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미 죽었나요?”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당황했다. 그에게 윤혜인은 너무 착해서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이준혁의 표정에 윤혜인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대신 대답할게요. 아직 안 죽었죠? 그렇다면 무엇으로 당신이 안 그럴 거란걸 보장할 수 있죠? 다음에도 그녀가 이런다면요? 그녀를 내버려두고 저를 선택할 건가요?”“그게 아니라 혜인아, 난...”흥분한 윤혜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아니! 당신은 절대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이건 내 아이에요. 스스로 책임질 수 있으니, 당신은 상관하지 않아도 돼요. 이혼계약서는 이미 도장찍었고 1달 후에는 이혼할 거라고 어머님과도 약속했어요. 며칠만 참으면 당신은 자유로울 수 있으니...”윤혜인은 아니꼽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더 이상 애쓰지 말아요.”분명히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지?또다시 임세희를 선택했을 때 그는 이미 그들의 금이 간 부부관계를 완전히 깨뜨렸다.그녀는 물러나기로 결심했고 그들을 축복해 주기로 했다.그들에게 걸림돌인 자신이 사라지면 된다.굳게 다문 이준혁의 입술이 한참 후 벌어졌다.“싫어.”“당신에게 거절할 자격이 있어요?”윤혜인의 차가운 웃음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내 이 심장은 당신이 직접 짓밟은 거예요.”둘 사이에 어떠한 회유의 여지도 없었다.이번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시는 믿지 않을 것이다.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을 것이다.상처로 가득한 마음은 더는 견딜 수 없다.윤혜인의 말은 칼날이 되어 이준혁의 심장에 내리꽂혔다.윤혜인이 단단히 결심한 것을 느껴졌지만 그는 손을 놓기 싫었다.그녀가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생각만으로도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그녀를 안으려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윤혜인이 몸을 피했다.이준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보상해 줄게. 반드시 보상해 줄 거야.
이준혁은 멈칫하며 해명했다.“할머니께서 그런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세희는 침대에 누워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에 가담할 수 있다는 거야?”듣고 있던 윤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거 봐요. 당신의 맹세는 아무 가치도 없어요.”이준혁이 임세희에 대한 믿음은 이미 뼈에 새겨진 것이었다.임세희와 연관 있다고 그녀가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즉시 조사하는 대신 임세희를 대신해 변명하고 있지 않는가?“네가 할머니를 잃은 마음은 이해해. 그러니 그런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소미로부터 만족스러운 해답을 가져다줄게.”“됐어요.”너무 우스웠다.할머니의 죽음도 임세희의 한 개 손가락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이렇게 견고한 자리를 자신이 어떻게 넘볼 생각을 했는지, 자신이 임세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했을까?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이준혁은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느낌이다.당황한 그는 그녀의 거절을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그는 그녀를 품속에 와락 껴안았다.“혜인아, 내가 너의 마음을 돌려놓을 거야. 시간을 줘.”윤혜인은 발버퉁쳤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그녀의 마음은 이미 재가 되었다.“제발 날 놓아줘요. 이혼은 서로에게 좋아요.”“안돼.”이준혁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절대 안 돼. 꿈도 꾸지 마.”윤혜인의 말투에는 짙은 비웃음이 깔려 있었다.“이미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들판에 피어 난 꽃도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하다니 너무 욕심이 과한 거 아니에요?”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이 말하려는데 윤혜인 그를 밀쳤다.“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 이혼 꼭 하고 말겠어요. 당신 가문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면 당장 도장 찍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윤혜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녀는 확고하고 말했다.“이혼 소송을 할 거예요.”이건 진흙탕 싸움을 하겠단 뜻이었다.그야말로 빅이슈일 것이다.이준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야?”그들이 법정 싸움까
