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눈물이 가득한 여름을 한 번 쓱 쳐다보더니 다시 여름을 지키려는 양유진을 쳐다봤다.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내가 이혼을 하거나 말거나 그건 내 일입니다. 애초에 그렇게 후안무치로 날 꼬드기려고 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겠죠. 다 자업자득입니다.”“누가 유혹했다는 겁니다. 애초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름 씨를 내 곁에서 데려간 게 당신 아닙니까? 여름 씨는 내 약혼녀였습니다.”양유진도 분노로 맞섰다.“약혼녀면 뭐?”하준이 웃었다. 눈에 떠오르는 싸늘함을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그때 내 침대로 들어온 건 강여름이었습니다. 지금도 내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잖습니까?”여름은 이제 참을 수가 없었다.“누가 달라붙어 있다는 거야? 해주기만 한다면 난 지금 당장이라도 이혼할 수 있어.”“뭐라고? 날 유혹해서 애는 가져 놓고 애는 양 대표에게 가서 낳겠다, 그런 말인가?”하준이 여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잘 들어. 나는 절대 내 아이들이 다른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는 꼴은 못 봐. 이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낳고 해. 그때 지안이랑 자리 교체하면 되겠네.하준이 말이 마디마디 여름이 심장을 찔러 왔다.너무 꽉 조여서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백지안이 그렇게 좋으면 백지안에게 낳아달라고 해요. 당신 둘의 아이를 가지면 되잖아. 내 아이를 빼앗아 갈 게 아니라.”여름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로 애걸했다.“제발 나랑 내 아이들을 놔 줘요.”하준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차가운 얼굴을 돌렸다.“아이를 낳는 건 많이 아프다는데 차마 지안이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어. 지안이는 그냥 지금 모습 그대로 최하준이 아내로 내 사랑만 받으면 돼.”“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이제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백지안이 아파서 안 되고 나는 그걸 다 견디고 아이를 낳으라는 건가?저게 인간이야?’여름은 자신이 임신한 것도 잊은 채 하준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미쳤어?”하준은 전혀 방비가 되지 않은 채로 맞고는
“날 가두겠다고?”여름은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내가 낳은 아이를 백지안에게 넘기라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날 가둬두기까지 하겠다니….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무슨 근거로? 당신 이거 위법 행위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여름이 휴대 전화를 들자마자 하준이 낚아챘다.“난 기회를 줬어. 누가 양유진이랑 그렇게 붙어서 날뛰래?”하준도 자신이 왜 이렇게 열이 뻗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무슨 자존심 발작 버튼이 눌린 듯 했다.“당신이 지금 남 얘기할 처지인가? 백지안이랑 바람 난 건 당신이잖아? 당신들 둘이 자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잤으면 또 어쩔 거야? 당신 이러고 미쳐서 날뛰는 그 못생긴 얼굴 보면 백지안이랑 비교가 안 된다고.”하준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잔인했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울퉁불퉁한 자기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솟아올랐다.‘내 외모가 어떻게 되든 영원히 사랑하겠다던 사람이 누군데,이제 와서 내 얼굴이 어쩌고저쩌고 왈가왈부야?내 얼굴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양심에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최하준, 당신이 내 아이들을 백지안에게 맡길 거라면 난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겠어.”여름이 창백한 얼굴로 결연하게 말했다.“하려면 하시던지. 이것만 알아둬. 내 아이에게 눈곱만큼이라도 이상이 생겼다가는 당신 친구랑 병원에 누워 있는 당신 아버지도 같이 저세상 가게 될 거야.”싸늘하게 말하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여름이 막 뛰어나가 봤지만 밖에서 문 잠그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힘껏 손잡이를 잡아 돌려 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았다.여름은 이곳에 갇힌 것이다.이제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전에는 하준이 무슨 짓을 해도 진심으로 하준을 미워한 적은 없었다.하준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백지안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다고 늘 되뇌어 왔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제는 진심으로 최하준이 미워졌다.백윤택이 미웠고, 백지안이 미웠다.
