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죠.”윤혜인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방귀 뀐 놈이 도리어 성을 내니, 억울했다. 윤혜인은 이준혁과 닿아 있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이준혁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가 팔을 휘두른 순간, 한발 앞서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준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얌전하게 굴라고 했지? 아직도 부족해?”윤혜인의 답을 바라며 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준혁은 이 말과 함께 또다시 키스를 몰아붙였다. 거의 혀뿌리가 뽑힐 듯 깊고,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배 속의 아이가 걱정되기도 했고, 윤혜인은 이제 그를 거부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그렇게 한참, 질척이는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윤혜인의 입술 감각이 거의 사라질 때쯤, 드디어 이준혁의 키스가 멈췄다. 그제야 그녀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당신, 미쳤어요?”틈만 나면 키스하고, 침대에 눕히고, 윤혜인은 발정난 짐승처럼 구는 이준혁이 버거웠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고분고분하게 굴었어야지.”행동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경고였다. 감히 딴 남자를 따라가려고 하다니, 좀 전의 상황을 떠올린 이준혁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다음에 또 처신 잘못하면, 아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목줄 차버릴 거야.”“….”“그러게 왜 함부로 딴 남자를 유혹해?”딴 남자를 유혹하다니,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사실 이준혁도 그녀가 의도적으로 다른 남자의 눈길을 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혜인은 그저 너무 예뻤던 죄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준혁의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거 놔요.”윤혜인이 짜증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이준혁은 전혀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준혁은 또 한 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싫은데?”상황이 본의 아니게 이렇게 되긴 했지만, 사실 오늘 이준혁은 윤혜인에게 사과할 생각
이준혁은 반드시 뒷동작을 벌인 범인을 잡아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윤혜인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 누구의 오해도, 모함도 없이, 그저 환영만을 받으면서 태어나길 바랐다.이준혁과의 관계는 이제 관심 밖의 일이었다.“이번 일 처리되면, 우리 이제 이혼할 준비 하죠.”좀 전에 둘이 그런 관계도 맺었는데, 이준혁은 윤혜인이 이렇게 차갑게 나올 줄은 몰랐다.속에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며, 이준혁이 입을 열었다.“너 지금 먹뱉 하는 거야? 즐길 만큼 즐겼으니, 버리겠다?”“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예요. 강제로 밀어붙인 건 준혁 씨잖아요. 제가 하자고 했나요?”누굴 바보로 아나, 윤혜인은 이준혁의 말장난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때 이준혁이 갑자기 또 돌발 행동을 했다. 느닷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화풀이하듯, 이빨 자국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크게 힘을 준 것은 아니라, 키스 마크 외에 피 보는 일은 없었다.“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다시는 이런 소리 꺼내지 마!”윤혜인이 그를 뿌리치며 담담히 말했다.“그럼 더 이상 얘기 나눌 것도 없겠네요. 바로 할아버지께 말씀드리도록 할게요.”“감히!”이준혁이 분노하며, 그녀를 협박하듯 노려봤다.“할아버지가 놀라실 일 없도록 잘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저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 분명히 알려드릴게요.”이준혁은 고집스러운 윤혜인의 태도에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너 자꾸 이렇게 제멋대로 굴래?”그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윤혜인은 다시 한번 할아버지한테 말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윤혜인의 단호한 모습에, 이준혁이 입술을 깨물었다.‘하,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이준혁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앞으로 어디에도 나갈 생각하지 마.”윤혜인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절 또 가두기라도 하려고요?”