이준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윤혜인은 이을 악물었다.“이혼하지 않으면 아이를 지울 거예요.”그녀는 마음속으로 힘껏 ‘퉤퉤퉤’ 하며 아이에게 사죄했다.[아가, 진심이 아니야. 엄마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혼하고 싶어서 그래. 엄마는 널 끝까지 책임질 거니까. 화내지 말아줘.]순간, 이준혁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는 분노했다.“그러기만 해 봐 어디!”윤혜인은 강경하게 말했다.“당신에게 통제당하지 않을 거예요. 내 아이이고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요.”이 이혼은 꼭 하고 말 테다.영원히 절대적인 선택을 받지 못하는 느낌은 너무 최악이었다.그녀는 한번 두번 반복되는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분노가 쌓인 이준혁이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전에 본적 없는 살기였다.“내가 안된 다면 안 되는 줄 알고 벗어나려고 꿈도 꾸지 마.”...병실 밖.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는 임세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송소미 이 바보 같은 년이 아이를 처리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오빠가 아이 존재를 알아채기까지 했다.큰 공을 들여 오빠를 붙잡고 해외에서 3일 더 머물렀는데 자신이 깨어나기도 전에 오빠는 이미 귀국해서 그녀도 바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그녀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오늘 들은 그녀는 특별히 병문안을 온 척하며 방문해 윤혜인을 자극하려 했는데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오빠는 왜 이혼 하려 하지 않는 걸까?그리고 어떻게 저 년이 자신을 의심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화가 난 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휴지통에 버리고 자리를 떠났다.임향숙이 그녀에게 물었다.“아가씨, 이대로 돌아가게요?”“안 가고 여기서 오빠가 저년을 잡는 거 지켜볼까요?”그녀는 화를 내며 덧붙였다.“그녀가 죽었으면 좋겠어요.”‘그녀’가 누구를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 들을 수 있었다.임향숙은 그녀를 위로했다.“아가씨,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그게 뭐죠?”“3개월 전에 대표님이 거의 한 달을 L 국의 계열사에 머
문현미가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이준혁을 나무랐다.“임신한 몸이야. 여기서 화를 돋우지 말고 의사 선생님한테서 초음파 결과 가져와.”문현미는 자신의 계획이 있었다.남자는 여자보다 세심하지 못한 법이다.피검사에서 임신을 확인한 후 그녀는 초음파검사를 시켰다.첫 초음파 사진을 이준혁이 받게 하여 아기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시키면 꼿꼿한 저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와이프를 아끼게 될 것이다.윤혜인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본 이준혁도 더 이상 대립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렸고 의사에게로 향했다.의사는 그에게 초음파 사진을 건네며 당부했다.“임신 15주이지만 발육이 더뎌서 영양에 각별히 신경 쓰세요.”의사를 뚫어지고 바라보는 이준혁의 얼굴이 험하게 변했다.“몇 주라고요?”그의 눈빛에 의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초음파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더듬더듬 대답했다.“십, 십오 주요...”주먹을 쥔 이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생긴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어떻게 15주란 말인가!그때, 그는 회사 계열사 일을 처리하느라 거의 한 달은 돌아오지 못했다.병실.죽을 들고 있는 윤혜인을 바라보던 문현미는 그가 들어오자,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받았어?”“네.”차갑게 대답하는 이준혁은 저기압이었다.하지만 문현미는 신경 쓰지 않았다.몸을 너무 급히 일으킨 탓에 그녀는 휘청거렸고 이준혁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문현미는 워낙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요 며칠 윤혜인과 함께 거사를 치르느라 무리했던 것 같다. 이준혁은 집사에게 문현미를 집으로 모시라고 지시했다.하지만 문현미는 거절했다.“내가 혜인이를 돌봐야 해.”이준혁이 차갑게 말했다.“내가 돌 보면 돼요.”두 사람이 함께 있길 바라는 문현미여서 마지못해 동의했다.그녀가 떠나기 전 이준혁이 당부 한마디 했다.“혜인이가 임신한 건 당분간 할아버지께는 비밀로 해요.”문현미는 흠칫했다.“할아
이준혁의 눈에는 그녀가 켕기는 것이 있어서 망설이고 있다고 여겼다.이준혁은 실망감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그래서... 그래서 네 아이라고 했군.”“그게...”윤혜인은 무의식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미친 듯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분노했다.“해명해 봐! 어디 한번 해명해 보라고!”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너무 강해서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이준혁의 행동은 둘 사이에 거론할 믿음 따위 없다는 것을 알게 했다.그래서 이준혁은 문현미더러 할아버지께는 비밀로 하자고 한 것이다.초음파를 받아 든 그는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를 불신하고 있었다.이왕 그렇게 믿고 있는 거라면 무슨 해명이 더 필요한가?그녀가 뭐라고 해도 그는 믿지 않을 텐데 말이다.그녀의 눈가가 살짝 젖어 들었다. 그녀는 이준혁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할 말 없어요.”“하!”이준혁은 갑자기 처량하게 웃었다.