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어오자 이준혁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었다.‘지금 내가 무슨 자격으로 혜인이에게 잘해주려고 한 거지?’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윤혜인의 앞길을 깨끗하게 정리해주는 것뿐이었다.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게 말이다.순간적으로 이준혁은 얼굴에 다시 차가운 가면을 썼다.무섭게 굳은 얼굴로 그는 낮게 말했다.“내가 너무 참견했군.”윤혜인은 손끝을 꽉 움켜쥐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너무도 지쳐 있었다.다시금 희망을 품을 때마다 이준혁은 직접 그 희망을 짓밟았다.가장 웃긴 건 조금 전까지 윤혜인은 이준혁이 아직 자신을 신경 쓰고 있는지, 혹시 그가 자신을 아직 놓지 못한 건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건 다 허상에 불과했다.그저 윤혜인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던 것뿐이었다.윤혜인은 입술을 악물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서러움을 억눌렀다.그리고 천천히 말했다.“이 대표님, 제발 다음부터는 이렇게 참견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필요 없고 매우 불편해요. 만약 다음에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주세요. 그게 우리가 합의한 규칙이잖아요.”윤혜인은 곽경천이 말해준 사실을 떠올렸다.이준혁이 바로 어렸을 때 자신이 구해준 그 오빠였다는 것.임세희의 부모는 그저 정원에 초대된 손님이었고 이준혁 역시 부모를 따라 그곳에 왔다.그러던 이준혁은 얼음판에서 실수로 빠졌고 어렸던 윤혜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얼음을 깨고 그를 구해낸 것이다.그녀 자신도 물에 빠져 거의 익사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를 물 위로 끌어 올렸다.그때 임세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그 공을 가로챘고 이준혁을 자신의 하인들에게 데려가게 했다.남자의 이름조차 몰랐던 윤혜인은 곽경천과 엄마에게 한 오빠를 구했다고만 말했었다.엄마는 그녀가 너무 무모하게 물에 뛰어들었다며 꾸짖었지만 윤혜인은 그저 사람을 구하려 했을 뿐이었다.그 후로 다시 이준혁을 볼 기회는 없었고 그는 가족들과 함께 떠났다.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이미 명확했다.깨어난 후, 이준혁
윤혜인은 비웃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렇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과정을 거듭할수록 마음이 더 빨리 식어갈 거야. 오히려 좋은 거 아니겠어? 이제 그 남자를 완전히 내 삶에서 지워낼 수 있는 건데...’...구지윤은 아침에 일어나 방안에 흩어진 옷가지들과 침대 위에 반쯤 옷을 벗은 곽경천을 보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이런 일은 한 번 있으면 두 번도 생기는 법이다.어젯밤 곽경천은 구지윤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커피를 마시러 올라왔다.그리고는 피곤하다며 그냥 그녀의 집에서 자겠다고 버티더니 결국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구지윤은 곽경천이 불쌍해 보여서 한밤중에 얇은 이불을 덮어주러 갔다가 그에게 그대로 끌려가 입맞춤을 받으며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다.결국 어찌저찌 곽경천은 구지윤을 침대로 데리고 갔다.성숙한 남녀라면 서로 뜨거운 감정 속에 잠길 수밖에 없었지만 곽경천은 마지막 순간에 멈추고 다른 방식으로 대신하자고 했다.구지윤이 어리둥절해 있던 차에 곽경천은 이렇게 말했다.“너 생리 중 아니야?”‘생리...’구지윤은 한참 생각한 끝에 그 말의 뜻을 깨달았다.첫날 밤 그녀의 반응을 보고 곽경천이 생리 중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사실, 그녀는 그동안 두 번밖에 그런 경험이 없었고 그나마도 꽤 오랜 시간 차이가 있었다. 그로 인해 갑작스러운 ‘침입’에 몸이 반응한 것일 뿐이었다.구지윤은 씁쓸하게 웃었다.‘그래. 한번 이혼한 여자가 순결할 거라는 생각을 할 리 없지.’게다가 그녀는 악명 높은 육선재와 결혼했었으니 말이다.육선재는 공공연하게 친구들 앞에서 구지윤과 함께 얼마나 많은 이상한 짓을 했는지 또 그녀가 얼마나 순순히 협조했는지 떠벌렸었다.이혼 후에도 육선재는 구지윤을 비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를 추악한 여자로 만들었다.마치 그녀가 남자보다 더 욕망이 많은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육선재를 떠올리기만 하면 구지윤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마치 건조한 종이처럼 손만 대도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한밤중에 깨어나면 항상 육선재
곽경천은 구지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솔직하게 물었다.“1008, 너희 집 도어락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야?”의심하던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고 그는 구지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에 빠졌다.아버지 앞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구지윤이 한번 결혼한 적이 없었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주먹을 꼭 쥔 채, 구지윤은 곽경천의 시선을 느끼며 작게 대답했다.“육선재의 생일이에요.”곽경천은 순간 멍해졌다.그는 자신과 육선재가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 사실 때문에 둘의 관계가 다른 가문의 자제들보다 가까웠던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곽경천은 구지윤을 그렇게 몰아붙인 사람이 육선재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특히나 육선재가 먼저 구지윤에게 결혼을 청했을 때, 곽경천은 오히려 그를 부러워하기까지 했었다.