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천은 구지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솔직하게 물었다.“1008, 너희 집 도어락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야?”의심하던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고 그는 구지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에 빠졌다.아버지 앞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구지윤이 한번 결혼한 적이 없었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주먹을 꼭 쥔 채, 구지윤은 곽경천의 시선을 느끼며 작게 대답했다.“육선재의 생일이에요.”곽경천은 순간 멍해졌다.그는 자신과 육선재가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 사실 때문에 둘의 관계가 다른 가문의 자제들보다 가까웠던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곽경천은 구지윤을 그렇게 몰아붙인 사람이 육선재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특히나 육선재가 먼저 구지윤에게 결혼을 청했을 때, 곽경천은 오히려 그를 부러워하기까지 했었다.자신은 절대 육선재처럼 대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들의 가문에서는 결혼이란 개인의 선택이 아닌, 가문 간의 관계를 위한 도구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이제서야 육선재가 그저 인간 말종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더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학대받았던 구지윤이 아직도 육선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그의 눈빛은 구지윤의 어깨에 남은 상처 자국으로 옮겨지며 점점 어두워졌다.“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도망갔어? 응?”구지윤은 그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느끼고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그녀는 다른 여성들처럼 자신감 있게 등을 드러낼 수 없었다.등에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고개를 젓던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사랑하지 않았어요.”곽경천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그 말이 주는 기쁨은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구지윤은 곧바로 덧붙였다.“그저 2년 동안 그 사람의 아내로 있었기 때문에... 익숙해졌을 뿐이에요.”육선재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몸이 오싹해지듯이 구지윤은 단지 그와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사랑이 아닌, 육선재의 앞
실내는 너무 조용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베개 위에 남아 있는 은은한 나무 향기만이 곽경천이 잠시 머물렀다는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구지윤은 천천히 몸을 돌려 두 손을 곽경천이 자고 간 자리 위에 놓았다.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맞잡자 마치 그를 껴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바닥의 온기가 점점 식어가며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슬픔이 서서히 번져갔다.그리고 그 슬픔은 결국 온몸을 휘감았다.과거의 기억들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기억을 뒤덮은 것처럼 말이다.어린 시절, 구지윤에게도 한때는 평온한 삶이 있었다.부유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중산층 가정에서 그녀는 자랐다.아버지 구철욱은 대기업의 임원이었고 어머니 홍승희도 같은 회사의 재무팀에서 일하고 있었다.구지윤이 태어난 후, 홍승희는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할까 걱정되어 베이비 시터를 고용했다.당시 부모님의 능력으로는 월급이 몇백만 원은 되는 베이비 시터를 고용하는 것이 전혀 부담이 없었다.하지만 좋은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홍승희는 회사의 한 고위 임원에게 눈에 띄었고 그 임원은 자주 일 핑계를 대며 그녀에게 추근댔다.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관계라 홍승희는 그가 상사인 탓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애써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러나 그 고위 임원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결국 그녀를 회식 자리에 불러 술에 취하게 한 후에 나쁜 의도를 드러냈다.홍승희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화장실에서 구철욱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철욱은 즉시 달려와 그 임원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사건은 크게 번졌고 구철욱은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호텔에 CCTV가 없었고, 그 임원과 홍승희는 상하 관계라는 이유로 그런 회식 자리가 흔하다고 여겨졌다.또한 그 임원이 실질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홍승희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기에 수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회사 측은 구철욱과 홍승희를 따로
일찍 철이 든 구지윤은 엄마가 일할 때 항상 조용히 옆에서 기다렸다.그러던 어느 날, 구철욱이 술에 취해 강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구철욱이 죽은 후, 홍승희에게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구철욱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술로 모든 돈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홍승희는 어쩔 수 없이 집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고 구철욱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임원은 또다시 홍승희에게 각가지 방법으로 괴롭힘을 가했다.그 무렵, 홍승희는 윤혜인의 어머니 윤아름이 줬던 명함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다.윤아름은 홍승희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는 그녀와 구지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구지윤이 윤혜인과 함께 놀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다.그렇게 구지윤은 윤아름과 함께 곽씨 가문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곽씨 가문의 가족들은 매우 친절했고 구지윤과 어린 윤혜인은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구지윤은 그때만 해도 이렇게 행복한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그러나 어느 날, 윤혜인의 어머니와 동생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곽씨 가문은 큰 슬픔에 빠졌다.