“그 정도로 내가 미웠던 거야? 그래서 거짓말 한마디도 하기 싫어? 네가 임신한 걸 알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넌 모를 거야!”윤혜인이 임신한 소식을 듣고 기뻤던 마음과 그 꿈이 산산이 부서짐으로 인한 분노는 정비례했다.그는 여태 윤혜인이 마음만 떠난 것이라고 생각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돌릴 거라고 다짐했다.그런데 인제 와 보니 그녀는 몸까지 더러워진 것이다.3개월?허!지난 3개월 동안 그녀와 몸을 섞은 차수를 떠올리니 갑자기 너무 역겨웠다.깨끗한 여자를 좋아하는 그는 지금 너무 더럽다고 느꼈다.이준혁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그놈이 누구야!”이불을 잡고 있는 윤혜인은 얼굴이 일그러졌다.점점 다가오는 이준혁은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한 씨야? 아니면 새로 만난 내... 삼촌?”빈소에서 두 사람이 악수하던 장면과 의미심장한 내뱉던 이신우의 모습이 떠오른 이준혁은 한기를 뿜어내며 말했다.“그렇게 몸을 놀리고 싶었던 거야? 야수도 가려가며 먹이를 사냥해. 넌 어떻게 이
이 순간, 윤혜인은 이준혁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살기를 확실하게 느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되레 자신의 가는 목을 조금 더 빳빳하게 치켜들었다.만약 이준혁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으로 그녀가 그를 영원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절대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윤혜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하지만 이준혁의 손은 새하얀 윤혜인의 피부에 닿기 전에 흠칫했다가 뒤에 있던 벽에 강하게 내리꽂았다.쿵!거대한 마찰음이 들렸다. 윤혜인이 눈을 떴을 때 이준혁의 얼굴은 코앞에 있었다. 그의 손등은 피범벅이 되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꽉 잡았다.“윤혜인,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 일부러 날 화나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이준혁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지만 등은 꼿꼿하게 세웠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준혁처럼 평생을 고고하게 살아온 사람은 절대 상대방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그는 자신을 배신한 상대방이 역겹고 더럽게 느껴질 것이다.하지만 윤혜인은 그가 원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이준혁이 한번 또 한번 임세희를 감쌀 때마다 점점 차갑게 식어버렸다.이준혁의 분노가 지금 그녀가 느끼는 분노보다 더 할까?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함께 생활했는데 그는 윤혜인에 대한 믿음이 추호도 없다.검사 결과지 하나로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고 있고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심지어 이준혁은 다시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으니 뱃속의 아이는 윤혜인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그녀는 뱃속의 아이까지 잃으면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이준혁은 결국 오랫동안 함께 하지 못할 것이고 그때가 되어 윤혜인이 이씨 가문의 핏줄을 데리고 떠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울 것이다.잘못된 검사 결과가 누군가가
고급 외제차는 순식간에 스카이 별장에 도착했고 윤혜인을 안고 차에서 내린 이준혁은 경비실을 지나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이 여자는 스카이 별장을 단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게 해.”윤혜인을 가두겠다는 이준혁의 말에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다음 순간, 큰 침대에 윤혜인을 내려놓은 이준혁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화들짝 놀란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준혁의 뺨을 내리쳤다.팍!순식간에 뺨을 맞은 이준혁은 흠칫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꽤 가까웠기에 윤혜인이 힘을 많이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준혁 얼굴은 조금 얼얼했다.이준혁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지더니 윤혜인의 턱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왜? 이제 연기하는 척도 귀찮아? 네가 이 침대에서 신음소리를 몇 번이나 냈고 나에게 몇 번이나 애원했던지 기억 안 나? 네가 그렇게 야릇하게 몸을 배배 꼬았던 걸 보면 그 남자가 널 만족시키지는 못했나 보네?”이준혁은 가벼운 말투로 듣기 거북한 말만 골라서 했다. 내면에 있던 야수가 그의 점잖은 가면을 찢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잔인하고 난폭했다.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그의 손목을 꽉 물었고 갑작스럽게 느껴진 통증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이준혁은 윤혜인의 턱을 더욱 꽉 잡았다.“입 떼!”하지만 윤혜인은 끝까지 입을 떼지 않았으며 되레 더욱 꽉 물다가 새빨간 피가 흐르는 걸 보고서야 놓아줬다.그녀의 입술에는 이준혁의 피가 묻어 있었고 차오르는 분노에 몸을 덜덜 떨었다.“이준혁 씨, 날 더럽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왜 그렇게 더럽고 역겨운 나에게 손을 대는 거예요?”표정이 확 굳어진 이준혁은 그녀 곁에 떨어진 핸드폰을 바닥에 홱 던졌다.“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가 모든 걸 알고도 너에게 손을 댈 거 같아?”윤혜인은 산산조각이 난 핸드폰을 보며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그녀는 울컥하는 마음에 이준혁에
