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는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하지만 살이 많이 빠지고 조각 같은 턱라인이 예전보다 더 튀어나와서 그런지 뭔가 날카로운 느낌이 더해졌다.윤혜인의 불안함은 남자를 보자마자 말끔히 사라졌다. 뭔가 더 말하려는데 남자가 덤덤한 말투로 아무 감정 없이 이렇게 말했다.“문 닫아요.”이 말은 윤혜인이 아니라 구급대원에게 한 말이었다.구급대원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윤혜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멀리 떠나고 나서도 윤혜인은 꼼짝도 못 했다.곽경천은 원래 곽아름을 데리고 떠나려다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윤혜인을 보고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다가갔다.“혜인아.”윤혜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손은 언제 까졌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곽경천이 다급하게 윤혜인의 손을 잡더니 걱정스레 물었다.“손은 언제 다친 거야?”몸에 힘이 풀린 윤혜인은 그제야 곽경천의 품에 기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나 너무 무서워... 준혁 씨 나 못 알아보는 것 같아...”곽경천도 가슴이 덜컹했지만 얼른 윤혜인을 위로했다.“어머니가 걱정돼서 그랬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준혁의 눈빛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정도가 아니라 낯설 정도였다.눈빛이 어두워진 곽경천이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먼저 병원 가자.”병원에 도착해 곽아름의 몸 상태를 체크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윤혜인은 그제야 한시름 놓고 문현미가 있는 응급실로 향했다.응급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순간 너무 애틋해진 윤혜인은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그렇게 한참 동안 망설이던 윤혜인은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준혁 씨...”이준혁이 천천히 눈까풀을 들었다. 그 눈동자는 차가우면서도 덤덤했다.날씨는 금방 가을에 들어섰지만 윤혜인은 오한을 느꼈다. 응급실이 워낙 차가운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윤혜인이 초롱초
윤혜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왜 그래요...”“윤혜인. 엄마가 지금 너 때문에 응급실에 들어갔는데 왜라니?”이준혁은 더는 윤혜인이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주변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윤혜인은 꽁꽁 얼어붙은 강물에 떨어진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몸이 무거워졌다. 벽을 잡고 나서야 간신히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윤혜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준혁 씨, 우리...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이 말에 이준혁이 귀한 몸을 돌려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우리? 우리 무슨 사이인데?”윤혜인이 멈칫하더니 말했다.“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이혼까지 한 마당에 사랑은 무슨. 우습지 않아?”이준혁이 서늘하게 말했다. 말투가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사랑했다면 이혼하지도 않았겠지.”이 말에 윤혜인이 어렵게 끌어모았던 용기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과도 같았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윤혜인.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아직 재결합하기 전 아닌가?”무섭게 몰아치는 언어 공격을 윤혜인은 당해낼 길이 없었다. 파르르 떨려오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처음으로 이준혁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윤혜인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자 이준혁이 더 싸늘하게 식어버린 목소리로 명령했다.“불필요한 인원은 당장 내보내. 내 허락 없이는 안에 들이지 말고.”불필요한 사람이라...목숨을 걸고 구한 사람이 불필요한 사람이라니, 윤혜인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것 같았다. 가슴을 뭔가 동여맨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이준혁이 살아있다는 희열에 잠겼던 윤혜인은 지금 이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이준혁은 잘빠진 뒷모습만 보여줬다. 윤혜인의 눈동자는 지금 혼돈과 절망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보디가드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윤혜인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내