강여름은 매일 그 2층 집에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그저 텔레비전을 보거나 테라스에 나가서 바람을 쐴 뿐이었다. 가끔 테라스에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 억지로 참았다.여름은 1주일을 견뎠다.상혁이 여름을 병원에 데려가 산전 검사를 받으려고 차를 몰고 왔다.“하준 씨는요?”여름이 물었다.상혁이 난감한지 입을 못 열고 있었다.여름이 웃었다.“알아요. 백지안 옆에 붙어 있느라고 바쁘겠죠. 백지안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요?”“사모님, 이러지 마십시오.”상혁의 눈에 동정과 연민이 컸다.“같이 병원에나 가시죠.”여름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곁에 있는 낯선 보디가드를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병원에 가는 길에 상혁이 운전했다. 뒷좌석에 여름만 남아있게 되었을 때에야 상혁이 입을 열었다.“요즘 제가 회장님과 백지안을 위해서 꽤 애쓰고 있어서 회장님이 이제 저를 의심하지 않으십니다.”“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여름은 하준이 상혁까지 의심해서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아마도 전에 제가 회장님께 사모님 편을 드는 듯한 말을 좀 해서 그런지 한동안은 저를 좀 못 미더워 하시더라고요.상혁이 조그맣게 말했다.“지난번에 제가 유산을 가장할 수 있게 준비해 달라고….”“이젠 그 작전도 안 통해요. 하준 씨가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겼다가는 윤서랑 우리 아버지를 가만두지 않겠다네요. 난 이제 윤서가 제일 걱정이에요."여름이 담담히 말했다.“백윤택이 풀려나면 이제 전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윤서에게 복수하려고 들 텐데, 윤서는 나랑 연락이 닿지 않으면 서울을 떠나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 윤서가 바로 외국으로 나가게 제소식을 좀 전해 줄 수 있나요?”“네, 하지만 임윤서 씨도 없으면 사모님은….”“연락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요. 최양하예요.”여름이 갑자기 말했다.상혁은 흠칫했다.“그 분이 도움이 될까요?”“나도 100% 확신은
시아는 잠시 여름의 눈치를 슬쩍 봤다.“너 아직 모르나 보구나. 요즘 이주혁 씨가 자기네 집안 모임에 가끔 나 데리고 가는데 최 회장이 매번 백지안 씨랑 같이 오더라. 둘이 얼마나 달라붙어 있는지 몰라. 끝나면 매번 지안 씨네 가서 자나 보더라."“시아 씨….”상혁이 얼굴로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김 비서, 내 말이 사실이잖아요? 김 비서도 다 봤잖아요?”시아가 눈을 깜빡이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지난번에는 지아 씨 목에 키스 마크까지 봤다니까, 세상에.”여름이 얼굴이 싸늘해졌다.“그렇구나. 아주 잘됐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모여 있는 게 좋지.”“아닌 척하지 마. 너도 힘들겠지, 왜 아니겠어?”시아가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 보더니 립스틱을 덧발랐다.“아 참, 며칠 전에는 지안 씨가 불러서 해변 별장에 놀러 갔었거든. 거기가 서울에서 집값 제일 비싼 데라면서? 침실에서 문을 탁 여니까 파란 바다가 보이더라.”여름의 안색이 확 변했다.그곳은 여름과 하준이 살았던 곳이었다. 하준이 요양할 수 있도록 여름이 최선을 다했던 곳이고 여름이 ‘우리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여름과 하준은 그곳에서 평생을 약속했고 배 속의 아이들도 바로 그곳에서 생겼었다.‘그런 곳을 백지안에게 내주었다니….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지.정말… 정말 너무하네.’완전히 의기소침해진 여름을 보고서 시아가 마침내 웃더니 천천히 목소리를 낮췄다.“한때 금수저였던 너와 임윤서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겠지. 이제 사람들은 임윤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두고 쑥덕쑥덕하지, 너는 남편에게 차였지. 쯧쯧, 인생이라는 게 돌고 도는 거라니까.”“뭐라고?”여름이 확 고개를 쳐들고 시아를 노려봤다.“윤서 일이….”“그래, 요즘 핫한 뉴스잖니? 동성 재벌가의 금수저가 강간당한 일 말이야. 오호홋! 사람들은 윤서가 일부러 백윤택을 꼬드긴 거라고 하더라고. 이제 누가 그런 애랑 사귀려고 하겠어? 이제 내 눈에는 너희 둘의 꼴이야말로 참 우습
