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그녀의 찢어진 목소리에서 남자의 이름이 하나씩 튀어나왔다.공기는 점점 희박해지고 그녀는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머릿속에 그녀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케익을 들고 그녀의 생일 축하하는 모습이 그려졌다.“소원아, 소원 빌어야지!”어머니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귀한 보물처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가 죽으면 어머니는 살아갈 수 있을까?그녀의 눈에서 커다란 구슬이 툭툭 떨어졌다.그녀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걸까?육경한의 이글거리는 눈은 악마를 집어삼킨 듯 했다. 손에 힘이 점점 강해져 소원의 가느다란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그는 자신이 너무 우스꽝스러웠다.이 여자에게 연민을 느껴 밤새 바보처럼 그녀를 걱정했다.아버지가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투신자살했던 그때, 그의 인생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 여자가 어떻게 그를 비웃었는지조차 한켠에 접어뒀다.하지만 이 여자는?그녀는 그가 역겹다고 하고 있다.그때 영상 속과 똑같은 말투로 그가 역겹다고, 멍청하다며 놀림거리가 된 그를 비웃었다...분노가 마치 칼날이 되어 그를 난도질했다.육경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살기 어린 냉소를 지었다.그는 더 이상 그녀를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한 행동은 동정할 받을 가치가 없다.그녀가 죽지 않는 한, 이번 생에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그는 평생 그녀를 무자비하게 괴롭힐 것이다.육경한의 시린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악마처럼 속삭였다.“난 널 평생 괴롭힐 거야.”그녀는 아무 반응 없었다. 풀린 동공과 상기된 얼굴에 육경한은 손을 놓았고 이성을 되찾았다.호흡이 돌아온 소원은 숨을 헐떡이며 산소를 들이켰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침대 시트와 우의를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자신이 꾼 터무니없는 꿈을 떠올렸다.그녀가 잠든 동안 육경한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마치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하지만 그 다정한 육경한은 꿈속에만
“하하. 하하...”소원은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맞았는지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넌 인간도 아니야! 넌 짐승이야!”“날 죽도록 괴롭히고 싶은 거지?”“네 소원을 들어줄게.”소원은 피를 토하듯 흐느꼈다.그녀는 갑자기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일어나 맨발로 창문으로 달려갔다.육경한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은 이미 창턱에 올라갔다.그녀는 저 아래 바닥을 바라보며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여기가 10층이지? 떨어지면 많이 못생겨 있겠지?”“당장 내려와!”육경한은 다급하게 외쳤다.“이미 너무 못생겨졌어. 이렇게 큰 흉터 때문에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리지 않을 거야...”소원은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마음이 너무 황량했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육경한이 돌아온 이후로 그녀의 생활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그는 그에 대한 그녀의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그는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소원의 눈에 슬픔은 너무 짙어 가실 줄 몰랐다.“난 너에게 미안한 짓을 한 적 없다고 거듭 말했지만, 넌 한 번도 믿지 않았어. 내가 한 말이 거짓이라고 쳐. 근데 육경한 난 널 사랑했었어!”육경한이 겪은 고통을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면 서로 빚진 것이 없게 된다.그녀는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육경한은 가볍게 웃으며 이 거짓말쟁이가 또 자신을 속이려 한다고 생각했다.그녀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절대!더럽고 지조도 없는 이런 여자는 사랑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그의 혀끝이 뼈를 에는 듯한 한기를 뿜었다.“뛰어내리면 한이그룹을 서울에서 영원히 퇴출시킬 것이고 네 부모들도 너의 뒤를 따라가게 할 거야. 그리고 네가 아끼는 사람들이 영원히 고통받으며 너의 죽음으로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살도록 할 거야!”육경한의 눈에 광기 어린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을 집어삼킬 듯했다.그의 허락 없이 그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너무 미운 그
