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로서 김성훈은 이준혁을 잘 알았다.깨어난 후 윤혜인을 보지 못한 뒤로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이었다.하지만 이준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어떤 일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성인이라면 서로 눈치챌 수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수술 당일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결국 이 관계를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그리고 이준혁은 신체적인 이유로 병원을 떠날 수 없었고 다리마저 움직일 수 없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침묵하고 기이하게 변해갔다.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고 매일 기계처럼 자신의 생명을 일에 소모했다.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김성훈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속을 태웠다.무슨 말을 해도 이준혁은 듣지 않는 듯했고 여전히 자신의 방식대로만 행동했다.기본적인 재활 치료조차도 거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이렇게 가다간 언제쯤 이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준혁의 다리는 장기간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평생 걸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리고 좋은 친구로서 김성훈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렇게 활기차고 자유롭게 살던 애가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순 없어.’김성훈은 침대 옆에 앉아 사과를 깎으며 평소처럼 이준혁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전했다.“찰스의 사람들이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 사실이더라. 원지민의 새엄마가 시켜서 버린 그 유골을 찾아서 북안도로 가져갔대. 무녀를 불러서 어떤 금술을 썼다던데 영혼을 지옥의 불길 속에서 매일 밤낮으로 고통받게 하는 금지된 주술이래.”이런 괴담이 사실이라면 원지민은 죽어서도 결코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받지 않은 벌을 죽어서라도 받는 것이 마땅할지도 모른다.“근데 이번에 좋은 일도 생겼어. 찰스 가문이 에단 찰스의 시신을 부검하지 않도록 하려고 서울과 협상을 했대. 서울에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만약 찰스 가문의 사람이 서울에서 사고를 치면 그들을 서울로 넘겨서 심판받게 할 거라고 했지.”잔인하고 무법적인
이준혁의 표정은 마치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차가웠다. 한 달 넘게 유지되던 평온한 가면이 바로 그 순간 깨져버렸다.김성훈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이준혁의 목소리가 다시 급박하게 울렸다.“혜인이가 누구랑 결혼하는데?”“내...”김성훈이 말을 꺼내는 순간 이준혁의 손에서 딱 하고 관절 소리가 났다.그의 손에 가해진 압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준혁의 어두운 눈동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심연처럼 깊었다.비록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툭 하는 소리와 함께 김성훈이 깎고 있던 사과가 바닥에 떨어지며 과즙이 튀었다.“아이구...”김성훈이 이를 드러내며 짧게 소리를 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내가 아니고 들은 바로는 배씨 가문 아들이래.”그제야 이준혁의 손에서 힘이 빠졌고 김성훈의 손은 놓여졌다.“아... 진짜 아프네...”김성훈은 팔을 휘저으며 생각했다.‘다음에 말할 때는 절대로 중간에 멈추지 말아야겠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내 손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렇게 꽉 쥐면 어떡해!”김성훈은 손에 보험까지 들 정도로 아끼는 편이었다.그런데 이준혁이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목이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의사로서의 습관이 나와서 그는 방금 했던 말을 잊고 이준혁의 회복 상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그런데 너 참 이상하네. 매일 재활 훈련은 안 하면서 손의 회복력은 꽤 좋은데?”그는 궁금해서 물었다.“혹시 나 몰래 밤에 재활하는 거냐?”“언제?”이준혁은 냉담하게 물었고 김성훈은 잠시 당황했다.“언제라니. 네가 언제 몰래 연습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설마 꿈에서라도 연습한 거야?”의심이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김성훈이 계속해서 물었다.“너 예전엔 몽유병 같은 거 없었잖아? 혹시 침대에 오래 누워 있다가 새로 생긴 증상이야?”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준혁의 눈을 들여다보려 했다. 혹시 다른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그러나 이준
이준혁의 회복력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김성훈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혜인 씨가 진짜 신의 약이구먼. 죽은 사람도 살리고 썩은 뼈도 되살릴 정도라니... 이건 거의 뭐 화타의 신비한 약 정도잖아?”그리고 그는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이준혁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병원을 떠났다.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층 버튼을 누르고 있었는데 마침 올라오던 주훈과 마주쳤다.주훈은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다 이준혁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그는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쉬며 무려 10초가 지나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대표님!”“회사로 가자.”이준혁은 그 한마디만 남기고 휠체어를 조작해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자 주훈은 황급히 외쳤다.“자... 잠시만요. 대표님!”