저번 사건 이후로 비슷한 광경만 봐도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차라리 자리를 비켜주기로 한 것이다. 뒤에서 허리띠를 휘두르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송소미는 창고 문을 닫았다.윤혜인의 팔에 빨간 선혈이 그어졌다. 그와 동시에 알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공포에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윤혜인은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이때, 뒤늦게 허리띠를 푼 남자가 말했다. "빨리 시작하자. 못 기다리겠어."얼굴이 땀과 먼지로 뒤덮인 상황이었지만, 윤혜인의 미모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남자들이 눈을 빛내며 입술을 축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욕구를 풀 때였다. 상상하던 가장 최악의 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윤혜인은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아이만은 지켜야 했다. 이때, 윤혜인의 머릿속에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남자들의 방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기가 시작됐다. "오빠들, 이렇게 절 묶은 채로 하는 거 불편하지 않겠어요? 이거 풀어주면 제가 제대로 상대해 줄게요."두 남자의 눈동자가 서로 맞닿았다. 실제로 의자에 묶인 상태에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윤혜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먼저 허리띠를 풀었던 키 큰 남자가 윤혜인에게 다가왔다."죽고 싶지 않으면 허튼짓할 생각 하지 마!"그가 경고하며 윤혜인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기 시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소원은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반차를 냈다. 다른 직원도 한 달에 겨우 2날 반 정도만 반차를 낼 수 있었기에 소원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영숙은 어머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원의 말을 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덧붙였다. 소원은 얼른 기사에게 방향을 돌려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했다.요양원에 도착한 소원을 보고 간병인 아줌마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소원 씨, 어쩐 일이에요?”소원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전미영을 보고 한시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요양원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와서요.”“괜찮아요. 사모님 오후에 약간의 경련이 있긴 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어요.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 쭉 안정적이에요.”간병인 아줌마가 소원을 다독였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요.”“다행이네요.”소원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중도에 잠깐 깨긴 했지만 전미영은 여전히 소원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매주 보러 와도 전미영은 소원을 알아보는 법이 없었기에 소원도 이제 적응했다. 언젠가 육경한이 전미영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육경한을 보고는 매우 즐겁게 반겨줬다. 소원을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감만 보면 오히려 육경한이 친자식 같기도 했다.소원도 이 일에 관해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의사는 전미영이 깨어나자마자 본 사람이 육경한이라 육경한에게 익숙함과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몸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게다가 애초에 전미영을 보살피는 일은 육경한이 전부 책임졌기에 무턱대고 육경한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문병 오는 시간을 피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일이 바빴기에 소원을 보러 오는 일이 드물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간병인 아줌마는 소원이 어딘가 피곤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얼른 들어가 쉬어요. 출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멀리서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병 온지 얼마나 됐다고
집사는 일 처리를 마치고 서현재의 핸드폰을 서진태에게 바쳤다.“도련님 핸드폰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여자가 계속 찾는 것 같은데 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처리할까요?”집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고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라 서진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진태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에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렸다.“이 여자가 정말...”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육경한 그 자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이 여자를 죽이든 풀어주든 일단 육경한의 생각부터 파악해야 해.”서진태는 겉으로만 육경한에게 공손했지 속으로는 죽일 듯이 미워했다. 서현재를 빌미로 서씨 가문을 여러 번이나 물고 늘어졌지만 목숨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강했고 외국에서 레전드로 남을만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이 바닥에서 명성을 널리 날린 터라 서씨 가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씨 가문은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이 여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결혼식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땐 육씨 가문과 원수를 질뿐더러 도련님을 휘두를 핑계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모든 일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요.”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집사는 사실 서진태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소원을 제거해 서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사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서현재가 아니었다.선동당한 서진태는 집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현재도 이 여자를 위해 여러 번 서진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기에 미래를 대비해 소원을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진태가 집사에게 귀띔했다.“사람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도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절대
