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멈춰!”이준혁은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곧바로 손을 뻗어 윤혜인의 목덜미를 잡아챘고 강제로 그녀를 차 안으로 다시 끌어당겼다.차는 급하게 멈췄고 두 사람은 앞으로 기울어졌다. 윤혜인이 차의 단단한 등받이에 부딪힐 뻔했지만 이준혁이 먼저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아 쿠션처럼 막아주었다.윤혜인은 차 좌석에 부딪히지 않았지만 미리 예상했던 대로 팔로 얼굴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래도 충격이 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이준혁이 자신을 보호해주었기에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방금 들렸던 쿵 소리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가 다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잠시 생각하다가 이 정도로 이준혁이 충격을 못 버틸 리 없다고 결론 내렸다. 게다가 급정거였지 차가 부딪힌 건 아니니 치명적인 상처는 없을 거라 여기며 말이다.물론 윤혜인은 진짜로 차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준혁 같은 사람은 절대 차를 멈추지 않았을 테니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었다.차가 완전히 멈춘 후에도 그는 여전히 윤혜인의 팔을 세게 잡고 있었다.이준혁의 눈에는 드문 긴장감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미쳤어?”그 세 글자는 이를 악물고 내뱉는 듯한 말투였다.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이준혁은 혀끝으로 어금니를 밀며 말했다.“고속도로에서 차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진짜로 죽고 싶어?”윤혜인은 그의 손에 붙잡힌 팔을 흔들며 화가 나서 말했다.“죽고 싶지 않아요. 그쪽 때문에 죽을만한 가치는 없거든요.”이 말에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이준혁의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렸다.한참을 침묵하더니 마침내 그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이루 말할 수 없는 서글픔에 휩싸여 있었지만 윤혜인은 입술을 깨물며 차갑게 웃어 보였다.“이준혁 씨, 난 이미 오래전에 다 정리했어요. 지난번 이후로 난 그쪽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왜 그쪽은 그러지 못하는 거예요? 원지민 씨와의 결혼에 대해 내가 한마디라도 했어요? 이준혁 씨도 분
찬바람이 불어오자 이준혁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었다.‘지금 내가 무슨 자격으로 혜인이에게 잘해주려고 한 거지?’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윤혜인의 앞길을 깨끗하게 정리해주는 것뿐이었다.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게 말이다.순간적으로 이준혁은 얼굴에 다시 차가운 가면을 썼다.무섭게 굳은 얼굴로 그는 낮게 말했다.“내가 너무 참견했군.”윤혜인은 손끝을 꽉 움켜쥐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너무도 지쳐 있었다.다시금 희망을 품을 때마다 이준혁은 직접 그 희망을 짓밟았다.가장 웃긴 건 조금 전까지 윤혜인은 이준혁이 아직 자신을 신경 쓰고 있는지, 혹시 그가 자신을 아직 놓지 못한 건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건 다 허상에 불과했다.그저 윤혜인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던 것뿐이었다.윤혜인은 입술을 악물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서러움을 억눌렀다.그리고 천천히 말했다.“이 대표님, 제발 다음부터는 이렇게 참견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필요 없고 매우 불편해요. 만약 다음에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주세요. 그게 우리가 합의한 규칙이잖아요.”윤혜인은 곽경천이 말해준 사실을 떠올렸다.이준혁이 바로 어렸을 때 자신이 구해준 그 오빠였다는 것.임세희의 부모는 그저 정원에 초대된 손님이었고 이준혁 역시 부모를 따라 그곳에 왔다.그러던 이준혁은 얼음판에서 실수로 빠졌고 어렸던 윤혜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얼음을 깨고 그를 구해낸 것이다.그녀 자신도 물에 빠져 거의 익사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를 물 위로 끌어 올렸다.그때 임세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그 공을 가로챘고 이준혁을 자신의 하인들에게 데려가게 했다.남자의 이름조차 몰랐던 윤혜인은 곽경천과 엄마에게 한 오빠를 구했다고만 말했었다.엄마는 그녀가 너무 무모하게 물에 뛰어들었다며 꾸짖었지만 윤혜인은 그저 사람을 구하려 했을 뿐이었다.그 후로 다시 이준혁을 볼 기회는 없었고 그는 가족들과 함께 떠났다.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이미 명확했다.깨어난 후, 이준혁