“아이고...”김성훈이 어쩔 바를 몰라 하다가 손수건을 건넸다.“일단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눈물은 일단 흐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었다.윤혜인은 손수건을 받아 들고 아무렇게나 닦았다. 어깨를 파르르 떨며 숨을 참았더니 눈물은 그쳤지만 어깨는 여전히 들썩들썩했다.윤혜인이 이내 고개를 들어 물었다.“이준혁 씨 돌아온 거 알고 있어요?”“음...”김성훈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웅얼거렸다.“알아요.”“그러면 언제 돌아왔는지도 알아요?”윤혜인이 또 물었다.김성훈이 잠깐 고민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어제 오전에 비행기에서 내렸어요.”이 말에 윤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어제 오전에 비행기에서 내렸다면 곽아름의 실종과 그녀가 부딪친 어려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니 오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게 그녀와 곽아름을 위한 게 아니라 문현미를 위해서 온 것이었다.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손바닥만 한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준혁 씨... 무슨 일 있어요?”이에 김성훈이 침묵했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윤혜인 씨. 인제 그만 해요.”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었다. 윤혜인은 정신이 혼미해졌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왜 그만해요?”김성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혜인이 캐물었다.“왜 그만해요? 목숨을 바쳐 나를 살렸는데 지금은 왜 그만하라는 거예요?”윤혜인의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김성훈은 그런 윤혜인이 너무 마음 아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윤혜인 씨. 내 말 들어요. 그냥 준혁이는 이제 없는 셈 쳐요.”그래도 친구였는데 김성훈은 윤혜인이 다치는 게 싫었다. 이준혁의 결심을 김성훈도 옆에서 지켜봤다.윤혜인에게 제일 좋은 보호는 바로 기대가 없다는 것이었다.“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없는 셈 쳐요...”윤혜인이 입꼬리를 당기더니 못생기게 웃어 보였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으니
이준혁의 눈빛은 담배 연기에 가려져 흐릿했다. 마치 김성훈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이 감탄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안 믿어. 너한테 다 계획이 있겠지.”김성훈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내일 외국으로 나가봐야 해. 메리와 이 독액에 대해 연구할 생각이야.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마. 나는 너 죽게 안 놔둬. 땅을 파서라도 그 독액을 만든 사람을 찾아내서 조성표를 가져올 거야. 그러면 충분히 억제할 수 있어.”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다. 김성훈이 말하는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이 자기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김성훈은 마음이 착잡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승산이 얼마인지는 김성훈도 몰랐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윤혜인에게 그만하라고 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친구로서 둘 중 그 누구도 다치지 말았으면 했다.김성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총명하기 그지없는 이준혁은 또 어떨까.김성훈이 손을 내밀어 이준혁의 손에서 담배를 하나 뺏어가 불을 붙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준혁아.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너의 행동이 맞다 틀리다 판단할 수 없는 거 알아. 네가 윤혜인 씨를 위해서 이러는 것도 알고. 근데 일방적인 생각일 수도 있잖아. 정말 이게 윤혜인 씨에게 좋은 일일까?”김성훈이 담배를 물고 이준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렇게 중얼거렸다.“네가 누워있을 때 내가 아무리 불러도 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어. 윤혜인이 다른 남자랑 도망갔다고 하자마자 바로 눈을 번쩍 떴던 거 기억나? 쓰러졌으면서도 너는 네 감정에 충실했던 거야. 나는 윤혜인 씨가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이준혁이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좀 닥쳐.”“콜록콜록...”김성훈은 독한 담배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와.”김성훈이 말했다.“니코틴으로 나 죽이려고 그러지. 너 따라서 죽으라고 그러는 거지.”