아직 놀란 상태에서 그는 평소의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잊고 느린 말투로 대응하더니 급하게 앞으로 다가가 문이 닫히기 전에 발을 넣고 겨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엘리베이터가 닫히자 주훈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 갑자기 회사에는 왜 가십니까?”“처리할 일이 있어.”이준혁은 깨어난 이후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할 수 있는 한 짧게 대답했고 가능하면 한두 마디로 대화를 끝냈다.이런 이준혁의 상태가 걱정되어 주훈은 김성훈을 찾아갔었다.김성훈은 이준혁의 팔꿈치에 맞는 새로운 인공 관절 재료를 연구하느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하지만 이준혁의 말을 듣고 김성훈은 연구를 중단하고 매일 병원에 와서 이준혁과 시간을 보냈다.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말이 많아서 이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혼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덕분에 이준혁도 이따금 짧게나마 반응을 보이곤 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은 습관적으로 이준혁의 휠체어를 밀려고 했다.하지만 이준혁은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내가 스스로 할 거야.”그는 휠체어의 버튼을 눌러 직접 조작하며 앞으로 나아갔다.차 앞에 도착하자 주훈이 이준혁을 도우
이준혁은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깨어난 이후 그의 과거와 미래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살아는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로봇처럼 움직이는 삶이었다.회사를 찾은 이준혁은 이신우가 자신의 대표 사무실을 그대로 보존해 둔 것을 발견했다.이신우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사무실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이준혁이 방에 들어섰을 때 이신우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준혁이 네가 여긴 웬일이야?”그러자 이준혁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삼촌, 혜인이가 결혼한다던데... 알고 계세요?”이준혁이 알고 있냐 묻는 것은 단순한 소식을 넘어 그 안에 숨겨진 어떤 진실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혜인이는 지금 임신 중인데... 결혼하면 아이는 어떻게 처리되지? 상대 집안에서 받아는 들이나? 그리고 배씨 가문은...’솔직히 말해 이준혁은 지금 반쯤 불구가 된 상태에서도 배씨 가문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겉으로는 명문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부의 음모와 복잡한 일들은 그들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좋은 서울을 두고 북안도에 자리를 잡겠다는 선택만으로도 그 가문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배남준도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사람이란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밖에 없다.‘지금 혜인이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 과연 가족의 압박을 이겨내고 다른 여자를 맞이하지 않고 혜인이에게만 충실할 수 있을까?’이신우는 이준혁이 묻는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윤혜인의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이신우는 그녀에게 바로 연락을 취해 상황을 물었다.그는 윤혜인과 어느 정도 교분이 있었고 서울에서도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신우의 질문을 거부하지 않고 잠시 침묵한 후 사실이라고 말했다.이준혁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이신우는 고민 끝에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알아본 바로 별다른 숨겨진 일은 없어. 혜인 씨가 배남준과 결혼하는 건 사실이야. 둘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고 배남준은 나름
이준혁이 어릴 때부터 보여준 놀라운 사업적 재능을 이신우는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재능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그는 냉정하고 차가웠으며 오로지 이선 그룹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있었다.작은 기업들이 이선 그룹과 같은 대기업에 의존해 살아남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망하든 손해를 보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들이 힘들어 찾아와 불만을 제기해도 이준혁은 아주 냉담하게 안 되면 다른 곳을 찾으면 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그의 눈에는 언제나 이익과 성공만이 중요했고 때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물론 악의를 품고 사람을 해친 적은 없었지만 기업 간의 경쟁에서 거칠게 나가기도 했다.이신우는 이런 이준혁의 이익만을 중시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없는 태도를 매우 불편해했다.그래서 그가 처음 귀국해 윤혜인을 만났을 때 그들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윤혜인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이준혁이라는 천재적인 인물이 너무 거만하다고 생각해 그를 조금 눌러보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신우는 이준혁이 윤혜인의 존재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예를 들어 이준혁은 무관심했던 직원 복지나 이선 그룹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이익 보장 문제에 대해 스스로 강력한 보장 제도를 마련했다.결혼 후 이준혁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자선 활동을 하며 아픈 아이들과 외로운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윤혜인의 선한 행동들이 서서히 이 차가운 남자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특히 이신우가 알게 된 것은 이준혁이 이렇게 냉정했던 이유가 이천수로부터 어린 시절 받은 정서적 학대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이준혁은 그 집에서 전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천수를 친아버지처럼 여겼다.하지만 따로 속셈을 품은 이천수는 오랫동안 이준혁을 그릇된 길로 이끌려 했다.다행히도 이준혁은 자제력이 강해 냉정하게 행동하며 불법적인 행위나 타인을 해치려 하지