홍승희는 윤아름이 데리고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곽경천의 아버지인 곽진명은 그녀를 곁에 두고 계속 일하도록 배려해 주었다.홍승희는 일을 성실하게 처리했고 곽진명은 그녀에게 집안의 일부 관리 업무를 맡겼다.구지윤과 홍승희는 곽씨 가문에서 관리인으로 살았고 곽경천은 어머니와 여동생의 실종 이후로 한동안 무기력하게 지냈다.그러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짖음을 당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곽경천은 더 많은 지식을 쌓고 강해지기로 결심했다.그래야 어머니와 여동생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구지윤은 어릴 때부터 곽경천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눈에 곽경천은 하늘의 신처럼 위대한 존재였다.게다가 그는 구지윤과 홍승희에게도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하지만 당시 구지윤은 곽경천이 자신을 여동생처
실내는 불이 켜지지 않았고 희미한 조명이 구지윤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었다.곽경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랜만에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구지윤과 눈높이를 맞춘 후,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지윤이 정말 많이 컸네. 하지만 나는 네가 네 인생을 살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라. 남을 위해 짐을 지지 말고, 알겠지?”구지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흐릿한 조명 속에서 보이는 곽경천의 잘생긴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심쿵이라는 감정을 일으켰다.곽경천은 다시 의자에 기대며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서 가서 자. 안 그러면 키 안 큰다?”하지만 구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보았다.단추가 풀려 있는 셔츠 사이로 그의 목과 쇄골이 살짝 보였다.어떤 모습이든 곽경천은 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구지윤은 자신이 곽경천을 향한 단순한 존경심이 변질되고 있음을 깨달았다.점점 더 탐욕스러운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지윤은 자꾸만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책 속에 숨겨둔 별 모양의 종이가 떨어졌고 그것을 홍승희가 발견했다.종이에 적힌 내용을 본 홍승희는 크게 놀랐고 처음으로 구지윤과 심하게 다투었다.감정이 폭발한 홍승희는 결국 구지윤에게 뺨을 때렸다.홍승희는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랐고 그 후로는 더 큰 슬픔이 밀려왔다.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그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지윤아, 우리는 깨끗하게 살아야 해. 사모님께서 우리를 거둬주셨고 회장님께서 네 학비를 내주셨잖니. 절대 곽경천 도련님께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면 안 돼. 알겠니?”얼굴이 붉게 부어오른 채 구지윤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왜 안 돼요? 전 그저 도련님을 좋아하는 건데... 좋아하는 게 왜 잘못이에요?”그러자 홍승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했다.“너 우리 집
남자의 손이 어깨로 스윽 올라오자 구지윤은 두려워서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도망쳤다.그러나 그 레게 머리를 한 남자는 구지윤을 놓친 게 아쉬운지 뒤에서 한참을 쫓아다녔다.구지윤은 마침 빈방 하나에 들어가 몸을 숨기며 겨우 그를 따돌릴 수 있었다.그 방의 인테리어를 살펴보던 구지윤은 문득 생각났다.구지윤에게 답장할 수 없을 떄, 곽경천은 종종 이곳 룸과 같은 사진을 찍어 보내며 손님을 접대 중이라고 알리곤 했었다.그리고 이 방은 그가 보냈던 사진 속의 방과 매우 비슷했다.구지윤은 문틈을 하나씩 기울여 살피기 시작했다.그러다 마침내 한 방에서 소파에 누워 있는 곽경천을 발견했다.구지윤은 서둘러 문을 밀고 들어갔다.정말로 누군가와 싸웠는지 그의 이마가 찢어져 있었다.구지윤은 불안에 떨며 곽경천의 손을 붙잡았다.“도련님, 도련님 왜 이러세요...”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경천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술에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 그의 눈은 충혈되고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마치 사탄의 눈처럼 보였다.구지윤은 놀라서 얼어붙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그러나 곽경천은 구지윤을 거칠게 끌어당겨 그녀를 자신의 품에 파묻었다.곧이어 뜨거운 그의 입술이 구지윤의 입술에 내려앉았다.구지윤은 크게 눈을 뜬 채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18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남자의 손도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었고 더구나 키스 같은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하지만 구지윤은 곽경천이 술에 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하는 행동은 술의 영향이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홍승희의 말이 떠올라 황급히 손을 뻗어 그를 밀며 웅얼거렸다.“도련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그제야 곽경천은 살짝 몸을 떼고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구지윤?”그가 너무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숨이 가빠진 채 구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 우리 집으로 가요.”정신을 차렸는지 아니
곽경천의 의심 섞인 질문에 구지윤은 그의 어두운 눈빛 속에서 짙은 짜증을 읽을 수 있었다.‘내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걸까?’구지윤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천둥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충격적이었다.곽경천은 분명 이 상황을 처리하는 데 몹시 곤란해하고 있었고 특히나 동생처럼 여기던 사람이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그런 감정은 끔찍하다는 단어로도 부족할 정도였다.그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도대체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구지윤은 그의 날카로운 말투에 움찔하며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그래서 손가락을 꼬며 작게 말했다.“도련님께서 다치셨다고 해서 기사 아저씨께 부탁드려서 왔어요...”구지윤의 이런 말을 듣고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는지 곽경천의 목소리는 한층 더 거칠어졌다.“구지윤, 너 대체 생각이 있긴 해? 