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문현미에게 밀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몇 미터 밖으로 구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조경석에 부딪히고 나서야 구르는 걸 멈출 수 있었다.등에서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곽아름을 꼭 안은 채 놓지 않았다.하지만 윤혜인이 상처를 살피기도 전에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문현미가 마치 깃털처럼 차에 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아악.”윤혜인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절규하며 몸부림쳤다.바닥에는 문현미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문현미는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사람 살려.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누가 좀 살려주세요.”윤혜인은 아까 구른 탓에 조경석에 기대 꿈쩍도 못했다. 그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고를 낸 차는 떠나지 않았다.윤혜인이 다시 소리를 내기 전에 까만 세단은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다시 정비하더니 그녀를 향해 질주해 왔다.윤혜인은 머리에서 윙 해지더니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그 차는 윤혜인과 곽아름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윤혜인은 그저 곽아름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윤혜인이 힘겹게 곽아름을 안고 일어나려 했지만 까만 세단이 더 빨랐다. 액셀을 풀로 밟고 거의 날아 오다시피 질주해 왔다.두려움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윤혜인은 어쩔 바를 몰라 두 눈을 부릅뜬 채 까만 세단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화살처럼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절체절명의 순간 까만 롤스로이스 하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까만 세단이 윤혜인과 매우 가까워졌는데 롤스로이스가 갑자기 언덕에서 나타나더니 정확하게 까만 세단을 들이박았다. 까만 세단이 공중에서 두 동강으로 분해되었다.쾅. 쿵.그렇게 부서진 차는 흙에 빠지고 말았다. 차 안에 있던 사람은 즉사했다. 하지만 까만 롤스로이스는 그대로 습지에 천천히 멈춰 섰다.범퍼가 바닥에 떨어진 것 외에
윤혜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는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하지만 살이 많이 빠지고 조각 같은 턱라인이 예전보다 더 튀어나와서 그런지 뭔가 날카로운 느낌이 더해졌다.윤혜인의 불안함은 남자를 보자마자 말끔히 사라졌다. 뭔가 더 말하려는데 남자가 덤덤한 말투로 아무 감정 없이 이렇게 말했다.“문 닫아요.”이 말은 윤혜인이 아니라 구급대원에게 한 말이었다.구급대원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윤혜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멀리 떠나고 나서도 윤혜인은 꼼짝도 못 했다.곽경천은 원래 곽아름을 데리고 떠나려다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윤혜인을 보고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다가갔다.“혜인아.”윤혜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손은 언제 까졌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곽경천이 다급하게 윤혜인의 손을 잡더니 걱정스레 물었다.“손은 언제 다친 거야?”몸에 힘이 풀린 윤혜인은 그제야 곽경천의 품에 기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나 너무 무서워... 준혁 씨 나 못 알아보는 것 같아...”곽경천도 가슴이 덜컹했지만 얼른 윤혜인을 위로했다.“어머니가 걱정돼서 그랬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준혁의 눈빛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정도가 아니라 낯설 정도였다.눈빛이 어두워진 곽경천이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먼저 병원 가자.”병원에 도착해 곽아름의 몸 상태를 체크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윤혜인은 그제야 한시름 놓고 문현미가 있는 응급실로 향했다.응급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순간 너무 애틋해진 윤혜인은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그렇게 한참 동안 망설이던 윤혜인은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준혁 씨...”이준혁이 천천히 눈까풀을 들었다. 그 눈동자는 차가우면서도 덤덤했다.날씨는 금방 가을에 들어섰지만 윤혜인은 오한을 느꼈다. 응급실이 워낙 차가운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윤혜인이 초롱초
윤혜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왜 그래요...”“윤혜인. 엄마가 지금 너 때문에 응급실에 들어갔는데 왜라니?”이준혁은 더는 윤혜인이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주변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윤혜인은 꽁꽁 얼어붙은 강물에 떨어진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몸이 무거워졌다. 벽을 잡고 나서야 간신히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윤혜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준혁 씨, 우리...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이 말에 이준혁이 귀한 몸을 돌려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우리? 우리 무슨 사이인데?”윤혜인이 멈칫하더니 말했다.“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이혼까지 한 마당에 사랑은 무슨. 우습지 않아?”이준혁이 서늘하게 말했다. 말투가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사랑했다면 이혼하지도 않았겠지.”이 말에 윤혜인이 어렵게 끌어모았던 용기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과도 같았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윤혜인.