김성훈이 가고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이준혁은 차가운 달빛 아래 꼿꼿이 선 채 온몸으로 한기를 뿜어냈다.주훈이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좀 쉬실래요?”“응, 너 먼저 가서 쉬어.”이준혁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이준혁도 움직이지 않는데 주훈은 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좋은 상담 선생님 찾아봐.”이준혁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주훈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반응하고는 말했다.“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이준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너는 갈 필요 없어. 앞으로 그쪽 일에 네가 얼굴을 비치지는 마.”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주훈도 다 알고 있었다. 이준혁은 그가 상담 선생님을 보냈다는 걸 윤혜인이 몰랐으면 했다.이준혁은 돌아오고 난 후로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주훈은 수석 비서로서 이준혁이 여전히 예전의 그 이준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행실이 조금 더 은밀해지고 뜻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뿐이었다.내부든 외부든 시름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 은밀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윤혜인이 깨어났을 때는 곽경천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혜인아, 깼어?”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곽경천이 조심스럽게 부축했다.“천천히. 조심해.”윤혜인은 고개를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곽경천을 바라봤다. 곽경천이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오빠, 왜 그래?”윤혜인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곽경천이 말하려다 말고 윤혜인을 바라봤다.윤혜인은 곽경천의 이상한 눈빛에 심장이 덜컹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빠, 도대체 무슨 일인데?”“할 말이 있어. 마음 단단히 먹어.”곽경천이 윤혜인에게 검사 결과를 건네주며 한숨을 내쉬었다.“너 임신했대.”윤혜인이 넋을 잃었다.‘임신?’윤혜인은 검사 결과를 받아서 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임신… 쌍둥이?”단어는 다 아는 단어였지만 붙여놓으니 어딘가 낯설었다.‘임신이라니. 그것도 쌍둥이를.’윤혜인은 선천적으로 한기가 많아
‘만약 준혁 씨가 임신한 걸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할까?’하지만 이내 이준혁이 했던 차가운 말들이 떠올랐다.“우리?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이혼했는데 사랑은 무슨. 너무 우습다.”“사랑했다면 왜 이혼했겠어?”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에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윤혜인이 곽경천의 옷깃을 잡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오빠, 생각 정리하기 전에 다른 사람은 몰랐으면 좋겠어.”곽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윤혜인은 몸에 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곽아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집에 돌아와 보니 단발에 네모난 안경을 쓴 여자가 곽아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윤혜인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홍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이 사람은 누구예요?”홍 아주머니가 대답했다.“새로 온 상담 선생님이에요. 전에 상담하던 선생님이 출장 가면서 이 선생님을 추천하셨어요. 도련님도 문제없다면서 오케이 하셨고요.”곽아름은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았고 상태가 매주 좋아 보였다.윤혜인도 옆에서 상담 선생님이 상담하는 걸 잠깐 지켜봤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이 상담 선생님은 전에 온 선생님보다 더 활발하게 다가갔고 곽아름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선생님은 곽아름과 잠깐 얘기를 나누더니 홍 아주머니에게 아이의 엄마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홍 아주머니는 윤혜인에게 확인하고 나서 선생님을 데리고 거실로 향했다.선생님은 윤혜인과 악수하더니 말했다.“안녕하세요. 이진화라고 합니다.”“선생님, 안녕하세요.”이진화가 손으로 쓴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곽아름 어린이에 대한 분석 보고서입니다. 한번 확인해 주세요.”윤혜인이 보고서를 받아 들더니 자세히 확인했다.이진화가 말했다.“대화를 옆에서 지켜보셨으니 아실 거예요. 곽아름 어린이는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용감해요. 부족한 부분을 꼽아보자면 너무 외롭다는 거예요. 어머님도 자녀 계획이 있으시다면 지금부터 계획해 보는 것도 좋아요. 곽아름