다리가 불편해진 것이 그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감까지 낮아지지는 않았다.오랜 시간 사업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과 상황을 겪으며 병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도 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람도 봐왔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다리 부상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뒤로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이신우도 이준혁의 고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잠시 생각을 하다 그는 입을 열었다.“내가 이미 비서한테 북안도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을 알아보라 했다. 최근 훈련 문제로 교통 통제가 실시돼서 소식은 기다려야 하지만 말이다.”그는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혜인 씨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가서 물어봐. 병원에 누워서 죽어가는 것처럼 있지 말고! 이게 우리 이씨 집안 남자의 태도냐?”이신우는 한 번에 말을 쏟아냈다. 그는 이준혁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정하는 건 빠르게 하고 통보만 할 뿐이었다.“최대 석 달까지는 너를 도울 수 있어. 석 달 후에 혜인 씨의 아이가 태어나면 너도 마음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 그동안 재활에 신경 쓰고 답을 찾든 아이의 출생을 지키든 네가 알아서 해. 어쨌든 석 달 후에는 나도 손 뗄 거야. 나도 내 일이 있으니까. 그때 가서 이선 그룹 대표 자리에 앉을 사람이 없다 해도 나 찾지 말고!”그가 긴 이야기를 마치자 밖에서 비서가 들어와 회의 참석을 요청했다.그렇게 이신우는 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던졌다.“가끔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 혜인 씨가 정말 결혼했다 해도 아이는 네 아이야.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넌 책임을 지고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해.”이신우는 이준혁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았다.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말이다.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하진이라는 아이 하나만 키워왔지만 친자식이 아니었다.이신우도 아버지로서 부족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아버지란 역할은 마음에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어떤 방식으로
만약 그가 윤혜인을 찾고 싶었다면 막 깨어났을 때 비록 들것에 누워 있어야 했더라도 방법을 찾아 그녀를 찾아갔을 것이다.하지만 이준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이는 그 또한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다.윤혜인은 더 이상 이준혁과 얽히고 싶지 않아 자신의 삶을 선택했고 그는 그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총상을 입던 날 이준혁은 고열에 시달리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윤혜인과 함께한 마지막 순간조차 흐릿하게 기억났다.다만 마지막에 그가 윤혜인을 대신해 총을 막아냈다는 것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윤혜인이 이준혁의 수술 당일에 떠난 것은 그녀의 결정을 간접적으로 알려준 셈이었다.김성훈과 이신우는 아마도 이준혁이 다리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져 윤혜인을 찾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사랑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그러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너무나도 쉽게 이준혁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의 내면은 감정적으로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 말이다.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지 않기로 한 것은 자신의 집착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보지 않고도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운 이준혁이 만약 윤혜인을 직접 마주한다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다음 날 점심 즈음에 남자 간호사가 다시 돌아와 이준혁에게 수액을 놓아주었다.간호사는 나가면서 이준혁의 과일 접시에 놓인 전날 과일을 보고 그가 전날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그렇게 간호사는 양해를 구하고 그 과일을 청소 아줌마에게 건네주었다. 이 일은 이미 몇 날 며칠째 반복되는 일이었다.하루가 지난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이준혁은 원래 그저 그 과일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그리고 과일을 상해 버리기 전에 신선할 때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게 더 나았고 말이다.병실에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캐묻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 아니다.남자 간호사는 계속해서 아줌마에게 눈짓을 보내며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런 적이 없다뇨?”하지만 아줌마는 남자 간호사의 눈짓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전에 아주 예쁜 아가씨가 있었어요. 얼굴이 하얗고 작고 눈이 크고 아주 온화했죠. 그 아가씨를 자주 봤어요.”아줌마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손자의 수술 때문에 휴가를 냈다가 오늘 처음으로 복귀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윤혜인이 떠난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남자 간호사는 아줌마가 잘못 기억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아줌마께서 분명 잘못 기억하신 거예요. 