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나는 부유한 사람들의 심리를 꽤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돈 많은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걸 꺼리기 때문에 대개 돈을 주고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김성훈은 그녀의 의도를 읽고 웃으며 물었다.“오, 그럼 어떻게 해결하고 싶어요?”“말했잖아요. 옷값만 보상해 주시면 돼요. 많지도 않아요. 10억 정도면 충분해요.”“헉!”김성훈조차도 이 말을 듣고는 놀란 듯 숨을 들이쉬며 비웃었다.“참, 요구가 크네요!”“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잖아요.”임이나는 자신이 요구한 금액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과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큰 금액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월급이 겨우 200만 원이 조금 넘고 연말 보너스를 모두 합쳐도 1년에 6000만 원 남짓 벌 뿐이었다.10억은 그녀가 밥도 안 먹고 한 푼도 안 쓰고 10년 넘게 모아야만 벌 수 있는 돈이었다.그러나 임이나는 자신의 연봉이 많지 않음에도 명품 가방과 옷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물론 그 돈은 모두 병원에서 번 외부 수입이었다.병원에서는 돈 많은 남자들을 만나기 쉬웠고 그들은 춤추는 여자들보다는 간호사가 낫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임이나 같은 사람들은 간호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여러 부정한 수입을 얻고 있었다.10억은 부자들에게 한 번 밥을 사거나 노래방에서 노는 데 쓰는 소액에 불과했다.그런 돈을 아끼다가 자신의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 금액은 아무리 따져도 손해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관리 주임은 임이나가 요구한 금액을 듣자마자 곧장 말했다.“이 정도 금액이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해결하는 게 좋겠네요. 제가 임이나 씨를 잘 달래겠습니다.”이 결과에 관리 주임과 임이나 모두 만족스러워 보였다.사실 김성훈이 한 말이 맞았다.두 사람은 사실 서로 애인 관계였고 이렇게 사기를 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관리 주임은 임이나의 높은 소비를 감당하지 못해 그녀에게 부유한 사람들을 상대로 협박을 하라는
임이나는 일을 벌이면 그 성격상 분명 바로 관리 주임을 고발할 것이고 그럼 관리 주임 본인도 꼼짝없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보호해야만 했고 절대 실수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관리 주임은 이미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어본 터라 자신 있었다.VIP 병실에는 절대 CCTV를 설치하지 않고 일반 병실도 마찬가지로 내부에는 설치되지 않으며 복도에만 카메라가 있었다.증거도 없고 목격자도 없는 상황에서 결국 둘의 말만 남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약한 여성을 더 쉽게 동정하는 경향이 있기에 일이 커지면 누가 불리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약자라는 위치가 대중의 동정심을 자극할 가능성이 컸다.관리 주임은 계속해서 설득을 이어갔다.“선생님, 제가 보기엔 이 일에 굳이 끼어들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긴 CCTV도 없는데 어떻게 친구분이 무조건 잘못 없다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임이나 씨 일은 제 당직 때 생긴 일이고 또 병원장님과 선생님은 친분도 있으시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까요. 다만 임이나 씨 아직 젊잖아요. 얼굴이 이렇게 팔리면 안 되죠. 조금의 보상이면 될 겁니다. 시간을 조금 드릴 테니 친구분과 상의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임이나 씨한테도 제가 말해서 보상금을 조금 깎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이미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으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을 겁니다.”이런 설득을 여러 번 해본 듯 관리 주임은 말이 청산유수처럼 나왔다.그러자 김성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이런 일을 여러 번 했나 보군요. 마침 이번에 전부 조사해 보면 되겠네요. 병원장이 제 친구가 아니었으면 저도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관리 주임은 김성훈이 강경하게 나오자 결국 본색을 드러내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전 이 일을 더 이상 중재하지 않겠습니다. 임이나 씨가 신문에 내거나 인터넷에 호소하는 건 제가 막을 수 없습니다. 젊은 여자애가 자칫 충격을 받아서
그는 여론을 권력층이 힘을 남용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하며 온갖 헛소리를 늘어놓았다.그러자 김성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제가 뭐 언제 권력을 남용하겠다고 했나요? 자, 저기 뭐가 보여요?”관리 주임과 임이나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천장을 쳐다보았다.거기엔 숨겨진 카메라가 하나 있었다!김성훈이 스위치를 누르자 카메라에 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관리 주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말도 안 돼. 이걸 언제 설치한 겁니까? 병실에선 CCTV 설치가 금지되어 있잖아요!”김성훈은 냉소하며 말했다.“지난번 한 간호사가 아래층으로 쫓겨난 후 설치된 겁니다. 바로 당신들 같은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죠.”그는 비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이번엔 이 CCTV 덕분에 병원의 명예를 해친 벌레들을 제대로 잡아낼 수 있겠군요.”관리 주임은 얼굴이 붉어졌다가 다시 창백해지며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끌려나가고 있었다.이제 임이나의 차례였다. 역시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장난 좀 친 거였어요...”“장난?”김성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맞아요. 정말 장난이었어요. 선생님은 대인배시잖아요. 제발 저한테 이러지 말아주세요. 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그녀는 김성훈의 발치로 기어가며 눈물 범벅된 얼굴로 애원했다.“김 선생님, 제가 다 따를 테니... 용서해 주세요. 네?”“나 만지지 마.”김성훈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더러우니까.”임이나는 이 말에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이 되었다.곧이어 그녀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주훈이 빠르게 다가와 임이나를 끌고 나갔다.더 이상 기다리면 이준혁이 분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사라지자 병실은 다시 고요해졌다.김성훈은 이준혁의 차가운 표정을 못 본 척하고 의자를 끌어와 이준혁 앞에 앉았다.“이제 좀 기분 풀렸어?”이준혁은 아무런 표정 없이 김성훈을
