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윤혜인은 이준혁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살기를 확실하게 느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되레 자신의 가는 목을 조금 더 빳빳하게 치켜들었다.만약 이준혁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으로 그녀가 그를 영원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절대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윤혜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하지만 이준혁의 손은 새하얀 윤혜인의 피부에 닿기 전에 흠칫했다가 뒤에 있던 벽에 강하게 내리꽂았다.쿵!거대한 마찰음이 들렸다. 윤혜인이 눈을 떴을 때 이준혁의 얼굴은 코앞에 있었다. 그의 손등은 피범벅이 되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꽉 잡았다.“윤혜인,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 일부러 날 화나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이준혁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지만 등은 꼿꼿하게 세웠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준혁처럼 평생을 고고하게 살아온 사람은 절대 상대방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그는 자신을 배신한 상대방이 역겹고 더럽게 느껴질 것이다.하지만 윤혜인은 그가 원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이준혁이 한번 또 한번 임세희를 감쌀 때마다 점점 차갑게 식어버렸다.이준혁의 분노가 지금 그녀가 느끼는 분노보다 더 할까?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함께 생활했는데 그는 윤혜인에 대한 믿음이 추호도 없다.검사 결과지 하나로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고 있고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심지어 이준혁은 다시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으니 뱃속의 아이는 윤혜인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그녀는 뱃속의 아이까지 잃으면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이준혁은 결국 오랫동안 함께 하지 못할 것이고 그때가 되어 윤혜인이 이씨 가문의 핏줄을 데리고 떠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울 것이다.잘못된 검사 결과가 누군가가
고급 외제차는 순식간에 스카이 별장에 도착했고 윤혜인을 안고 차에서 내린 이준혁은 경비실을 지나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이 여자는 스카이 별장을 단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게 해.”윤혜인을 가두겠다는 이준혁의 말에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다음 순간, 큰 침대에 윤혜인을 내려놓은 이준혁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화들짝 놀란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준혁의 뺨을 내리쳤다.팍!순식간에 뺨을 맞은 이준혁은 흠칫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꽤 가까웠기에 윤혜인이 힘을 많이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준혁 얼굴은 조금 얼얼했다.이준혁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지더니 윤혜인의 턱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왜? 이제 연기하는 척도 귀찮아? 네가 이 침대에서 신음소리를 몇 번이나 냈고 나에게 몇 번이나 애원했던지 기억 안 나? 네가 그렇게 야릇하게 몸을 배배 꼬았던 걸 보면 그 남자가 널 만족시키지는 못했나 보네?”이준혁은 가벼운 말투로 듣기 거북한 말만 골라서 했다. 내면에 있던 야수가 그의 점잖은 가면을 찢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잔인하고 난폭했다.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그의 손목을 꽉 물었고 갑작스럽게 느껴진 통증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이준혁은 윤혜인의 턱을 더욱 꽉 잡았다.“입 떼!”하지만 윤혜인은 끝까지 입을 떼지 않았으며 되레 더욱 꽉 물다가 새빨간 피가 흐르는 걸 보고서야 놓아줬다.그녀의 입술에는 이준혁의 피가 묻어 있었고 차오르는 분노에 몸을 덜덜 떨었다.“이준혁 씨, 날 더럽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왜 그렇게 더럽고 역겨운 나에게 손을 대는 거예요?”표정이 확 굳어진 이준혁은 그녀 곁에 떨어진 핸드폰을 바닥에 홱 던졌다.“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가 모든 걸 알고도 너에게 손을 댈 거 같아?”윤혜인은 산산조각이 난 핸드폰을 보며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그녀는 울컥하는 마음에 이준혁에
말을 하던 이준혁은 윤혜인이 보는 앞에서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지금 당장 AT 투자은행 한구운 그 사람의 근 1년간 행적을 확실하게 알아와. 그리고 그 사람에게 사람 두 명 붙여서 절대 서울을 떠나지 못하게 해.”이준혁의 말에 윤혜인은 살짝 당황했다.애초부터 몰래 만나는 남자 같은 건 없기에 이준혁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윤혜인은 순조롭게 이혼하기 위해 일부러 이준혁을 자극한 것이다.이준혁처럼 오만한 남자는 절대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까.하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고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이준혁 씨, 이 아이는 선배와 아무런 연관도 없어요. 그렇게 함부로 남의 생활을 방해하지 말라고요!”하지만 이준혁은 윤혜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별장을 나섰고 윤혜인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너무 불안했다.