그 뒤로 윤혜인도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천수 때문에 흐트러진 작업실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이준혁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다들 들었는지 윤혜인을 괴롭히던 고객들도 갑자기 태도가 좋아졌다.어떤 고객은 3배의 배상도 필요 없다면서 통쾌하게 계속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전에 이미 3배의 배상을 받은 고객은 다시 돈을 돌려주기까지 했다.고객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윤혜인은 의문을 품었고 평소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고객에게 이유를 물으려 했다.윤혜인은 상대와 상가의 한 식당에서 만나 밥까지 먹을 생각이었다. 마침 주변에 있던 윤혜인은 일찍 상가에 도착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다 어린이용품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대에 비치된 옷들이 너무 깜찍하고 예뻤다.더 자세히 보기도 전에 두 사람이 매장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남자는 잘빠진 슈트를 입고 있었고 외모가 준수한 데다 체격이 일품이었다. 같이 온 여자는 거의 만삭이었고 선글라스를 낀 채 손에는 매장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쇼핑백은 무겁지 않아 보였다.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달콤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임산부의 아름다움을 다분히 느낄 수 있었다.윤혜인의 눈까풀이 세게 뛰었다.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데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윤혜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원지민은 윤혜인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더니 선글라스를 벗으며 웃었다.“준혁아, 윤혜인 씨네.”원지민은 다시 대범한 척하던 그때로 돌아갔고 윤혜인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하지만 윤혜인의 눈에는 오만한 웃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뒤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만 알았다.원지민이 덤덤하게 말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쇼핑하러 왔어요?”윤혜인은 한참 노력해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그러게요.”말하면서도 윤혜인은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익숙한 흔적을 찾아내려 했지만 이준혁은 낯설 정도로 차가웠다.원지민은 윤혜인의 눈빛이 아니꼬워 뭔
윤혜인은 머리가 복잡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이준혁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아직 전쟁을 치르기 전인데 먼저 마음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혜인 씨.”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오늘 만나려 했던 사람을 여기서 마주친 것이다.윤혜인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차 대표님.”상대는 마케팅팀의 본부장이었다. 성격이 통쾌한 편이라 윤혜인과도 잘 맞았다.윤혜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자 차 대표가 걱정스레 물었다.“왜 여기 이렇게 서 있어요? 몸이 안 좋아요?”윤혜인이 멈칫했다.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도 그녀가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발견했는데 이준혁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기에 윤혜인의 안색이 굳은 걸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못 본 척했다는 건 정말 그냥 관심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차 대표가 관심했다.“아니면 다음에 만날까요? 일단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윤혜인이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웃었다.“아니요. 괜찮아요. 갈까요?”“뭐 먹을까요?”“갈치조림은 어때요?”윤혜인이 말했다.유명하다고 소문난 식당에 가보니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다행히 손님이 많이 몰릴 때가 아니어서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윤혜인 차례가 되자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갈치조림이요.”윤혜인이 말했다.원지민이 맛있다고 한 갈치조림이 어떤 맛인지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웨이터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 갈치조림은 수량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미 다 나가고 없어요.”차 대표는 열정적이고 사람을 관심할 줄 아는 여자였기에 윤혜인의 안색을 보고 몸보신을 시켜주려 했다. 하여 웨이터가 금방 내온 갈치조림을 보며 말했다.“저 팀은 두 사람밖에 없는데 다 드실 수 있대요? 혹시 좀 나눠줄 수 있는지 확인해 주실래요? 값은 맞춰서 드린다고 하세요.”아직 테이블에 올리지 않았기에 차 대표도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윤혜인