말을 하던 이준혁은 윤혜인이 보는 앞에서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지금 당장 AT 투자은행 한구운 그 사람의 근 1년간 행적을 확실하게 알아와. 그리고 그 사람에게 사람 두 명 붙여서 절대 서울을 떠나지 못하게 해.”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살짝 당황했다.애초부터 몰래 만나는 남자 같은 건 없기에 이준혁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윤혜인은 순조롭게 이혼하기 위해 일부러 이준혁을 자극한 것이다.이준혁처럼 오만한 남자는 절대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까.하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고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이준혁 씨, 이 아이는 선배와 아무런 연관도 없어요. 그렇게 함부로 남의 생활을 방해하지 말라고요!”하지만 이준혁은 윤혜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별장을 나섰고 윤혜인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너무 불안했다.분노에 이성을 잃은 이준혁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한편, 스카이 별장을 나선 이준혁은 와인바로 향했다.와인바에 도착해보니 술을 미리 주문한 김성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자리에 털썩 앉은 이준혁은 술을 세 잔이나 연달아 마셨다.그러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약은?”김성훈이 약통을 건네자 이준혁은 바로 약을 꺼내 입에 넣더니 술로 넘겨버렸다.이를 지켜보던 김성훈은 눈살을 찌푸렸다.“아니, 너처럼 이렇게 약을 먹고도 살아있는 걸 보면 참 기적이야.”“근데 왜 한 통밖에 없어?”이준혁의 물음에 김성훈이 눈썹을 들썩거렸다.“내가 직접 이 약을 만드는 줄 알아? 나한테 더 있긴 있어. 일단 이것부터 먹고 더 가져가. 적당하게 먹어야 돼. 약은 다 독성이 있어. 이 약이 네 조울증을 치료할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널 죽일 수도 있어.”김성훈이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건 아니었다. 이준혁은 옛날에 꽤 심한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발작할 때마다 심각해져서 국내의 치료는 그에게 큰 효과가 없었다.그때 김성훈이 L 국의 한 교수에게서 이 약을
방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조세진이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움직여요. 움직여요. 방금 움직였어요. 안 죽은 것 같아요. 다행이에요.”조세진은 방민아에게 질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방민아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여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명줄이 어찌나 질긴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며 방민아의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다만 죽지 않았다 해도 조세진 손에 들어가면 반병신이 되어야 나올 수 있었다. 방민아는 조세진이 얼마나 추잡스러운 인간인지 잘 알았다.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소원의 몸이 망가져야 미련도 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방민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게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원이 조세진의 손에 놀아난 걸 알면 육경한도 소원을 역겨워하며 더는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조세진이 별 볼 일 없긴 했지만 추잡스럽게 논다는 소문은 이 바닥에 자자했다. 방민아는 이제 유진도 더는 거슬리지 않아 깊은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이게 다 너희 엄마 덕분이야.”‘명줄이 긴 덕분이지.’...한편, 조세진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애초부터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예정이었다니, 정말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조세진도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방민아가 이렇게 나온 이상 조세진도 똑같이 갚아줄 생각이었다.소원은 아무 말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조세진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이겼음을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을 바라보는 조세진의 눈에는 이제 그 어떤 욕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조세진은 이제 정신을 차렸다. 방민아가 이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는 건 육경한의 마음속에 소원이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런 소원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다시 육경한의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 남자라면 자기가 가지긴 싫어도 남에게 주기는 더 싫
