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는 불이 켜지지 않았고 희미한 조명이 구지윤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었다.곽경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랜만에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구지윤과 눈높이를 맞춘 후,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지윤이 정말 많이 컸네. 하지만 나는 네가 네 인생을 살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라. 남을 위해 짐을 지지 말고, 알겠지?”구지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흐릿한 조명 속에서 보이는 곽경천의 잘생긴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심쿵이라는 감정을 일으켰다.곽경천은 다시 의자에 기대며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서 가서 자. 안 그러면 키 안 큰다?”하지만 구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보았다.단추가 풀려 있는 셔츠 사이로 그의 목과 쇄골이 살짝 보였다.어떤 모습이든 곽경천은 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구지윤은 자신이 곽경천을 향한 단순한 존경심이 변질되고 있음을 깨달았다.점점 더 탐욕스러운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지윤은 자꾸만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책 속에 숨겨둔 별 모양의 종이가 떨어졌고 그것을 홍승희가 발견했다.종이에 적힌 내용을 본 홍승희는 크게 놀랐고 처음으로 구지윤과 심하게 다투었다.감정이 폭발한 홍승희는 결국 구지윤에게 뺨을 때렸다.홍승희는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랐고 그 후로는 더 큰 슬픔이 밀려왔다.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그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지윤아, 우리는 깨끗하게 살아야 해. 사모님께서 우리를 거둬주셨고 회장님께서 네 학비를 내주셨잖니. 절대 곽경천 도련님께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면 안 돼. 알겠니?”얼굴이 붉게 부어오른 채 구지윤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왜 안 돼요? 전 그저 도련님을 좋아하는 건데... 좋아하는 게 왜 잘못이에요?”그러자 홍승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했다.“너 우리 집
남자의 손이 어깨로 스윽 올라오자 구지윤은 두려워서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도망쳤다.그러나 그 레게 머리를 한 남자는 구지윤을 놓친 게 아쉬운지 뒤에서 한참을 쫓아다녔다.구지윤은 마침 빈방 하나에 들어가 몸을 숨기며 겨우 그를 따돌릴 수 있었다.그 방의 인테리어를 살펴보던 구지윤은 문득 생각났다.구지윤에게 답장할 수 없을 떄, 곽경천은 종종 이곳 룸과 같은 사진을 찍어 보내며 손님을 접대 중이라고 알리곤 했었다.그리고 이 방은 그가 보냈던 사진 속의 방과 매우 비슷했다.구지윤은 문틈을 하나씩 기울여 살피기 시작했다.그러다 마침내 한 방에서 소파에 누워 있는 곽경천을 발견했다.구지윤은 서둘러 문을 밀고 들어갔다.정말로 누군가와 싸웠는지 그의 이마가 찢어져 있었다.구지윤은 불안에 떨며 곽경천의 손을 붙잡았다.“도련님, 도련님 왜 이러세요...”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경천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술에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 그의 눈은 충혈되고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마치 사탄의 눈처럼 보였다.구지윤은 놀라서 얼어붙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그러나 곽경천은 구지윤을 거칠게 끌어당겨 그녀를 자신의 품에 파묻었다.곧이어 뜨거운 그의 입술이 구지윤의 입술에 내려앉았다.구지윤은 크게 눈을 뜬 채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18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남자의 손도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었고 더구나 키스 같은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하지만 구지윤은 곽경천이 술에 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하는 행동은 술의 영향이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홍승희의 말이 떠올라 황급히 손을 뻗어 그를 밀며 웅얼거렸다.“도련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그제야 곽경천은 살짝 몸을 떼고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구지윤?”그가 너무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숨이 가빠진 채 구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 우리 집으로 가요.”정신을 차렸는지 아니
곽경천의 의심 섞인 질문에 구지윤은 그의 어두운 눈빛 속에서 짙은 짜증을 읽을 수 있었다.‘내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걸까?’구지윤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천둥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충격적이었다.곽경천은 분명 이 상황을 처리하는 데 몹시 곤란해하고 있었고 특히나 동생처럼 여기던 사람이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그런 감정은 끔찍하다는 단어로도 부족할 정도였다.그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도대체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구지윤은 그의 날카로운 말투에 움찔하며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그래서 손가락을 꼬며 작게 말했다.“도련님께서 다치셨다고 해서 기사 아저씨께 부탁드려서 왔어요...”구지윤의 이런 말을 듣고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는지 곽경천의 목소리는 한층 더 거칠어졌다.“구지윤, 너 대체 생각이 있긴 해? 술집 같은 데는 네가 마음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이름 석 자를 똑바로 부르며 곽경천이 구지윤을 꾸짖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말투와 표정은 매우 엄격했다.구지윤은 이미 홍승희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몰래 이곳까지 찾아온 터였다.이토록 끔찍한 첫 경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곽경천에게까지 차갑게 혼나고 있었다.그 순간 구지윤의 가슴은 마치 쓴 감귤처럼 쓰라렸다.곽경천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그의 존재는 구지윤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서러움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꾹 참으며 구지윤은 고개를 숙여 조용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곽경천은 그녀의 희고 가녀린 목에 남은 붉은 자국들을 보며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그와 마주쳐서 다행이지 만약 다른 낯선 사람이 구지윤을 건드렸다면 어땠을까?그러나 자신과의 일이었다고 해도 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인간관계를 다루는 데 능숙했지만 이런 종류의 상황은 완전히 초보였다.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오로지 분노였다.구지윤이 허락 없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였다.원래 그는 누