오랜 친구로서 김성훈은 이준혁을 잘 알았다.깨어난 후 윤혜인을 보지 못한 뒤로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이었다.하지만 이준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어떤 일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성인이라면 서로 눈치챌 수 있었다.윤혜인이 이준혁의 수술 당일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결국 이 관계를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그리고 이준혁은 신체적인 이유로 병원을 떠날 수 없었고 다리마저 움직일 수 없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침묵하고 기이하게 변해갔다.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고 매일 기계처럼 자신의 생명을 일에 소모했다.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김성훈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속을 태웠다.무슨 말을 해도 이준혁은 듣지 않는 듯했고 여전히 자신의 방식대로만 행동했다.기본적인 재활 치료조차도 거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이렇게 가다간 언제쯤 이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준혁의 다리는 장기간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평생 걸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리고 좋은 친구로서 김성훈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렇게 활기차고 자유롭게 살던 애가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순 없어.’김성훈은 침대 옆에 앉아 사과를 깎으며 평소처럼 이준혁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전했다.“찰스의 사람들이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 사실이더라. 원지민의 새엄마가 시켜서 버린 그 유골을 찾아서 북안도로 가져갔대. 무녀를 불러서 어떤 금술을 썼다던데 영혼을 지옥의 불길 속에서 매일 밤낮으로 고통받게 하는 금지된 주술이래.”이런 괴담이 사실이라면 원지민은 죽어서도 결코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받지 않은 벌을 죽어서라도 받는 것이 마땅할지도 모른다.“근데 이번에 좋은 일도 생겼어. 찰스 가문이 에단 찰스의 시신을 부검하지 않도록 하려고 서울과 협상을 했대. 서울에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만약 찰스 가문의 사람이 서울에서 사고를 치면 그들을 서울로 넘겨서 심판받게 할 거라고 했지.”잔인하고 무법적인
이준혁의 표정은 마치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차가웠다. 한 달 넘게 유지되던 평온한 가면이 바로 그 순간 깨져버렸다.김성훈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이준혁의 목소리가 다시 급박하게 울렸다.“혜인이가 누구랑 결혼하는데?”“내...”김성훈이 말을 꺼내는 순간 이준혁의 손에서 딱 하고 관절 소리가 났다.그의 손에 가해진 압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준혁의 어두운 눈동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심연처럼 깊었다.비록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툭 하는 소리와 함께 김성훈이 깎고 있던 사과가 바닥에 떨어지며 과즙이 튀었다.“아이구...”김성훈이 이를 드러내며 짧게 소리를 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내가 아니고 들은 바로는 배씨 가문 아들이래.”그제야 이준혁의 손에서 힘이 빠졌고 김성훈의 손은 놓여졌다.“아... 진짜 아프네...”김성훈은 팔을 휘저으며 생각했다.‘다음에 말할 때는 절대로 중간에 멈추지 말아야겠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내 손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렇게 꽉 쥐면 어떡해!”김성훈은 손에 보험까지 들 정도로 아끼는 편이었다.그런데 이준혁이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목이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의사로서의 습관이 나와서 그는 방금 했던 말을 잊고 이준혁의 회복 상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그런데 너 참 이상하네. 매일 재활 훈련은 안 하면서 손의 회복력은 꽤 좋은데?”그는 궁금해서 물었다.“혹시 나 몰래 밤에 재활하는 거냐?”“언제?”이준혁은 냉담하게 물었고 김성훈은 잠시 당황했다.“언제라니. 네가 언제 몰래 연습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설마 꿈에서라도 연습한 거야?”의심이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김성훈이 계속해서 물었다.“너 예전엔 몽유병 같은 거 없었잖아? 혹시 침대에 오래 누워 있다가 새로 생긴 증상이야?”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준혁의 눈을 들여다보려 했다. 혹시 다른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그러나 이준
이준혁의 회복력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김성훈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혜인 씨가 진짜 신의 약이구먼. 죽은 사람도 살리고 썩은 뼈도 되살릴 정도라니... 이건 거의 뭐 화타의 신비한 약 정도잖아?”그리고 그는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이준혁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병원을 떠났다.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층 버튼을 누르고 있었는데 마침 올라오던 주훈과 마주쳤다.주훈은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다 이준혁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그는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쉬며 무려 10초가 지나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대표님!”“회사로 가자.”이준혁은 그 한마디만 남기고 휠체어를 조작해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자 주훈은 황급히 외쳤다.“자... 잠시만요. 대표님!”