이준혁은 윤혜인이 임세희를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임세희를 만나왔었다. 하지만 이준혁이 자기 입으로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니, 윤혜인은 그의 성의를 보고 싶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이유가 있으니까, 만나려는 거지.“임세희를 만나는 것에 무슨 사정이요?”이준혁은 임세희를 만나 물어볼 것이 있었다. “당신도 임세희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잖아요. 그 여자가 얼마나 당신한테 시집가고 싶어 하는지도요. 그런데도 끊지 않고 계속 만남을 가져왔죠.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요?”이준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난 한 번도 세희를 여자로 본 적 없어. 그저 입은 은혜가 있으니까, 돌봐줬던 것뿐이야.”“당신, 임세희가 어떤 여자인 줄은 알아요? 그 여자가 당신이 생각한 만큼 과연 순수할까요? 전에 그 여자가 저한테 뭐라 했는지 알려줄까요? 넌 그저 이준혁이 욕구를 푸는 장난감일 뿐이다. 절대로 너랑 아이 낳을 일 없을 거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자기랑 낳으려고 할거고, 넌 그저 할아버지를 잠잠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했죠.”이준혁이 사실 여부를 감별하듯, 말없이 윤혜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윤혜인은 그의 태도가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했던 대로, 이준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임세희가 기고만장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의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이준혁이 입을 열었다.“넌 아직도 외할머니 일 때문에 세희를 의심하고 있겠지만, 송소미가 말했듯이, 그 일은 세희와 연관이 없어.”“그만해요!”윤혜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 겨우 참고 있던 분노가 터져버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준혁이 조금이라도 임세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줄 알았다.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공평한 시선에서 그녀를 바라봐줄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오산이었다. 차라리 말이라도 꺼내지 않았더라면 덜 아팠을 텐데, 윤혜인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이준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임세희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려 미소를 지은 채 다가갔다. 하지만 몸이 여전히 좋지 않았던 탓에 기침이 나오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오빠, 어서 와. 나 오빠를 위해 직접 요리까지 했는데, 한번 먹어볼래?”하지만 그녀의 애교 어린 말투에도 이준혁은 끄떡없었다. “아니, 금방 갈 거야.”임세희의 표정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럼 조금만 같이 먹어줘.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그녀를 지긋이 쳐다보던 이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난 먹었으니까, 너 먹어. 곁에 있어 줄게.”그가 의도대로 움직여주자, 임세희는 매우 기뻤다.이준혁은 기본적으로 임세희한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매번 그녀가 울상을 지을 때마다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그녀는 곧바로 임향숙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준혁이 중간에서 저지했다. 그의 박수 소리와 함께, 주훈이 한 사람을 끌고 와 바닥에 던져 놓았다.이준혁이 임세희의 얼굴을 탐색하듯 바라봤다.“세희야,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임세희는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준혁 오빠, 송 비서는 왜 데리고 왔어? 뭐 잘못했어?”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송 비서가 회사 기밀문서를 빼돌렸는데, 들통나자 도망치려고 했어. 그런데 조사해 보니까 네가 송 비서한테 돈을 보낸 기록이 있더라고.”“난, 난….”임세희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무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그녀의 반응을 본 이준혁이 우아하게 밥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한 가지만 알려주면 돼. 너도 여기에 가담했어?”임세희의 공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출국하라고 돈까지 찔러줬는데, 어째서? 그것도 모자라 꼬리까지 밟히다니, 이 멍청한! 설마 날 불건 아니겠지?’임세희는 극심한 불안감에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이때, 갑자기 임향숙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며 무릎을 꿇었다.
임세희가 다시 울먹이며 애원했다.“이번 일은 아줌마가 지나쳤다는 거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동안 날 돌본 정을 생각해서라도, 오빠가 한발 물러서 주면 안 돼? 이 연세에 감옥 가면 정말 큰일나!”하지만 이준혁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단호히 입을 열었다.“일개 가정부가, 무슨 능력으로 그 많은 돈을 송 비서한테 넘겨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예요.”5천만 원, 송휘재가 받은 돈은 절대 적지 않았다. 금액만 본다면, 임향숙이 노후 자금으로 모아뒀던 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임향숙이 임세희를 각별히 생각한다고 해도, 노후 자금까지 배팅한다는 건 지나쳐 보였다. 그러니 임세희의 지갑에서 돈이 나왔을 게 뻔했다. 이준혁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믿지 않았다.임세희는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지며, 옥구슬 같은 눈물을 후드득 떨궜다.“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내 꼴을 봐, 오빠. 일상생활도 하기 힘든데, 언제 그런 짓까지 꾸몄겠어?”이때, 옆에 있던 임향숙이 엉금엉금 임세희를 향해 걸어왔다.“아가씨,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몰래 아가씨 물건을 훔쳐다가 돈으로 바꿨어요. 저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둘의 장단을 지켜보던 이준혁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임세희에게 물었다.“세희야, 진짜야? 생각 잘하고 대답해야 할 거야. 이번이 너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어.”임세희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어떤 대답을 해도 지금 상황에 정답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주훈이 조사를 시작했다는 얘기는 어제 송휘재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5천만 원은 그가 임세희를 불지 않겠다는 대가로 받아 간 것이었다. 아무리 강도 높은 조사가 있더라도 굳게 입 다물겠다는 전제가 깔린 대가였다. 심지어 임향숙과 임세희는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해 말을 맞추기까지 했다. 임향숙은 임세희에게 모든 것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면 될 것이라 말했었다.그때까지만 해도 임세희는 사태의
이준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임세희를 밀쳐냈다.“L국의 저명한 교수한테 연락 넣어 놨으니까, 널 치료할 방법이 있을 거야.”그 말을 들은 임세희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사실 그녀의 병은 진작에 나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병약한 척할 수 있었던 건, L국에서 가짜 증상을 만들어내는 약을 맞은 덕분이었다. 모든 것은 이준혁의 믿음과 관심을 얻기 위한 계획된 행동이었다.그런데 L국의 의사한테 진찰받으라니, 들킬 게 분명했다.임세희가 다시 눈물을 터트리며 말했다.“오빠, 여기도 치료 잘해. 고통도 덜한 편이고, 난 여기 치료가 편한데….”이준혁이 차갑게 답했다.“세희야, 난 네가 빨리 좋아지길 바라. 이건 너의 동의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야.”그가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임세희가 아무리 고집부린다고 한들, 무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오랫동안 계획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임세희는 이번 기회를 핑계로 삼아 이준혁과 함께 출국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둘을 떨어뜨려 놓으면 분명 이준혁도 마음을 돌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했다.임세희가 다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이준혁에게 말했다.“내가 건강해지고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면, 어머님도 분명 좋아하시겠지?”사실 임세희는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임신으로 이준혁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윤혜인이 아이를 통해 이준혁의 관심을 얻은 것처럼, 임세희도 아이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돌아온 것은 이준혁의 시큰둥한 반응이었다.“치료 잘 받고, 잘 살아.”이 말의 뜻을 임세희가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임세희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그럼 우리 언제 떠나?”“삼 일 뒤, 도착하면 아버님이 마중 나와 있을 거야. 수술 무사히 잘 마쳐.”“그럼 오빠는 같이 안 간다는 거야?”
