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은 부하들에게 그들의 은신처를 하나하나 조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한 번에 공격하여 에단 찰스가 어디든 도망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층의 맨 끝으로 가기 위해 잠복하면서 달려갔다.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양말만 신은 채 뛰었다.지도를 따라 가장자리에 도착하자 윤혜인은 소화전 뒤편에서 작은 폭탄을 찾았다.윤혜인은 현실에서 실제 다이너마이트를 처음 보았다.생각보다 많이 달랐다.이 폭발 장치는 아주 초라하게 만들어져서 TV에서처럼 첨단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세 개의 다른 색상으로 만든 전기 알루미늄 와이어가 묶인 플라스틱 밀봉 상자의 형태였다.딱 봐도 후반에 더 작업하여 만든 것이었다.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총과 탄약에 대한 규제로는 에단 찰스가 다이너마이트를 직접 반입할 수 없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너마이트의 사진 디테일을 모두 찍어 보냈다.그리고 몇 명이 있는지도 다 알려줬다.뒤에 몇 군데도 윤혜인은 조심스럽게 잠복해서 다이너마이트를 하나씩 모두 찍었다.다행히 에단 찰스는 감시카메라가 첩보원에 의해 해킹당할까 봐 감시카메라를 모두 부쉈다. 덕분에 윤혜인은 들키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임무를 마친 후 윤혜인은 상대방의 회답을 기다렸다.곧바로 답장이 왔다.[B2F 주차장으로 가시면 돼요. 그곳에는 작은 문이 있어서 거기서 나올 수 있어요. 우리는 출구에서 혜인 씨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해요.]윤혜인은 머뭇거렸다.[그럼 이 다이너마이트들은 어떻게 처리해요?]에단 찰스가 지금 이렇게 날뛰는 이유는 다이너마이트 작동 버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이너마이트라는 위협을 제거하고 첩보원 중 엘리트들을 지하로 침투시키면 승산은 훨씬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다.[그건 혜인 씨가 관여할 일이 아니에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안전하게 나오시면 돼요.]윤혜인은 으스스한 빌딩을 둘러보더니 지휘관님의 말도 맞다고
이때 휴대전화의 위성 신호는 이미 박약해졌다.딱 한 칸만 남았는데 드문드문 신호가 아예 없어지기도 했다.윤혜인은 지휘관과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몇 차례나 신호음을 듣지도 못하고 나와버렸다.윤혜인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신호가 되는 창가 옆을 찾았다.그러자 주훈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조급했다.“혜인 씨, 서두르지 마세요. 이쪽에서 아직 다른 출구를 찾고 있어요.”그는 줄곧 첩보원 부대에 있었다. 그리고 윤혜인이 금방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일한 출구가 나쁜 놈들에 의해 폭파될 줄은 몰랐다.이는 주훈이 윤혜인과 이준혁의 운명을 걱정하며 초조하게 만들었다.위험지대에 있는 윤혜인이 오히려 주훈보다 더 차분했다.그녀는 입을 열었다.“지휘관님에게 전화를 넘겨주세요.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혜인 씨, 무슨 일인가요?”윤혜인은 물었다.“자체 제작한 원격조종 다이너마이트는 원격조종을 담당하는 선만 빼도 터지지 않는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요?”윤혜인은 이런 걸 몰랐는데 어느 한번 아버지의 서재에서 비슷한 책을 본 적이 있었다.아버지는 군인을 좋아하여 평소 이런 책들을 즐겨 읽고 윤혜인에게 지식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그래서 그녀는 실제로 다이너마이트를 본 적은 없지만 다른 사람보다 서면으로 더 많이 접하고 이해했다.지휘관은 설명해 주었다.“이론적으로 원격 조종 다이너마이트는 특수성 때문에 그 안에 원격 조종을 담당하는 선을 한번 끊어버리면 원격 조종 다이너마이트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어요.”“그렇다면 제가 방금 찍어 드린 영상 속에서 전문가들은 어떤 게 그 선인지 알 수 있을거예요.”“...”지휘관은 그녀의 의도를 알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윤혜인은 말을 이었다.“지휘관님, 제가 가서 선을 다 잘라내고 지휘관님의 사람들을 창문으로 들어오게 하세요. 건물 전체에 인질이 저를 포함해서 3명밖에 없어요. 저들에게 들켰다고 하더라도 손에는 2명의 인질만 잡고 있기에 쉽게 죽일 수 없을 거예
