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김성훈이 어쩔 바를 몰라 하다가 손수건을 건넸다.“일단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눈물은 일단 흐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었다.윤혜인은 손수건을 받아 들고 아무렇게나 닦았다. 어깨를 파르르 떨며 숨을 참았더니 눈물은 그쳤지만 어깨는 여전히 들썩들썩했다.윤혜인이 이내 고개를 들어 물었다.“이준혁 씨 돌아온 거 알고 있어요?”“음...”김성훈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웅얼거렸다.“알아요.”“그러면 언제 돌아왔는지도 알아요?”윤혜인이 또 물었다.김성훈이 잠깐 고민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어제 오전에 비행기에서 내렸어요.”이 말에 윤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어제 오전에 비행기에서 내렸다면 곽아름의 실종과 그녀가 부딪친 어려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니 오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게 그녀와 곽아름을 위한 게 아니라 문현미를 위해서 온 것이었다.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손바닥만 한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준혁 씨... 무슨 일 있어요?”이에 김성훈이 침묵했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윤혜인 씨. 인제 그만 해요.”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었다. 윤혜인은 정신이 혼미해졌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왜 그만해요?”김성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혜인이 캐물었다.“왜 그만해요? 목숨을 바쳐 나를 살렸는데 지금은 왜 그만하라는 거예요?”윤혜인의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김성훈은 그런 윤혜인이 너무 마음 아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윤혜인 씨. 내 말 들어요. 그냥 준혁이는 이제 없는 셈 쳐요.”그래도 친구였는데 김성훈은 윤혜인이 다치는 게 싫었다. 이준혁의 결심을 김성훈도 옆에서 지켜봤다.윤혜인에게 제일 좋은 보호는 바로 기대가 없다는 것이었다.“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없는 셈 쳐요...”윤혜인이 입꼬리를 당기더니 못생기게 웃어 보였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으니
이준혁의 눈빛은 담배 연기에 가려져 흐릿했다. 마치 김성훈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이 감탄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안 믿어. 너한테 다 계획이 있겠지.”김성훈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내일 외국으로 나가봐야 해. 메리와 이 독액에 대해 연구할 생각이야.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마. 나는 너 죽게 안 놔둬. 땅을 파서라도 그 독액을 만든 사람을 찾아내서 조성표를 가져올 거야. 그러면 충분히 억제할 수 있어.”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다. 김성훈이 말하는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이 자기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김성훈은 마음이 착잡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승산이 얼마인지는 김성훈도 몰랐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윤혜인에게 그만하라고 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친구로서 둘 중 그 누구도 다치지 말았으면 했다.김성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총명하기 그지없는 이준혁은 또 어떨까.김성훈이 손을 내밀어 이준혁의 손에서 담배를 하나 뺏어가 불을 붙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준혁아.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너의 행동이 맞다 틀리다 판단할 수 없는 거 알아. 네가 윤혜인 씨를 위해서 이러는 것도 알고. 근데 일방적인 생각일 수도 있잖아. 정말 이게 윤혜인 씨에게 좋은 일일까?”김성훈이 담배를 물고 이준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렇게 중얼거렸다.“네가 누워있을 때 내가 아무리 불러도 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어. 윤혜인이 다른 남자랑 도망갔다고 하자마자 바로 눈을 번쩍 떴던 거 기억나? 쓰러졌으면서도 너는 네 감정에 충실했던 거야. 나는 윤혜인 씨가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이준혁이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좀 닥쳐.”“콜록콜록...”김성훈은 독한 담배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와.”김성훈이 말했다.“니코틴으로 나 죽이려고 그러지. 너 따라서 죽으라고 그러는 거지.”