“요즘 바빠?”윤혜인이 물었다.“음... 조금.”소원의 대답은 거짓말이기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클럽 일은 확실히 바빴다. 낮에는 잠을 보충하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전미영을 보러 갈 때도 퇴근하고 바로 가야 했기에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그리고 이 일에 윤혜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육경한은 유진의 친부니 이준혁이 개입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그래. 나도 요즘 애가 어려서 모임을 줄였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아름이까지 데리고 너랑 유진이 보러 갈게.”“그래.”소원은 딱히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유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윤혜인이 말했다.“그래. 꼭 그럴게.”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원은 윤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지내라는데 유진이 육경한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육경한 혼자라면 소원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소원의 몸 상태로는 유진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육경한 옆에 있으면 어느 날 소원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해도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방민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민아는 사악한 속내를 숨기는데 능했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가지면 유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제거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소원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유진이 표적이 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서현재의 개인 번호를 보내왔다. 소원이 얼른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번 걸어도 받지 않자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서현재 씨, 나 소원이에요. 보면 회신해요.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소원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일 뒤면 결혼인데 그때 가서 서씨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려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옆에 있던 사람이 좋다고 손뼉을 쳤다.“그래. 그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인플루언서가 된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자.”순간 구경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소원의 얼굴을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육연주는 이런 상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꼬리 치길 좋아하는 소원을 인터넷에 폭로해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세간에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소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 눈에 육연주는 서현재의 와이프였고 서씨 가에서 인정한 며느릿감이었지만 소원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런 소원이 서한 그룹까지 찾아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하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씨 가문에서 육연주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육연주는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 금융은 일절 몰랐기에 서한 그룹의 경영에 간섭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연주는 육씨 가문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었다.“육연주 씨, 서현재와 얘기 나누러 온 것뿐인데 뭐가 방해된다고 그래요.”소원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가방을 들어 소원에게 던졌다.“정말 여간 뻔뻔한 게 아니네요. 이런 수모를 겪어도 그런 말이 나와요?”소원이 옆으로 쓱 비키며 공격을 피했지만 육연주는 소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보디가드를 불러 소원을 끌어냈다.“빌어먹을 년.”육연주는 소원이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벌건 대낮만 아니었으면 정말 소원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결혼이 코앞이라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으니 여기서 멈췄지 아니면 정말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거기.”육연주가 데스크 직원들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경고했다.“오늘 일 현재 씨 귀에 들어가는 날엔 당신들부터 해고할 거야.”육연주는 이미 서한 그룹의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데스크 직원들은 육연주가 언젠간 서씨 가문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 대꾸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소원은 서현재가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이성을 잃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심이 든 순간 조사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태의 음모를 알아차릴 것이다.서진태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만 해도 서진태를 경계할 수 있으니 너무 끌려다니진 않을 것이다.그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 씨?”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찰싹.소원은 여자가 날리는 귀싸대기를 제대로 맞아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여자가 포기하지 않고 귀싸대기를 더 날리려는데 소원이 얼른 손을 낚아챘다. 그러자 여자가 오만하게 데스크 직원에게 명령했다.“서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 얼른 잡고 때려요.”데스크 직원이 넋을 잃었다.비서실에 전화를 넣을 때 미래의 사모님도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서가 사람을 일단 남겨두라고 하자 데스크 직원은 소원이 말한 것처럼 서현재와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전 여자 친구거나 떨어지지 않고 질척거리는 외간 여자 같았다.소원은 그제야 내려온 사람이 육연주임을 알아봤다.데스크 직원이 다가와 도와주려는데 육연주가 귀싸대기를 두 방 날렸다.“일을 왜 이따위로 해요? 회사에 누굴 들이고 누굴 들이지 말아야 할지 몰라요?”데스크 직원이 얼굴을 감싸 쥔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위에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인데 이런 수모를 겪을 줄은 몰랐다.육연주는 그저 데스크 직원을 이용해 기선을 제압하여 미래의 서한 그룹 사모님이 누군지 알려주려 했다. 선제공격이 제일 타격감이 큰 편이다. 육연주는 오늘 모든 사람에게 서현재의 와이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감히 서현재를 넘볼 사람이 없을 것이다.“소원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내가 그날 분명히 경고했죠. 현재 씨 유혹할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데 회사까지 찾아와요? 정말 너무 뻔뻔하네요.”육연주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소원은 볼이