감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입을 떼자마자 이미 목이 메었다.곽진명은 순식간에 윤혜인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지막하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혜인아, 무슨 일이야?”윤혜인은 재빨리 감정을 감추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아니에요, 아빠. 방금 물 마시다가 사레 들렸어요.”“그래? 그럼 지금 그쪽에 도착한 거야?”곽진명이 물었다. 그는 비행기 경유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에 아직 윤혜인이 출장 중인 줄 알았다.“네, 아빠, 도착했어요.”멀리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감정이 북받쳐 오를 것 같아 윤혜인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아빠, 아빠가 아시는 분 중에 폭탄 해체하실 줄 아는 군인 한 분 계시죠?”윤혜인은 아버지가 해외에서 굉장히 친하게 지내던 군인이 있었고 그가 폭탄 해체 전문가였다는 걸 기억했다.그 군인은 해외에서 오랜 경험을 쌓으며 폭발물 처리 업무를 맡았었다.“아, 스미스 말이야? 왜, 그 사람한테 뭐 물어보려고?”“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제 친구 중에 감독인 강미연이라는 친구 있잖아요. 기억하시죠? 그 친구가 지금 영화 촬영 중인데 폭약 관련된 정보를 좀 알아봐야 해서요. 스미스 아저씨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곽진명은 딸의 말을 신뢰했기에 대답했다.“아, 그럼. 내가 스미스한테 연락해서 너가 물어보면 다 알려주라고 할게.”“네, 고마워요, 아빠.”윤혜인은 또다시 목이 메였다.“바보 같은 녀석, 아빠한테 뭘 고맙다고 그래. 일할 때도 몸조심하고 건강도 잘 챙겨라. 아름이는 나랑 네 홍 아줌마가 잘 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네, 아빠도 건강 조심하시고요...”“알았다. 돌아오기 전에 네 오빠한테 미리 말해. 공항에 마중 나갈 거야.”“네, 아빠. 그럼 끊을게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윤혜인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녀와 이준혁의 생존 확률은 각각 60%와 10%에 불과하다. 또 다른 가능성은 둘 다 폭약과 함께 목숨을 잃는 것이다.어느
손바닥에는 이미 땀이 잔뜩 차서 가위조차 제대로 쥐기 힘들었다.마침내 그녀는 노란 선을 향해 가위를 겨눴다. 눈을 꼭 감고 마음을 다잡으며 자르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뭐 하는 거야!”그리고 곧 이어서 들린 소리.“쾅!”맑은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나타나 가위를 그녀 손에서 낚아채 땅에 떨어뜨렸다.윤혜인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단정하고 지적인 얼굴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내가 아니면 누가 있을 줄 알았어?”한구운이 불친절한 어조로 비아냥거렸다.윤혜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한구운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말해봐. 나 말고 누가 널 구해줄 수 있는데?”사실 그는 결혼식장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화가 나서 일찍 자리를 떠났었다. 그런데 차가 도중에 이르렀을 때 부하들이 여러 가지 수상한 상황을 보고했다.먼저 이천수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예상했던 일이었다.이준혁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이천수의 체포는 필연적이었다.이씨 집안의 자산을 탐하려 했던 데다 주진희까지 살해했으니 그 어떤 죄목도 피할 수 없었다.한구운은 이천수가 저지른 자잘한 실수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천수가 자신을 대신해 다 뒤집어쓸 테니 말이다.최악의 경우 자신이 망한다 해도 이천수가 해외에 만들어놓은 광대한 사업체가 있으니 갈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이천수가 어떤 처벌을 받을지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는 쓸모없는 무능한 놈일 뿐 더 이상 신경 쓸 가치가 없었다.변호사나 하나 구해서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놔두면 될 일이었다.하지만 이준혁이 모든 손님들을 대피시키고 호텔을 비웠다는 보고를 듣자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최근 일들을 떠올려보니 이준혁이 단순히 이천수와 한구운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 이상의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곧바