육경한은 적대적인 눈빛으로 말했다.“오냐오냐하니까 아주 멋대로구네?”소원은 화가 난 육경한의 모습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그건 3년 내 결혼 하지 않는 거야. 내가 고상을 떠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연녀란 꼬리표는 달지 않을 거야.”진아연이 매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육경한의 신부가 되어 그녀를 철저히 밟아 버리려는 것 아닌가?그러면 그녀의 뜻대로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누구나 건드릴 수 있는 내연녀는 하지 않을 것이다.육경한은 분노가 치밀었다.“네까짓 게 무슨 자격으로 하라 마라야! 내가 결혼하든 안 하든 넌 내 노리개가 되어야 해!”“육경한, 난 지금 너와 상의하는 게 아니야. 어차피 넌 우리 가문을 놔주지 않을 테니,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그녀의 목소리가 가벼워졌다. 하지만 의미는 무거웠다.“끝까지 가.”육경한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몇 미터 밖에서도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웃음이었다.끝까지란 말을 그는 좋아했다.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좋아.”그는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소원도 망설임없이 그의 손을 잡고 내려왔고 그대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육경한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몸 아래 짓눌렀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다가 아래로 손을 뻗었다.“네가 날 자극했으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어떤 건지 똑똑하게 알려줄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어.”그의 지옥을 그녀가 모두 경험하게 해줘야겠다.더 이상 따스함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차가워졌다.그는 거칠게 움직이며 말했다.“내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해.”반쪽눈만 드러낸 소원은 여전히 요염한 눈빛을 뿜었다.그녀는 육경한의 목을 감고 핏기가 도는 입술로 그의 귓볼을 삼켰다.그리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육경한, 난 이미 지옥이었어.”네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순간부터!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다른 사람이 함부로 날 대하게 한 순간부터!육경한, 난 매 순간 지옥에서 살고 있었어
육경한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비웃었다.“넌 나에게 빌게 될 거야.”하지만 자신이 끝까지 용서를 구하는 그녀를 기다리지 못하게 될 줄을 그는 몰랐다.그는 3년이란 시간이 길다고 생각했고 그녀를 괴롭히기에는 충분하다고 여겼다.하지만 그들은 반년도 넘기지 못했다.소원이 아무런 생기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겼을 때 그는 자신의 목숨으로 그녀를 되찾으려 했다.그 깊은 사람의 감정은 증오의 공허함 속에서 흐려졌다.그는 결국 그녀를 망가뜨리고 말았다....이준혁 사무실.주훈은 병원에서 윤혜인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보고했다.이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조사해.”주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때 이준혁이 그를 불렀다.“그날 생일 파티에 관한 사실이 아닌 내용들도 전부 내려.”사무실을 나선 주훈은 마주 향해 오는 송휘재를 보고 그를 불러세웠다.“LM 회의 당일 대표님 사무실 입구 감시카메라 영상을 복사해 줘요.”잠시 당황한 송휘재는 표정을 숨기며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휘재는 영상이 든 메모리 카드를 건넸다.주훈이 그에게 물었다.“요즘 세희 아가씨를 모시느라 힘들지는 않아요?”송휘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힘들지 않아요. 대표님의 부담을 덜어 드리는 것이 제 일인 걸요.”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께서 앞으로는 더 이상 세희 아가씨의 지시를 들을 필요 없이 회사에 남아서 일을 하라고 했어요.”“왜요?”송휘재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주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회사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요?”송휘재는 황급히 말투를 바꿨다.“당연히 아니죠. 그저 너무 갑작스러워서요.”주훈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난 휘재 씨가 세희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았어요.”“그럴 리가요. 그 여자는 성격도 안 좋아서 하루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에요.”“그래요? 어쨌든 이제 그 사람은 우리와 아무 상관 없으니, 지시를 들을 필요도 없어요.”주훈이 덧붙였다.“이