김성훈이 가고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이준혁은 차가운 달빛 아래 꼿꼿이 선 채 온몸으로 한기를 뿜어냈다.주훈이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좀 쉬실래요?”“응, 너 먼저 가서 쉬어.”이준혁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이준혁도 움직이지 않는데 주훈은 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좋은 상담 선생님 찾아봐.”이준혁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주훈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반응하고는 말했다.“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이준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너는 갈 필요 없어. 앞으로 그쪽 일에 네가 얼굴을 비치지는 마.”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주훈도 다 알고 있었다. 이준혁은 그가 상담 선생님을 보냈다는 걸 윤혜인이 몰랐으면 했다.이준혁은 돌아오고 난 후로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주훈은 수석 비서로서 이준혁이 여전히 예전의 그 이준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행실이 조금 더 은밀해지고 뜻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뿐이었다.내부든 외부든 시름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 은밀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윤혜인이 깨어났을 때는 곽경천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혜인아, 깼어?”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곽경천이 조심스럽게 부축했다.“천천히. 조심해.”윤혜인은 고개를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곽경천을 바라봤다. 곽경천이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오빠, 왜 그래?”윤혜인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곽경천이 말하려다 말고 윤혜인을 바라봤다.윤혜인은 곽경천의 이상한 눈빛에 심장이 덜컹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빠, 도대체 무슨 일인데?”“할 말이 있어. 마음 단단히 먹어.”곽경천이 윤혜인에게 검사 결과를 건네주며 한숨을 내쉬었다.“너 임신했대.”윤혜인이 넋을 잃었다.‘임신?’윤혜인은 검사 결과를 받아서 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임신… 쌍둥이?”단어는 다 아는 단어였지만 붙여놓으니 어딘가 낯설었다.‘임신이라니. 그것도 쌍둥이를.’윤혜인은 선천적으로 한기가 많아
‘만약 준혁 씨가 임신한 걸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할까?’하지만 이내 이준혁이 했던 차가운 말들이 떠올랐다.“우리?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이혼했는데 사랑은 무슨. 너무 우습다.”“사랑했다면 왜 이혼했겠어?”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에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윤혜인이 곽경천의 옷깃을 잡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오빠, 생각 정리하기 전에 다른 사람은 몰랐으면 좋겠어.”곽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윤혜인은 몸에 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곽아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집에 돌아와 보니 단발에 네모난 안경을 쓴 여자가 곽아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윤혜인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홍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이 사람은 누구예요?”홍 아주머니가 대답했다.“새로 온 상담 선생님이에요. 전에 상담하던 선생님이 출장 가면서 이 선생님을 추천하셨어요. 도련님도 문제없다면서 오케이 하셨고요.”곽아름은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았고 상태가 매주 좋아 보였다.윤혜인도 옆에서 상담 선생님이 상담하는 걸 잠깐 지켜봤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이 상담 선생님은 전에 온 선생님보다 더 활발하게 다가갔고 곽아름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선생님은 곽아름과 잠깐 얘기를 나누더니 홍 아주머니에게 아이의 엄마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홍 아주머니는 윤혜인에게 확인하고 나서 선생님을 데리고 거실로 향했다.선생님은 윤혜인과 악수하더니 말했다.“안녕하세요. 이진화라고 합니다.”“선생님, 안녕하세요.”이진화가 손으로 쓴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곽아름 어린이에 대한 분석 보고서입니다. 한번 확인해 주세요.”윤혜인이 보고서를 받아 들더니 자세히 확인했다.이진화가 말했다.“대화를 옆에서 지켜보셨으니 아실 거예요. 곽아름 어린이는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용감해요. 부족한 부분을 꼽아보자면 너무 외롭다는 거예요. 어머님도 자녀 계획이 있으시다면 지금부터 계획해 보는 것도 좋아요. 곽아름
그 뒤로 윤혜인도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천수 때문에 흐트러진 작업실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이준혁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다들 들었는지 윤혜인을 괴롭히던 고객들도 갑자기 태도가 좋아졌다.어떤 고객은 3배의 배상도 필요 없다면서 통쾌하게 계속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전에 이미 3배의 배상을 받은 고객은 다시 돈을 돌려주기까지 했다.고객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윤혜인은 의문을 품었고 평소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고객에게 이유를 물으려 했다.윤혜인은 상대와 상가의 한 식당에서 만나 밥까지 먹을 생각이었다. 마침 주변에 있던 윤혜인은 일찍 상가에 도착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다 어린이용품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대에 비치된 옷들이 너무 깜찍하고 예뻤다.더 자세히 보기도 전에 두 사람이 매장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남자는 잘빠진 슈트를 입고 있었고 외모가 준수한 데다 체격이 일품이었다. 같이 온 여자는 거의 만삭이었고 선글라스를 낀 채 손에는 매장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쇼핑백은 무겁지 않아 보였다.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달콤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임산부의 아름다움을 다분히 느낄 수 있었다.윤혜인의 눈까풀이 세게 뛰었다.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데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윤혜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원지민은 윤혜인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더니 선글라스를 벗으며 웃었다.“준혁아, 윤혜인 씨네.”원지민은 다시 대범한 척하던 그때로 돌아갔고 윤혜인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하지만 윤혜인의 눈에는 오만한 웃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뒤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만 알았다.원지민이 덤덤하게 말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쇼핑하러 왔어요?”윤혜인은 한참 노력해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그러게요.”말하면서도 윤혜인은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익숙한 흔적을 찾아내려 했지만 이준혁은 낯설 정도로 차가웠다.원지민은 윤혜인의 눈빛이 아니꼬워 뭔