임세희는 무척 당황했다.‘그, 그,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얼마나 철저했는데, 들켰을 리 없어! 이건 함정이야!’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 정말로 오빠한테 미안한 짓 한 거 없어. 내가 얼마나 오빠를 좋아하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에, 이준혁은 헛웃음이 났다.“내가 인하 마을에서 돌아오고 나서, 검사하라고 윤혜인을 보냈던 그 병원 원장, 너의 아버지랑 오래된 동창이시더라? 그리고 무명으로 내게 보내진 그 사진들, 출처가 어딘지… 굳이 내 입으로 밝혀야 해?”임세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준혁이 다 알고 있었을 줄이야,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인정하기엔, 정말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눈물을 터트리며 이준혁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내가 한 일 아니야. 나 아무것도 몰랐어. 정말 나랑 상관없다고! 제발 나 좀 믿어줘, 오빠!”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준혁의 차가운 외면이었다. 처음 주훈의 보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이준혁도 쉽사리 믿지 못했다. 한때 그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몸도 아끼지 않던 소녀, 위험한 물속에서도 포기하지 말라며 다독이던 소녀, 그 아름다운 소녀는 도대체 어디 갔단 말인가?김성훈의 말이 맞았다. 여자가 한번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미칠 수 있는지, 고려하지 못한 이준혁의 탓이었다.그의 표정이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본 임세희는 크게 절망했다.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에게 애원했다.“그래, 아줌마… 다 아줌마가 한 짓이야. 나랑 상관없다고!”이준혁이 눈가를 가늘게 뜨며 차갑게 말했다.“세희야, 네가 이번 일을 아줌마한테 떠넘기고 잘 넘어갔다 쳐.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이 정도로 넘어가는 건, 너에 대한 내 마지막 예우야.”이제 이준혁은 임세희에 대한 어떠한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렇게 한때 아름다웠던 소녀는, 그의 마음에서 완전히 죽어버렸다.이준혁이 오만한 표정으로
하지만 임세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발걸음을 멈춘 이준혁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뒤돌아봤다.“한 번뿐인 인생, 너의 선택이지, 내 알 바는 아니야. 수술까지는 내가 그동안의 정을 봐서 준비했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마.”임세희가 수술받든, 말든, 그가 결정을 바꿀 일은 없을 것이다.“뭐라고?”임세희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얗게 질렸다. 오직 그녀만 바라보며, 다정하게 굴던 완벽한 왕자님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임세희는 이준혁이 오늘따라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아아악!!!!”그녀가 아무리 소리 높여 운다 한들, 바뀌지 않을 현실이었다. 임세희는 실성한 사람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다 거짓이야. 다 거짓이라고! 오빠가, 준혁 오빠가 나한테 이럴 리 없어! 오빠가 날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데…. 다 윤혜인 탓이야! 윤혜인 배 속에 있는 그 애만 아니었어도!”악독한 표정을 지은 임세희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이때, 갑자기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세희는 설 힘도 없어 기어가 전화를 받았다.한참 대화가 오갔고, 임세희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계획을 변경해야겠어. 좀 더 독하게 가자.”전화를 끊은 임세희 얼굴에 소름 끼치는 미소가 맺혔다. ‘준혁 오빠는 반드시 내 것이야 해! 윤혜인, 넌 이제 끝장이야!’한편, 윤혜인은 병원에 갇힌 채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를 가던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니, 그녀는 무기력함에 일찍 침대에 누웠다. 윤혜인은 자기 전 꼭 에어컨을 끄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 유난히 더웠던 날씨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잠결에 따뜻한 것을 찾아 움직였다. 그런데 마침, 무언가 뜨끈한 것이 옆에 닿았다. 윤혜인은 점점 그 알 수 없는 것에 파고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하고 깊은 잠이 쏟아졌다.이준혁은 온밤 윤혜인 전용 난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녀의 잠버릇이었다. 윤혜인은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