자신은 절대 육선재처럼 대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들의 가문에서는 결혼이란 개인의 선택이 아닌, 가문 간의 관계를 위한 도구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이제서야 육선재가 그저 인간 말종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더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학대받았던 구지윤이 아직도 육선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그의 눈빛은 구지윤의 어깨에 남은 상처 자국으로 옮겨지며 점점 어두워졌다.“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도망갔어? 응?”구지윤은 그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느끼고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그녀는 다른 여성들처럼 자신감 있게 등을 드러낼 수 없었다.등에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고개를 젓던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사랑하지 않았어요.”곽경천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그 말이 주는 기쁨은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구지윤은 곧바로 덧붙였다.“그저 2년 동안 그 사람의 아내로 있었기 때문에... 익숙해졌을 뿐이에요.”육선재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몸이 오싹해지듯이 구지윤은 단지 그와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사랑이 아닌, 육선재의 앞
실내는 너무 조용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베개 위에 남아 있는 은은한 나무 향기만이 곽경천이 잠시 머물렀다는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구지윤은 천천히 몸을 돌려 두 손을 곽경천이 자고 간 자리 위에 놓았다.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맞잡자 마치 그를 껴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바닥의 온기가 점점 식어가며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슬픔이 서서히 번져갔다.그리고 그 슬픔은 결국 온몸을 휘감았다.과거의 기억들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기억을 뒤덮은 것처럼 말이다.어린 시절, 구지윤에게도 한때는 평온한 삶이 있었다.부유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중산층 가정에서 그녀는 자랐다.아버지 구철욱은 대기업의 임원이었고 어머니 홍승희도 같은 회사의 재무팀에서 일하고 있었다.구지윤이 태어난 후, 홍승희는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할까 걱정되어 베이비 시터를 고용했다.당시 부모님의 능력으로는 월급이 몇백만 원은 되는 베이비 시터를 고용하는 것이 전혀 부담이 없었다.하지만 좋은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홍승희는 회사의 한 고위 임원에게 눈에 띄었고 그 임원은 자주 일 핑계를 대며 그녀에게 추근댔다.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관계라 홍승희는 그가 상사인 탓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애써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러나 그 고위 임원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결국 그녀를 회식 자리에 불러 술에 취하게 한 후에 나쁜 의도를 드러냈다.홍승희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화장실에서 구철욱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철욱은 즉시 달려와 그 임원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사건은 크게 번졌고 구철욱은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호텔에 CCTV가 없었고, 그 임원과 홍승희는 상하 관계라는 이유로 그런 회식 자리가 흔하다고 여겨졌다.또한 그 임원이 실질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홍승희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기에 수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회사 측은 구철욱과 홍승희를 따로
일찍 철이 든 구지윤은 엄마가 일할 때 항상 조용히 옆에서 기다렸다.그러던 어느 날, 구철욱이 술에 취해 강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구철욱이 죽은 후, 홍승희에게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구철욱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술로 모든 돈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홍승희는 어쩔 수 없이 집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고 구철욱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임원은 또다시 홍승희에게 각가지 방법으로 괴롭힘을 가했다.그 무렵, 홍승희는 윤혜인의 어머니 윤아름이 줬던 명함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다.윤아름은 홍승희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는 그녀와 구지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구지윤이 윤혜인과 함께 놀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다.그렇게 구지윤은 윤아름과 함께 곽씨 가문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곽씨 가문의 가족들은 매우 친절했고 구지윤과 어린 윤혜인은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구지윤은 그때만 해도 이렇게 행복한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그러나 어느 날, 윤혜인의 어머니와 동생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곽씨 가문은 큰 슬픔에 빠졌다.