윤혜인은 머리가 복잡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이준혁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아직 전쟁을 치르기 전인데 먼저 마음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혜인 씨.”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오늘 만나려 했던 사람을 여기서 마주친 것이다.윤혜인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차 대표님.”상대는 마케팅팀의 본부장이었다. 성격이 통쾌한 편이라 윤혜인과도 잘 맞았다.윤혜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자 차 대표가 걱정스레 물었다.“왜 여기 이렇게 서 있어요? 몸이 안 좋아요?”윤혜인이 멈칫했다.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도 그녀가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발견했는데 이준혁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기에 윤혜인의 안색이 굳은 걸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못 본 척했다는 건 정말 그냥 관심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차 대표가 관심했다.“아니면 다음에 만날까요? 일단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윤혜인이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웃었다.“아니요. 괜찮아요. 갈까요?”“뭐 먹을까요?”“갈치조림은 어때요?”윤혜인이 말했다.유명하다고 소문난 식당에 가보니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다행히 손님이 많이 몰릴 때가 아니어서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윤혜인 차례가 되자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갈치조림이요.”윤혜인이 말했다.원지민이 맛있다고 한 갈치조림이 어떤 맛인지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웨이터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 갈치조림은 수량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미 다 나가고 없어요.”차 대표는 열정적이고 사람을 관심할 줄 아는 여자였기에 윤혜인의 안색을 보고 몸보신을 시켜주려 했다. 하여 웨이터가 금방 내온 갈치조림을 보며 말했다.“저 팀은 두 사람밖에 없는데 다 드실 수 있대요? 혹시 좀 나눠줄 수 있는지 확인해 주실래요? 값은 맞춰서 드린다고 하세요.”아직 테이블에 올리지 않았기에 차 대표도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윤혜인
윤혜인이 멈칫하더니 물었다.“무슨 말이에요?”차 대표가 무를 한입 베어 물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리 회사를 포함한 다른 회사도 여럿 물어봤는데 이선 그룹과의 거래가 막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끼리 연구해봤는데 거래가 막힌 정도와 전에 우리가 달밤을 괴롭힌 정도가 맞물렸어요.”윤혜인이 대화에 몰두하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요?”“우리는 그나마 괜찮은 수준이었어요. 애초에 달밤을 괴롭힐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냥 문제가 빨리 해결됐으면 하는 입장이었죠. 근데 우리가 관찰한 데 의하면 달밤을 제일 세게 괴롭혔던 회사들은 업무가 꽉 막혀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차 대표가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이선 그룹이 달밤의 업무를 다시 찾아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왜 다들 태도가 변했는지 알겠죠?”윤혜인이 생각을 정리하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죄송해요.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네. 그래요.”윤혜인이 조용한 곳을 찾아 주훈에게 전화를 걸었다.“혜인 씨, 무슨 일이죠?”주훈은 전에 윤혜인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호칭이 바뀐 게 누구의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윤혜인은 실망감을 감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주훈 씨,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자료 분실로 인한 후폭풍을 막아줘서 고마워요.”주훈이 잽싸게 대응했다.“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윤혜인이 놀란 척 이렇게 되물었다.“주훈 씨가 도운 거 아니었어요? 오빠 말로는 이선 그룹에서 그런 의향을 내비치는 바람에 여러 회사에서 태도를 바꾼 거라고 하던데. 주훈 씨가 아니라면 설마…”이러다 이준혁의 이름이 나올 것 같았다.당황한 주훈이 이렇게 말했다.“저 맞아요. 꼭 비밀 지켜주셔야 해요. 대표님이 아시면 저 모가지 날아가는 거 아시죠?”주훈은 이준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혹시나 윤혜인이 이준혁이 지시한 일이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떨떠름해진 윤혜인이 손을 거두더니 이준혁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지금 나 걱정한 거예요?”윤혜인이 뒤에 있는 펜스를 가리키며 말했다.“내가 떨어질까 봐?”이준혁이 그런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뭔가 비아냥대려는데 윤혜인이 이준혁의 입을 틀어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요.”윤혜인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나 아직 걱정하는 거 알아요.”이준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손은 닦았어?”이 말에 윤혜인이 하마터면 발끈할 뻔했다.이준혁은 마치 더러운 거라도 묻었다는 듯이 옆에 있는 수도를 틀어 입과 얼굴을 닦았다.윤혜인은 이준혁을 졸졸 따라와 이렇게 말했다.“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그때 다시 얘기해요.”“…”이준혁은 말문이 막혔다.윤혜인이 몸을 돌렸다. 기분은 이미 매우 좋아진 상태였다.아직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윤혜인은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걸 느꼈다.생사도 이별도 다 겪은 두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준혁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여러 번이나 목숨을 마다하지 않았다.윤혜인은 목숨을 바칠 만큼의 감정이 사랑이 아닐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고작 몇 번 상처 준 걸로 그를 떠나 혼자 싸우게 한다면 정말 매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감정에 충실하고 사랑에 충실히 할 생각이었다. 절대 아쉬움을 남겨서는 안 된다.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윤혜인은 예상대로 이준혁을 찾으러 온 원지민과 마주쳤다.이준혁이 돌아오고 난 후로 원지민은 한시도 시름을 놓은 적이 없었다..윤혜인이 식당을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준혁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따라 나갔다. 원지민은 너무 불안해서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이준혁은 이번에 다시 돌아온 뒤로 그녀를 대하는 게 많이 부드러워졌고 약속까지 했다.분명 큰 경사였지만 원지민은 불안하고 걱정되고 무서웠다.한여름 밤의 꿈일까 봐, 혹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