분노에 이성을 잃은 이준혁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한편, 스카이 별장을 나선 이준혁은 와인바로 향했다.와인바에 도착해보니 술을 미리 주문한 김성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자리에 털썩 앉은 이준혁은 술을 세 잔이나 연달아 마셨다.그러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약은?”김성훈이 약통을 건네자 이준혁은 바로 약을 꺼내 입에 넣더니 술로 넘겨버렸다.이를 지켜보던 김성훈은 눈살을 찌푸렸다.“아니, 너처럼 이렇게 약을 먹고도 살아있는 걸 보면 참 기적이야.”“근데 왜 한 통밖에 없어?”이준혁의 물음에 김성훈이 눈썹을 들썩거렸다.“내가 직접 이 약을 만드는 줄 알아? 나한테 더 있긴 있어. 일단 이것부터 먹고 더 가져가. 적당하게 먹어야 돼. 약은 다 독성이 있어. 이 약이 네 조울증을 치료할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널 죽일 수도 있어.”김성훈이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건 아니었다. 이준혁은 옛날에 꽤 심한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발작할 때마다 심각해져서 국내의 치료는 그에게 큰 효과가 없었다.그때 김성훈이 L 국의 한 교수에게서 이 약을
더군다나 이준혁은 성적 욕구가 강해서 생리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관계를 가졌었다. 그는 그녀의 야릇한 표정과 가벼운 신음소리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윤혜인이 그가 외국으로 출장간 동안 갑자기 그를 배신했다는 건 솔직히 말도 안 된다.더군다나 귀국한 첫날밤, 이준혁은 바로 윤혜인과 잠자리를 가졌는데 그때도 전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남자가 그녀의 몸을 건드렸는지 안 건드렸는지는 이준혁이 제일 잘 알고 있다.떠올려보니 그날도 안전한 시기라 이준혁은 피임 조치를 하지 않은 채 여러 번의 관계를 가졌다.그럼 윤혜인이 그런 말들을 한 건 그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내뱉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그런데 윤혜인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녀는 정말 그를 조금이라도 사랑하지 않는 걸까?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의 외할머니를 만나주지 않은 것 때문에 이토록 화가 난 건가?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던 이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와인바에 기대에 잠이 들었다. 그는 잠결에서도 중얼거리고 있었다.“혜인아, 떠나지 마. 그 어떤 이유로도 날 떠나지 마…”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다가 주훈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했다.차에 올라탄 이준혁은 주훈에게 호텔로 가겠다고 했다. 지금 스카이 별장으로 돌아갔다가 술김에 이성을 잃고 잘못된 일이라도 저지를까 봐 두려웠다.다음날.송소미는 저번에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뒤로부터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에 맞아 심하게 다친 문미정은 그때 당시 구급차에 실려 돌아올 정도였으며 아직까지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두 모녀는 이 일을 문미정 부친에게 고자질했지만 사업에 정신이 팔린 문미정 부친은 여자들 일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더군다나 문미정 부친은 계속 이씨 가문의 덕을 봐야 하기에 딸을 위해 이씨 가문과 적이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이때, 송소미가 문미정 침대 앞에 앉아 궁시렁댔다.“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준혁 오빠가 이 일을 다 잊었겠지?”“당연히 다 지나갔지. 내가 이렇
신문 앞면에는 커다란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속보, 서울 한 가짜 규수의 추잡한 사생활!]아래에 적힌 글은 길지 않았다. 송모 씨라는 이름만 제외하면 글에 적힌 배경은 송소미가 틀림없었다. 그녀가 유학 시절에 밖에서 저질렀던 더러운 행적들이 전부 까발려졌다. 가장 중요한 건, 모자이크 처리가 전혀 안 됐다는 것이다. 모자이크는 얼굴이 아닌 머리를 가리고 있었기에 사진에는 그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특히 그 사진들 속 송소미의 야릇한 포즈가 유난히 눈에 띄었으며 심지어 여자 한 명과 남자 세 명이서 화끈한 파티를 즐기는 모습도 찍혀 있었다.송소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이를 악물면서 소리를 질렀다.“이게 대체 어느 신문사예요! 남의 사생활을 이렇게 신문에 올려도 되는 거예요? 당장 이 신문사를 고소할 거예요!”송태산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인터넷에 이것보다 화끈한 기사들이 더 많아. 그 사람들까지 전부 고소할 거야? 어린 놈이 나보다 더 더럽게 즐기고 다녔을 줄은 몰랐네. 남자 세 명을 데리고 놀아? 네가 아주 대단한 계집애네.”송태산의 말에 송소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인터넷이라니!송소미가 다급하게 핸드폰을 열어보니 그녀가 온갖 사이트의 검색어 1위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신문에 찍힌 사진보다 더욱 화끈하고 더러운 사진들이 많았다.[대박! 평소에 고고한 척하던 부잣집 딸이 평소에는 이렇게 더럽게 놀고 있었다니.][부잣집 딸은 무슨, 저 못생긴 여자 이름이 송소미야. 온몸에 가슴만 빼고 다 가짜거든. 저 여자 엄마가 옛날 도우미 딸이야. 내연녀가 성공한 거지 뭐. 이 바닥에서 저 여자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송모 씨가 여러 남자와 함께 노는 걸 직접 보고싶은 분들은 여기로 모이세요. 제가 공짜로 영상 뿌려드릴게요.]