홍승희는 윤아름이 데리고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곽경천의 아버지인 곽진명은 그녀를 곁에 두고 계속 일하도록 배려해 주었다.홍승희는 일을 성실하게 처리했고 곽진명은 그녀에게 집안의 일부 관리 업무를 맡겼다.구지윤과 홍승희는 곽씨 가문에서 관리인으로 살았고 곽경천은 어머니와 여동생의 실종 이후로 한동안 무기력하게 지냈다.그러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짖음을 당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곽경천은 더 많은 지식을 쌓고 강해지기로 결심했다.그래야 어머니와 여동생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구지윤은 어릴 때부터 곽경천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눈에 곽경천은 하늘의 신처럼 위대한 존재였다.게다가 그는 구지윤과 홍승희에게도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하지만 당시 구지윤은 곽경천이 자신을 여동생처
실내는 불이 켜지지 않았고 희미한 조명이 구지윤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었다.곽경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랜만에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구지윤과 눈높이를 맞춘 후,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지윤이 정말 많이 컸네. 하지만 나는 네가 네 인생을 살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라. 남을 위해 짐을 지지 말고, 알겠지?”구지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흐릿한 조명 속에서 보이는 곽경천의 잘생긴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심쿵이라는 감정을 일으켰다.곽경천은 다시 의자에 기대며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서 가서 자. 안 그러면 키 안 큰다?”하지만 구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보았다.단추가 풀려 있는 셔츠 사이로 그의 목과 쇄골이 살짝 보였다.어떤 모습이든 곽경천은 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구지윤은 자신이 곽경천을 향한 단순한 존경심이 변질되고 있음을 깨달았다.점점 더 탐욕스러운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지윤은 자꾸만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책 속에 숨겨둔 별 모양의 종이가 떨어졌고 그것을 홍승희가 발견했다.종이에 적힌 내용을 본 홍승희는 크게 놀랐고 처음으로 구지윤과 심하게 다투었다.감정이 폭발한 홍승희는 결국 구지윤에게 뺨을 때렸다.홍승희는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랐고 그 후로는 더 큰 슬픔이 밀려왔다.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그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지윤아, 우리는 깨끗하게 살아야 해. 사모님께서 우리를 거둬주셨고 회장님께서 네 학비를 내주셨잖니. 절대 곽경천 도련님께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면 안 돼. 알겠니?”얼굴이 붉게 부어오른 채 구지윤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왜 안 돼요? 전 그저 도련님을 좋아하는 건데... 좋아하는 게 왜 잘못이에요?”그러자 홍승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했다.“너 우리 집
남자의 손이 어깨로 스윽 올라오자 구지윤은 두려워서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도망쳤다.그러나 그 레게 머리를 한 남자는 구지윤을 놓친 게 아쉬운지 뒤에서 한참을 쫓아다녔다.구지윤은 마침 빈방 하나에 들어가 몸을 숨기며 겨우 그를 따돌릴 수 있었다.그 방의 인테리어를 살펴보던 구지윤은 문득 생각났다.구지윤에게 답장할 수 없을 떄, 곽경천은 종종 이곳 룸과 같은 사진을 찍어 보내며 손님을 접대 중이라고 알리곤 했었다.그리고 이 방은 그가 보냈던 사진 속의 방과 매우 비슷했다.구지윤은 문틈을 하나씩 기울여 살피기 시작했다.그러다 마침내 한 방에서 소파에 누워 있는 곽경천을 발견했다.구지윤은 서둘러 문을 밀고 들어갔다.정말로 누군가와 싸웠는지 그의 이마가 찢어져 있었다.구지윤은 불안에 떨며 곽경천의 손을 붙잡았다.“도련님, 도련님 왜 이러세요...”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경천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술에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 그의 눈은 충혈되고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마치 사탄의 눈처럼 보였다.구지윤은 놀라서 얼어붙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그러나 곽경천은 구지윤을 거칠게 끌어당겨 그녀를 자신의 품에 파묻었다.곧이어 뜨거운 그의 입술이 구지윤의 입술에 내려앉았다.구지윤은 크게 눈을 뜬 채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18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남자의 손도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었고 더구나 키스 같은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하지만 구지윤은 곽경천이 술에 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하는 행동은 술의 영향이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홍승희의 말이 떠올라 황급히 손을 뻗어 그를 밀며 웅얼거렸다.“도련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그제야 곽경천은 살짝 몸을 떼고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구지윤?”그가 너무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숨이 가빠진 채 구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 우리 집으로 가요.”정신을 차렸는지 아니