조세진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이렇게 말했다.“민아 씨, 나 골로 보내려고 작정했어요?”방민아가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세진 삼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왜 세진 삼촌을 골로 보내요? 난 그냥 KB 클럽에 선물을 보낸다고 했을 뿐이지 소원 씨가 거기서 출근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소원 씨를 그쪽으로 보내요?”아니나 다를까 방민아는 계획대로 발을 뺐다. 애초에 조세진에게 말할 때도 소원이라는 말은 일절 없었고 선물을 준비했다고만 했다. 이런 일이 생길 걸 대비해 여지를 많이 남겨둔 덕분에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조세진은 이제 소원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방민아는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하고 선해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은 악하기 그지없었다.“방민아 씨,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어떻게 할지나 말해봐요. 이 여자 전에 민아 씨 약혼자랑 붙어먹었던 그 여자 아닌가요? 뭐 시체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해야죠. 육경한이 나 찾아오거나 그러진 않겠죠?”“세진 삼촌, 삼촌도 그 여자가 과거라는 거 아네요. 적어도 지금은 경한 씨도 내게 그 여자를 꺼낸 적이 없어요. 해결하고 싶으면 나랑 얘기하지 말고 알아서 해결해요.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듣기만 해도 너무 끔찍하네요.”방민아는 쓸데없는 말만 이어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다만 방민아의 말투에서 발을 빼겠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앞으로 다른 사람 혹은 경찰이 조사한다 해도 방민아는 농담인 줄 알았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긴 방민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직접 참여한 적이 없었고 조세진 혼자서 벌인 일이라 방민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조세진은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 이 바닥에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여자에게 호되게 데일 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조세진의 행실이 바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업보였다.조세진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방민아와 계속 신경전을 벌였다.“손 떼겠다는 말로
조세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 바닥에 오래 있은 사람 중에 능구렁이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 마음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했다.“너나 방민아나 다 똑같이 나쁜 년이야. 상대가 죽기를 누구보다 바라잖아.”조세진이 콧방귀를 뀌더니 헤벌쭉 웃었다.“둘 다 나를 샌드백으로 쓰겠다는 거잖아.”속셈을 들킨 소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못 믿겠으면 방법 하나 알려줄까요? 이 방법대로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조세진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물었다.“무슨 방법?”“지금 방민아에게 전화해서 내가 죽었다고 해봐요. 어떤 반응인지 보면 바로 알지 않겠어요?”조세진은 소원의 아이디어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속이 텅 빈 예쁜 꽃병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까지 총명했다. 조세진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방민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민아가 전화를 받았다.“삼촌,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평소 방민아는 조세진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대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소원의 처참한 상황을 들으려고 조세진에게 유난히 살갑게 굴었다.조세진은 일부러 당황한 척하며 이렇게 말했다.“민아 씨, 어떡해요...”방민아는 조세진의 말투에 일단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이 조세진에게 당해 반병신이 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 친근하게 말했다.“삼촌, 왜 그래요?”“죽었어요. 죽었어. 내가 소원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죽어버렸어요.”조세진의 연기는 꽤 자연스러웠다. 버벅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정말 진짜 같았다.“...”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조세진은 방민아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의심하기 시작했다.