여름이 있는 대로 물건을 다 집어 던지는 바람에 새로 온 가사 도우미가 당황하고 말았다.밤이 되자 하준이 마침내 나타났다.하준이 난장판이 된 집을 보고 있는데 별안간 뭔가가 덮쳐왔다.얼른 피하며 여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여름의 손에 든 날붙이를 얼른 멀리로 던져 놓고 돌아보니 뼛속까지 얼릴 한기를 품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죽을 뻔했잖아?”“내가 틀렸네. 바보가 되는 게 지금보다는 나았겠어.”여름이 가슴 아프게 하준을 바라보았다.“왜 살아남았어? 당신 같은 정신이상자, 가둬두고 풀어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내가 당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다니, 미쳤었나 봐.”“시끄러워. 당신이 지금 정신 이상인 것 같은데?”하준은 여름을 화장실로 끌고 가 거울 앞에 여름의 얼굴을 잡아 가져다 댔다.“지금 이 꼴을 보라고, 완전 미치광이 같아.”“그래, 나 미쳤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여름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대체 내 친구를 왜 그따위로 취급해? 당신도 윤서가 피해자인 거 다 알면서. 백윤택이야 도와줘도 이제는 오명을 썼으니 그렇다 치고, 윤서는? 이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으며 살아야 하잖아?”하준은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말 다 했다? 기사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당신 친구가 백윤택을 먼저 유혹했다고.”“뭐라고?”여름은 황당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임윤서가 먼저 백윤택을 자기 톡에 추가하고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윤택을 유혹했어. 그러다가 백윤택의 소문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완전히 몸을 빼려고 했던 거라고. 세상에 이렇게 치사한 일이 있겠어?”“누가 그런 소릴 해요? 백지안이? 지금 백지아니 하는 말을 다 믿는 거야?”하준이 콧방귀를 뀌더니 무시하듯 말했다.“그럼 내가 지안이를 믿지, 당신을 믿을까? 유유상종이라고 당신도 임윤서랑 같은 부류겠지. 임윤서가 동성에서는 그래도 좀 사는 집안의 자식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살다가 서울에 와서 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백윤택을 등에 업고 이득을 취해볼까
배가 욱신욱신 아파왔다.‘한때는 나와 하준이 그렇게도 원했던 아이. 둘 다 아픔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오면 드디어 우리만의 온전한 가족이 될 줄 알았는데….’여름은 하늘이 자신에게 쌍둥이를 내려 주신 것을 감사하기도 했었다.여름 그 뒤로 어미로서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지켜야 지,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백지안에게 상처받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보냈다.‘이렇게 그냥 가는 게 나은지도 모르겠다.최소한 고통을 당하며 사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아마도 이건 일종의 해방인지도 몰라.’“강여름, 버텨.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하준이 여름을 안고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품 안의 여름은 분명 임신 3개월인데도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깃털처럼 가벼웠다.하준은 누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은 느낌이었다.왜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두려웠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여름은 하준이 외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르르 피곤한 두 눈을 감아버렸다.곧 여름은 응급실로 들어갔다.하준은 초조해서 왔다 갔다 걸어 다녔다. 이마에서는 이미 상당히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다.상혁은 그 모습을 보면서 불안했다.“회장님 일단 그 이마를 좀 처치 받으시죠.”“그럴 정신이 어디 있나?”하준의 두 손이 끊임없이 떨렸다. 손도 온통 피로 물들어 옆에서 보기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곧 수술실 문이 열렸다.의사가 걸어 나왔다.“회장님, 환자분의 아이는 아무래도 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사모님의 목숨도 위태로워요.”“뭐라고? 아이를 살리지 못하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야?”하준이 시뻘게진 눈으로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내 아이라고, 잃을 순 없어!’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하준은 자신이 이렇게나 두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회장님,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 어느 의사가 와도 똑같아요.”의사가 두려워하며 해명했다.“전에 사모님 임신