윤혜인은 억지로 이 사실을 잊으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임세희의 생일 파티 다음 날, 헤어졌다가 재회한 두 연인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는 소식이 쏟아져 나왔고 모든 매체에서 이 소식을 보도했다.또한 생일 파티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좋은 일이 곧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이런 소식이 퍼질 수 있다는 것은 이준혁도 묵인하고 있다는 뜻이다.그의 능력이면 보도를 막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의도적으로 잊고 있었던 일이 다시 제기되었으니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었다.씁쓸한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는 시선을 떨구고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한구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얘기하기 싫으면 얘기하지 마, 난 그냥 네가 예전처럼 행복하길 바래.”윤혜인은 다시 말을 꺼냈다.“선배, 미안해요. 앞으로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 다시 만나지 말아요.”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한구운은 커피잔을 든 손이 통제력을 잃을 뻔했다.하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며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왜 그래? 그 사람이 협박했어?”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선배가 절 만날 때마다 상처받아서 제가 너무 죄송해서요. 모두 나 때문이라 만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윤혜인은 아주 단순했다. 그녀는 그저 지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한구운도 그녀가 백지처럼 순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더럽히고 싶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두렵지 않아.”하지만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선배. 전 이미 다짐했어요.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선배한테 너무 죄송해요. 선배를 더는 해칠 수 없어요.”윤혜인의 단호한 태도에 항상 따뜻했던 한구운의 눈이 차갑게 번쩍였다.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결정했으니 널 존중할게.”“이
그는 차갑게 말했다.“그럼 안 꺼지고 뭐 하는 거죠?”“그건…”한구운은 잠시 멈칫하며 야망을 선명하게 드러냈다.“혜인이는 너무 훌륭하죠. 아주 마음에 들고요.”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마음에 들어요? 스스로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는 게 어때요?”한구운은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이 이렇게 해도 혜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을 거예요.”이준혁은 화가 치밀어올라 하마터면 폭발할 뻔했다.그 말은 두 사람이 방금 그들 부부에 대해 말했단 거야?주먹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풀었다.이 자식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그는 턱을 살짝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우리는 부부고 혜인이는 내 거예요.”한구운은 열받은 남자를 보며 더 자극해야 할 것 같아 장난스럽게 말했다.“주인이 있으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요?”퍽-힘 센 주먹이 한구운을 향해 날아갔다.순간, 한구운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얼굴은 감싸며 최후의 점잖음을 유지했다.이준혁의 분노는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광기로 가득했다. 그의 발이 한구운을 향했다.“그만!”급히 달려온 윤혜인이 두 팔을 벌려 한구운 앞에 막아섰다.“뭐 하는 짓이에요.”한구운을 보호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이준혁은 눈이 가늘어졌다. 심장이 아파왔다.그는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너희들 달콤한 시간을 방해 했어?”“그게 무슨 말이에요?”윤혜인은 큰소리로 비난했다.다른 남자를 감싸 있는 그녀에 이준혁은 평온함을 잃었고 말이 날카로워졌다.“넌 부끄러운 줄도 모르면서 나한텐 말도 못 하게 하는 거야?”얼굴이 하얗게 질린 윤혜인은 숨을 쉬기 힘겨웠다.피곤, 무감각, 실망, 여러 감정들이 얽혀서 그녀는 너무 힘들었다.이미 너무 실망하고 있었다. 실망보다 더한 감정이 있을까?없다.그녀는 몸을 돌려 한구운을 부축했다.“선배, 우리 가요.”“멈추지 못해?”이준혁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는 윤혜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한구운이 막아섰다.
