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나는 일을 벌이면 그 성격상 분명 바로 관리 주임을 고발할 것이고 그럼 관리 주임 본인도 꼼짝없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보호해야만 했고 절대 실수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관리 주임은 이미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어본 터라 자신 있었다.VIP 병실에는 절대 CCTV를 설치하지 않고 일반 병실도 마찬가지로 내부에는 설치되지 않으며 복도에만 카메라가 있었다.증거도 없고 목격자도 없는 상황에서 결국 둘의 말만 남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약한 여성을 더 쉽게 동정하는 경향이 있기에 일이 커지면 누가 불리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약자라는 위치가 대중의 동정심을 자극할 가능성이 컸다.관리 주임은 계속해서 설득을 이어갔다.“선생님, 제가 보기엔 이 일에 굳이 끼어들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긴 CCTV도 없는데 어떻게 친구분이 무조건 잘못 없다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임이나 씨 일은 제 당직 때 생긴 일이고 또 병원장님과 선생님은 친분도 있으시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까요. 다만 임이나 씨 아직 젊잖아요. 얼굴이 이렇게 팔리면 안 되죠. 조금의 보상이면 될 겁니다. 시간을 조금 드릴 테니 친구분과 상의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임이나 씨한테도 제가 말해서 보상금을 조금 깎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이미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으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을 겁니다.”이런 설득을 여러 번 해본 듯 관리 주임은 말이 청산유수처럼 나왔다.그러자 김성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이런 일을 여러 번 했나 보군요. 마침 이번에 전부 조사해 보면 되겠네요. 병원장이 제 친구가 아니었으면 저도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관리 주임은 김성훈이 강경하게 나오자 결국 본색을 드러내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전 이 일을 더 이상 중재하지 않겠습니다. 임이나 씨가 신문에 내거나 인터넷에 호소하는 건 제가 막을 수 없습니다. 젊은 여자애가 자칫 충격을 받아서
그는 여론을 권력층이 힘을 남용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하며 온갖 헛소리를 늘어놓았다.그러자 김성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제가 뭐 언제 권력을 남용하겠다고 했나요? 자, 저기 뭐가 보여요?”관리 주임과 임이나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천장을 쳐다보았다.거기엔 숨겨진 카메라가 하나 있었다!김성훈이 스위치를 누르자 카메라에 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관리 주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말도 안 돼. 이걸 언제 설치한 겁니까? 병실에선 CCTV 설치가 금지되어 있잖아요!”김성훈은 냉소하며 말했다.“지난번 한 간호사가 아래층으로 쫓겨난 후 설치된 겁니다. 바로 당신들 같은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죠.”그는 비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이번엔 이 CCTV 덕분에 병원의 명예를 해친 벌레들을 제대로 잡아낼 수 있겠군요.”관리 주임은 얼굴이 붉어졌다가 다시 창백해지며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끌려나가고 있었다.이제 임이나의 차례였다. 역시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장난 좀 친 거였어요...”“장난?”김성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맞아요. 정말 장난이었어요. 선생님은 대인배시잖아요. 제발 저한테 이러지 말아주세요. 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그녀는 김성훈의 발치로 기어가며 눈물 범벅된 얼굴로 애원했다.“김 선생님, 제가 다 따를 테니... 용서해 주세요. 네?”“나 만지지 마.”김성훈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더러우니까.”임이나는 이 말에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이 되었다.곧이어 그녀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주훈이 빠르게 다가와 임이나를 끌고 나갔다.더 이상 기다리면 이준혁이 분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사라지자 병실은 다시 고요해졌다.김성훈은 이준혁의 차가운 표정을 못 본 척하고 의자를 끌어와 이준혁 앞에 앉았다.“이제 좀 기분 풀렸어?”이준혁은 아무런 표정 없이 김성훈을
오랜 친구로서 김성훈은 이준혁을 잘 알았다.깨어난 후 윤혜인을 보지 못한 뒤로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이었다.하지만 이준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어떤 일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성인이라면 서로 눈치챌 수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수술 당일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결국 이 관계를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그리고 이준혁은 신체적인 이유로 병원을 떠날 수 없었고 다리마저 움직일 수 없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침묵하고 기이하게 변해갔다.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고 매일 기계처럼 자신의 생명을 일에 소모했다.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김성훈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속을 태웠다.무슨 말을 해도 이준혁은 듣지 않는 듯했고 여전히 자신의 방식대로만 행동했다.기본적인 재활 치료조차도 거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이렇게 가다간 언제쯤 이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준혁의 다리는 장기간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평생 걸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리고 좋은 친구로서 김성훈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렇게 활기차고 자유롭게 살던 애가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순 없어.’김성훈은 침대 옆에 앉아 사과를 깎으며 평소처럼 이준혁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전했다.“찰스의 사람들이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 사실이더라. 원지민의 새엄마가 시켜서 버린 그 유골을 찾아서 북안도로 가져갔대. 무녀를 불러서 어떤 금술을 썼다던데 영혼을 지옥의 불길 속에서 매일 밤낮으로 고통받게 하는 금지된 주술이래.”이런 괴담이 사실이라면 원지민은 죽어서도 결코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받지 않은 벌을 죽어서라도 받는 것이 마땅할지도 모른다.“근데 이번에 좋은 일도 생겼어. 찰스 가문이 에단 찰스의 시신을 부검하지 않도록 하려고 서울과 협상을 했대. 서울에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만약 찰스 가문의 사람이 서울에서 사고를 치면 그들을 서울로 넘겨서 심판받게 할 거라고 했지.”잔인하고 무법적인