윤혜인은 비웃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렇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과정을 거듭할수록 마음이 더 빨리 식어갈 거야. 오히려 좋은 거 아니겠어? 이제 그 남자를 완전히 내 삶에서 지워낼 수 있는 건데...’...구지윤은 아침에 일어나 방안에 흩어진 옷가지들과 침대 위에 반쯤 옷을 벗은 곽경천을 보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이런 일은 한 번 있으면 두 번도 생기는 법이다.어젯밤 곽경천은 구지윤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커피를 마시러 올라왔다.그리고는 피곤하다며 그냥 그녀의 집에서 자겠다고 버티더니 결국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구지윤은 곽경천이 불쌍해 보여서 한밤중에 얇은 이불을 덮어주러 갔다가 그에게 그대로 끌려가 입맞춤을 받으며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다.결국 어찌저찌 곽경천은 구지윤을 침대로 데리고 갔다.성숙한 남녀라면 서로 뜨거운 감정 속에 잠길 수밖에 없었지만 곽경천은 마지막 순간에 멈추고 다른 방식으로 대신하자고 했다.구지윤이 어리둥절해 있던 차에 곽경천은 이렇게 말했다.“너 생리 중 아니야?”‘생리...’구지윤은 한참 생각한 끝에 그 말의 뜻을 깨달았다.첫날 밤 그녀의 반응을 보고 곽경천이 생리 중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사실, 그녀는 그동안 두 번밖에 그런 경험이 없었고 그나마도 꽤 오랜 시간 차이가 있었다. 그로 인해 갑작스러운 ‘침입’에 몸이 반응한 것일 뿐이었다.구지윤은 씁쓸하게 웃었다.‘그래. 한번 이혼한 여자가 순결할 거라는 생각을 할 리 없지.’게다가 그녀는 악명 높은 육선재와 결혼했었으니 말이다.육선재는 공공연하게 친구들 앞에서 구지윤과 함께 얼마나 많은 이상한 짓을 했는지 또 그녀가 얼마나 순순히 협조했는지 떠벌렸었다.이혼 후에도 육선재는 구지윤을 비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를 추악한 여자로 만들었다.마치 그녀가 남자보다 더 욕망이 많은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육선재를 떠올리기만 하면 구지윤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마치 건조한 종이처럼 손만 대도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한밤중에 깨어나면 항상 육선재
곽경천은 구지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솔직하게 물었다.“1008, 너희 집 도어락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야?”의심하던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고 그는 구지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에 빠졌다.아버지 앞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구지윤이 한번 결혼한 적이 없었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주먹을 꼭 쥔 채, 구지윤은 곽경천의 시선을 느끼며 작게 대답했다.“육선재의 생일이에요.”곽경천은 순간 멍해졌다.그는 자신과 육선재가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 사실 때문에 둘의 관계가 다른 가문의 자제들보다 가까웠던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곽경천은 구지윤을 그렇게 몰아붙인 사람이 육선재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특히나 육선재가 먼저 구지윤에게 결혼을 청했을 때, 곽경천은 오히려 그를 부러워하기까지 했었다.자신은 절대 육선재처럼 대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들의 가문에서는 결혼이란 개인의 선택이 아닌, 가문 간의 관계를 위한 도구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이제서야 육선재가 그저 인간 말종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더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학대받았던 구지윤이 아직도 육선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그의 눈빛은 구지윤의 어깨에 남은 상처 자국으로 옮겨지며 점점 어두워졌다.“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도망갔어? 응?”구지윤은 그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느끼고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그녀는 다른 여성들처럼 자신감 있게 등을 드러낼 수 없었다.등에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고개를 젓던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사랑하지 않았어요.”곽경천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그 말이 주는 기쁨은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구지윤은 곧바로 덧붙였다.“그저 2년 동안 그 사람의 아내로 있었기 때문에... 익숙해졌을 뿐이에요.”육선재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몸이 오싹해지듯이 구지윤은 단지 그와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사랑이 아닌, 육선재의 앞