곽경천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기사에게 전화를 걸고는 일어나 구지윤에게 걸치라고 소파 위에 놓인 자신의 재킷을 던졌다.그 행동은 마치 시혜를 베푸는 듯했다.누가 봐도 그는 이 상황을 처리하고 싶지 않은, 원치 않은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구지윤은 마치 영혼 없는 사람처럼 그 재킷을 걸쳤다. 이 상황에서 그녀는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맨몸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어머니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절대로 품어선 안 될 꿈을 꾸었던 것이다.곽경천의 말이 정확했다.구지윤에게는 그를 걱정할 자격조차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도련님이었고 그녀는 도우미의 딸일 뿐이었다. 그들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그녀는 주인의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의 감정을 대놓고 표현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더 나아가 그를 좋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곽경천의 냉정한 말이 구지윤을 깨어나게 했다.그렇다.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구지윤은 누구인가?그녀는 그저 곽씨 가문에서 하인 방에 기거하는 도우미의 딸에 불과했다.곽경천은 고개를 돌려 구지윤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고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모든 기운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구지윤이 걸친 곽경천의 재킷은 너무 커서 무릎까지 내려왔고 그 안에서 그녀는 너무나도 가냘프고 약해 보였다.평소에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언제나 반짝이는 별과 달을 품고 있는 듯했지만 지금은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빛을 잃고 차가워 보였다.그와 함께 완전히 생기를 잃은 구지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곽경천은 잠시 멈칫하며 방금 자신의 말투가 너무 과하지 않았나 생각했다.그녀는 이제 겨우 18살에 불과했다. 그저 남녀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나이였을 뿐이다.조심스럽게 곽경천이 말을 꺼냈다.“오늘 일은...”“괜찮아요.”구지윤은 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저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
기사 아저씨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대답했다.“알겠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네.”그때 곽경천이 다가오며 구지윤이 여전히 차가운 바람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아직 차에 안 타고 있어?”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도련님 먼저 타세요.”곽경천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가 차에 오르자 구지윤은 조수석 옆으로 돌아갔지만 문을 열기 직전 곽경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뒤로 와서 앉아.”구지윤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뒷좌석으로 올라탔고 최대한 작게 몸을 움츠리며 한쪽 끝에 앉았다.온몸의 찢어지는 통증 때문에 그녀는 허리를 구부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곽경천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불편해?”평소처럼 곽경천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려 했지만 구지윤은 재빨리 창문 쪽으로 몸을 더 멀리 옮기며 거리를 두었다.그렇게 손이 허공에 머무르다 그는 결국 천천히 거두었다.“괜찮아요.”구지윤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감정을 숨기며 말했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곽경천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늘 밤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그에게 약을 탄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차는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고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머리도 아프고 숙취도 남아서인지 곽경천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잠든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구지윤은 재킷 속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줄이려 애쓰며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 했다.차가 한 약국 앞을 지나갈 때 곽경천이 차를 멈추라고 지시했다.기사는 급히 물었다.“도련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무엇을 사 오면 될까요?”그러자 곽경천은 구지윤을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말했다.“제가 다녀오겠습니다.”뒤이어 차에서 내려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차에 오를 때, 곽경천의 손에는 약 봉투가 들려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구지윤은 도망치듯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곽경천이 그녀를