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아직 재결합하기 전 아닌가?”무섭게 몰아치는 언어 공격을 윤혜인은 당해낼 길이 없었다. 파르르 떨려오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처음으로 이준혁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윤혜인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자 이준혁이 더 싸늘하게 식어버린 목소리로 명령했다.“불필요한 인원은 당장 내보내. 내 허락 없이는 안에 들이지 말고.”불필요한 사람이라...목숨을 걸고 구한 사람이 불필요한 사람이라니, 윤혜인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것 같았다. 가슴을 뭔가 동여맨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이준혁이 살아있다는 희열에 잠겼던 윤혜인은 지금 이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이준혁은 잘빠진 뒷모습만 보여줬다. 윤혜인의 눈동자는 지금 혼돈과 절망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보디가드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윤혜인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내
“아이고...”김성훈이 어쩔 바를 몰라 하다가 손수건을 건넸다.“일단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눈물은 일단 흐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었다.윤혜인은 손수건을 받아 들고 아무렇게나 닦았다. 어깨를 파르르 떨며 숨을 참았더니 눈물은 그쳤지만 어깨는 여전히 들썩들썩했다.윤혜인이 이내 고개를 들어 물었다.“이준혁 씨 돌아온 거 알고 있어요?”“음...”김성훈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웅얼거렸다.“알아요.”“그러면 언제 돌아왔는지도 알아요?”윤혜인이 또 물었다.김성훈이 잠깐 고민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어제 오전에 비행기에서 내렸어요.”이 말에 윤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어제 오전에 비행기에서 내렸다면 곽아름의 실종과 그녀가 부딪친 어려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니 오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게 그녀와 곽아름을 위한 게 아니라 문현미를 위해서 온 것이었다.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손바닥만 한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준혁 씨... 무슨 일 있어요?”이에 김성훈이 침묵했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윤혜인 씨. 인제 그만 해요.”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었다. 윤혜인은 정신이 혼미해졌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왜 그만해요?”김성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혜인이 캐물었다.“왜 그만해요? 목숨을 바쳐 나를 살렸는데 지금은 왜 그만하라는 거예요?”윤혜인의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김성훈은 그런 윤혜인이 너무 마음 아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윤혜인 씨. 내 말 들어요. 그냥 준혁이는 이제 없는 셈 쳐요.”그래도 친구였는데 김성훈은 윤혜인이 다치는 게 싫었다. 이준혁의 결심을 김성훈도 옆에서 지켜봤다.윤혜인에게 제일 좋은 보호는 바로 기대가 없다는 것이었다.“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없는 셈 쳐요...”윤혜인이 입꼬리를 당기더니 못생기게 웃어 보였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으니
이준혁의 눈빛은 담배 연기에 가려져 흐릿했다. 마치 김성훈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이 감탄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안 믿어. 너한테 다 계획이 있겠지.”김성훈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내일 외국으로 나가봐야 해. 메리와 이 독액에 대해 연구할 생각이야.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마. 나는 너 죽게 안 놔둬. 땅을 파서라도 그 독액을 만든 사람을 찾아내서 조성표를 가져올 거야. 그러면 충분히 억제할 수 있어.”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다. 김성훈이 말하는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이 자기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김성훈은 마음이 착잡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승산이 얼마인지는 김성훈도 몰랐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윤혜인에게 그만하라고 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친구로서 둘 중 그 누구도 다치지 말았으면 했다.김성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총명하기 그지없는 이준혁은 또 어떨까.김성훈이 손을 내밀어 이준혁의 손에서 담배를 하나 뺏어가 불을 붙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준혁아.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너의 행동이 맞다 틀리다 판단할 수 없는 거 알아. 네가 윤혜인 씨를 위해서 이러는 것도 알고. 근데 일방적인 생각일 수도 있잖아. 정말 이게 윤혜인 씨에게 좋은 일일까?”김성훈이 담배를 물고 이준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렇게 중얼거렸다.“네가 누워있을 때 내가 아무리 불러도 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어. 윤혜인이 다른 남자랑 도망갔다고 하자마자 바로 눈을 번쩍 떴던 거 기억나? 쓰러졌으면서도 너는 네 감정에 충실했던 거야. 나는 윤혜인 씨가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이준혁이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좀 닥쳐.”“콜록콜록...”김성훈은 독한 담배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와.”김성훈이 말했다.“니코틴으로 나 죽이려고 그러지. 너 따라서 죽으라고 그러는 거지.”