영상을 뿌린다는 댓글 아래에는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호응으로 들썩였고 이를 보고 있던 송소미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댓글에 올라온 사진만으로도 기절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송태산이 문미정을 언급하자 문씨 가문에서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그제야 알게 된 건데, 문미정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와 이혼을 해서 문미정의 할아버지가 송수미를 포함한 세 여인을 문씨 가문 호적에서 지워버린 것이다.문미정 할아버지가 이 정도로 매정하게 내친 걸 보면 이 세 여인은 심각할 정도로 추잡한 짓을 저질러서 문씨 가문에게 버림을 받은 게 분명하다.애초부터 문씨 가문의 힘에 빌붙기 위해 문미정과 결혼한 송태산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문미정을 곁에 남겨둘 필요가 없었다.결국, 문미정과 송소미는 송씨 가문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두 모녀는 문씨 가문으로 돌아와 애원했지만 거기서도 경호원에게 쫓겨나고 말았다.두 사람은 이내 이씨 가문까지 찾아갔지만 집을 지키고 있던 개에게 쫓겨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다.더 이상 갈 데가 없게 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호텔에 며칠 묵으려고 했지만 카드마저 전부 정지당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송태산의 발길질에 심하게 맞은 문미정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기에 자신이 차고 있던 귀걸이를 팔아서 그 돈으로 작은 여관으로 들어갔다.송소미는 작고 냄새가 나는 여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단 한번도 이렇게 누추한 곳에 몸을 담근 적이 없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밖에서 빙빙 돌아다니던 송소미는 친구들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자 결국 임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임세희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하던 임씨 아주머니가 임세희에게 물었다.“아가씨, 받으실 건가요?”조금 전에 집으로 돌아온 임세희는 얼굴에 팩을 붙인 채 꽤 기분이 좋은 듯 대답했다.“주세요.”“송소미 씨는 이제 하수구에 빠진 강아지 신세입니다. 최대한 송소미 씨와 엮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러다가 준혁 도련님이 눈치라도 채면 큰일입니다.”임씨 아주머니가 잠시 머뭇거리면서 타이르자 임세희가 가볍게 웃었다.“괜찮아요. 스피커 좀 켜주세요.”임씨 아주머니가 스피커를 켜자 전화기 너머 송소미의 애절한 목소리가
송소미의 말은 꽤 위협적이었다. 정 안 되면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임세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송소미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때, 임씨 아주머니가 나서서 송소미의 말을 끊었다.“송소미 씨, 그런 말씀은 거둬주세요. 우리 아가씨가 송소미 씨에게 윤혜인 씨를 괴롭히라고 시킨 건 아니잖아요? 우리 아가씨는 그때 당시 그저 윤혜인 씨가 임신하지 않았을까 의심했던 것뿐입니다. 송소미 씨를 친한 동생으로 생각해서 속마음을 털어놓은 건데 윤혜인 씨 뱃속의 아이에게 못된 짓을 저지르라고 한 적은 없잖아요?”흠칫하던 송소미는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임세희는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하지만 임세희가 그녀에게 울면서 고자질하고 암시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절대 윤혜인을 잡고 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이때, 임세희가 온화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전 소미를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소미가 이렇게 힘든 상황인데 전 당연히 도와야죠.”임세희가 임씨 아주머니에게 눈치를 주자 임씨 아주머니는 방에서 현금을 잔뜩 들고 나왔다. 임세희가 송소미의 손을 덥석 잡고는 눈시울을 붉혔다.“소미야, 내가 널 돕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야. 준혁 오빠가 분명하게 경고를 했거든. 너희 집안을 돕는 사람은 이선 그룹에 도전장을 내미는 거라고 했어.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까 언니도 마음이 안 좋아. 여기 현금 1200만 원 있으니까 일단 가져가서 써. 내가 갖고 있는 돈을 전부 투자에 넣어서 현금이 많이 없어. 나중에 현금이 생기면 또 줄게.”송소미의 얼굴이 확 굳어버렸다. 1200만 원으로 국내에서도 며칠 버티지 못할 텐데 이 돈으로 해외에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임세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이 터지고 나서 내가 병원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봤어. 윤혜인 씨 할머니는 애초부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대. 근데 그 죽음을 너에게 뒤집어씌울 정도로 독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 거기에
잠시 머뭇거리던 윤혜인은 아주머니를 보며 물었다.“아주머니, 혹시 통화 좀 하게 핸드폰을 잠깐 빌려주실 수 있나요?”아주머니는 살짝 난감했다. 도련님은 사모님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렸으니 당연히 아무한테도 연락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하지만 아주머니는 요 며칠동안 매일 우울하고 말도 없는 윤혜인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통화로 기분이 좀 좋아질 수 있다면 전화 한 통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아주머니는 핸드폰을 윤혜인에게 건넨 뒤 주방으로 들어갔다.한편, 윤혜인은 한구운의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았지만 소원의 번호는 외우고 있었다.소원이 전화를 받자 윤혜인은 한구운에게 별다른 상황이 없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병원에서 아버지를 지키고 있던 소원은 이제야 윤혜인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조금은 원망하듯 말했다.