정말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한구운 씨, 나가요. 나 방해하지 말고.”“야, 너 정말 은혜도 모르는 여자구나. 내가 너 구해주러 왔는데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이런 식으로밖에 말 못 해?”한구운의 평소 차분한 얼굴은 이미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그의 말투는 마치 윤혜인이 당연히 감사해야 한다는 듯했다.그러나 윤혜인은 단지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어요?”“...”그 순간, 남자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윤혜인은 상황을 금방 파악했다.“경유 항공편... 한구운 씨가 관련된 거죠?”이번에는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는지 한구운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며 솔직하게 말했다.“그래. 내가 그랬어.” 그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네 전남편이 결혼식을 하는데 네가 그 장면을 놓치면 안 되잖아?”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날 여기에 갇히게 한 주범이 이 사람이었어!’“한구운 씨, 내가 전생에 당신 조상 묘라도 파헤쳤나요? 어떻게 날 속여 여기로 데려오고 호텔 방에 가둬두기까지 해요? 당신 알기나 해요? 내가 그 변태에게 거의 죽을 뻔했다는 거?!”“...”한구운은 윤혜인이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평소에 그녀는 차갑거나 그저 그를 무시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분노로 가득 찬 윤혜인의 모습이 오히려 한구운의 눈에는 생기 있어 보였다.한순간, 그는 자신의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에는 단지 윤혜인을 소유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말만 걸어줘도 충분했다.정말 구제 불능이었다.“당장 꺼져요!”윤혜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이런 사람과 한마디도 더 나누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녀의 화난 얼굴을 보고 한구운은 설명했다.“난 너를 방에 가두라고 지시한 적 없어.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야. 정말이야.”만약 한구운이 아니었다면 윤혜인을 본 사람은 원지민밖에 없었다.하지만 원지민이 저지른 일이라 한들 윤혜인은 그
“한구운 씨, 정말로 나를 구해서 여기서 나가고 싶은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그럼 나가고 나서는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데요? 집으로 돌려보낼 거예요?”남자는 잠시 멍해졌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답은 내가 알려줄게요”윤혜인이 말했다.“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죠.”“한구운 씨는 이제 서울에 기반이 없어요. 그러니까 나를 데리고 나가려는 진짜 목적은 나를 멀리 해외로 데려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 가둬두려는 거겠죠. 맞아요?”한구운은 여전히 침묵했다.이 순간, 이들 둘만이 있을 뿐이고 더 이상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윤혜인의 앞에서는 굳이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았다.“한구운 씨는 아직도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거예요?”윤혜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당신은 언제나 이기주의자일 뿐이에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당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사람의 생각은 전혀 상관없죠. 그리고 필요할 때면 협박도 마다하지 않잖아요.”윤혜인은 한구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말에 한구운의 얼굴은 잠시 푸르스름해졌다가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그럼 이준혁은 다르기라도 해?”한구운은 비웃으며 말했다.“윤혜인, 알아둬. 남자는 다 똑같아. 아무도 마음속에 사욕이 없는 사람은 없어. 이준혁도 예전에 나와 네가 가까워지는 걸 보고 여러 일들을 벌였잖아. 결국 널 대하는 이준혁의 태도도 단순한 소유욕 때문일 뿐이야. 너희 여자들만 멍청하게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지!”한구운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사실 남자들한테 사랑과 소유욕은 본질적으로 같은 거야.”그가 한참 동안 쏟아낸 말을 다 듣고 윤혜인은 단호히 말했다.“아니요. 준혁 씨는 당신과 같지 않아요. 그리고 많은 남자들과도 달라요.”윤혜인은 더 이상 이런 사람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많은 것들이 그녀에게는 분명했지만 한구운에게는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한구운의 집착은 이미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어쩌면