“이제 어떡하죠? 민아 씨... 아...”방민아가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삼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죽은 거예요?”방민아는 소원이 병신이 됐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도 죽일 정도까지 가지고 놀았을 줄은 몰랐다. 예상밖의 일이라 방민아는 일단 대충 관심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조세진이 대답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소원이 이렇게 되묻자 조세진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오만하기 그지없는 방민아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잘 보이려고 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 방민아가 갑자기 이런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게 이상하긴 했다.조세진은 소원의 말에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방민아가 함정을 판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육경한이 물으면 방민아는 얼마든지 발을 빼고 조세진에게 덮어씌울 수 있었다.‘젠장. 방민아 역시 듣던 대로 무서운 여자네.’조세진은 속으로 이렇게 궁시렁거렸지만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지금 이런 말 하는 거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지어낸 걸 수도 있잖아.”소원이 침착하게 말했다.“말은 많이 한다고 효과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해명한다고 해서 다 먹히는 것도 아니고요. 본인이 직접 그 말이 맞는지 마음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죠.”소원은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출발해 해명하면 조세진이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의문만 잔뜩 던져 알아서 생각하게 했다.소원의 말에 거의 넘어간 조세진이 한마디 덧붙였다.“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방민아가 여기로 보냈다고 직접 육경한에게 말하지 않는 거야?”“방민아가 아이로 협박한 거지?”조세진이 이렇게 추측했다. 생긴 건 우락부락하고 다소 멍청해 보였지만 소원은 한 번도 조세진을 바보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서울에 발을 붙이고 이름을 날릴 정도면 절대 바보일 리 없었다.“육경한이 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지금 당장 전화해서 알려. 어떻게 처리하는지 좀 보게.”조세진이 소원에게 전화를 걸라며 몰아세우기 시작했지만 소원이 고개를 저었다.“그 제안 바로 거절해도 되는데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여기 남아있는 것뿐이에요.”방민아가 무서워서 들어온 건 아니었다. 소원이 방민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방민아의 경계심을 풀면서 육경한의 경계심도 같이 풀려는 것이었다.이번에는 절대 저번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풀어나갈 생각이었다. 유진의 양육권을
두 아가씨는 혀를 삐쭉 내밀더니 더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숙은 담배를 절반쯤 태우고는 콧방귀를 뀌었다.“오늘 채워야 할 금액은 채우고 떠드는 거야?”두 아가씨는 영숙의 말에 입을 앙다물며 얌전하게 말했다.“이만 내려가 볼게요.”영숙은 대꾸하지 않았다. 두 아가씨가 물러가고 영숙은 조세진이 있는 룸 앞으로 다가가 서서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속이 탔는지 담배가 다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데이고 말았다. 사실 영숙도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그렇게 문 앞에서 한참 듣던 영숙은 안에서 더 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자리를 떠났다....조세진에게 내동댕이쳐진 소원은 갈비가 부서진 것처럼 너무 아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세진의 더러운 입술이 곧 소원에게 닿으려는데 소원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애초에 왜 육경한에게 당했는지 잊은 거 아니죠?”조세진이 멈칫하더니 되물었다.“무슨 말이야?”소원이 이 틈을 타서 한숨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간 거 육경한 때문이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조세진은 육경한의 이름을 듣자마자 성욕마저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 재수 없는 자식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소원이 이렇게 말했다.“육경한이 조 대표님을 그 땅끝에 있는 마을까지 내려보낸 건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조 대표님을 내쫓는 것으로 내게 잘 보이려고 한 거죠.”조세진은 그때 수영장에서 당했던 것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올라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다 네년 때문이잖아.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일은 없었어.”조세진이 소원의 옷을 벗기며 계속 중얼거렸다.“이제 육경한 곁에는 방민아가 있잖아. 이제 더는 너를 도와줄 리 없으니까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촤락.소원이 챙겨입었던 유니폼이 조세진에 의해 볼품없이 찢어지고 말았다. 소원은 얼른 손으로 찢어진 천 쪼가리를 움켜쥐고 조세진에게 따귀를 날렸다.조세진은 갑자기 날아든 따귀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소원의 머리