“혜인아, 왜 나한테 아무것도 얘기 안 해? 우리가 제일 친한 친구인 건 맞아?”“미안해, 소원아. 내가 그때 당시 정신이 없어서 아무한테도 연락을 못했어.”윤혜인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소원은 당연히 그녀를 탓하는 뜻이 아니었기에 서둘러 대꾸했다.“혜인아, 네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네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서 그런 말 한 거야.”“알고 있어.”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기에 소원의 뜻을 오해할 리가 없었다.전화를 끊은 윤혜인은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그녀는 아주머니의 걱정을 덜기 위해 국을 조금 마신 뒤 위층으로 휴식을 취하러 올라갔다.날이 어두워지자 이틀 동안 사라졌던 이준혁이 나타났다. 그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화들짝 놀란 윤혜인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리더니 밖으로 잡아당겼다.다리에 힘이 풀린 윤혜인은 넘어질까 봐 이준혁의 손을 꽉 잡은 채 화난 표정으로 물었다.“이준혁 씨, 또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고개를 홱 들었고 싸늘하게 굳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
눈빛이 어두워진 채 이준혁은 묵묵히 소화전 쪽으로 걸어갔다....한편, 윤혜인은 이미 추위로 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의식은 오락가락했고 마치 꿈속에서 이준혁이 자신을 구하러 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무의식중에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몇 번 두드려 그에게 자신이 여기 갇혀 있다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지쳐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고 손은 힘없이 축 처졌다.지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이준혁은 서너 번의 도끼질로 문을 쳐서 자물쇠를 부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윤혜인은 그의 무릎 담요로 사용하던 짙은 남색 담요를 몸에 감싼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바닥에 웅크린 윤혜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병든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이준혁의 가슴 속엔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몸을 낮추고 그녀를 안아 올렸지만 마치 얼음 덩어리를 안는 것처럼 차가웠다.윤혜인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조금 경직되어 있었고 다리는 자연스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다행히 아직 숨을 조금 쉬며 윤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이준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일어섰다.지팡이 없이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힘을 남아 있는 한쪽 다리에 집중해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집어 벽에 기대어 두었다.그런 다음 지팡이를 짚으며 윤혜인을 어깨에 걸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도착해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이 이미 구급대와 함께 들것을 대기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구급대는 윤혜인을 곧장 들것으로 옮겼고 이준혁도 함께 이동했다.주훈은 뒤따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가 윤혜인에게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무실에 갇혀 반나절 동안 얼어붙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행히도 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았지만 만약 모두가 그녀가
곽경천은 분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모든 단계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도 윤혜인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급히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었다. 때는 이미 새벽 3시였다.이준혁은 전화를 받고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사실 그는 잠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곧장 이준혁은 윤혜인이 그날 자기 사무실에 왔다가 떠난 후 소식을 들은 바 없다는 것을 곽경천에게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곽경천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현지 경찰에 연락해 CCTV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으나 이준혁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는 외투를 걸치고 휠체어에 올라 회의장에 향하기로 했다.혹시나 싶었지만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회의장이 전원이 차단되고 문이 잠기면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상급 관료의 허가 없이는 다시 전원을 공급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당직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하여 주훈에게 당직자의 집 주소를 찾아가 직접 연락하도록 지시한 후, 이준혁 자신은 보안 직원에게 열쇠로 건물 내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그렇게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입이 피로할 때는 손전등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았다. 다행히 사무실은 높은 곳이 아닌 그나마 적당한 8층에 있었다.20분 정도가 지나 8층에 도착한 그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무릅쓰고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원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이 문을 열 수 없었다.전력을 공급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는데 문에 틈새도 없어 내부 상황을 볼 수도 없었다.창문도 벽 쪽에 설치되어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힘껏