실내는 너무 조용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베개 위에 남아 있는 은은한 나무 향기만이 곽경천이 잠시 머물렀다는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구지윤은 천천히 몸을 돌려 두 손을 곽경천이 자고 간 자리 위에 놓았다.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맞잡자 마치 그를 껴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바닥의 온기가 점점 식어가며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슬픔이 서서히 번져갔다.그리고 그 슬픔은 결국 온몸을 휘감았다.과거의 기억들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기억을 뒤덮은 것처럼 말이다.어린 시절, 구지윤에게도 한때는 평온한 삶이 있었다.부유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중산층 가정에서 그녀는 자랐다.아버지 구철욱은 대기업의 임원이었고 어머니 홍승희도 같은 회사의 재무팀에서 일하고 있었다.구지윤이 태어난 후, 홍승희는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할까 걱정되어 베이비 시터를 고용했다.당시 부모님의 능력으로는 월급이 몇백만 원은 되는 베이비 시터를 고용하는 것이 전혀 부담이 없었다.하지만 좋은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홍승희는 회사의 한 고위 임원에게 눈에 띄었고 그 임원은 자주 일 핑계를 대며 그녀에게 추근댔다.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관계라 홍승희는 그가 상사인 탓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애써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러나 그 고위 임원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결국 그녀를 회식 자리에 불러 술에 취하게 한 후에 나쁜 의도를 드러냈다.홍승희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화장실에서 구철욱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철욱은 즉시 달려와 그 임원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사건은 크게 번졌고 구철욱은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호텔에 CCTV가 없었고, 그 임원과 홍승희는 상하 관계라는 이유로 그런 회식 자리가 흔하다고 여겨졌다.또한 그 임원이 실질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홍승희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기에 수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회사 측은 구철욱과 홍승희를 따로
일찍 철이 든 구지윤은 엄마가 일할 때 항상 조용히 옆에서 기다렸다.그러던 어느 날, 구철욱이 술에 취해 강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구철욱이 죽은 후, 홍승희에게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구철욱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술로 모든 돈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홍승희는 어쩔 수 없이 집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고 구철욱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임원은 또다시 홍승희에게 각가지 방법으로 괴롭힘을 가했다.그 무렵, 홍승희는 윤혜인의 어머니 윤아름이 줬던 명함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다.윤아름은 홍승희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는 그녀와 구지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구지윤이 윤혜인과 함께 놀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다.그렇게 구지윤은 윤아름과 함께 곽씨 가문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곽씨 가문의 가족들은 매우 친절했고 구지윤과 어린 윤혜인은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구지윤은 그때만 해도 이렇게 행복한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그러나 어느 날, 윤혜인의 어머니와 동생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곽씨 가문은 큰 슬픔에 빠졌다.홍승희는 윤아름이 데리고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곽경천의 아버지인 곽진명은 그녀를 곁에 두고 계속 일하도록 배려해 주었다.홍승희는 일을 성실하게 처리했고 곽진명은 그녀에게 집안의 일부 관리 업무를 맡겼다.구지윤과 홍승희는 곽씨 가문에서 관리인으로 살았고 곽경천은 어머니와 여동생의 실종 이후로 한동안 무기력하게 지냈다.그러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짖음을 당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곽경천은 더 많은 지식을 쌓고 강해지기로 결심했다.그래야 어머니와 여동생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구지윤은 어릴 때부터 곽경천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눈에 곽경천은 하늘의 신처럼 위대한 존재였다.게다가 그는 구지윤과 홍승희에게도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하지만 당시 구지윤은 곽경천이 자신을 여동생처