방민아의 안색이 변했다.‘어젯밤이랑 오늘이랑 어떻게 같아?’여긴 육경한의 집이라 곳곳에 CCTV와 보이지 않는 눈들도 가득했기에 방민아의 말투도 다소 딱딱했고 무슨 말을 하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무슨 헛소리에요? 나 유진이 친자식처럼 대했는데. 모함할 생각하지 마요.”“허허...”소원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아니. 어딜 들어가요.”방민아가 계속 질척거리는데 잠금장치까지 걸어간 소원이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를 열더니 자동문이 스륵 열렸다.“소원 씨가 어떻게... 어떻게 여길 들어갈 수 있지?”방만아가 넋을 잃고 묻자 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이제 세상이 변했거든요. 방민아 씨.”“그게... 무슨 말이에요?”방민아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무서운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으로서는 애써 그 생각들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방민아는 철저한 사람이라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다.“내 뜻은 이따 유진이랑 아주머니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게 밝혀지면 내가 당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소원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와 노인에게 손댈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람이었기에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되레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사람에게 도망과 인내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맞서서 싸우는 게 제일 빠른 효과적이었다.방민아는 소원이 뭘 믿고 설치는지 몰라 넋을 잃었다.‘뭔데 이렇게 당당해? 여기 경한 씨 집 앞인데. 내 미래 남편 집 앞이잖아. 어떻게 감히.’방민아는 소원을 얕잡아보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무슨 수로 나를 처단해요?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들 텐데?”방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허세 부리다가 혀가 쥐 날까 무섭지도 않아요?”“두고 봐요.”“뭘 두고 본다는 거예요...”소원의 말은 너무 의미심장해서 방민아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방민아 씨, 곧 후회한다에 한표 걸려는데 믿어볼래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잘만 하면 꼭 만나게 해줄게요.”방민아가 말했다.소원이 망가질 거라는 희열에 잠겨있는 방민아가 느긋하게 보충했다.“어차피 망가질 몸 차리리 우리 오빠에게 망가지는 게 낫지 않아요? 남자구실을 못 하니 사실 잤다고 해도 실질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건 아니니까.”‘허...’방민기는 남자구실을 못 하긴 했지만 변태 성욕이 강한 사람이라 몸을 쓰지 못할수록 사람을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일반인도 견뎌내지 못하는 걸 소원이 버텨낸다는 건 말도 안 되었기에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방민아가 바라는 것도 딱 그거였다.“방민아 씨는 언제 보나 말을 참 잘해요.”소원이 촘촘한 치아를 들어내고 웃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전혀 믿기지 않는데요? 어떡하죠?”“못 믿을 게 뭐가 있어요.”방민아는 그런 소원이 그저 우습다고 생각했다.“내 말 듣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바로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은요?”“지금은 안 돼요.”방민아가 단칼에 거절했다.“일단 오빠 달래주고 3달 뒤에 다시 보여줄게요.”“3달이요?”소원이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그 석 달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방민아를 속내를 들켜도 전혀 난감한 기색이 없었고 그저 귀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왜 못 버텨요? 버텨야죠.”“사실 남자는 달래기 쉬워요. 오빠는 조금만 잘해주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난폭하게 구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방민기 씨든 방민아 씨든 더는 못 믿겠어요. 꿍꿍이가 좀 많아야 믿죠.”“당신 정말...”방민아는가 욕설을 퍼부으려다 매서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평생 아이 볼 생각하지 마요.”“오늘 꼭 아이를 봐야겠다면요?”소원이 말했다.“웃겨라. 무슨 자격으로요?”방민아는 소원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그게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여기서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아우성이라니, 꿈꾸는 게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
방민아는 소원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당신이 왜 여기에.”어젯밤 방민기에게 호되게 당했을 사람이 멀쩡하게 이곳에 서 있는 게 이상했다.방민아가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건 방민기가 아직 깨어나지 못해 방민아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이 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도 어젯밤 방민기에게 당한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멍이 든 걸 봐서는 당해도 호되게 당했을 거라는 생각에 방민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방민아 씨.”소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방민아를 또 만나고 싶지는 않기에 또 만났네요 같은 인사말은 생략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방민아가 소원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어딜 들어가요.”