“힘으로 사람을 모욕하지 말아요.”윤혜인은 이준혁이 심했다고 생각했다.선배와 이미 거리를 두기로 했는데 이렇게 다시 그녀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말리지 말고 그가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는가?이준혁은 차가운 눈으로 하찮게 여기며 말했다.“내가 괴롭혔다는 거야? 저 자식이 비겁한 거잖아.”주먹 하나도 못 받아치는 남자는 쓸모없는 놈이었다.그는 이 여자가 지금 뭘 감싸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의 두 눈은 그저 장식품인가?“선배, 가요.”윤혜인은 이준혁을 무시하며 몸을 낮추며 한구운을 부축했다.어차피 아무런 이유 없이 죄명을 씌우는 그에 익숙했고 그에게 논리적으로 말해도 아무 소용없었다.“못 가!”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의 힘은 너무 강했다.“감히 내가 여기 있는데 다른 남자와 가겠다는 거야? 미쳤어?”이 순간, 이준혁의 얼굴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방금 웃으며 대화를 하고 서로 감싸는 행동에 그는 그녀를 꽁꽁 묶고 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를 거칠게 잡았다. 그는 혐오스러운 어조로 말했다.“남자 없이는 못 살겠어?”그 모욕적인 말에 윤혜인의 마음 너무 아파 경련을 일으켰다.그녀는 입을 벌렸지만, 여전히 숨을 쉴 수 없었다.살인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지만, 이 남자는 언제나 너무 쉽게 그녀의 마음을 짓밟았다.그녀의 몸이 떨렸다. 그녀는 손목을 비틀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놔!”이준혁은 이미 질투심으로 가득했고 자신의 말이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놔? 남자를 유혹하게 놔두라고? 꿈 깨!”짝-윤혜인의 다른 한 손이 이주혁의 뺨을 세게 때렸다.날카로운 마찰음에 주변은 갑작스러운 정적에 휩싸였다.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내가 그렇게 뻔뻔하고 더럽고 천박하다면서 그렇게 고상한 분께서는 왜 날 놔주지 않는 거죠? 왜 아직도 이혼서류
더 이상 이준혁을 상대하기 싫었던 윤혜인은 그의 소원대로 병실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몇 발작 떼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끌어당기는 느낌과 함께 들어 올려졌다. “이거 놔요!”먼저 꺼지라고 했던 건 이준혁인데, 왜 붙잡는지 윤혜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우리가 법적으로 부부로 남아 있는 이상, 넌 절대로 날 벗어날 수 없어.”윤혜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준혁은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분노한 윤혜인이 발버둥 치며 그의 팔뚝을 물었다. 하지만 이준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혼날 각오해야 할 거야.”철컥하고 병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혜인은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그녀의 눈빛이 경계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문은 왜 잠갔어요?”“혼날 짓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지.”그 말과 함께 윤혜인을 침대에 던져 놓은 이준혁이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윤혜인은 순식간에 양손이 결박된 채 침대 머리맡에 고정되었다. 곧이어 이준혁이 몸을 숙이며 입 맞춤을 하기 위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혜인은 움직임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그의 키스를 피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턱을 잡는 억센 손길에 강제로 고개가 돌려졌다.“뱃속 아기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협조 잘해야 할 거야.”윤혜인은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여자를 이렇게 험하게 다루다니, 당신은 남자도 아니에요!”단추를 풀던 이준혁의 손이 멈칫했다. 곧이어 그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렸다.“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또 증명해 줘야겠어?”윤혜인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이준혁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그나마 자유로운 발로 발차기를 날리며 이준혁을 떼어놓으려 노력했다.“이 나쁜 놈!”하지만 그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도리어 윤혜인이 그의 긴 다리에 깔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아직도 내가 남잔지 모르겠으면, 오늘 제대로 보여줄게.”한편, 한구운은 병실 밖에서 둘이 엎치락뒤치락 사투를 벌이는 소리를
소원은 서현재와 진아연을 만난 사실을 숨겼다.서현재는 이제 육연주의 남편이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모르는데 존재가 신비로운 여자까지 나타났으니 서현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육경한은 무조건 육연주의 편을 들 게 뻔했다. 그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이 적기도 했고 육연주네 가족과 인연이 꽤 깊었다.게다가 소원이 관찰한 데 의하면 육경한은 매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육연주만큼은 아주 잘 챙겼다 아마도 육연주와 육연주의 어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의 말에 잠깐 침묵했다. 소원은 이런 침묵이 불편하기도 했고 육경한에 의해 침대와 벽 사이에 갇혀 있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 맡아야 했다.“술 마셨어?”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한테 해장국 좀 끓여달라고 할게.”소원이 이렇게 말한 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비키자 소원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에 소종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소종이 모은 정보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소원이 선미를 진아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그도 진아연이 이 정도로 얼굴을 갈아엎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가 소원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경계해야 했지만 그때는 육경한도 머리가 복잡했고 죽은 여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바람에 사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그리고 그 진아연이 용케 살아남아 소원을 해치려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진아연이 소원을 해친다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육경한이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사지로 내몰았으니 사랑이 원망으로 변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소종이 병원에 잠복해 관찰한 데 의하면 그렇게 단순한 아니라 진아연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 배후가 도대체 누구길래 진아연을 이용해 육경한을 해치려는 건지, 게다가 그 배후는 진아연을 소원의 모습으로 성형하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진아연은 도망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고 모습