이준혁의 표정은 마치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차가웠다. 한 달 넘게 유지되던 평온한 가면이 바로 그 순간 깨져버렸다.김성훈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이준혁의 목소리가 다시 급박하게 울렸다.“혜인이가 누구랑 결혼하는데?”“내...”김성훈이 말을 꺼내는 순간 이준혁의 손에서 딱 하고 관절 소리가 났다.그의 손에 가해진 압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준혁의 어두운 눈동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심연처럼 깊었다.비록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툭 하는 소리와 함께 김성훈이 깎고 있던 사과가 바닥에 떨어지며 과즙이 튀었다.“아이구...”김성훈이 이를 드러내며 짧게 소리를 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내가 아니고 들은 바로는 배씨 가문 아들이래.”그제야 이준혁의 손에서 힘이 빠졌고 김성훈의 손은 놓여졌다.“아... 진짜 아프네...”김성훈은 팔을 휘저으며 생각했다.‘다음에 말할 때는 절대로 중간에 멈추지 말아야겠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내 손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렇게 꽉 쥐면 어떡해!”김성훈은 손에 보험까지 들 정도로 아끼는 편이었다.그런데 이준혁이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목이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의사로서의 습관이 나와서 그는 방금 했던 말을 잊고 이준혁의 회복 상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그런데 너 참 이상하네. 매일 재활 훈련은 안 하면서 손의 회복력은 꽤 좋은데?”그는 궁금해서 물었다.“혹시 나 몰래 밤에 재활하는 거냐?”“언제?”이준혁은 냉담하게 물었고 김성훈은 잠시 당황했다.“언제라니. 네가 언제 몰래 연습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설마 꿈에서라도 연습한 거야?”의심이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김성훈이 계속해서 물었다.“너 예전엔 몽유병 같은 거 없었잖아? 혹시 침대에 오래 누워 있다가 새로 생긴 증상이야?”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준혁의 눈을 들여다보려 했다. 혹시 다른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그러나 이준
이준혁의 회복력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김성훈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혜인 씨가 진짜 신의 약이구먼. 죽은 사람도 살리고 썩은 뼈도 되살릴 정도라니... 이건 거의 뭐 화타의 신비한 약 정도잖아?”그리고 그는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이준혁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병원을 떠났다.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층 버튼을 누르고 있었는데 마침 올라오던 주훈과 마주쳤다.주훈은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다 이준혁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그는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쉬며 무려 10초가 지나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대표님!”“회사로 가자.”이준혁은 그 한마디만 남기고 휠체어를 조작해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자 주훈은 황급히 외쳤다.“자... 잠시만요. 대표님!”아직 놀란 상태에서 그는 평소의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잊고 느린 말투로 대응하더니 급하게 앞으로 다가가 문이 닫히기 전에 발을 넣고 겨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엘리베이터가 닫히자 주훈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 갑자기 회사에는 왜 가십니까?”“처리할 일이 있어.”이준혁은 깨어난 이후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할 수 있는 한 짧게 대답했고 가능하면 한두 마디로 대화를 끝냈다.이런 이준혁의 상태가 걱정되어 주훈은 김성훈을 찾아갔었다.김성훈은 이준혁의 팔꿈치에 맞는 새로운 인공 관절 재료를 연구하느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하지만 이준혁의 말을 듣고 김성훈은 연구를 중단하고 매일 병원에 와서 이준혁과 시간을 보냈다.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말이 많아서 이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혼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덕분에 이준혁도 이따금 짧게나마 반응을 보이곤 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은 습관적으로 이준혁의 휠체어를 밀려고 했다.하지만 이준혁은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내가 스스로 할 거야.”그는 휠체어의 버튼을 눌러 직접 조작하며 앞으로 나아갔다.차 앞에 도착하자 주훈이 이준혁을 도우
이준혁은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깨어난 이후 그의 과거와 미래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살아는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로봇처럼 움직이는 삶이었다.회사를 찾은 이준혁은 이신우가 자신의 대표 사무실을 그대로 보존해 둔 것을 발견했다.이신우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사무실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이준혁이 방에 들어섰을 때 이신우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준혁이 네가 여긴 웬일이야?”그러자 이준혁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삼촌, 혜인이가 결혼한다던데... 알고 계세요?”이준혁이 알고 있냐 묻는 것은 단순한 소식을 넘어 그 안에 숨겨진 어떤 진실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혜인이는 지금 임신 중인데... 결혼하면 아이는 어떻게 처리되지? 상대 집안에서 받아는 들이나? 그리고 배씨 가문은...’