아직 놀란 상태에서 그는 평소의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잊고 느린 말투로 대응하더니 급하게 앞으로 다가가 문이 닫히기 전에 발을 넣고 겨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엘리베이터가 닫히자 주훈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 갑자기 회사에는 왜 가십니까?”“처리할 일이 있어.”이준혁은 깨어난 이후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할 수 있는 한 짧게 대답했고 가능하면 한두 마디로 대화를 끝냈다.이런 이준혁의 상태가 걱정되어 주훈은 김성훈을 찾아갔었다.김성훈은 이준혁의 팔꿈치에 맞는 새로운 인공 관절 재료를 연구하느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하지만 이준혁의 말을 듣고 김성훈은 연구를 중단하고 매일 병원에 와서 이준혁과 시간을 보냈다.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말이 많아서 이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혼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덕분에 이준혁도 이따금 짧게나마 반응을 보이곤 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훈은 습관적으로 이준혁의 휠체어를 밀려고 했다.하지만 이준혁은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내가 스스로 할 거야.”그는 휠체어의 버튼을 눌러 직접 조작하며 앞으로 나아갔다.차 앞에 도착하자 주훈이 이준혁을 도우
이준혁은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깨어난 이후 그의 과거와 미래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살아는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로봇처럼 움직이는 삶이었다.회사를 찾은 이준혁은 이신우가 자신의 대표 사무실을 그대로 보존해 둔 것을 발견했다.이신우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사무실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이준혁이 방에 들어섰을 때 이신우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준혁이 네가 여긴 웬일이야?”그러자 이준혁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삼촌, 혜인이가 결혼한다던데... 알고 계세요?”이준혁이 알고 있냐 묻는 것은 단순한 소식을 넘어 그 안에 숨겨진 어떤 진실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혜인이는 지금 임신 중인데... 결혼하면 아이는 어떻게 처리되지? 상대 집안에서 받아는 들이나? 그리고 배씨 가문은...’솔직히 말해 이준혁은 지금 반쯤 불구가 된 상태에서도 배씨 가문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겉으로는 명문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부의 음모와 복잡한 일들은 그들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좋은 서울을 두고 북안도에 자리를 잡겠다는 선택만으로도 그 가문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배남준도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사람이란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밖에 없다.‘지금 혜인이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 과연 가족의 압박을 이겨내고 다른 여자를 맞이하지 않고 혜인이에게만 충실할 수 있을까?’이신우는 이준혁이 묻는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윤혜인의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이신우는 그녀에게 바로 연락을 취해 상황을 물었다.그는 윤혜인과 어느 정도 교분이 있었고 서울에서도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신우의 질문을 거부하지 않고 잠시 침묵한 후 사실이라고 말했다.이준혁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이신우는 고민 끝에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알아본 바로 별다른 숨겨진 일은 없어. 혜인 씨가 배남준과 결혼하는 건 사실이야. 둘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고 배남준은 나름
이준혁이 어릴 때부터 보여준 놀라운 사업적 재능을 이신우는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재능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그는 냉정하고 차가웠으며 오로지 이선 그룹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있었다.작은 기업들이 이선 그룹과 같은 대기업에 의존해 살아남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망하든 손해를 보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들이 힘들어 찾아와 불만을 제기해도 이준혁은 아주 냉담하게 안 되면 다른 곳을 찾으면 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그의 눈에는 언제나 이익과 성공만이 중요했고 때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물론 악의를 품고 사람을 해친 적은 없었지만 기업 간의 경쟁에서 거칠게 나가기도 했다.이신우는 이런 이준혁의 이익만을 중시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없는 태도를 매우 불편해했다.그래서 그가 처음 귀국해 윤혜인을 만났을 때 그들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윤혜인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이준혁이라는 천재적인 인물이 너무 거만하다고 생각해 그를 조금 눌러보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신우는 이준혁이 윤혜인의 존재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예를 들어 이준혁은 무관심했던 직원 복지나 이선 그룹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이익 보장 문제에 대해 스스로 강력한 보장 제도를 마련했다.결혼 후 이준혁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자선 활동을 하며 아픈 아이들과 외로운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윤혜인의 선한 행동들이 서서히 이 차가운 남자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특히 이신우가 알게 된 것은 이준혁이 이렇게 냉정했던 이유가 이천수로부터 어린 시절 받은 정서적 학대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이준혁은 그 집에서 전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천수를 친아버지처럼 여겼다.하지만 따로 속셈을 품은 이천수는 오랫동안 이준혁을 그릇된 길로 이끌려 했다.다행히도 이준혁은 자제력이 강해 냉정하게 행동하며 불법적인 행위나 타인을 해치려 하지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