“안 돼요!”구지윤은 당황한 듯 외쳤다.“엄마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그녀가 마침내 입을 여는 것을 보고 곽경천은 마음을 조금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천천히 고민해 보고 무슨 생각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네 생각을 존중할게.”구지윤은 곽경천이 설명을 해주고 심지어 사과까지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하지만 보상 같은 건 절대로 받을 수 없었다.그런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를 노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고 이 모든 일을 거래로 만들어버릴 것 같았다.곽경천의 삶 속에서 구지윤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첫사랑이자 첫 번째로 좋아한 사람에게 첫 경험을 준 것이었다. 후회는 없었다.구지윤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저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보상도 필요 없어요. 이번 일은 없었던 거로 해주세요. 도련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구지윤이 이토록 착하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자, 그리고 여자로서 가장 소중한 첫 경험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곽경천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짜증이 피어올랐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지윤아, 아무리 나라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어.”구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구지윤은 방으로 돌아와 욕조에 몸을 담갔다.머릿속에서는 곽경천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그가 말했다.‘아무리 나라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어.’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곽경천이 오늘 밤 보여준 태도는 그의 말대로 절반은 걱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어떤 말은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면 마치 예언처럼 가슴 깊이 새겨진다.문득문득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 당시 느꼈던 서러움과 슬픔이 함께 되살아났다.구지윤은 그 말을 마음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그 후 며칠 동안 구지윤은 곽경천을 피해 다녔고 곽경천도 그녀를 피하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은 며칠간 서로 마주치지 않았다.어느 날 방과 후, 곽
곽진명은 구지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이가 든 그로서는 앞으로 곽씨 가문의 영광을 유지하거나 더 높은 경지로 올리기 위해서는 곽경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곽씨 가문의 번영뿐만 아니라 윤아름과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아오는 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윤아름과 여동생을 찾게 된다면, 곽씨 가문은 충분히 강력해져야만 다시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강력한 가문과의 계약 결혼이 곽경천의 운명이었다.구지윤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자격이 부족했고 운이 좋지 않았다.곽경천이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곽진명이 잠시 동정심에 허락한다 해도 언젠가 곽씨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면 곽진명이 경험했던 비극을 똑같이 구지윤에게 물려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남자로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도 못하는 것 말이다.그는 구지윤을 위해서라도, 그녀가 자신과 어울리는 평범한 가정에서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곽진명은 구지윤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아무튼 이 일은 우리 곽씨 가문이 너한테 잘못한 거야. 경천이가 보상을 제안했다던데 내 생각에도 괜찮은 방법이다. 네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나서 나중에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 평범한 행복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떤 때라도 곽씨 가문은 언제나 네 뒤에 있을 거야.”서재의 노란 조명이 구지윤의 얼굴을 비추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매우 연약해 보였다.“회장님, 제가 아스테리아로 유학 가는 건 도련님의 뜻인가요?”곽진명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인정했다.그러자 구지윤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마음속이 쓰리고 아픈 감정이 몰려왔다.곽진명은 그런 그녀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아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곽경천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해 터득하는 것이 너무 늦었다.구지윤이 분명 오래전부터 곽경천을 좋아했지만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이런 일은 벌어지기 전에 방
그리고 구지윤은 그런 홍승희의 딸이었다. 그녀의 순수한 몸을 자신의 아들이 차지했다면 곽진명은 최소한 홍승희에게도 예의를 갖추어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구지윤은 곽진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생각한 듯 급히 해명했다.“회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술집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로 의도치 않은 사고였어요. 저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도련님을 탓하지 말아 주세요.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곽진명은 그녀가 정말로 어머니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네 뜻을 따르마. 많이 속상했겠구나.”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에요, 회장님. 속상하지 않아요. 회장님께서 저희를 이렇게 잘 돌봐주시고 엄마에게도 신경 써 주셨는데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죄송할 뿐이에요.”곽진명은 구지윤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숙하고 통찰력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상대방의 의도를 바로 간파할 수 있는 이런 현명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많은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구지윤은 서류 봉투에 담긴 곽진명이 준 블랙카드를 공손하게 내밀며 말했다.“회장님, 학비는 제가 이미 모아둔 것이 있어요. 대학을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으니 이 돈은 다시 가져가 주세요.”이 말에 곽진명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카드는 삼촌이 주는 작은 성의야. 네가 이걸 받지 않으면 삼촌을 마음속으로 원망하는 것처럼 느껴질 거야.”구지윤이 다시 거절하려고 하자 곽진명이 말을 이어갔다.“난 빚을 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네가 이 돈을 받아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구나.”곽진명은 여전히 구지윤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구지윤은 잠시 생각한 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카드를 받기로 했다.다만 이 돈은 사용하지 않고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돌려줄 생각이었다.다음 날, 구지윤은 홍승희에게 아스테리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홍승희는 크게 놀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