그만하고 나가시죠.”그러나 아줌마는 고집스러웠다.“아니에요. 제가 잘못 본 게 아닙니다. 전 이분께 감사 인사를 할 겸 그 아가씨에게 돈을 돌려드리려고 온 거예요.”남자 간호사는 이준혁이 화낼까 봐 아줌마를 끌어당기며 말했다.“이쯤 하시고 가시죠, 아줌마.”아줌마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평소에 남자 간호사가 자신과 손자를 잘 돌봐주었기에 그의 말을 잘 따랐다.곧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혁에게 말했다.“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빨리 회복하시길 바라요.”그렇게 남자 간호사가 아줌마와 함께 나가려 하자 이준혁이 그들을 불렀다.“잠깐만요.”그는 아줌마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줌마, 돈을 돌려준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아줌마는 이준혁이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랐다.그는 겉모습만 보아도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남자 간호사처럼 자신을 ‘아줌마’라고 불러주며 존댓말을 해주니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저한테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러자 이준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습니다. 아줌마,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전에 제가 근무하던 때였어요. 선생님께서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을 때였죠. 제가 이 구역을 청소하고 있었어요. 돈을 더 벌려고 그달에는 계속 야간 근무를 했거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
황진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간 후 소원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주석훈이 죽을 다 먹고 소원에게 말했다.“소원 씨,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으니까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소원 씨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밤에 유진을 보러 갈 예정이었기에 진짜로 돌아가야 했다.주석훈을 위해 간병인을 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감염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환자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이제 막 열이 내린 주석훈은 소원의 고민을 알아채고 농담을 던졌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요. 이렇게 큰 병원에 있는데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요?”소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번 일, 여자친구에게 말씀하셨나요?”“여자친구요?”주석훈이 멍해 있자 소원이 급히 말했다.“방금 물컵을 들다가 변호사님의 직원증을 떨어뜨렸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여자친구 사진인 것 같아서...”소원의 말을 들은 주석훈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소원이 보기엔 약간 어두워진 것 같았다.평소 밝고 남을 잘 돕는 그의 얼굴과 조금 달랐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여자친구 맞아요.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몇 초 동안 충격에 빠졌던 소원이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 이미 오래된 일이니까.”주석훈의 말에 소원이 한마디 했다.“정말 예쁘더라고요.”그러자 주석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잘 웃고 또 성격도 좋았어요. 그리고 동물들도 정말 좋아했죠.”소원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화해 보이던 여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니...두 사람이 몇 마디 더 나눈 후, 주석훈이 소원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했다.주석훈의 말에 소원도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석훈의 전화벨 소리가
황진수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미우 그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하나같이 대표님의 권한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회의도 많아서 시시각각 대표님 곁을 지킬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표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도 속이 바질바질 타요. 대표님이 빨리 업무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황진수은 소원에게 왜 육경한을 보러 오지 않냐고 대놓고 질책하지 않고 월급쟁이로서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만 얘기했다. 이렇게 되면 가스라이팅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든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수락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비서님, 수고하셨어요. 시간 되면 그때 찾아갈게요.”가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고 시간 될 때 찾아간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병원인데 시간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진수도 이 말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그러면 소원 씨, 일 보세요. 일 끝나면 대표님 좀 꼭 보러 오시고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수액실로 돌아와 보니 주석훈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소원은 딱히 깨우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주석훈 눈에 난 다크서클만 봐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기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그 누구든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주석훈의 정서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미 너무 안정적인 편이었다.