곽경천의 의심 섞인 질문에 구지윤은 그의 어두운 눈빛 속에서 짙은 짜증을 읽을 수 있었다.‘내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걸까?’구지윤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천둥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충격적이었다.곽경천은 분명 이 상황을 처리하는 데 몹시 곤란해하고 있었고 특히나 동생처럼 여기던 사람이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그런 감정은 끔찍하다는 단어로도 부족할 정도였다.그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도대체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구지윤은 그의 날카로운 말투에 움찔하며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그래서 손가락을 꼬며 작게 말했다.“도련님께서 다치셨다고 해서 기사 아저씨께 부탁드려서 왔어요...”구지윤의 이런 말을 듣고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는지 곽경천의 목소리는 한층 더 거칠어졌다.“구지윤, 너 대체 생각이 있긴 해? 술집 같은 데는 네가 마음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이름 석 자를 똑바로 부르며 곽경천이 구지윤을 꾸짖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말투와 표정은 매우 엄격했다.구지윤은 이미 홍승희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몰래 이곳까지 찾아온 터였다.이토록 끔찍한 첫 경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곽경천에게까지 차갑게 혼나고 있었다.그 순간 구지윤의 가슴은 마치 쓴 감귤처럼 쓰라렸다.곽경천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그의 존재는 구지윤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서러움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꾹 참으며 구지윤은 고개를 숙여 조용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곽경천은 그녀의 희고 가녀린 목에 남은 붉은 자국들을 보며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그와 마주쳐서 다행이지 만약 다른 낯선 사람이 구지윤을 건드렸다면 어땠을까?그러나 자신과의 일이었다고 해도 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인간관계를 다루는 데 능숙했지만 이런 종류의 상황은 완전히 초보였다.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오로지 분노였다.구지윤이 허락 없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였다.원래 그는 누
방씨 가문에서 지키려 한다 해도 방민아의 인생은 별로 희망이 없었다.육연주는 적게 연루되기도 했고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구치소에 한 달 구금되었다가 나왔다. 육경한이 육연주에게 변호사를 찾아줬지만 육연주 모녀는 이를 소원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한사코 거절하면서 일부러 육연주를 구치소에 들여보냈고 육경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하지만 육연주 모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 원칙인 방씨 가문은 방민아가 이 지경까지 된 게 다 육연주 탓이라고 생각한 이상 복수를 준비할 것이고 그 후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그다음은 서씨 가문이었다. 육연주가 서씨 가문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오라지 않았지만 서현재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이 점점 이상해진 데다 원래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재벌 집 아가씨라 서씨 가문에 척을 진 사람이 많았다.지금의 서씨 가문은 몰락하게 되었고 서현재가 암 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서씨 가문에서 몰아내긴 했지만 줄곧 호의호식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그 어떤 미친 생각을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육연주가 계속 서울에서 나댄다면 앙심을 품은 서씨 가문 사람들이 기회를 노리고 복수해 올 수도 있기에 아예 이지애와 함께 외국으로 나가 피신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지만 모녀는 육경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소원에게 홀려 인사불성이라고만 생각했다.이지애는 끌려가면서 육경한에게 원망을 퍼붓기도 했다.“경한아,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래? 우리가 잘해준 거 다 잊은 거야? 여자 하나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이 우리를 내치겠다고? 가족인데 어떻게 그래?”사실 잘해줬다고 할 것도 없었다. 상대편에 서서 손가락질하지 않고 돈 몇십만 원 쥐여준 게 전부였다. 이지애도 그때는 살만했기에 양심이라는 게 남아있었고 조금의 ‘선심’을 베풀었지만 육경한은 갚아야 할 돈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많은 돈으로 보답했다.다만 이지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빚쟁이 대하듯 대했다. 돈이 많으니 이걸로는