“누가 그만둔다는 거예요?”그때 남자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고개를 돌린 방민아는 육경한을 발견하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경한 씨, 소원 씨가 아이를 만나겠다고 난리인데 유진이 오늘 몸 상태가 별로라 거절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버티면서 손찌검까지 하려 해요. 얼른 경비에게 끌어내라고 해요.”방민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육경한의 팔을 잡으며 위안을 얻으려 했지만 육경한이 티 나지 않게 팔을 거두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넋을 잃은 방민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을 지었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내가 오늘 본때를 보여준다.’“멀쩡해 보이는 데 왜 때린대요?”육경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지만 상황 파악이 안 된 방민아가 여전히 이간질했다.“맞아요. 나 때리려 들면서 아이는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당신이 뭔데 막아서냐고, 경한 씨가 있어도 막지 못할 거라고 하더라고요.”육경한은 소원에게 묻는 대신 경비에게 물었다.“소원이 방민아 씨 때리려 했다는데 너희들도 봤어?”방민아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경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곳의 여주인이 누군지 안다면 경비도 그렇게 눈치 없이 굴진 않을 것이다.게다가 방민아가 서 있는 곳은 육경한 뒤였기에 경비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함부로 그런 적 없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보안 팀장을 매수했으니 다른 경비들에게도 지시를 내렸을 거라고 생각한 방민아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아니요. 사모님은 방민아 씨 때리려고 한 적 없습니다. 방민아 씨가 사모님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어요.”경비가 대답했다.방민아는 이 모든 게 환청이라고 생각했다.‘이 경비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호칭이 틀렸잖아. 소원 씨랑 사모님이어야지.’사모님이라고 부르기엔 살짝 이른 감이 있었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호칭이었다. 정신 승리를 마친 방민아가 약간 멍한 표정의 경비를 바라봤다. 그래도 눈치는 있다는 생각에 마른기침하며 경비에게 당부했다.“
방민아의 안색이 변했다.‘어젯밤이랑 오늘이랑 어떻게 같아?’여긴 육경한의 집이라 곳곳에 CCTV와 보이지 않는 눈들도 가득했기에 방민아의 말투도 다소 딱딱했고 무슨 말을 하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무슨 헛소리에요? 나 유진이 친자식처럼 대했는데. 모함할 생각하지 마요.”“허허...”소원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아니. 어딜 들어가요.”방민아가 계속 질척거리는데 잠금장치까지 걸어간 소원이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를 열더니 자동문이 스륵 열렸다.“소원 씨가 어떻게... 어떻게 여길 들어갈 수 있지?”방만아가 넋을 잃고 묻자 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이제 세상이 변했거든요. 방민아 씨.”“그게... 무슨 말이에요?”방민아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무서운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으로서는 애써 그 생각들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방민아는 철저한 사람이라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다.“내 뜻은 이따 유진이랑 아주머니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게 밝혀지면 내가 당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소원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와 노인에게 손댈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람이었기에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되레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사람에게 도망과 인내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맞서서 싸우는 게 제일 빠른 효과적이었다.방민아는 소원이 뭘 믿고 설치는지 몰라 넋을 잃었다.‘뭔데 이렇게 당당해? 여기 경한 씨 집 앞인데. 내 미래 남편 집 앞이잖아. 어떻게 감히.’방민아는 소원을 얕잡아보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무슨 수로 나를 처단해요?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들 텐데?”방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허세 부리다가 혀가 쥐 날까 무섭지도 않아요?”“두고 봐요.”“뭘 두고 본다는 거예요...”소원의 말은 너무 의미심장해서 방민아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방민아 씨, 곧 후회한다에 한표 걸려는데 믿어볼래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잘만 하면 꼭 만나게 해줄게요.”방민아가 말했다.소원이 망가질 거라는 희열에 잠겨있는 방민아가 느긋하게 보충했다.“어차피 망가질 몸 차리리 우리 오빠에게 망가지는 게 낫지 않아요? 남자구실을 못 하니 사실 잤다고 해도 실질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건 아니니까.”‘허...’방민기는 남자구실을 못 하긴 했지만 변태 성욕이 강한 사람이라 몸을 쓰지 못할수록 사람을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일반인도 견뎌내지 못하는 걸 소원이 버텨낸다는 건 말도 안 되었기에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방민아가 바라는 것도 딱 그거였다.“방민아 씨는 언제 보나 말을 참 잘해요.”소원이 촘촘한 치아를 들어내고 웃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전혀 믿기지 않는데요? 어떡하죠?”“못 믿을 게 뭐가 있어요.”방민아는 그런 소원이 그저 우습다고 생각했다.