조세진은 소원의 턱을 꽉 잡더니 테이블에 내팽개치며 이렇게 말했다.“젠장. 개가 뭔지 몰라? 내가 가르쳐줘?”옆에서 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짜증이 치밀어오른 조세진이 언성을 높였다.“꺼져.”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이 지체할 엄두가 나지 않아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고 안에서 있었던 일을 영숙에게 알려줬다.영숙이 이를 듣더니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자 옆에 있던 아가씨가 얼른 불을 붙여줬다. 영숙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이렇게 말했다.“고작 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다는 소리 아니겠어? 그러면 괴롭힘을 받아도 싸지.”순간 두 아가씨는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영숙이 원칙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만 잘 들으면 위험이 닥쳐도 직접 나서서 도와줬지만 반항하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식으로 혼쭐을 내줬다.선미가 제일 좋은 시범 케이스였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남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영숙이 그렇게 말했는데 들으려 하지 않고 육 대표에게 들러붙었다가 육 대표에게 폭행을 당했을뿐더러 업소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영숙은 그 손실을 다 선미에게 돌렸고 선미도 미친 듯이 일해서 갚았지만 아직도 몇억은 더 갚아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 스폰해줄 사람만 잘 만나도 금방 갚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요새 예쁜 아가씨도 많고 경쟁도 심해 선미처럼 얼굴을 뜯어고친 여자는 잘 먹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 뒤로 영숙은 방 대표와 붙어먹었지만 방 대표는 종잡을 수 없는 데다 여자 사람 친구도 많았다. 선미가 그쪽으로 기술이 좋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절대 방 대표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돈을 들여 소원의 배상을 대신 해주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다들 영숙의 말이라면 어명처럼 받들었다. 영숙은 이 바닥에 오래 있어서 눈치를 잘 살폈고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미리 짚어주기도 했다.아가씨들은 영숙이 고개를
양옆에는 아가씨 한 명씩 서서 술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술 먹는 방식이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기괴했다.소원은 담배 연기에 눈이 매워 앞에 앉은 남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늙은 남자는 소원을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차더니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를 밀어내며 헤벌쭉 웃었다.“오랜만이네요.”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확인한 소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전에 소원을 추행했던 조세진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보낸 사람이 조세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세진은 소원을 뼈저리게 미워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역시 방민아는 아는 게 많았고 수단도 어마어마했다.“거기 서서 뭐 해? 오지 않고.”조세진이 재촉했다.소원이 앞으로 걸어가자 조세진은 소원이 앞에 단 명찰을 보고는 비웃었다.“아, 체리? 이름 하나는 잘 어울리네.”체리처럼 매혹적인 소원을 조세진은 진작에 노리고 있었다. 전에 소원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방민아가 준 선물이 소원일 줄은 몰랐던 조세진은 쾌재를 부르며 소파에 드러눕더니 손가락으로 옆에서 술 시중을 들던 여자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봤지? 보고 똑같이 시중들면 돼.”소원은 역겨움을 꾹꾹 참아내며 거절했다.“같이 술 먹는 건 되는데요, 이렇게 먹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요.”휙.조세진이 술잔을 뿌리자 소원이 피했지만 술이 그대로 소원의 얼굴을 적셨다.“네까짓 게 뭐라고 거절이야? 그 명찰 달았으면 무릎이라도 꿇고 시중을 들어야지.”조세진이 불같이 화를 내더니 옆에 있는 두 여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얘들처럼 무릎 꿇으라고. 알아들어?”“아니요.”소원이 얼굴에 쏟아진 샴페인을 닦아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퍽.조세진이 소원을 발로 걷어차 바닥에 쓰러트리며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그 땅끝에 있는 마을에서 너를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너는 지금쯤 꿈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겠지?”소원은 입에서 단내가 느껴졌지만 이 말을 듣자마자 매서운 눈