“경한아... 억울해서 죽을 것 같구나. 쟤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날 욕하고 때리고...”이지애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소원은 어이가 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나왔고 한편으로는 육경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육경한은 이 일에 엮이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지 차가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데려가.”육경한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경호원들은 두피가 저릿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데려가겠습니다.”이지애는 육경한이 자신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해 재빨리 다각 그의 손목을 잡았다.“역시 경한이가 최고야. 우린 가족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저 여자가 우리 남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연주가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살도 많이 빠졌어. 삼촌이 무시한다며 얼마나 울었는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지애는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경호원이 왜 나한테 오지?’‘저 천박한 계집애를 끌어내지 않고 뭐 하는 거야.’“잠깐만... 지금 착각하는 모양인데 경한이는 저 여자를 끌어내라고 한 거야. 옆에 있는 변호사까지 묶어서 밖으로 쫓아내.”경호원들은 이지애처럼 눈치가 없고 멍청하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육경한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이지애였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빽이 있다며 대표님과 미우 그룹을 언급하는지...’‘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지?’경호원들은 이지애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를 끌고 나갔다.현실 부정 중인 이지애는 육경한의 팔을 꽉 잡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경한아, 말 좀 해봐. 저 여자 쫓아내려고 했잖아. 나는 네 누나야.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외부인 편을 들 수 있어? 경한아...”이지애는 눈물을 쏟았다.“말 좀 해봐.”“누나.”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진지하게 말했다.“여러 번 말했잖아요. 소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대뜸 욕을 바가지째로 먹었다.그럼에도 이지애는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X신들. 멍청하기는.”방금까지 동정심을 느끼던 여자에게 심한 욕을 먹었으니 다들 어이가 없었고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말을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저렇게 추잡스러운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그러니까요. 좋은 사람이었다면 구치소에 수감되었겠어요?”이지애는 여론이 이렇게 빨리 바뀔 줄 몰랐는지 더욱 흥분했다.“너희들이 뭘 알아. 이 여자가 내 딸을 해쳤고 내 딸은 피해자야. 이 여자가 헛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수감될 일도 없었어.”사람들은 더 이상 이지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 지르며 욕하는 모습은 정말 품위가 없어 보였다.“그쪽이 돈 많고 대단한 사람이라면서요? 딸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으면 당연히 빼냈겠죠.”이때 한 아주머니가 일침을 놓았다.“맞는 말이에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잡았겠어요? 다 이유가 있는 거지.”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이유 없이 사람을 잡았다면 돈도 없고 인맥도 없는 우리가 일 순위이겠죠.”“됐어요. 됐어요. 이만하고 다들 들어갑시다. 구경났어요?”아파트 단지 관리자가 달려와 구경 중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그 시각.육경한은 고위급 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황진수는 전화를 받고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육경한은 해외의 유명 대기업과 협상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황진수는 몇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회의실로 들어갔다.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육경한에게 다가가 보고 했다.그러자 육경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황진수를 회의석으로 끌어당겼다.“네가 해.”‘지금 나한테 이 중요한 회의를 떠맡기고 간 거야? 내가 이런 걸 할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소원 씨, 괜찮아요?”말을 건넨 사람은 주석훈이었다.오늘 아침 두 사람은 합의 사항을 만들기 위해 만나기로 약속했다.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드는 이지애를 목격했고 소원이 중심을 못 잡고 뒤로 넘어지려던 찰나에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부축했다.옆에서 발악하던 이지애는 어디선가 나타난 경호원에게 제압되었다.“너 누구야? 감히 날 막아?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경호원에게 꽉 붙잡힌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럽다.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당장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미우 그룹 대표가 내 동생이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하는구나. 내 동생이 오면 너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서울에서 쫓겨날 거야.” 이지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반응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육경한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경호원들은 육경한과의 관계를 듣고 쉽게 손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임무는 소원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기에 이지애가 해치지 못하게 손을 묶어두었다.