김성훈이 가고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이준혁은 차가운 달빛 아래 꼿꼿이 선 채 온몸으로 한기를 뿜어냈다.주훈이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좀 쉬실래요?”“응, 너 먼저 가서 쉬어.”이준혁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이준혁도 움직이지 않는데 주훈은 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좋은 상담 선생님 찾아봐.”이준혁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주훈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반응하고는 말했다.“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이준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너는 갈 필요 없어. 앞으로 그쪽 일에 네가 얼굴을 비치지는 마.”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주훈도 다 알고 있었다. 이준혁은 그가 상담 선생님을 보냈다는 걸 윤혜인이 몰랐으면 했다.이준혁은 돌아오고 난 후로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주훈은 수석 비서로서 이준혁이 여전히 예전의 그 이준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행실이 조금 더 은밀해지고 뜻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뿐이었다.내부든 외부든 시름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 은밀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윤혜인이 깨어났을 때는 곽경천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혜인아, 깼어?”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곽경천이 조심스럽게 부축했다.“천천히. 조심해.”윤혜인은 고개를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곽경천을 바라봤다. 곽경천이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오빠, 왜 그래?”윤혜인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곽경천이 말하려다 말고 윤혜인을 바라봤다.윤혜인은 곽경천의 이상한 눈빛에 심장이 덜컹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빠, 도대체 무슨 일인데?”“할 말이 있어. 마음 단단히 먹어.”곽경천이 윤혜인에게 검사 결과를 건네주며 한숨을 내쉬었다.“너 임신했대.”윤혜인이 넋을 잃었다.‘임신?’윤혜인은 검사 결과를 받아서 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임신… 쌍둥이?”단어는 다 아는 단어였지만 붙여놓으니 어딘가 낯설었다.‘임신이라니. 그것도 쌍둥이를.’윤혜인은 선천적으로 한기가 많아
‘만약 준혁 씨가 임신한 걸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할까?’하지만 이내 이준혁이 했던 차가운 말들이 떠올랐다.“우리?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이혼했는데 사랑은 무슨. 너무 우습다.”“사랑했다면 왜 이혼했겠어?”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에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윤혜인이 곽경천의 옷깃을 잡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오빠, 생각 정리하기 전에 다른 사람은 몰랐으면 좋겠어.”곽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윤혜인은 몸에 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곽아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집에 돌아와 보니 단발에 네모난 안경을 쓴 여자가 곽아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윤혜인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홍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이 사람은 누구예요?”홍 아주머니가 대답했다.“새로 온 상담 선생님이에요. 전에 상담하던 선생님이 출장 가면서 이 선생님을 추천하셨어요. 도련님도 문제없다면서 오케이 하셨고요.”곽아름은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았고 상태가 매주 좋아 보였다.윤혜인도 옆에서 상담 선생님이 상담하는 걸 잠깐 지켜봤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이 상담 선생님은 전에 온 선생님보다 더 활발하게 다가갔고 곽아름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선생님은 곽아름과 잠깐 얘기를 나누더니 홍 아주머니에게 아이의 엄마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홍 아주머니는 윤혜인에게 확인하고 나서 선생님을 데리고 거실로 향했다.선생님은 윤혜인과 악수하더니 말했다.“안녕하세요. 이진화라고 합니다.”“선생님, 안녕하세요.”이진화가 손으로 쓴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곽아름 어린이에 대한 분석 보고서입니다. 한번 확인해 주세요.”윤혜인이 보고서를 받아 들더니 자세히 확인했다.이진화가 말했다.“대화를 옆에서 지켜보셨으니 아실 거예요. 곽아름 어린이는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용감해요. 부족한 부분을 꼽아보자면 너무 외롭다는 거예요. 어머님도 자녀 계획이 있으시다면 지금부터 계획해 보는 것도 좋아요. 곽아름
그 뒤로 윤혜인도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천수 때문에 흐트러진 작업실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이준혁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다들 들었는지 윤혜인을 괴롭히던 고객들도 갑자기 태도가 좋아졌다.어떤 고객은 3배의 배상도 필요 없다면서 통쾌하게 계속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전에 이미 3배의 배상을 받은 고객은 다시 돈을 돌려주기까지 했다.고객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윤혜인은 의문을 품었고 평소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고객에게 이유를 물으려 했다.윤혜인은 상대와 상가의 한 식당에서 만나 밥까지 먹을 생각이었다. 마침 주변에 있던 윤혜인은 일찍 상가에 도착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다 어린이용품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대에 비치된 옷들이 너무 깜찍하고 예뻤다.더 자세히 보기도 전에 두 사람이 매장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남자는 잘빠진 슈트를 입고 있었고 외모가 준수한 데다 체격이 일품이었다. 같이 온 여자는 거의 만삭이었고 선글라스를 낀 채 손에는 매장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쇼핑백은 무겁지 않아 보였다.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달콤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임산부의 아름다움을 다분히 느낄 수 있었다.윤혜인의 눈까풀이 세게 뛰었다.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데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윤혜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원지민은 윤혜인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더니 선글라스를 벗으며 웃었다.“준혁아, 윤혜인 씨네.”원지민은 다시 대범한 척하던 그때로 돌아갔고 윤혜인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하지만 윤혜인의 눈에는 오만한 웃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뒤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는 두 사람만 알았다.원지민이 덤덤하게 말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쇼핑하러 왔어요?”윤혜인은 한참 노력해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그러게요.”말하면서도 윤혜인은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익숙한 흔적을 찾아내려 했지만 이준혁은 낯설 정도로 차가웠다.원지민은 윤혜인의 눈빛이 아니꼬워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