마음이 움직인 영숙이 이렇게 말했다.“그러면 네가 알아서 골라. 옷은 저쪽에 있어.”소원이 그쪽으로 걸어가 한참 찾았지만 입을 수 있는 옷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억지로 셔츠에 짧은 치마를 고르긴 했지만 여전히 유혹하려는 의도가 뻔한 옷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매혹적이면서도 그렇게 살이 드러나지는 않은 옷이었다.영숙이 옆에서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나이는 좀 많아 보이지만 싹수는 괜찮네.”같은 옷이지만 소원이 입으면 왠지 모르게 더 매혹적이었다. 영숙처럼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도 소원이 예쁘고 매혹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비록 사장님들은 나이가 어린 아가씨를 좋아했지만 소원은 분위기가 아우라가 독보적이었다. 여우를 닮은 눈은 반달처럼 은은하면서도 깊었는데 한눈에 봐도 돈을 잘 벌어다 줄 상이었다.소원은 영숙이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여기 그냥 술만 마셔주면 되는 데 맞죠?”영숙이 잔뜩 긴장한 소원을 보며 웃었다.“당연하지. 우리 여기 건전한 영업장이야. 사장님들과 얘기 나누면서 술 마셔주고 기분 달래주면 돼.”“네, 알겠어요.”소원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말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신뢰 관계가 쌓이지 않은 터라 무슨 일이 터지면 소원이 알아서 해야 했다.영숙이 한마디 덧붙였다.“이제 예명도 지어야지. 전에 다니던 직원이 체리였는데 퇴사했어. 아니면 그냥 체리할래?”“네, 언니.”소원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이제 뭐라고 불리든 상관없었다. 이곳에 왔으니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소원도 알고 있었다.영숙은 그런 소원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 오늘 소원을 찜한 사람은 그야말로 변태였다. 이렇게 가녀린 몸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얌전하게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영숙이 귀띔했다.“절대 사장님들 화나게 하지 마. 정말 화나면 나도 너 못 도와줘.”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언니.”영숙은 소원이 알았다고 하자 더는 아무 말도 하
소원이 멈칫하자 서현재가 설명했다.“소원 씨 지금 몸 상태로는 술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 약속이 있더라도 조심해요.”서현재는 소원이 약속 때문에 온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숨기지 않았다.“약속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여기서 출근하고 있어요.”“...”서현재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원은 대화가 끝난 줄로 알고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뜨려고 했다.“소원 씨.”서현재가 소원을 불러세우자 소원이 걸음을 멈췄다.“혹시 요즘 돈이 부족한가요?”서현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내 의지로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고마워요.”소원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소원은 이렇게 말하면 서현재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은 바에는 철저히 잃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소원의 일에 끼지 않는 게 서현재의 발전에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지금처럼 기억을 쭉 잃는 것도 어찌 보면 좋은 일이다. 이게 소원이 서현재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일지도 모른다.서현재는 멀어져가는 소원의 뒷모습을 보며 침묵에 빠졌다. 왜 여기로 출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원은 이런 곳에서 출근할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원이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서현재도 과도하게 참여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소원의 삐쩍 마른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소원은 이제 종이 인형처럼 말라 있었지만 허리를 꼿꼿이 편 모습이 겨울에 피어난 매화와도 같았다. 그 누가 뭐라 하든 절대 꺾이지 않는 그런 매화꽃 말이다.덤덤하던 서현재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 여자를 마주칠 때마다 텅 빈 가슴이 조금씩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느낌인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떨치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았다.서현재는 소원의 뒷모습이 금빛으로 빛나는 대문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차에 시동을 걸었다....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 직원이 소원에게 누구를 찾아왔냐며 물었다. 소원이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