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지애와 소원이 다투고 있을 때 곧바로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이지애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소원을 부축하는 주석훈을 보며 막말을 퍼부었다.“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 동생이랑 헤어진 지 며칠 됐다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 너는 남자를 꼬시는 게 취미야?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하여튼 개 버릇 남 못 준다니까.”이지애의 말은 듣기 굉장히 거북했고 소원은 방금 한 대만 때리고 멈춘 자신을 원망했다.그 시각 주석훈은 단호한 표정으로 이지애를 바라봤다.“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도 처벌 대상입니다. 제 의뢰인이 내연녀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일방적인 모함에 속하고 법에 의거하여 충분히 고소할 수 있
이지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생트집을 잡았다.그러나 사건의 경과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무작정 소원을 내연녀라고 생각했다.하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소원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이를 본 이지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오늘 기필코 소원을 짓밟으리라 다짐했다.그녀는 계속하여 소리쳤다.“빈말이 아니라 여러분은 남편 간수 잘해요. 한동네 살다가는 이 여자한테 홀랑 넘어갈 수도 있다니까요?”소원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말조심하세요. 계속 이런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고소할 겁니다.”소원이 경찰에게 신고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이지애는 단번에 핸드폰을 쳐냈다. 소원을 모욕하려고 찾아온 만큼 절대 경찰에 신고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던 소원은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그 타이밍에 이지애가 손을 들어 그녀를 밀었다.계단에 서 있던 소원은 이지애가 손을 뻗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짚었다.그러고선 자신의 본능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내가 왜... 이 아이를 신경 쓰는 거지...’그녀의 몸은 이미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 같다.비록 소원은 결정을 내린 상태가 아니지만 본능이 이렇게 행동하게끔 그녀를 이끌었다.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 타고난 모성애일까?이지애는 죄책감을 느낀 소원이 겁을 먹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착각했다.아니나 다를까 더욱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로 욕설을 퍼부었다.“다들 봤죠? 겁먹었잖아요.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겠어요?”“이 여우 같은 계집애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세요. 남자에 환장한 X이에요. 천박한 것.”주변 사람들은 이지애의 말을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우리 동네에 이런 여자가 살고 있었다니. 정말 몰랐네요.”“이래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저 예쁜 얼굴로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남의
“우리 연주를 그렇게 괴롭혀놓고 뻔뻔스럽게 무슨 일로 왔냐는 말이 나와요?”이지애의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밝은 미래를 가진 그녀의 딸은 구타 사건으로 인해 30일간의 구속 처분을 받았고 석방된 후에는 정신 상태에 큰 타격을 입었다.소문에 의하면 구치소 동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늘 부잣집 아가씨로만 살아왔던 육연주는 구치소에 들어가도 모든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만한 태도로 구치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러다가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말았다.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지켜주니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무 일 없었지만 그 버릇을 구치소에서 똑같이 하는 건 죽자고 덤비는 거나 다름없다.게다가 이미 구치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누굴 무서워하겠는가?육경한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한지 기어코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이지애는 모든 자원이 국내에 있다. 해외로 나간다해서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세상에 그녀보다 잘나가고 부유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해외로 나가면 횡포를 부릴 수 없을 텐데, 엄마와 딸이 억울함을 당하고만 있겠는가?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하소연을 듣지 않았고 이혼도 혼자서 처리했다. 서한 그룹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곧바로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지었다.게다가 이혼했음에도 육연주를 해외로 보냈기에 이지애는 분노와 원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모든 걸 알게 된 소원은 그저 이 상황이 우스웠다.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말은 똑바로 하세요. 그쪽 따님이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괴롭혔다면 구치소에 들어간 사람은 저였겠죠.”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우리 사위한테 치근덕거리지 않았다면 연주가 때렸겠어요? 당신 같은 인간은 맞아도 싸죠. 얌치도 모르는 천박한 주제에.”소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증거 있으세요? 제가 서현재