“내 말 듣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바로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은요?”“지금은 안 돼요.”방민아가 단칼에 거절했다.“일단 오빠 달래주고 3달 뒤에 다시 보여줄게요.”“3달이요?”소원이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그 석 달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방민아를 속내를 들켜도 전혀 난감한 기색이 없었고 그저 귀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왜 못 버텨요? 버텨야죠.”“사실 남자는 달래기 쉬워요. 오빠는 조금만 잘해주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난폭하게 구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방민기 씨든 방민아 씨든 더는 못 믿겠어요. 꿍꿍이가 좀 많아야 믿죠.”“당신 정말...”방민아는가 욕설을 퍼부으려다 매서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평생 아이 볼 생각하지 마요.”“오늘 꼭 아이를 봐야겠다면요?”소원이 말했다.“웃겨라. 무슨 자격으로요?”방민아는 소원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그게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여기서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아우성이라니, 꿈꾸는 게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
방민아는 소원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당신이 왜 여기에.”어젯밤 방민기에게 호되게 당했을 사람이 멀쩡하게 이곳에 서 있는 게 이상했다.방민아가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건 방민기가 아직 깨어나지 못해 방민아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이 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도 어젯밤 방민기에게 당한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멍이 든 걸 봐서는 당해도 호되게 당했을 거라는 생각에 방민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방민아 씨.”소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방민아를 또 만나고 싶지는 않기에 또 만났네요 같은 인사말은 생략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방민아가 소원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어딜 들어가요.”방민아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문을 여는 카드가 먹통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육경한에게 전화하려는데 미처 전화하기도 전에 소원을 발견한 방민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서 말했다.“들어가서 유진이 좀 보고 올게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민아의 손을 뿌리쳤다.“누가 보여준대요?”방민아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따라 갑자기 이상하게 나오는 소원이 신기했다.‘여기가 언제 소원이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는 곳이 됐지?’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하라는 대로 하면 유진이 보여준다면서요.”방민아가 그런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소원이 말했다.“네. 했어요. 그 어떤 일을 당해도 가만히만 있으면 유진이 보여준다고요.”방민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소원 씨,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왜 갑자기 헛소리하고 그래요?”소원이 대꾸했다.“열은 안 나는데? 정말 모르겠어요?”방민아의 태도는 소원이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방민아는 애초부터 아이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고 그저 소원을 모욕하고 망가트리기 위해 유진을 앞세웠을 뿐이다.분명 방민아에게 피해 가는 일이 없었고 육경한을 보면 멀리 피해 다녔지만 방민아는 그래도 소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단순
통화를 마친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끌어안고 뽀뽀하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여보, 아까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우리가 대상에 당첨됐다며 세계 일주 비용을 협찬해 주겠대.”“정말?”“정말이야. 미우 그룹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검색해 봤더니 정규적인 대기업이더라고.”소원이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선 육경한을 바라보자 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잘생겼다고 칭찬해 주는데 어떡해.”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서늘하던 아까와는 달리 딴사람이 된 육경한은 어딘가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자 소원은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대뜸 이렇게 물었다.“이제 유진이 보러 가도 돼요?”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앞으로 거기가 우리 집이 될 거야.”말 한마디에 육경한은 소원의 향후 생활을 결정해 버렸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했고 아까 봤던 모습은 그저 착각이었다.소원은 곧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줌마가 왜 병에 들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차 안.육경한이 입을 열었다.“백업 동영상은 내게 맡겨.”육경한이 토론이 아닌 명령을 내리자 소원이 멈칫했다.“왜 너한테 맡겨야 하는데?”소원은 꿍꿍이 많은 방민아가 아줌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게 둘 리가 없었다. 일단 착한 척하기 좋아하는 방민아의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벗겨내 더는 착한 척할 수 없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육경한이 말했다.“방씨 가문을 상대하는 데 영상을 쓸 필요는 없어. 아직 육씨 가문과 협력한 프로젝트도 있고. 이때 영상을 터트리면 다 같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 동영상은 절대 유포할 수 없어.”육경한은 야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잇속만 챙기는 약삭빠른 장사꾼이었다.소원은 두 사람이 비록 거래했지만 그녀가 방씨 가문에 해를 입히는 건 육경한도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방민아는 결국 육경한의 아내가 되지 못했지만 뼈는 끊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