방민아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문을 여는 카드가 먹통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육경한에게 전화하려는데 미처 전화하기도 전에 소원을 발견한 방민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서 말했다.“들어가서 유진이 좀 보고 올게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민아의 손을 뿌리쳤다.“누가 보여준대요?”방민아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따라 갑자기 이상하게 나오는 소원이 신기했다.‘여기가 언제 소원이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는 곳이 됐지?’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하라는 대로 하면 유진이 보여준다면서요.”방민아가 그런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소원이 말했다.“네. 했어요. 그 어떤 일을 당해도 가만히만 있으면 유진이 보여준다고요.”방민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소원 씨,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왜 갑자기 헛소리하고 그래요?”소원이 대꾸했다.“열은 안 나는데? 정말 모르겠어요?”방민아의 태도는 소원이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방민아는 애초부터 아이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고 그저 소원을 모욕하고 망가트리기 위해 유진을 앞세웠을 뿐이다.분명 방민아에게 피해 가는 일이 없었고 육경한을 보면 멀리 피해 다녔지만 방민아는 그래도 소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단순
통화를 마친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끌어안고 뽀뽀하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여보, 아까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우리가 대상에 당첨됐다며 세계 일주 비용을 협찬해 주겠대.”“정말?”“정말이야. 미우 그룹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검색해 봤더니 정규적인 대기업이더라고.”소원이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선 육경한을 바라보자 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잘생겼다고 칭찬해 주는데 어떡해.”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서늘하던 아까와는 달리 딴사람이 된 육경한은 어딘가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자 소원은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대뜸 이렇게 물었다.“이제 유진이 보러 가도 돼요?”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앞으로 거기가 우리 집이 될 거야.”말 한마디에 육경한은 소원의 향후 생활을 결정해 버렸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했고 아까 봤던 모습은 그저 착각이었다.소원은 곧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줌마가 왜 병에 들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차 안.육경한이 입을 열었다.“백업 동영상은 내게 맡겨.”육경한이 토론이 아닌 명령을 내리자 소원이 멈칫했다.“왜 너한테 맡겨야 하는데?”소원은 꿍꿍이 많은 방민아가 아줌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게 둘 리가 없었다. 일단 착한 척하기 좋아하는 방민아의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벗겨내 더는 착한 척할 수 없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육경한이 말했다.“방씨 가문을 상대하는 데 영상을 쓸 필요는 없어. 아직 육씨 가문과 협력한 프로젝트도 있고. 이때 영상을 터트리면 다 같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 동영상은 절대 유포할 수 없어.”육경한은 야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잇속만 챙기는 약삭빠른 장사꾼이었다.소원은 두 사람이 비록 거래했지만 그녀가 방씨 가문에 해를 입히는 건 육경한도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방민아는 결국 육경한의 아내가 되지 못했지만 뼈는 끊어져
여자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언니, 남자 친구 하나 골라줘 봐요.”소원은 성화에 못 이겨 아무거나 육경한에게 집어줬다. 육경한은 사탕을 받자마자 껍질을 까서 입에 넣었고 소원도 여자가 보는 앞에서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었다.초콜릿은 그렇게 달지 않고 살짝 썼지만 천천히 달아지면서 고소해지는 게 맛있긴 했다.여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봤다.“어때요? 맛있죠?”“네. 맛있어요.”소원이 말했다.“내 말이 맞죠?”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맛을 몰라도 공부를 했으니 잘못 고르진 않았을 거예요.”소원은 여자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미각에 무슨 문제가 있어요?”여자가 입을 열었다.“아파서 항암 치료를 여러 번 했더니 뭘 먹어도 맛이 안 느껴지네요.”이 말에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항암 치료를 한다는 건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과 다름없었기에 소원이 멈칫하더니 말했다.“미안해요. 몰랐어요...”여자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언니. 아픈지 너무 오래돼서 이미 적응했어요. 