소원이 이야기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육경한은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요양원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자세히 말해줬다.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임신중절 약은 소원의 손에 있었기에 그녀가 약을 먹는 순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하고 불안했다.비록 위협을 한 거나 다름없지만 그 속에 섞인 두려움을 소원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고 고작 이런 협박으로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니다.어쩌면 더욱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수 있다.이러한 끈기가 보통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분명 빛날 테지만, 소원은 육경한에 의해 거듭 억압당해 모든 자존심이 닳아 없어졌다.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오래전에 시들었을 텐데도 소원은 여전히 끝없는 황야에서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썼다.육경한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후회하냐고 물으면 당연하다고 대답할 것이다.그러니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지키는것 뿐이다.한편으로는 전미영이 빨리 호전되길 원했다. 어머님의 호전이 소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마음을 약하게 하고 이로부터 순진한 아이를 지켜내길 바랐다....소원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 한 통을 받았다.지난번 진찰받았던 의사였다.“선생님, 안녕하세요.”“소원 씨, 오늘 병원에 안 오셔서 연락드린 거예요. 3일 동안 약 다 먹으면 병원에 검사받으러 오셔야 해요. 안 그러면 위험할 거예요.”의사의 말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환자를 마주하는데 약을 먹은 후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집에서 출혈이 발생하고서야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들이 많았다.“아직 약을 안 먹었어요.”소원이 말했다.“안 먹었다면 다행이네요. 아이를 지키기로 결정하셨나요?”의사가 물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민 중이라면 검사를 받는
전미영은 소원의 행동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녀는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점점 멍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소원의 복부를 가리키며 여전히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꽃이야... 꽃이 피었어...”소원은 회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셔츠 단추에는 하얀 데이지 한송이가 있었다.전미영은 복부 쪽 단추에 달린 작은 데이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꽃...”소원의 외침은 간병인의 주의를 끌었고, 부랴부랴 달려온 간병인은 말하는 진미영을 보고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재빨리 달려가 요양원의 의사를 모셔 왔다.소원은 의사가 살펴볼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했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검사를 해보니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런 반응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좋은 징조이기도 합니다. 만약 간단한 요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한다면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다만 기억 회복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때때로 많은 기억이 환자의 뇌에 부담을 주어 과부하를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겠죠?”의사는 전미영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해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남아있는 기억 또한 부담일 수 있으니 간단하게 사는 게 최고다.소원은 검사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태가 만신창이된 그들에게는 최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전미영이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했다.병실로 돌아온 소원은 전미영의 곁을 지켰지만 처음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소원은 전미영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병실에서 나왔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는 게 아니라 주차된 은색의 승용차로 향했다.창문을 두드리자 차장이 내려가며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는데 다름 아닌 육경한이다.육경한은 놀라지 않은듯하다. 비서의 차를 타고 있다 한들 예민하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