‘혜인이는 왜 나한테는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 걸까. 똑같은 남자인데... 내가 한 일도 이준혁 못지않은데. 오늘도 마찬가지야. 여기에 폭탄이 가득한 걸 알면서도 난 혜인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돌아왔잖아. 똑같이 목숨을 걸고 한 행동인데... 대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고.’“그래요. 나 상처받았어요.”윤혜인은 주저 없이 인정했다.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면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다.하지만 주훈이 모든 걸 윤혜인에게 털어놓았을 때 윤혜인은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몸이 그렇게까지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길을 터주려 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이준혁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그는 유언장을 수정하며 윤혜인에게 더 유리한 조건들을 추가했고 이천수와 한구운을 상대하면서도 철저히 그녀와 아이를 위한 이익을 위해 싸웠다.이준혁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악명 높은 에단 찰스를 잡으려 했다.목적은 분명했다.그 모든 건 바로 윤혜인을 위한 것이었다.지난번 차 안에서 에단 찰스가 목소리를 변조해 내뱉은 말들을 듣는 순간 윤혜인은 깨달았다.이 악인이 잡히지 않는 한, 자신은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려 했고 언젠가 윤혜인을 떠올려 흥미가 생기면 언제든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그래서 이준혁이 마지막으로 하려던 일은 직접 에단 찰스를 잡는 것이었다.그리고 원지민과의 결혼식을 올린 이유는 에단 찰스가 더 이상 이준혁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윤혜인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이 모든 것을 주훈이 전화로 설명했을 때 윤혜인은 이준혁의 의도를 확신했다.윤혜인은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한구운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사람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요.”“준혁 씨는 나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어요. 사랑을 핑계로 도덕적 압박을 주지도 않았죠. 그 사
마치 윤혜인이 말했던 그대로였다.한구운은 언제나 완벽한 이기주의자였다.그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보상이 충분히 크고 매력적이어야만 했다.지금처럼 자신이 지불한 노력과 얻을 보상이 불균형할 때는, 한구운은 명확하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한구운의 반쪽 얼굴은 어둠 속에 숨어 밤과 하나가 되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살며시 입술을 떼고 말했다.“혜인아, 네가 살아있길 바라. 그건 진심이야.”그 말을 마친 한구운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마치 그 옛날, 광기 어린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돌아서 나간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그의 마음이 정말 아무런 동요도 없었을까?당연히 아니었다.하지만 한구운은 그 동요를 억누를 수 있었다. 이것이 그와 다른 사람들의 차이였다.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한 방울의 차가운 눈물이 카펫 위로 떨어졌다. 그 눈물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마음을 가다듬은 후, 윤혜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더 이상 떨리지 않는 손을 그녀는 정확하게 노란색 연결선 위에 올렸다....한편, 홀 안에서.원지민의 웨딩드레스는 여기저기 더러워져 흠집투성이였고 액세서리들도 흐트러져 있었다. 두꺼운 화장은 갈라져 그녀의 얼굴을 추하게 만들었다.평소라면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에단 찰스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된 후, 원지민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그녀는 이준혁의 불타는 듯한 눈길을 마주하면서도 전혀 두려움 없이 당당히 쳐다보았다.“하하, 준혁아. 지금 많이 불안하지?”원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에단이 혜인 씨를 잡으면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 설마...”그녀는 입을 가리며 일부러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혜인 씨의 배를 갈라서 네 아이를 꺼내는 건 아닐까?”“닥쳐!”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원지민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서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