그렇게 소원은 병원을 나섰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그녀는 곧바로 전미영과 아주머니를 보러 갔다.요즘 아주머니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눈을 깜빡이며 간단한 질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비록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 상황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이는 모두 육경한 덕분이었다.그가 국내외의 유명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아주머니를 위한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냈고 그 덕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었고 평생을 전문가로 살아온 이들에게 돈은 큰 유혹이 되지 않았다.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인간관계와 신뢰였다.육경한이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소원은 알고 있었다.소종 역시 은근히 암시를 주며 육경한의 헌신을 그녀에게 알렸다.게다가 소원의 어머니 역시, 한때는 의사들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았던 상태에서 지금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비록 소원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원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과거 소원이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가족도 의지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꼈다.오직 배 속의 아이만이 그녀를 붙잡았다.그때, 혹시라도 자신과 아이가 함께 죽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소원은 그 상황이 어쩌면 해방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전미영, 유진이, 아주머니, 서현재...이제 그녀는 결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이들은 윤혜인과는 다른 존재였다.윤혜인은 그녀가 없더라도 이준혁이 그녀를 충분히 잘 돌볼 것이었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소원이 없으면 정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소원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게 됐네.’그녀의 삶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그 무거움이야말로 일종의 행복이었다.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그녀가 별장
소원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안상철에게 연락한 거 맞아?”진아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소원이 이미 안상철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만약 소원이 안상철을 찾아낸다면 자신 역시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뻔했다.왜냐하면 그녀와 안상철은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육경한에게 접근하라고 명령했던 그 신비로운 인물이었다.진아연은 그 인물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육경한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이로 인해 받았던 처벌은 너무나도 끔찍했다.그날의 기억은 생생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그녀의 팔에서 피를 뽑아내며 했던 말 말이다.“네가 살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그는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에서 피를 한 방울씩 뽑아냈다.그렇게 피와 물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만약 그날 구조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진아연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소원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진아연 같은 사람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진아연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고 그녀는 반드시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진아연은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쉰 듯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알고 싶으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소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뭔데?”진아연은 떨리는 손으로 몸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며 말했다.“이걸 육경한의 음식이나 마실 것에 넣어.”소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죽이려는 거야?”“아니야. 천천히 약화시킬 거야.”진아연은 입술을 꽉 물고 대답했고 소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그 사람 사랑하지 않았어?”“...사랑? 그런 건 이미 끝났어.”진아연의 눈빛에는 분노와 미움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육경한이 소원과 결혼했다는
여자는 의사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서현재까지 데리고 갔다.소원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 따라가려 했지만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어쩔 수 없이 포기한 소원은 이전에 도움을 요청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번에 부탁했던 일, 소식 있어?]친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마침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 여자는 무녀 가문 사람이야.”‘무녀 가문?’소원은 이 이름이 생소했다.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친구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녀 가문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진 원시 부족이야. 그 부족의 무녀들은 주술과 독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수단이 잔인해. 게다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그 말에 소원의 마음속엔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현재 곁에 왜 무녀 같은 사람이 있는 거지? 서씨 가문에서 현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현재를 노리고 있는 건가?’소원은 최근 유진이와 아주머니 일로 정신이 없어서 서현재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더군다나 서씨 가문의 감시가 너무 엄격해서 서현재를 만날 기회조차 잡기 힘들었다.뭔가 심상치 않았다.소원은 방금 녹음한 음성을 친구에게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이 대화 내용 번역해 줄 수 있어?]친구가 답장을 보냈다.[배경 소음이 너무 심해서 지금은 잘 안 들려. 무녀 가문 언어라 내가 알아듣지 못해. 우선 음질을 정리한 뒤에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확인해 볼게.][그래, 부탁할게.][우린 서로 그런 말 필요 없어.]이 친구는 소원이 해외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소원이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친구는 소원에게 깊이 감사하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그때 한 간호사가 다가와 소원을 불렀다.“저기, 병실에 있는 분 아는 분 맞죠? 방금 깨어나셨어요.”소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넣고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갔