남편과 등기하고 세계 일주할 생각만 하면 너무 들뜨는데요?”남자도 한마디 거들었다.“말 잘 듣고 약 제때 챙겨 먹어야 데리고 갈 거야. 아니면 아무 데도 못 가.”여자가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흥. 내가 언제 약 빼먹은 적 있어?”남자가 말했다.“전에 몰래 던지는 거 봤거든?”“그건 예전이잖아. 지금은 미각을 잃어서 매번 꼬박꼬박 먹어도 맛을 몰라서 딱히 쓰지도 않아.”여자의 말에 남자가 대꾸 대신 씁쓸한 표정을 짓자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벌써 깨갱이야? 말발 다 떨어졌네.”소원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여자의 성격에 깊이 끌렸다. 이렇게 낙관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서로를 만난 게 제일 큰 행운인 두 사람은 앞으로 그 어떤 역경이 있든 꿋꿋이 헤쳐나갈 용기가 있어 보였다.그때 육경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자. 이제 우리 차례야.”소원은 그제야
“언니, 정말 너무 예쁘다. 연예인이에요?”여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소원은 살짝 난감했다. 얼굴에 아직 상처가 있었지만 벙거지 모자와 마스크에 가려져 두눈만 보였다. 그래도 눈이 예쁘고 아우라가 남달랐기에 살짝만 꾸미자 연예인이 몰래 산부인과에 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나 연예인 아니야. 그저 일반인이야.”소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딱 봐도 일반인이 아닌데. 남편이 너무 잘생겼잖아요. 대박. 나 현실에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 본 건 처음이에요.”칭찬을 아끼지 않는 여자를 보며 얼음 같던 남자의 얼굴이 사르르 녹았다. 육경한은 보기 드물게 여자에게 먼저 인사했다.“안녕.”잘생겼다고 칭찬해서가 아니라 남편이라는 말이 너무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보며 어쩔 바를 몰라 얼굴을 빨개지자 여자의 남편이 바로 질투했다.“작작 해. 외모지상주의야. 침 나오겠다.”하지만 청년은 여자를 욕하는 게 아니라 그저 비아냥댈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귀띔에 정신을 차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잘생긴 남자만 보면 얼굴 빨개지는 거 알잖아.”여자가 고개를 돌려 소원에게 웃었다.“언니, 화내지 마요. 그저 남편이 너무 잘생겨서 그랬을 뿐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여자의 남편도 따라서 해명했다.“맞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와이프가 외모지상주의인데 가끔 티브이에 잘생긴 남자가 나오면 침도 흘리고 그래요. 오랜만에 옆에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보니까 감정 조절을 잘못했네요.”“아니요. 화 안 났어요. 게다가 이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그러니 소원이 화날 것도 없었다. 소원은 원래도 다른 사람이 육경한을 보든지 말든지 상관없었지만 이 말에 분위기가 딱딱해지고 말았다.여기에 줄까지 섰으면서 남편인지 아닌지 다투는 건 별로 의미가 없었다. 아무튼 이따가 다 남편이 될 것이니 말이다. 다만 소원이 강조하자 어딘가 살짝 이상했다.육경한의 안색이 굳어졌지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설명할 리도 없었다.“여자가 웃으며 말했
“내가 이미 준비해 뒀어.”육경한이 말했다.이내 그는 신분증을 꺼내 들었고 소원이 그것을 낚아채서 펼쳐 보았다.그 안에는 소원의 신분증 사본은 물론 그녀 어머니의 주민등록증 사본도 포함되어 있었다.육경한은 정말로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엄마 주민등록증 사본 복원해 놓을 줄이야...’이쯤 되니 소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 정도로 능력이 있다면 굳이 소원이 나설 필요도 없이 육경한은 두 사람의 혼인신고를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왜 꼭 같이 구청까지 와야 했지?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도 아닌데... 이런 곳에 와서 애정을 가장하는 게 정말 불편하지도 않나?’소원은 냉랭하게 말했다.“이 정도는 뭐든 할 수 있으면서... 여기 오는 건 쓸데없는 일이었잖아.”“쓸데없는 일이 아니지.”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이 일은 직접 해야 의미가 있잖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싶지 않아.”그의 말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에게 이렇게 정상적으로 말을 걸고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는 육경한은 너무 낯설었다.게다가 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소원을 달래려는 뉘앙스까지 숨어 있었다.소원은 곧바로 경계심을 느끼며 구청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한 발짝이라도 더 떨어지려 애썼다.육경한은 이런 그녀의 작은 몸짓을 눈치챘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소원의 그런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졌다.이른 아침이라 구청은 막 문을 연 상태였다.소원은 육경한이 분명 미리 사람을 준비시켜 VIP 통로라도 열어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야 그녀도 혼인신고를 빨리 끝내고 떠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남자는 태연하게 뒤에서 걸어오며 손에 들린 번호표를 보여주었다.23번.소원은 말문이 막혔다.직접 하겠다던 육경한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것이다.그는 정말로 줄을 서서 기다리려 하고 있었다.문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23쌍의 커플이 앞서 대기하고 있었다.소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오늘 무슨 특별한 날이라도 되나