침을 뺄 때가 되자 주석훈이 잠에서 깨 간호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는 역시나 중무장하고 들어왔다. 병원 측은 주석훈의 상황을 대비해 수액실도 단독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바늘을 뽑은 간호사들은 주석훈에게 오늘 밤 다시 열이 나는지 체크해야 하므로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은 아직도 병실에 남아있는 소원을 보며 멋쩍게 말했다.“소원 씨,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옆에서 있어 주기 힘든데.”“괜찮아요.”소원이 말했다.“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소원이 물을 주석훈에게 건네주는데 핸드폰이 올렸다. 배달 기사가 걸어온 전
소원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주석훈은 이번에 병원을 바꿔 제일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이 이런 유형의 감염류 질병에 더욱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소원이 도착하자 수액을 맞던 주석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소원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말했다.“마침 근처로 왔다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죠.”소원은 주석훈이 신세 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석훈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창백해진 얼굴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목마르죠? 물 좀 마실래요?”주석훈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목이 불편해 이렇게 말했다.“괜찮으면 소원 씨가 뜨거운 물 좀 따라줄래요?”“그래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소원이 말했다.“컵은 내 가방에 있어요. 움직이기 불편하니까 소원 씨가 좀 가져다줘요.”소원이 주석훈의 가방에서 컵을 꺼내다 주석훈의 사원증이 딸려 나왔다. 사원증 뒷면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사진에 보이는 여자는 밝고 수수하고 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소원은 그 사람이 주석훈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본적도, 그렇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였지만 그래도 사진을 사원증 뒷면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건 무척 사랑한다는 의미였다.주석훈은 머리가 흐리멍덩한 상태라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소원이 사원증을 다시 집어넣고는 뜨거운 물 받으러 갔다.뜨거운 물을 받고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마침 육경한의 비서 황진수가 보였다. 황진수는 소원을 보고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소원 씨, 혹시 대표님 보러 오셨어요?”소원은 황진수의 열정에 살짝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아니요.”황진수는 소원이 들고 있는 남성용 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친구가 홍콩에 있어서요.소원이 설명했다.“아 그래요?”황진수의 말투에서 실망이 묻어났다. 소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황진수가 입을 열었다.“소원 씨, 우리 대표님 좀 보러 가주실
소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취객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동행한 사람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연신 이렇게 말했다.“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주석훈은 동행자의 태도가 좋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얼른 데리고 올라가요.”취객이 여전히 중얼거리며 말했다.“음냐... 맛있다. 음냐...”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주석훈이 여전히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소원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가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상처 아무래도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요.”주석훈이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소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치료해요. 어차피 지금 병원이잖아요. 상처 처리하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주석훈은 소원의 권고에 치료하러 향했다. 간호사가 바쁘다 보니 한참 기다려서야 소독할 수 있었고 치료를 마쳤을 땐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석훈이 다시 휠체어를 밀어주려는데 소원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이제 휠체어 안 타도 돼요. 다 나았는데 앉아 있으려니까 낯 간지럽네요.”주석훈은 소원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 보이자 휠체어에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더니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의 간호사 두 명이 토론하는 게 들렸다.“너 그거 알아? 큰일 났대.”“무슨 일?”“아까 실려 온 환자가 있는데 혈액 검사를 해보니 에이즈래.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부 검사받아야 한다던데?”“뭐? 접촉한 사람은 다 받아야 한다고? 그런 병이 있다고 직접 밝히진 않았나 보지?”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환자는 병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소수의 환자가 병을 속여서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