술집 같은 데는 네가 마음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이름 석 자를 똑바로 부르며 곽경천이 구지윤을 꾸짖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말투와 표정은 매우 엄격했다.구지윤은 이미 홍승희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몰래 이곳까지 찾아온 터였다.이토록 끔찍한 첫 경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곽경천에게까지 차갑게 혼나고 있었다.그 순간 구지윤의 가슴은 마치 쓴 감귤처럼 쓰라렸다.곽경천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그의 존재는 구지윤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서러움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꾹 참으며 구지윤은 고개를 숙여 조용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곽경천은 그녀의 희고 가녀린 목에 남은 붉은 자국들을 보며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그와 마주쳐서 다행이지 만약 다른 낯선 사람이 구지윤을 건드렸다면 어땠을까?그러나 자신과의 일이었다고 해도 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인간관계를 다루는 데 능숙했지만 이런 종류의 상황은 완전히 초보였다.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오로지 분노였다.구지윤이 허락 없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였다.원래 그는 누
곽경천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기사에게 전화를 걸고는 일어나 구지윤에게 걸치라고 소파 위에 놓인 자신의 재킷을 던졌다.그 행동은 마치 시혜를 베푸는 듯했다.누가 봐도 그는 이 상황을 처리하고 싶지 않은, 원치 않은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구지윤은 마치 영혼 없는 사람처럼 그 재킷을 걸쳤다. 이 상황에서 그녀는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맨몸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어머니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절대로 품어선 안 될 꿈을 꾸었던 것이다.곽경천의 말이 정확했다.구지윤에게는 그를 걱정할 자격조차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도련님이었고 그녀는 도우미의 딸일 뿐이었다. 그들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그녀는 주인의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의 감정을 대놓고 표현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더 나아가 그를 좋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곽경천의 냉정한 말이 구지윤을 깨어나게 했다.그렇다.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구지윤은 누구인가?그녀는 그저 곽씨 가문에서 하인 방에 기거하는 도우미의 딸에 불과했다.곽경천은 고개를 돌려 구지윤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고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모든 기운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구지윤이 걸친 곽경천의 재킷은 너무 커서 무릎까지 내려왔고 그 안에서 그녀는 너무나도 가냘프고 약해 보였다.평소에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언제나 반짝이는 별과 달을 품고 있는 듯했지만 지금은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빛을 잃고 차가워 보였다.그와 함께 완전히 생기를 잃은 구지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곽경천은 잠시 멈칫하며 방금 자신의 말투가 너무 과하지 않았나 생각했다.그녀는 이제 겨우 18살에 불과했다. 그저 남녀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나이였을 뿐이다.조심스럽게 곽경천이 말을 꺼냈다.“오늘 일은...”“괜찮아요.”구지윤은 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저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
기사 아저씨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대답했다.“알겠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네.”그때 곽경천이 다가오며 구지윤이 여전히 차가운 바람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아직 차에 안 타고 있어?”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도련님 먼저 타세요.”곽경천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가 차에 오르자 구지윤은 조수석 옆으로 돌아갔지만 문을 열기 직전 곽경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뒤로 와서 앉아.”구지윤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뒷좌석으로 올라탔고 최대한 작게 몸을 움츠리며 한쪽 끝에 앉았다.온몸의 찢어지는 통증 때문에 그녀는 허리를 구부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곽경천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불편해?”평소처럼 곽경천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려 했지만 구지윤은 재빨리 창문 쪽으로 몸을 더 멀리 옮기며 거리를 두었다.그렇게 손이 허공에 머무르다 그는 결국 천천히 거두었다.“괜찮아요.”구지윤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감정을 숨기며 말했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곽경천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늘 밤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그에게 약을 탄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차는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고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머리도 아프고 숙취도 남아서인지 곽경천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잠든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구지윤은 재킷 속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줄이려 애쓰며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 했다.차가 한 약국 앞을 지나갈 때 곽경천이 차를 멈추라고 지시했다.기사는 급히 물었다.“도련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무엇을 사 오면 될까요?”그러자 곽경천은 구지윤을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말했다.“제가 다녀오겠습니다.”뒤이어 차에서 내려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차에 오를 때, 곽경천의 손에는 약 봉투가 들려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구지윤은 도망치듯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곽경천이 그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