그 감정은 마치 황량한 사막에서 자라난 초록빛 잔디처럼 거칠고 끈질기게 뻗어 나갔다.그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내면을 억지로 찢어놓으며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소원은 곧 그 감정을 냉정하게 끊어냈다.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소원과 육경한 사이에는 이미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더는 이런 부질없는 감정이 그녀를 흔들거나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오랜 침묵이 이어지면서 남자의 모든 희망은 서서히 사라졌다.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역겹다고 해도 평생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소원, 그 말 받아줄게.”소원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육경한이 다시 말했다.“오늘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난 서씨 가문을 상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거야. 너 그 남자 놓지 못한다며?”그의 눈빛에는 진한 증오가 담겨 있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얼음처럼 차가웠다.“내가 그 사람 없애버릴 거야.”“뭐라고?”화들짝 놀란 소원은 고개를 돌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나한테는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육경한은 무표정하게 말했다.“그리고 너도 알잖아. 네가 어제 한 일은 이미 방씨 가문에 알려졌을 거야. 내 보호 없이는 방민아나 방민기 중 누구도 널 가만두지 않을걸.”그의 말은 소원의 속을 꿰뚫고 있었다.정확히 그녀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을 찌르고 있는 것이었다.“지금 나와의 거래를 포기한다면 너뿐만 아니라 네 주변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거야. 네 친구 영숙이라는 사람도 포함해서 말이야.”육경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소원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방민아는 분명히 그녀를 죽도록 미워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영숙은 그녀의 분노를 가장 먼저 받을 대상이 될 것이다.소원은 단순히 자신만이 아닌 그녀를 도와준 영숙의 안전도 무시할 수 없었다.육경한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소원, 선택해야 해. 뭘 선택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거야.”소원은 침묵했다.그들의 내면이
차에서 내리려던 소원이 동작이 순간 멈췄다.육경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얇은 입술을 통해 들려왔다.“소원, 이 차에서 내린다면 우리의 거래는 끝나는 거야. 내가 말한 대로 기회 없다고 했으면 진짜로 없는 거라고.”그는 이미 그녀의 심리를 꿰뚫어 본 듯 냉담하게 덧붙였다.“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야. 잘 생각해 봐.”움직일 수도 없이 소원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돌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차에서 내린다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지만 육경한과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겠다는 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농담이었다.‘내가 어떻게 육경한이랑 결혼을 해?’그들은 원수였다.비록 유진이라는 아이가 둘 사이를 연결해주고 있다 해도, 비록 그들이 지금 유진이의 혈연관계로 묶여 있다 해도, 그들 사이에 깊이 새겨진 사랑과 증오의 복잡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소원은 자신이 평생 이 남자와 부부가 되는 건 불가능하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이 문제는 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단 1초라도 더 고민하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불경이었다.아버지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었다.갑자기 숨이 가빠지더니 소원은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말했다.“난 이미 충분히 생각했어. 당신이랑 결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육경한.”문이 열렸다.소원이 몸을 낮춰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니까 내 애인이 되어 내 침대에서 잘 수는 있지만 내 가족의 일원이 되는 건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야?”소원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이 남자는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생각을 간파한 것이었다.이 거래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유진이와 서현재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타협이었다.지금 당장은 더 나은 방법이 없었고 유진이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만 했다.하지만 이 긴급한 위기가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