그가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려는 이유는 단순히 공부를 시키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육연주가 집에 머무르는 상황에서는 이런 일들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어쨌든 육연주는 서씨 가문의 며느리였다.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진태가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변형된 보호책이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속내를 이지애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이지애는 말이 많고 입이 가벼운 편이라 자칫 잘못하면 이 사실이 새어나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육경한은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방금 하려던 일을 떠올리고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핸드폰 화면에는 ‘아내’라는 이름이 떴다. 얼마 전 혼인신고를 마치자마자 그는 소원의 이름을 이렇게 저장해 두었다.그러나 전화는 한참 동안 울리기만 했고 끝내 받는 사람이 없었다.육경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전원이 꺼져 있었다.얼굴이 굳어진 그는 내선 전화를 눌러 소종에게 지시했다.“병원에 가서 확인해. 사모님 아직 거기 계신지.”소종은 곧바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한편.이지애는 육경한이 전화를 끊자 기분이 매우 나빴다.그녀는 육경한의 새 아내가 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자신과 딸을 외면할 정도로 말이다.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곧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명령했다.“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 알아내.”서울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기반을 닦아온 이지애는 돈만 있으면 사람들을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그녀의 눈에는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어디 한번 보자고. 그 여자한테 대체 어떤 능력이 있길래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대는 건지.’...병원.진아연은 여전히 응급실에서 치료 중이었다.소원은 문밖에서 서현재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괜찮아?”그녀가 물었을 때 서현재
“경한아, 연주 좀 도와줘... 부탁이야.”이지애의 입장에서는 소원이 고소를 철회하는 일쯤은 육경한에게 한마디면 충분한 일이었다.육경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건 반역이나 다름없지 않은가?이지애는 그 소원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배경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분명 어딘가 치밀한 술수를 써서 그 몰래 낳은 아이를 빌미 삼아 육경한을 유혹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지애는 그 여자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육경한은 이미 가족이 거의 없는 사람이니 지금 그녀들과 육경한의 관계는 어떻게 봐도 피보다 진한 관계였다.육경한이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때문에 그녀들에게 등을 돌릴 리 없다고 믿었다.그럴 리가 없었다.한참 후, 육경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누나, 연주가 전에 피아노에 관심 많다고 했잖아요. 제가 이미 국제적인 피아노 대가 이엘 선생님과 연결해 뒀습니다. 연주 나중에 외국에서 그분께 배우면 성격도 좀 가라앉을 겁니다.”이지애는 이 일은 이미 확실히 해결됐다고 여겼다.육경한이 이렇게 말했으니 연주를 돕겠다는 뜻 아니겠는가?그녀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말했다.“경한아, 내가 뭐랬어? 너는 정말 연주에게 최고야. 연주도 너 이 삼촌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존경한다고. 피아노 공부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우선 연주를 당장 풀어줘야지.”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 확신하며 이지애는 기분이 좋아졌다.하지만 육경한의 말은 예상치 못하게 이어졌다.“누나, 연주도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행동이 늘 이렇게 무모한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이번엔 좀 반성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말이에요.”“...”이지애는 육경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연주를 풀어줄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경한아,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방금 연주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어?”“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육
이지애는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뭐라고? 결혼을 했다고? 난 왜 몰랐지?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가 있어? 그럼 민아 씨는?”해외여행을 갓 마치고 돌아온 이지애는 육경한과 방민아의 파혼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여전히 방민아가 육경한의 운명적인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지금까지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 외에 다른 여자가 없었고 방민아는 자신과 딸 육연주를 기쁘게 해주는 데 능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잘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방민아가 육경한의 아내가 되는 건 그녀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지애는 방민아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우리 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육경한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결혼은 조촐하게 했어요. 