소원은 외교팀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전화했다. 외국인이라 인맥이 매우 넓었기에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서씨 가문이 밖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는지, 그리고 맏며느리가 임신했는지만 확인하면 아까 들은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소원은 사실 서현재가 기억을 잃은 게 어찌 보면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서씨 가문에서 서현재를 해치지 않고 다리까지 고쳐줬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그 모든 걸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진실이라면 서씨 가문은 제일 큰 악마 소굴이었기에 빨리 서씨 가문에서 도망쳐야 했다.불안한 마음을 안고 며칠이나 기다렸지만 조이는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한시름 놓고 그들이 술에 취해 헛소리한 거라고 생각하려는데 조이가 소식을 보내왔다.“소원, 전에 말했던 거 조사해 봤는데 확실히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더라고요. 서씨 가문 맏며느리도 회사 관리에 참여했고 얼마 전에 쌍둥이를 낳았대요.”모든 게 들어맞았다. 소원은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했다.서현재가 자신을 벗어나 원하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이용하려 한다면 서현재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소원은 영숙에게 반차를 올리고 차를 잡아 서현재가 있는 회사로 향했다. 서현재의 번호가 없어 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차가 서한 그룹에 도착하자 소원은 바로 데스크로 뛰어갔다.“안녕하세요. 서현재 씨를 만나려고 왔어요.”“안녕하세요. 예약은 하셨나요?”데스크 직원이 물었다.“아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예약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데스크 직원이 말했다.“저 서 대표님과 친구예요. 전화해서 소원이 급한 일로 찾아왔다고 잠깐 내려오라고 하면 돼요.”“죄송합니다. 예약한 손님만 접대하는 게 저희 원칙입니다. 더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네요.”데스크에서 바로 거절했다. 작은 회사에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 서현재를
“우리 아빠가 말해준 거야. 외국에서 장사할 때 서씨 가문과 접점이 있었는데 우연히 서씨 가문 사람을 만나서 물어본 거래. 그래도 함부로 외부에 알리지는 마. 나도 어르신에게 밉보이긴 싫거든. 무서운 사람 같아.”“나도 알아... 걱정하지 마. 나까지만 아는 걸로 하고 절대 외부로 얘기하지 않을게.”소원은 서씨 가문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 몰랐다. 역시 소원의 직감이 맞았다. 서진태는 서현재를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서현재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저번에 직접 사람을 불러 서현재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든 것만 봐도 서진태가 서씨 가문의 일원인 서현재를 전혀 관심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만약 위층에서 토론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진태가 그동안 행동과 어느 정도 맞았지만 희생양이 된 서현재가 너무 위험했다.소원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고 다리에 힘이 풀려 얼른 벽을 붙잡고 서는데 어쩔 수 없이 소리가 났다.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바로 신경을 곤두세웠다.“거기 누구예요?”소원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가면 위에서 보일지도 모른다. 토론자 중 한 명이 아래로 머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여기서 보고 있을 테니까 빨리 아래 내려가서 봐봐.”소원은 정말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제 납작 없이 잡힐 것이다. 도망간다고 해도 복도 CCTV만 조사하면 누가 엿들었는지 다 조사할 수 있을 것이다.야옹.그때 가냘픈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온몸이 눈덩이처럼 하얀 고양이가 기어 나오더니 우아하게 앞으로 걸어가며 연신 야옹거리며 울부짖었다.위에서 내려다보던 사람이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을 불러세웠다.“됐어. 고양이가 낸 기척이었어.”계단을 내려오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내가 그랬잖아. 이 시간에 여기로 걷는 사람이 없다고.
영숙은 차갑게 말했다.“그 셋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참을 수 있으면 참아. 아니면 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져도 내가 대신 해결해줄 일은 없을 거야!”소원은 바보가 아니었는지라 영숙의 말 속에 담긴 선의를 금세 알아챘다.다음에 또 그 셋을 마주친다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근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처럼 서로 계산만 가득한 곳에서 같은 여성이 보여주는 호의는 그녀에게 작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소원은 영숙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언니. 절대 폐 끼치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영숙은 잠시 멍해 하더니 어딘가 어색한 듯 담배를 끄며 고개를 돌렸다.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면서 넌지시 말했다.“미친 거 아니야? 너 도와주는 거 아니라니까.”소원은 영숙이 떠난 후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영숙은 선한 사람이었다.그녀가 왜 자신을 돕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심과 가식은 구분할 수 있었다.그렇게 씻고 나서 소원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걸어가던 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서현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정말 현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번 기억 상실이 현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만약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서현재는 분명 싸울 것이었다.서씨 가문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통제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뒤편 문 근처에 도착했다.그 순간, 2층 창문 쪽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희미하게 들리던 대화 속에 ‘서씨 가문’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소원은 멈춰 서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로 했다.“서씨 가문에서 요즘 그 사생아를 꽤 중시하는 것 같더라.”“사생아라니? 그 자식은 사생아보다도 더 낮은 존재야. 사생아조차도 못 되는 잡종이지.”“야,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 서씨 가문 어르신이 그 사람을 중히 여긴다는데... 네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