곽경천이 돌아왔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저들만의 편의를 봐가며 태만하게 지내고 있었다.배남준이 윤혜인을 피하며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우미들은 윤혜인이 버림받았다 생각하고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아이를 출산했음에도 자신들의 주인이 윤혜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 도우미들은 일에 태만해졌고 그녀를 아예 무시하며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다.윤혜인은 원래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도우미들과 크게 마주칠 일 없이 지냈고 이들의 불성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윤혜인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해 점점 더 방자하게 굴었다.태만하게 군 나머지, 그들은 윤혜인이 하룻밤은 물론 사흘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곽경천은 도우미들이 무릎도 제대로 꿇지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들이 윤혜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분노가 끓어오른 그는 단호하게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이 사람들 모두 끌고 나가서 무릎 꿇게 해! 한 명도 잠들지 않도록 감시하고!”그러자 당황한 도우미들이 소리를 질렀다.“저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벌을 주시는 거예요? 아가씨도 성인이신데 저희가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특히 곽경천에게 발길질을 당한 도우미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당당히 외쳤다.“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요?”곽경천은 냉랭하게 눈을 치켜떴다.“남준이가 없다고 해서 당신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도우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여 그저 뻣뻣하게 등을 펴고 말했다.“저희 가주님만이 저희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좋아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보네요.”곧 곽경천은 그들 앞에서 배남준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들은 배남준은 크게 분노하며 도우미들에게 더욱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그들을 야외에서 무릎을 꿇을 뿐만 아니라 겉옷을 벗고 한
순간 윤혜인은 절망감에 휩싸였다.차가운 기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윤혜인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윤혜인은 유일한 방한 도구인 담요를 꼭 껴안았지만 추위에 몸과 정신이 얼어붙어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이준혁뿐이었다.만약 모두가 그녀가 실종된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준혁은 아마도 윤혜인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다행히 평소에 곽경천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전 윤혜인에게 전화해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날 밤 업무로 인해 늦어진 그는 전화 대신 윤혜인이 자고 있을까 봐 문자로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혜인아, 자?]문자를 보낸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파티 준비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원진우의 계획을 지연시키거나 필요할 경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행사장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곽경천은 디자인 도면을 수십 번 확인하며 허점을 찾아냈다.작업을 끝마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윤혜인의 답장은 없었다.‘벌써 잠에 들었나...’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곽경천은 곧바로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전화가 여러 번 울리다가 결국 연결되었고 도우미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받는 거야?!’“곽씨 가문 사람인데 혜인이는 자고 있나요?”그가 자신을 ‘곽씨 가문 사람’이라고 밝히자 도우미는 그가 바로 윤혜인의 오빠임을 알아챘다.하여 도우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가씨께서 별로 밖에 나오지 않으셨거든요.”‘안 나왔다고?’곽경천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여은과 도지훈이 아기를 서울로 데려간 터라 윤혜인은 아기를 돌볼 필요가 없는데 하루 종일 방에만 있었다니 참 이상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가서 확인하고 즉시 보고해요!”곽경천의 엄격한 목소리에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