솔직히 말해 이준혁은 지금 반쯤 불구가 된 상태에서도 배씨 가문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겉으로는 명문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부의 음모와 복잡한 일들은 그들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좋은 서울을 두고 북안도에 자리를 잡겠다는 선택만으로도 그 가문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배남준도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사람이란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밖에 없다.‘지금 혜인이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 과연 가족의 압박을 이겨내고 다른 여자를 맞이하지 않고 혜인이에게만 충실할 수 있을까?’이신우는 이준혁이 묻는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윤혜인의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이신우는 그녀에게 바로 연락을 취해 상황을 물었다.그는 윤혜인과 어느 정도 교분이 있었고 서울에서도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신우의 질문을 거부하지 않고 잠시 침묵한 후 사실이라고 말했다.이준혁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이신우는 고민 끝에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알아본 바로 별다른 숨겨진 일은 없어. 혜인 씨가 배남준과 결혼하는 건 사실이야. 둘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고 배남준은 나름
이준혁이 어릴 때부터 보여준 놀라운 사업적 재능을 이신우는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재능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그는 냉정하고 차가웠으며 오로지 이선 그룹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있었다.작은 기업들이 이선 그룹과 같은 대기업에 의존해 살아남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망하든 손해를 보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들이 힘들어 찾아와 불만을 제기해도 이준혁은 아주 냉담하게 안 되면 다른 곳을 찾으면 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그의 눈에는 언제나 이익과 성공만이 중요했고 때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물론 악의를 품고 사람을 해친 적은 없었지만 기업 간의 경쟁에서 거칠게 나가기도 했다.이신우는 이런 이준혁의 이익만을 중시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없는 태도를 매우 불편해했다.그래서 그가 처음 귀국해 윤혜인을 만났을 때 그들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윤혜인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이준혁이라는 천재적인 인물이 너무 거만하다고 생각해 그를 조금 눌러보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신우는 이준혁이 윤혜인의 존재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예를 들어 이준혁은 무관심했던 직원 복지나 이선 그룹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이익 보장 문제에 대해 스스로 강력한 보장 제도를 마련했다.결혼 후 이준혁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자선 활동을 하며 아픈 아이들과 외로운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윤혜인의 선한 행동들이 서서히 이 차가운 남자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특히 이신우가 알게 된 것은 이준혁이 이렇게 냉정했던 이유가 이천수로부터 어린 시절 받은 정서적 학대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이준혁은 그 집에서 전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천수를 친아버지처럼 여겼다.하지만 따로 속셈을 품은 이천수는 오랫동안 이준혁을 그릇된 길로 이끌려 했다.다행히도 이준혁은 자제력이 강해 냉정하게 행동하며 불법적인 행위나 타인을 해치려 하지
다리가 불편해진 것이 그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감까지 낮아지지는 않았다.오랜 시간 사업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과 상황을 겪으며 병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도 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람도 봐왔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다리 부상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뒤로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이신우도 이준혁의 고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잠시 생각을 하다 그는 입을 열었다.“내가 이미 비서한테 북안도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을 알아보라 했다. 최근 훈련 문제로 교통 통제가 실시돼서 소식은 기다려야 하지만 말이다.”그는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혜인 씨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가서 물어봐. 병원에 누워서 죽어가는 것처럼 있지 말고! 이게 우리 이씨 집안 남자의 태도냐?”이신우는 한 번에 말을 쏟아냈다. 그는 이준혁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정하는 건 빠르게 하고 통보만 할 뿐이었다.“최대 석 달까지는 너를 도울 수 있어. 석 달 후에 혜인 씨의 아이가 태어나면 너도 마음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 그동안 재활에 신경 쓰고 답을 찾든 아이의 출생을 지키든 네가 알아서 해. 어쨌든 석 달 후에는 나도 손 뗄 거야. 나도 내 일이 있으니까. 그때 가서 이선 그룹 대표 자리에 앉을 사람이 없다 해도 나 찾지 말고!”그가 긴 이야기를 마치자 밖에서 비서가 들어와 회의 참석을 요청했다.그렇게 이신우는 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던졌다.“가끔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 혜인 씨가 정말 결혼했다 해도 아이는 네 아이야.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넌 책임을 지고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해.”이신우는 이준혁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았다.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말이다.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하진이라는 아이 하나만 키워왔지만 친자식이 아니었다.이신우도 아버지로서 부족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아버지란 역할은 마음에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어떤 방식으로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