“정말이야?”“그렇다니까. 방금 그 비서라는 사람이 사인해줬기 망정이지 아무도 신경을 안 쓰더라고.”“나도 최하준이랑 그 여자가 껴안고 나가는 거 봤어.”“아유, 하여간….”“……”여름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하아아….최하준 정말 독하네.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데도 사인 하나 해주지 않을 정도라니.심지어 이런 때에도 마음속에 백지안뿐이라니….’우리 두 사이의 사랑은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하늘로 사라지는 듯했다.‘앞으로 내가 살아서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저것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야.’----병실, 여름이 눈을 떴다.병실에는 백지안 한 사람뿐이었다.백지안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에든 자동차 키를 달랑거렸다.“보여? 전에 준이 당신에게 선물했던 스포츠카. 이제는 내 거야. 어때?”여름은 한눈에 알아보았다.그것은 전에 하준이 직접 여름에게 주었던 스포츠카의 열쇠였다.당시 번호판과 국내에 1대뿐이라는 사실이 온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었다.여름은 가볍게 웃었다.“남이 버린 걸 좋아하나 봐? 차, 별장, 남자, 그래, 다 가져라. 어쨌든 난 이제 다 상관없어.”“당신이 신경을 쓰던 말던 준의 마음속에는 이제 나뿐이거든.”백지안이 득의양양하게 침대가로 와서 여름을 내려다봤다.“내 말 한마디면 네 친구의 명예 따위 단숨에 땅바닥에 떨어지는 거거든. 우리 오빠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 친구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하거든. 이제 네 친구의 명예는 시궁창에 떨어졌지. 뭐, 누가 그렇게 우리 오빠를 모욕하랬나?”“애진작에 백윤택이 윤서를 해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여름이 두 눈을 부릅떴다.“자업자득이지.”여름이 허리를 굽혔다. 신나는 구경을 보는 사람처럼 웃음을 띠고 있었다.“마지막에 성공하지 못해서 그게 참 아쉽네. 하지만 상관없지. 어쨌든 이제 평생을 오명이 임윤서를 따라다닐 테니까.”여름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안 그래도 막 수술을 마쳐서 아프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
백지안의 말에 지난 사건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니 하준의 생각에도 의심스러웠다.“백지안, 헛소리 마. 난 지극히 정상이라고.”하준이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여름에게 불안이 엄습했다. 그래서 다급히 해명했다.“당신들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백지안은 연민어린 시선으로 여름을 내려다보았다.“우울증 있는 사람들은 자기 병을 잘 인정 안 하려고 해요. 게다가 유산까지 했으니 정말 빨리 치료를 받으시길 권할게요.”그 말에 여름은 온몸의 힘을 그러모아 백지안에게 따귀라도 날리고 싶었다.그러나 이런 때 여름이 분노할수록 하준은 백지안을 믿게 될 터였다.“최하준은 이미 당신 거잖아. FTT 사모님 자리도 이제 양보하겠어.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날 가만두질 못하는 거야. 이제 앞으로는 눈앞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돌아서 갈게.”하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하준은 여름을 미워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여름이 자신을 마주치고 아는 척도 안 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백지안이 씁쓸하게 웃었다.“내가 무슨 말을 해야 이해를 하려나? 생각 안 해봤나 본데, 지금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정말 평생 고생할 수도 있어요. 당신은 최하준의 전처인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최하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됐어. 내가 병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지.”여름은 이제 진짜로 멘붕이 올 지경이었다.“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는지 모르겠네. 아이를 잃은 것만으로도 난 이미 비참한데 날 정신병원에 처넣기까지 하겠다는 건가? 최하준, 날 사랑하지 않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고, 날 인격으로서는 대해줘야 할 게 아니야?”“병원에 입원할 것까지는 없어요. 그냥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매일 시간 맞춰 약만 잘 먹으면 되지.”“됐어. 난 건강한 사람이야. 약 따위 먹을 필요 없어.”“당신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군요.”백지안은 고개를 돌려 하준에게 말했다.“준,