그냥 혼인신고만 한 거라서 누구도 몰라요.”그는 더 이상 뭐든 요란하게 하고 싶어 하는 나이가 않았다. 무엇보다 설령 자신이 성대한 결혼식을 원한다고 해도 소원이 이를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두 차례나 자멸했던 소원은 서울에서 이미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결혼식을 대대적으로 치르면 그녀의 과거와 관련된 소문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게 분명했다.그건 마치 소원을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위치에 세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하여 육경한은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지애는 기가 막힌 듯 말했다.“경한아, 그게 어떻게 작은 일이니? 네 결혼이 작은 일이라니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야? 민아 씨가 아니라도 아무 여자나 데려다가 결혼하면 안 되지 않니?”“아무 여자가 아니에요.”육경한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그 사람은 내가 오래 고민하고 선택한 사람이에요.”속으로는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걸 사촌 누나 이지애에게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그는 대화를 본론으로 돌렸다.“연주 문제는 이미 확인했어요. 연주가 폭행에 가담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약물을 쓴 건 아니었으니 처벌은 그렇게 무겁지 않을 거예요. 아마 15일
이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소종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소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그래도 오랜 시간 육경한을 보좌하면서 익힌 대로 뭐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 마음에 걸린 말은 모두 털어놓았다.“대표님, 어쨌든 전 사모님이 서현재 도련님과 대화하는 걸 봤습니다. 둘이 약속해서 만난 건 아닌 것 같지만 사모님께서 꽤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더군요.”소종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대표님, 사모님께 그렇게 잘해주는데 사모님은 그걸 조금도 몰라주는 것 같아요. 서 도련님하고는 아직도 뭔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 같고 정말...”“그냥 우연히 만난 거겠지. 별일 아니야.”육경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소종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소종은 육경한이 소원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는 모습에 놀랐다. 심지어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니 말이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런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 특별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행동은 없었어요. 다만 제 생각엔 사모님이 대표님과 결혼했으면 서현재 도련님과는 거리를 두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특히 서현재는 다른 남자들과는 성격이 달랐다.그는 과거에 소원을 데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애매한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소원이 육경한과 결혼한 것도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한 결과였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소종은 이런 상황이 결국 다시 불씨가 될까 걱정했다.“게다가 대표님, 제가 보기엔 서현재 도련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소종은 말을 이어갔다.“사람을 보는 눈빛이 너무 차갑고 깊어요. 누구를 봐도 같은 표정이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엔 사모님과 무슨 갈등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굴더군요. 마치 나무 인형 같았습니다.”“서씨 가문에서 전에 서현재 도련님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하지만 기억을 잃어도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결국 미우 그룹의 복지와 대우는 업계에서 최상위급이었고 요즘같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이런 직장을 떠나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소종은 이미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을 정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방씨 가문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없었다.그는 육경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남자는 여전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지했고 그 모습은 단정하고 매력적이었다.“대표님, 방 대표님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태도로 봐선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밖에 퍼진 소문들은 전부 방씨 가문에서 흘린 겁니다.”소종이 말했다.“알고 있어.”육경한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소종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고는 참다못해 물었다.“이대로 소문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그럼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육경한은 눈을 살짝 들어 올렸고 소종은 답답한 듯 말했다.“하지만 그들이 퍼뜨린 말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큽니다. 직원들조차 집중을 못 하고 일에 소홀해지고 있어요.”“그게 더 좋지 않나.”육경한은 담담히 말했다.소종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육경한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깨끗하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냉정히 말했다.“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부 팀을 정리할 수 있잖아. 방씨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리하라는 거야.”소종은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그동안 두 가문이 협력하며 방씨 가문과 연결된 사람이 그룹 내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일부는 방씨 가문으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이익을 공유하며 내부에서 세력을 구축했을 수도 있었다.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을 모두 걸러내겠다는 것이었다.“그럼 방씨 가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소종이 물었다.“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이미 기회를 줬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