실내는 불이 켜지지 않았고 희미한 조명이 구지윤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었다.곽경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랜만에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구지윤과 눈높이를 맞춘 후,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지윤이 정말 많이 컸네. 하지만 나는 네가 네 인생을 살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라. 남을 위해 짐을 지지 말고, 알겠지?”구지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흐릿한 조명 속에서 보이는 곽경천의 잘생긴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심쿵이라는 감정을 일으켰다.곽경천은 다시 의자에 기대며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서 가서 자. 안 그러면 키 안 큰다?”하지만 구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보았다.단추가 풀려 있는 셔츠 사이로 그의 목과 쇄골이 살짝 보였다.어떤 모습이든 곽경천은 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구지윤은 자신이 곽경천을 향한 단순한 존경심이 변질되고 있음을 깨달았다.점점 더 탐욕스러운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지윤은 자꾸만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책 속에 숨겨둔 별 모양의 종이가 떨어졌고 그것을 홍승희가 발견했다.종이에 적힌 내용을 본 홍승희는 크게 놀랐고 처음으로 구지윤과 심하게 다투었다.감정이 폭발한 홍승희는 결국 구지윤에게 뺨을 때렸다.홍승희는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랐고 그 후로는 더 큰 슬픔이 밀려왔다.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그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지윤아, 우리는 깨끗하게 살아야 해. 사모님께서 우리를 거둬주셨고 회장님께서 네 학비를 내주셨잖니. 절대 곽경천 도련님께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면 안 돼. 알겠니?”얼굴이 붉게 부어오른 채 구지윤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왜 안 돼요? 전 그저 도련님을 좋아하는 건데... 좋아하는 게 왜 잘못이에요?”그러자 홍승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했다.“너 우리 집
남자의 손이 어깨로 스윽 올라오자 구지윤은 두려워서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도망쳤다.그러나 그 레게 머리를 한 남자는 구지윤을 놓친 게 아쉬운지 뒤에서 한참을 쫓아다녔다.구지윤은 마침 빈방 하나에 들어가 몸을 숨기며 겨우 그를 따돌릴 수 있었다.그 방의 인테리어를 살펴보던 구지윤은 문득 생각났다.구지윤에게 답장할 수 없을 떄, 곽경천은 종종 이곳 룸과 같은 사진을 찍어 보내며 손님을 접대 중이라고 알리곤 했었다.그리고 이 방은 그가 보냈던 사진 속의 방과 매우 비슷했다.구지윤은 문틈을 하나씩 기울여 살피기 시작했다.그러다 마침내 한 방에서 소파에 누워 있는 곽경천을 발견했다.구지윤은 서둘러 문을 밀고 들어갔다.정말로 누군가와 싸웠는지 그의 이마가 찢어져 있었다.구지윤은 불안에 떨며 곽경천의 손을 붙잡았다.“도련님, 도련님 왜 이러세요...”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경천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술에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 그의 눈은 충혈되고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마치 사탄의 눈처럼 보였다.구지윤은 놀라서 얼어붙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그러나 곽경천은 구지윤을 거칠게 끌어당겨 그녀를 자신의 품에 파묻었다.곧이어 뜨거운 그의 입술이 구지윤의 입술에 내려앉았다.구지윤은 크게 눈을 뜬 채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18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남자의 손도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었고 더구나 키스 같은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하지만 구지윤은 곽경천이 술에 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하는 행동은 술의 영향이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홍승희의 말이 떠올라 황급히 손을 뻗어 그를 밀며 웅얼거렸다.“도련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그제야 곽경천은 살짝 몸을 떼고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구지윤?”그가 너무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숨이 가빠진 채 구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 우리 집으로 가요.”정신을 차렸는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